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선세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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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광주목 단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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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한문생략

엎드려 생각건대 민등(民等)은 들으니 사람의 집마다 시조의 터에 사당을 세우고

향사하는 것은 자손의 떳떳한 정이요 예와 지금의 의라 그러므로 동방(東方) 대성(大姓)의 집에 또 각각이미 전예가 있으니 이 다 먼 할아버지를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며 떳떳한 본심에 근거하여 능히 스스로 말지 못함이라.

 

민등(民等)의 선조 문안공(文安公)은 고려조(高麗朝)에 재상으로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당세에 으뜸이었고 송나라 희영(熙寧)갑인(甲寅)년에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가니 중국 조정에서 여러 현인(賢人)들이 한번 보고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돌아올 적에 응상지(凝祥池)까지 나와서 전송하면서 소학사(蘇學士) 식(軾)은 시를 주며 작별하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삼한(三韓) 사신에게 주노니 새로운 그림이 낙랑(樂浪)에 가내⌟라 하였으니 신도(新圖)는 곧 문묘(文廟)의 그림이라.

 

이번 길에 공(公)은 중국 성묘(聖廟)제도의 아름다움과 문물(文物)의 성함을 보고 그려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에 전하여 삼한(三韓)의 무무(貿貿)한 풍속을 변하여 빈빈(彬彬)한 예의(禮儀)에 나라가 되었으니 그 사문(斯文)을 도운 공(功)이 성묘(聖廟)에 있으니 비록 문묘(文廟)에서 혈식천추(血食千秋)라 할지라도 백세(百世)에 부끄러움이 없을지니라.

이로써 후손의 한은 오랫동안 조두(俎豆)에 향사를 올리지 못함이요. 또 그 머물던 터가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고을 서쪽 불대산(佛臺山) 밑에 있고 자손이 가까운 곳에 살면서 옛일에 감동하고 지금 일에 상심하여 선영을 사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받들어 설향(設享)하자는 의논이 있는지 벌써 오래 되었는데

 

숭정(崇禎)뒤에 호남(湖南)일가들과 서울일가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장차 별묘(別廟) 두어 채를 세워 한 채는 선영 제사하는 집으로 하고 한 채는 일가들이 모이는 집으로 하려하였으나 재력(財力)이 넉넉하지 못하여서 우선 강당(講堂)만 세우려다가 중지되었다.

 

뒤에 부제학(副堤學) 퇴어공(退漁公)이 또 이일을 이루려다가 결과를 맺지 못하고 다만 비각(碑閣)만 세웠고 십 여년전(十餘年前)에 의논하던 사당 건축(建築)할 일을 서울에서 시작해 옴으로 호남(湖南) 일가들은 다 말하되 이에 우리 김씨(金氏)가 뜻을 이어 이 일을 마칠 때라하고 뜻을 같이 하고 별묘(別廟)를 세우다가 미처 낙성하지 못하였는데 주장할 사람도 없고 흉년(凶年)이 계속하니 아무리 사당 모양은 이뤄졌다 하되 향사할 기약이 없으니 여러 종친(宗親)들의 한이 팔구년이 되었는데 올봄에 민등(民等)이 간신히 재물을 모아 집행(執行)할 임사(任事)를 정한 뒤에 지패(紙牌)로 봉안(奉安)하고 지패(紙牌)위에 선조(先祖) 두자를 쓰고 후손이 정성을 펴려 하였다.

 

천만(千萬)뜻밖에 춘조(春曹)에서 탁핵이 지엄(至嚴)하고 영문(營門)에서 제지(題旨)가  더욱 박절하여 민등(民等)의 선영 사당을 헐고 불태우는 액화를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우리 원님 윤자서(尹玆瑞)가 나라에 보고하여 회유(誨諭)가 정중(鄭重)하며 친절한 뜻과 화평한 가르침이 백성을 예로 인도하고 사람을 의리로 효유하지 않음이 없으니 민등(民等)은 억(億)뿐이 아닌 수가 느낌을 새겨 칭송하고 이어서 몸을 바칠 마음을 갖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민등(民等)은 이에 감히 즐기고 뛰고 춤추며 같은 소리로 효리(孝理)하는 밑에 우러러 고하오니

 

오늘 합하(閤下)의 송사 듣는 마당은 문득 이 어리석은 백성에게 예를 묻는 장소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어리석은 정성을 가긍하게 여기시고 특별히 명감(明鑑)을 내리시어 인정(人情)을 헤아리고 예의(禮儀)를 참작하시와 정확한 논리(論理)를 게시(揭示)하여 주시면 민등(民等)의 종중(宗中)에도 예를 아는 댁이 많이 있사오니 즉시 사람을 보내어 왕복(往復)하며 오직 명령(命令)에 따르리다.  

