왕자대 왕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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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신무왕 유사(神武王 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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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 45대 신무왕(諱 祐徵 ~ 839.7)은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증손으로 조부는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추봉된 예영(禮英)이요, 아버지는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봉된 균정(均貞)이고, 어머니는 헌목태후(憲穆太后)로 추봉된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이며, 비(妃)는 각간(角干) 김명해(金明海)의 딸[註 3] 진종부인(眞從夫人) 즉 정종태후(定宗太后)이다.

 

828년(興德王3년) 1월, 대아찬 김우징(金祐徵)이 시중(侍中)이 되었다.

동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張保皐)[註 4]이 당(唐)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여 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을 얻어(이끌고) 청해(淸海=莞島)에 진(鎭)을 세웠다.

 

834년(興德王 9년) 1월, 우징(祐徵)을 다시 시중으로 삼았다.  

835년(興德王10년) 2월, 아찬 김균정(金均貞)[註 5]에게 벼슬을 내려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우징(祐徵)이 아버지 균정이 재상이 되었음을 이유로 표를 올려 사직을 구하여, 대아찬 김 명(金明) 을 시중으로 삼았다.  

(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興德王 條)  

 

서기 836년 12월, 제 42대 흥덕왕이 졸하니, 흥덕왕의 종제(從弟)로 왕실의 어른인 상대등(上大等) 김균정(金均貞)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순리(順理)였으므로 균정의 아들 아찬 김우징(金祐徵)은 균정의 조카(妹壻라고도 함)[註 6]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과 함께 김균정을 옹립(擁立)하고 왕궁(積板宮)으로 들어갔으나

 

흥덕왕의 다른 종제(從弟)인 김헌정(金憲貞)의 아들 제륭(悌隆)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시중 김명(金明), 아찬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이 병졸을 이끌고 왕궁에 난입, 김우징 과 김 양 등은 탈출했으나 김균정은 난병(亂兵)에게 살해당하고, 김제륭(金悌隆)이 왕으로 즉위하니 제 43대 희강왕(僖康王)이다.

 

837년(僖康王 2) 4월, 아찬 우징(祐徵)이 아버지 균정(均貞)이 해를 당한 것 때문에 원망의 말을 하니, 김명(金明)과 이홍(利弘)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므로, 우징(祐徵)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5월에 남은 군사를 거두어 처자식과 함께[註 7] 황산진구(黃山津口)[註 8]로 가, 배를 타고 청해진(淸海鎭=莞島) 대사(大使) 궁복(弓福=張保皐)에게 가서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를 갚으려고 도모하였다.

 

동년 6월, 균정(均貞)의 매서(妹壻)인 아찬 예징(禮徵)과 아찬 양순(良順)[註 9]이 청해진으로 와서 우징에게 의탁하였다.

 

838년僖康王 3년) 1월, 상대등 김명(金明), 시중 이홍(利弘) 등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꾸며서 왕의 측근들을 해치니, 왕은 자신이 온전치 못할 것을 알고 궁중에서 자살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僖康王 條)

김 명(金 明)이 즉위하니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이다.

 

838년(閔哀王 1) 2월 김 양(金陽)이 청해진 소식을 듣고 모사(謀士)와 병졸을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을 만나보고 함께 거사(擧事)할 것을 모의(謀議)하였다.

 

김우징은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金明)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弓福)에게 말하기를, “김명은 임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으며 이홍(利弘)도 임금과 아버지를 죽였으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원컨대 장군의 병사에 기대어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궁복이 말하기를,“옛 사람의 말에, 의(義)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는 비록 용렬(庸劣)하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 하고, 드디어 병사 5천 명을 내어 친구 정년(鄭年)[註 10]에게 주고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838년 3월, 강한 군사 5千人으로써 무주(武州=광주)를 습격하여 성 아래에 이르니 주의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다시 진격하여 남원(南原)에 이르러 (신라)왕군(王軍)과 마주 싸워 이겼으나, 김우징은 군사들이 오래 피로하였으므로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병마(兵馬)를 휴양시키었다.(三國史記 金陽 傳)  

 

838년(閔哀王 2년) 12월, 김양을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일컫고, 다시 출동하니, 김양순(金亮詢)이 무주(鵡洲) 군사를 데리고 와서 합치고, 우징은 또 날래고 용맹한 염장(閻長)[註 11]·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 여섯 장수를 보내 병사를 통솔케 하니 군대의 위용이 대단히 성하였다. 북을 치며 행진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註 12] 북천(北川)에 이르니 신라의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가 군사를 이끌고 역습하였다. 장군 낙금·이순행이 기병 3천으로써 저쪽 군중을 돌격해 들어가 거의 다 살상하였다.

