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선세 문헌

본문

12. 경모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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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曰 敬慕起敬寓慕所以追遠者在此所以報本者在此即敬慕我 先祖 王子府君而剏建者也惟我 先祖以王室至親當新羅季世高擧遠引卜宅于光州之北佛臺山下西一洞而遯跡焉今遺墟尙存曰平章洞光山之金寔大而昌蕃條衍流殆遍國中而皆 先祖是祖後孫之敬慕 先祖者亦當如何哉然而世遠墓無傳芬苾無所未伸其瞻慕之萬一常以爲恨往在庚申後孫特進官珏鉉與珉鉉容柱珍鉉以有司之任通告僉宗就遺墟上潔淨地築壇設享依朱文公歲一祀之義十月一日其日也于今三十有餘年齊宿庖溜實無有爾甲午之歲後孫源千昌鉉同錫永滿曁蓮洙亦忝是任以齋室之剏建發議于僉宗僉宗亦無二辭各殫其誠醵至鉅金而羅州之銅洙尤其用力者也起工于丙申春不幾日而落之繼自碑閣及聚斯堂以至庫舍門廊圮者崇之缺者葺之墻以衛之堦砌以儼之又伐貞珉改竪于壇於是乎洞壑增光雲煙改觀升降進退尤不勝敬慕之心始終周旋同錫永滿尤爲殫誠者而役旣竣使蓮洙記其實嗚呼祖依於孫孫依於祖天理人情之所當然矣惟我 先祖潜功懋德宜享悠久則凡我後孫以盡報本之誠不失其天理人情之所當然愈勤而愈靡懈而已盍各勉旃詩曰母念爾祖聿修厥德後孫 光州地方法院長 蓮洙 記 서기1956년

 

[譯文] 재호(齋號)를 경모(敬慕)라 함은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사모하는 마음을 부침이니 추원(追遠)하는 마음도 여기 있고 보본(報本)하는 마음도 여기 있어 곧 우리 선조 왕자부군을 경모하여 이 집을 창건(創建)한 것이다. 우리 선조께서는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신라말(新羅末)을 당하여 높은 뜻으로 멀리 떠나와서 광주(光州) 북쪽 불대산(佛臺山)아래 서일동(西一洞)에 집을 짓고 자취를 숨겼으므로 지금 유허가 오히려 있으니 곧 평장동이다.

 

광산김씨가 이에 크게 번창하여 가지가 벌어지고 흐름이 불어나듯 온 국풍(國風)에 두루 살며 다 이 할아버지를 선조로 모시니 후손으로써 선조를 경모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세대가 멀고 묘소도 실전하여 유적이 남음이 없으니 첨모(瞻慕)하는 마음을 만분의 일이라도 펼 수 없음이 항상 한이 되었는데 지난 경신(庚申:1920)년에 후손 특진관(特進官) 각현(珏鉉)이 민현(珉鉉) 용주(容柱) 진현(珍鉉)과 같이 유사가 되었을 적에 여러 종친께 통고한 다음 힘을 합하여 유허(遺墟) 위에 정결(淨潔)한 땅을 가려 단(壇)을 모으고 시조공의 신위(神位)를 설향(設享)하여 주문공(朱文公)의 세일사(歲一祀)하던 뜻을 따르니 10월 1일에 제향일(祭享日)이었으나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에 재숙(齋宿)하고 제수(祭需)마련할 곳이 없으므로 갑오(甲午:1954)년에 후손 원천(源千) 창현(昌鉉) 동석(同錫) 영만(永滿) 및 연수(蓮洙)가 유사직(有司職)을 맡아 재실창건(齋室創建)하자는 의논을 여러 종친들에게 물으니 종친들이 이의(異議)없이 기금(基金)을 모으는데 나주(羅州) 동수(銅洙)가 더욱 힘을 썼다. 병신(丙申:1956)년 봄에 기공(起工)하여 바로 낙성(落成)하였고 비각(碑閣)과 취사당(聚斯堂)이며 고사(庫舍)와 문랑(門廊)을 중수(重修)한 후 담장을 둘러쌓고 축대(築臺)를 엄정하게 쌓았으며 단비(壇碑)를 고쳐 세우니 이에 동학(洞壑)이 빛이 나고 구름과 연기가 장관(壯觀)을 이루니 승강(昇降:오르고 내려감)하고 진퇴함에 더욱 경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리로다.

 

끝까지 주선(周旋)하고 정성을 다한 분은 동석(銅錫) 영만(永滿)이요 역사(役事)를 마치고 연수(蓮洙)에게 사실(事實)을 쓰라 하므로 이에 이 글을 쓰노니 아!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의지하는 것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당연한 일이다.

우리 선조께서 공(功)을 숨기고 덕을 쌓았으니 마땅히 복록(福祿)을 누림이 유구(悠久)할지라 우리 후손들은 보본(報本)하는 정성을 다하여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당연함을 잃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고 게으르게 하지 말 것이니 어찌 모두 각자가 힘을 쓰지 않으랴. 그러므로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네 할아버지 생각을 잊지 말고 그 덕(德)을 닦으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