 

지패(紙牌)에 대하여는 당초에 예를 묻는 자가 지방(紙榜)을 지패(紙牌)로 잘못듣고 이러한 착오가 있었고 또 일시(一時) 권도에서 나온 일인데 지난번 영문(營門)에서 아무리 사가(私家)의 시조 제사라고 예의(禮儀)를 어겼다 하였으나 대례상복소기(戴禮喪服小記)에 이르되 별자(別子)가 셋이 있으니 하나는 제후적자(諸侯嫡子)의 여러 아우요 둘째는 이성(異姓)인 공경(公卿)의 아들로 다른 지방에 서 온자요. 셋째는 여러 성씨(姓氏)가 이 지방에서 일어나 경대부(卿大夫)가 된 자라 하였고

 

구경산(丘瓊山)의 의절가례도(儀節家禮圖)에 이르되 예기(禮記)에 별자(別子)별묘(別廟)라는 말은 전혀 사람의 집을 주로 하여 말한 것인데 대범 처음으로 옮겨 문호를 떨친 자는 당연히 별묘(別廟)를 둔다 하였고

 

가례사당장(家禮祠堂章)에 또 이르되 만일 친진(親盡)한 할아버지가 있는 별자(別子)이면 묘소에 옮긴다 하니 양씨(楊氏)는 주(註)하여 이르되 묘소에 사당을 두고 그 제사를 받든다 하였으므로

 

정통원년(正統元年)에 주문공(朱文公)의 팔세손(八世孫) 순(洵)이 사사로 그 선조 위재(韋齋)에 별묘를 한천정사(寒泉精舍) 옛 터에 세웠는데 우리나라 노선생(老先生) 문집(文集) 예의권(禮儀卷)의 별자(別子)조에 이르되 가례(家禮)에 글이 이미 이러함으로 세속이 많이 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으니

 

또 사대부(士大夫)의 집이며 민등(民等)의 시조(始祖) 광산군(光山君)은 신라왕(新羅王)의 적자(嫡子)의 아우로서 나라가 장차 어지러울 줄 알고 여기에서 숨어 살며 빛을 숨기고 덕을 꺼리면서 터를 열고 업을 키위 그 자손에게 주었으니 옛적에 이른바 제후(諸侯)의 여러 아들이 처음으로 옮겨서 별도로 문호(門戶)를 세운 자라.

 

이제 우리 후손이 추모하는 정성을 펴려하면 유허(遺墟)를 버리고 어디로 가는가.  또 사람의 집에서 시조의 묘에 사람마다 제사하여도 참람하다 아니하는데 묘소에서 제사하는 것과 유허(遺墟)에서 제사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개 유허(遺墟) 두자가 어찌 귀하고 중하지 아니하릿가.

 

사문(斯文)에 많은 선비의 일을 말하면 니성(尼城)에 부자(夫子) 사당을 세운 것은 이자(尼子)가 부자(夫子)의 유허(遺墟)와 방불(彷佛)함이요. 자양(紫陽)에 주자(朱子)의 사당을 세운 것은 또 당 이름이 주자(朱子)께서 예전에 살던 곳과 같은 이라.

 

그냥 이름자만 서로 같아도 오히려 사당을 세우고 받드는 일이 있거든 또 자손이 선조께서 천년(千年)전에 대대로 살았던 유허(遺墟)이지 않으리까. 사당을 세우고 갱장(羹墻) 사모함을 붙임이 이에 사람의 집에 아름다운 일이요, 맑은 세상에 좋은 풍속이요. 엎드려 바라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윤정을 살피고 정론(正論)을 지시(指示)하여 민등(民等)으로 하여금 선영 사모하는 정성을 펴게 하고 범모(犯冒)하였다는 이름을 씻어 주심을 천만(千萬)번 비나이다.

丙辰十一月 初七日 長城 金必重等 一百五十人

 

*註 貿貿:어릿어릿하고 아는 것이 없음.

彬彬(빈빈):빛남

崇禎:明나라 毅宗의 年號

春曹:禮曹

營門:감사가있는 監營

諄諄(순순):친절하고 성실함

申申:화평하고 정중함

隕絶(운절):목숨을 바침

羹墻(갱장):堯임금이 죽은 뒤에 舜임금은 국을 대해도 요임금이 나타나고 담을 보아도 요임금    이 나타났다는 말인데 즉 사모한다는 말

閤下:牧使나높은벼슬한사람의 尊稱

倫情:유기와 인정

犯冒:나라에 기강을 어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