 

김양(金 陽)[註 13] 등이 밤낮으로 행군하여 839년 윤달 정월 19일 달벌구(達伐丘=大邱)에 이르니, 김명이 이찬 김흔(金昕)과 대아찬 윤린(允璘)ㆍ의훈(嶷勛)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으나, 김양 등이 한 번 싸워 크게 이겼다. 김명은 서교(西郊)에 있었는데, 좌우가 모두 흩어져 도망하므로 혼자 남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것을 군사들이 추격하여 윤달 정월 23일에 주살(誅殺)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로써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839년(神武王 1년) 윤달 1월, 신무왕(神武王)이 즉위하였다.[註 14] 이름은 우징(祐徵)으로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손자인 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이며, 희강왕(僖康王)의 사촌동생이다. 예징(禮徵) 등이 궁궐을 깨끗이 한 후, 예를 갖추어 왕을 맞아 즉위케 하였다.

 

조부 이찬 예영(禮英) -효진(孝眞)이라고도 한다- 을 추존(追尊)하여 혜강대왕(惠康大王)이라 하고, 아버지를 성덕대왕(成德大王)이라 하였으며, 어머니 박씨 진교부인(眞矯夫人)을 헌목태후(憲穆太后)라 하였다. 아들 경응(慶膺)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청해진 대사 궁복(弓福=張保皐)을 봉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 2천 호를 봉하여 주었다.

 

동년 7월 23일(음력) 신무왕이 병으로 승하(昇遐)하였다.  

시호(諡號)를 신무(神武)라 하고,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지냈다.[註 15]

 

 

 

 

[註 1]: 東史綱目 神武王 條에 神武王元年 己未。金陽討明殺之。立王孫祐徵’이라 하였다.

 

[註 2]: 삼국사기 진성왕 6년 조 및 열전 甄萱 傳에 진성왕 6년(892)에 견훤이 武州를 점령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하였고, 삼국유사 권2 紀異篇 後百濟 甄萱 條 에는 (건국)원년을 88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견훤 전에 나라가 庚寅年(930)까지 42년간 지속되었다고 하였으니 후백제 원년은 889년이라 할 수 있다.

 

[註 3]: 東京大學 영인본·속장경본에는 ‘明海角干’이라 되어 있다 .崔南善교주본·李丙燾역주본·이재호역주본·權相老 역해본·三品彰英遺撰本에는 ‘明海▣’으로 되어 있다.

 

[註 4] 장보고(張保皐)는 궁파(弓巴)라고도 하였다. 흥덕왕 때 청해진을 세워 해적을 소탕하고 동북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함으로써 큰 세력을 이루었다. 838년 우징(祐徵) 을 도와 이듬해에 즉위하케 하여 그 공으로 감의군사(感義軍使)에 봉해졌다. 문성왕 때 이전 신무왕과의 약속에 따라 자기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였으나 진골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후에 염장(閻長) 에게 피살당하였다.

 

그는 청해진을 근거로 일본에도 독자적인 사절을 파견할 정도로 세력권을 형성하였으며, 당나라에도 그의 세력이 뻗쳐 연간 500석의 소출을 내는 전장(田莊)을 소유하였고 중국 산동성(山東省) 적산포(赤山浦)에 법화원(法花院)을 창건하였다. ≪삼국사기≫ 권44 열전 장보고전 , ≪삼국유사≫ 권2 기이편 신무대왕 염장궁파조 , ≪신당서≫ 권220 신라전 ,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권2 개성(開成) 4년 6월 및 5년 2월조,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권10 인명천황(仁明天皇) 승화(承和) 8년 2월조 및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권11 승화(承和) 9년 정월조 참조.

 

[註 5]: 김균정(金均貞)은 애장왕 3년(802)에 이미 대아찬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김균정이 ‘아찬(阿湌)’으로서 상대등이 되었다고 한 것은 ≪삼국사기≫의 잘못이라 하겠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6]: 삼국사기 희강왕 1년 12월조에 ‘阿湌祐徴與姪禮徴及金陽奉其父均貞’이라 하였는데 2년 조에는 ‘六月均貞妹壻阿湌禮徴與阿湌良順亡投於祐徴’이라 하여 不一致하다.

희강왕 2년(837년) 6월에 良順등과 함께 우징이 있는 청해진의 들어갔다. 그 후 민애왕 2년(839년)에 예징은 김양 등과 함께 민애왕을 몰아내고 신무왕을 즉위시키는데 성공하고 상대등이 되었다가 문성왕 11년(847)에 죽었다.

