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계 연구보고서

본문

8. 위.주영 양공의 계대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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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언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光山金門에 족보제도가 있은 이래 오로지 상계편성의 기본 자료로 삼고 있는 문헌은 王子公의 13世孫에 해당하는 提按公 金珥 가 찬술한 광산현제영시서에 의하여  편성되어져 왔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序文에는 王 子公 金興光에서부터 8世 義元까지만 기술 하고 그 以下世系의 기록은 생략하고는 다만 ‘충정공 의원은 내 현조(5대조)’라 기록되어 있으므로 해서 제안공 珥가 王子公의 13世에 해당하는 것만은 확실하나

 

9世이하의 世系기록이 없으니 提按公 자신의 계통도 알 수 없음은 물론, 여타 자손들의 세계편성과 관련문제에 있어서도 혼란이 없지 않아, 역 대 修譜家 제현들에 의하여 많은 의문을 제기하여 왔고 또 이를 풀고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오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근년에 이르러서는 학계에서까지도 이를 빌미로 광산김씨보의 상계편성에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러서는 광김 위성자라면 그 누구나 불쾌한 심회를 갖게 됨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이에 本稿 주제와 관련한 부분에 대하여 불가피하게 재검토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선 충정공 묘지문에서 [구속무보]라 하였는바 과연 고려시대(特히 前期)에는 광김가첩이 부재하였는지를 추구하여 보고 또 근년에 새로 확인된 [씨족 원류]에서 조선조 전기인 16세기 중반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산김씨의 상계편성을 살펴보게 될 것이며, 이어서 17세기 초기로 추정되는 사계, 용계 양보이후 광산김문의 족보간행 추이와 1747년 정묘대보 이후 歷代 諸譜에서의 상계편성 부분을 검토하여 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제안공 서문에 제시된 上系의 생갑년대와 그 下代의 생갑년대와의 접속은 시대적으로 합당한지를 추고하여 본 다음, 충정공 묘지가 나타난 이후 장성대보 한성대보 그리고 1991년에 光山金氏史가 간행되기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던 문안공의 嫡男 김의영의 존재와 김원의 묘지문에서 그 계통이 확인된 새로운 사실에 따라 位 珠永 兩公의 계서문제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代案으로 上系의 수정시안을 별록으로 제시하게 될 것이다.

 

결 어

이상에서 우리 광산가첩의 연원을 추적하여 보았고, 또 그 간의 수보과정과 상계 편성에 있어서의 의문점 내지 문제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1) 고려시대의 광산가첩으로서 평장사공 김원의 家의 계보도가 씨족원류와 또 다른 가첩으로서 정묘대보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대보의 권6 상에 의하면

 

“自平章元義以下七代 載於舊譜 故依舊錄之” 라 하여 ‘金元義이하 7代가 舊諸에 등재되어 있으므로 다시 예대로 옮긴다. 한 것을 보면 金元義 系는 고려 말에서 실전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나 그 계보도는 다행이 외손 계통을 통하여 후세에 전하여졌을 것으로 추정하여 보게 된다.

 

2) 중랑장공 김광세계는 씨족원류에서 고려후기의 수, 주정과 심, 류의 형제 서차가 바뀌어 있고, 여말의 김광재 지문의 세계를 인용한 것을 보면, 고려시대의 가첩이 불전하고 朝蘇朝 전기에 家牒을 새로 편성하면서 많은 부분 오류가 발생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3) 별장공 금광존 계는 고려 家牒의 傳來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다행이 良簡公(鍾)과 章榮公(진) 호적이 후세에 전하여 짐으로 해서 隊正公(珠永) 이후의 編譜에 差 이 없었던 것으로 여격진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 2), 3) 모두가 공통적으로 고려 前期와 後期의 系世를 連緊하여 줄 근거를 제시하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로 沙漢譜와 龍漢譜, 그리고 領南인이 만든 족보와 송희업씨가 만든 族譜가 있었다고 하며, 이어서 瑞石譜와 竹泉譜가 있었으나 後世에 전하여지지 못하였고, 정묘, 壬寅, 丙子大譜를 간행하는 과정에서도 역대 수보가 제현들이 義元-珠永의 連緊에 疑問을 풀지 못하는 가운데 더욱이 文肅公誌文에서 位의 존재가 확인됨으로서 位의 上代가 누구인지 그 身位를 定立하는데 異見이 없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1910년에 이르러 忠貞公 墓誌가 출토됨으로서 그 간의 의문은 현실로 나타났으니, 즉 義元 밑에는 珠永 또는 位는 없는 반면 光中, 大筠,大庸 3형제가 새로 확인되고 고려사에서 金光中에게 아들 帶가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이를 수용하는데 여러 異見도 없지는 않았으나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펴낸 것이 일컬어 長城大譜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서 看過된 것은 誌文과 序文이 서로 다른 두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誌文을 過信하고 序文을 疑心하게 되는 편중된 의식과 그러한 분위기가 작용하는 가운데 이를 진행하다보니 序文의 “忠貞公 義元 乃玄祖也” 하는 구절은 검토의 대상에서 멀리 밀려나 있었고, 아울러서 序文 作者인 提按公 珥의 身位 定立문제도 근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였던 듯 하며, 또 忠貞公(義元)과 光中 父子간에 生甲이 실제로 50년 以上 差異가 있는데도 이를 認識하지 못한 가운데 光中, 帶 2代를 追加하게 되었는데,

 

이리되고 보니, 序文의 ‘及 玄祖’라는 明文에 비하여 忠貞公 幕誌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구보에는 대수를 한 代 모자라게 편성되어져 오다가 장성대보에서부터는 代數가 한 代 더 많게 편성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즉 位, 珠永 兩公을 王子公의 10世로 편성되어야 함에도 11世로 잘못 편성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未備点은 그 후 한성대보를 거쳐 오늘날 각 派譜의 간행에 이르기까지 시정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근년에 이르러서는 또 전연 예상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즉 金義英 父子의 존재와 位의 長子가 金元義였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이제 우리 족보의 上系修正은 불가피하여 졌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이제 이에 따라 位·珠永 兩公의 世系를 推考하여 본바, 序文의 明文과 그리고 年代的으로 推考하여도 世代가 잘못 편성된 것이 明白하여졌으므로, 이는 마땅히 시정 되어야 할 것이며, 그 계서 문제에 있어서도 앞에서 충분히 검토된바 位는 義英의 孫 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으며, 珠永 또한 光中 3兄弟의 子 또는 질로 보아 우선은 光中의 밑으로 직서함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결론에 따라 감히 다음과 같이 [상계수정시]을 별록으로 제시하고 이를 大宗中의 公論을 거처 이후에 간행되는 諸 派譜에 反映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첫째는 을해정변(1005년)이후 이제까지 실전되어 不載된 金義英 父子를 새로 登載하고,

둘째는 현재의 [光中→帶→位]로 이어진 잘못된 世系를 [義英→00→位→元義]

로 바로잡으며,

셋째는 현재 잘못 系書된 [光中→帶→珠永]을 [光中→珠永]으로 世代를 조정함으로서 前讀에서 잘못 산정된 세수를 시정하게 될 것이며,

넷째는 왕자공의 신위를 신무왕 第3子로 확정하는 문제이니, 이는 앞에서 ‘신라왕자 김흥광의 신위검토”를 통하여 충분히 검토된 사안이다.

 

以上의 4大 수정방향 외에 기타 역대의 佛註記에 누락 또는 오기된 부분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 바에 따라 보완하게도 될 것이며,아울러서“地理誌(平章洞 建置沿革)의 檢討”結果도 제시하게 될 것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