 

희강왕 2년 6월조 및 金陽 傳에는 예징을 균정(均貞)의 매서(妹壻)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흥덕왕 1년 12월 조에는 우징의 질(姪)이라 하였으니, 아마 잘못된 것인 듯하다. (이병도,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1996, p269)

 

[註 7] 김양 전에 837년 八월(五월의 誤로 보임)에 전 시중 우징(祐徵)이 남은 군사를 거두어 청해진으로 들어가 대사(大使) 궁복(弓福)과 결탁하여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고 하였다.

 

開成二年八月 前侍中祐徴 收殘兵 入清海鎮 結大使弓福 謀報 不同天之讎 陽聞之募集 謀士兵卒 -

본전 희강왕 2년 5월조에 -五月 祐徴懼禍及 與妻子奔 黄山津口乗舟 徃依於 清海鎮大使弓福 -이라 하였다. ≪역주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1996 , 269쪽)

b) 梁山의 黃山江 下流 나루: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2, 梁山郡 山川 條 參照)

 

[註 9]: 삼국사기 권44 열전 김양(金陽)전 에 보이는 ‘김양순(金亮詢)’과 동일인이다. 良順은 흥덕왕 사후에 일어난 왕위쟁탈전에서 균정(均貞)을 지지하였으며. 838년 민애왕 축출거사시 에는 무주(鵡(武)州)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김양 을 도와 신무왕을 즉위시키고 이찬이 되었다가 문성왕 5년(843년)에 시중이 되었으나 다음해 3월에 퇴임하였다. 그 후 문성왕 9년(847년)에 파진찬 흥종(興宗)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註 10]: 정연(鄭連)이라고도 적었다. 장보고 와 함께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무장으로 출세하였다가, 장보고가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자 뒤따라 귀국하여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잠수에 능하여 물 속으로 50리를 갔다고 한다. (鄭年은 鄭達이라고도 함) ≪삼국사기≫ 권44 열전 장보고, 정년 전 참조.

 

[註 11]: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권11 승화(承和) 9년 정월 조 에는 염장(閻丈)이라 하였다. 염장은 무주(武州) 사람으로 김양(金陽) 등과 함께 민애왕 일파를 제거하고 신무왕 을 즉위시킨 거사에 참여하였다. 장보고 가 반란을 일으킨 때를 전후한 시기에 염장은 무주 별가(別駕)였으며 장보고의 부장 이진충(李珍忠)의 반란을 평정하기도 하였다

 

(≪속일본후기≫ 권11, 승화 9년 정월 을사조). 후에 염장이 장보고를 제거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주었다고 한다(≪삼국유사≫ 권2, 신무대왕 염장궁파 조). 그리고 일본에 이소정(李少貞) 등을 보내 교역을 하기도 하였다. 그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334쪽)

 

[註 12]:a) 전라남도 나주 남평면(南平面)의 옛 이름이다. 이재호, ≪삼국사기≫1, 솔, 1997

b)회진현: 지금의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시(羅州市) 다시면(多侍面)으로 비정한다

철야현: 지금의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시(羅州市) 봉황면(鳳凰面) 철천리(鐵川里)로 비정한다

여황현: 지금의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광산구(光山區) 운수동(雲水洞)으로 비정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43~344쪽).

 

*금산군(錦山郡)은 본래 백제 발라군(發羅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 나주목(羅州牧)이다. 영현이 셋이었다.

회진현(會津縣)은 본래 백제 두힐현(豆肹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철야현(鐵冶縣)은 본래 백제 실어산현(實於山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여황현(艅艎縣)은 본래 백제 수천현(水川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三國史記 卷第三十六 雜志 第五 地理 錦山郡)

 

[註 13]: 자는 위흔(魏昕)으로 무열왕의 9세손이며, 증조부는 주원(周元), 조부는 종기(宗基),아버지는 정여(貞茹(章如))이다. 839년에 민애왕 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문성왕 때에는 벼슬이 시중 겸 병부령에 올랐다. 사후에 서불감(舒弗邯)으로 추증되었으며, 장례를 김유신(金庾信) 의 예에 따라 하였고 무열왕릉에 배장되었다.

 

[註 14]: 삼국사기 김양 전에는 신무왕이 839년 4월에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註 15]: 현재의 경북 경주시 동방동 산 600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을 신무왕릉으로 비정하고, 사적 185호 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부정하고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이른바 김유신묘(金庾信墓)를 신무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李丙燾, 「金庾信墓考」, ≪韓國古代史硏究≫, 1976 , 710∼735쪽)

 

*지금의 전칭흥무왕(傳稱興武王 : 김유신(金庾信))묘(경주 충효동(忠孝洞))가 양식 연대로 보아, 신무왕릉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전신무왕릉’ 믿을 수 없는 것이다‘

(金庾信墓考)이병도, ≪역주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1996 , p27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