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자료

고려사 여행 ⑮ (諱 光載) 附誌文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4 21:12 조회1,389회 댓글0건

본문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충정왕 2년(1350) 9월
계축(癸丑) 삭(朔)에 이능간(李凌幹)으로 천녕 부원군(川寧府院君)을 삼고 김광재(金光載)로 삼사 우사(三司右使)를 삼고 손홍량(孫洪亮)으로 복천 부원군(福川府院君)을 ...
癸丑朔, 以李凌幹, 爲川寧府院君, 金光載, 爲三司右使, 孫洪亮, 爲福川府院君....

충정왕 3년(1351) 8월
병신(丙申)에 김나해(金那海)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삼고 유탁(柳濯)·김인호(金仁浩)로 찬성사(贊成事)를 삼고 권적(權適)·최천택(崔天澤)·조유(趙瑜)로 참리(參理)을 삼고 김광재(金光載)·강득룡(姜得龍)으로 삼사 우·좌사(三司右左使)를 삼고 한대순(韓大淳)으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삼고 ....
丙申, 以金那海, 判三司事, 柳濯·金仁浩, 爲?成事, 權適·崔天澤·趙瑜, 爲콷理, 金光載·姜得龍, 爲三司右左使, 韓大淳, 知都僉議事.....

공민왕 12년(1363) 3월
갑인(甲寅)에 삼사 우사(三司右使) 김광재(金光載)가 죽었다.
甲寅, 三司右使金光載, 卒.

[고려사(高麗史) 지(志) 선장(選場) ④]

충혜왕(忠惠王) 후 원년(後元年)에 김영돈(金永旽)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안축(安軸)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취하였다. 후2년 7월에 밀직 부사(密直副使) 이군해(李君?)가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김광재(金光載)가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고 안원룡(安元龍) 등 33인에게 급제(及第)를 사(賜)하였다
忠惠王後元年, 金永旽, 知貢擧, 安軸, 同知貢擧, 取李公遂等. 後二年七月, 密直副使李君?, 知貢擧, 判典儀寺事金光載, 同知貢擧, 取進士, 賜安元龍等三十三人及第....

[고려사(高麗史) 지(志) 국자시(國子試) 액수(額數)]

충혜왕(忠惠王) 후 원년(後元年)에 김진(金?)이 양윤식(梁允軾) 등을 취하였다. 2년에 김광재(金光載)가 성원달(成元達) 등을 취하였다
忠惠王後元年, 金?, 取梁允軾等. 二年, 金光載, 取成元達等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김광재(金光載)]

김광재(金光載)의 자(字)는 자여(子輿)이니 낳으매 신장(身長)이 2척여(尺餘)나 되므로 부모가 이상(異常)히 여겨 그를 특별히 사랑하였다. 충선왕조(忠宣王朝)에 등제(登第)하여 성균 학관(成均學官)에 보임(補任)되었고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에 갔던 공로로서 사복 시승(司僕寺丞)을 제수(除授)하였으며 도관 정랑(都官正郞)에 천배(遷拜)되었다. 조적(曹?)이 난(亂)을 짓다가 복주(伏誅)되고 왕이 원(元)에 잡혀가매 김광재(金光載)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위태(危殆)한데 내가 어찌 차마 홀로 면하리오.”
하고 따라갔다. 왕이 복작(復爵)되어 동환(東還)하매 군부 총랑(軍簿摠郞)을 제배(除拜)하여 전선(銓選)에 참여(參與)케 하였고 여러번 옮겨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왕이 평소에 김광재(金光載)의 엄직(嚴直)함을 꺼리고 좌우의 군소(群少)도 또한 많이 그를 기탄(忌憚)하나 말을 빙자(憑籍)할 것이 없었다가 이에 말하기를,
“김공(金公)은 한정(閒靜)한 것을 좋아하여 사진(仕進)하는 것이 그 본 뜻이 아니라.”
하니 왕이 그 말을 믿고 그 직(職)을 치탈(?奪)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서매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제수(除授)하고 지신사(知申事)에 전임(轉任)하였는데 권세를 마음대로 하는 대신(大臣)이 자기들에게 아부(阿附)하지 아니함을 미워하여 아뢰므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개천(改遷)하였으나 왕이 이어서 회오(悔悟)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 제수하고 전선(銓選)을 제조(除調)케 하였으며 지사사(知司事)에 승진(陞進)하였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여 서연(書筵)을 열고 김광재(金光載)로 사(師)를 삼으니 고사(固辭)하므로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제배(除拜)하고 이어서 전선(銓選)을 맡게 하였다. 때에 덕녕 공주(德寧公主)가 자못 정사(政事)를 간예(干預) 하되 왕이 능히 저지(沮止)하지 못하므로 김광재(金光載)가 분연(奮然)히 나가버렸는데 공주(公主)가 두번 불러도 끝내 불응(不應)하였다. 문득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천직(遷職)되니 왕에게 사뢰어 말하기를,
“문선(文選)은 이조(吏曹)가 맡고 무선(武選)은 병조(兵曹)가 맡는 것인데 정방(政房)이 총관(摠管)하는 것은 권신(權臣)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오 영전(令典)이 아니오니 청컨대 구제(舊制)를 회복(回復)하소서.”
하니 왕이 이를 청종(聽從)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김광재(金光載)를 쓰고자 하여 명(命)하여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겸하게 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서매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기를 무릇 12년이나 하였고 그 어머니를 봉양(奉養)하여 조석(朝夕)으로 예(禮)를 다하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매 여묘(廬墓)에서 상제(喪制)를 마쳤으며 매양 제사할 적에 반드시 체읍(涕泣)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왕이 듣고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사람을 시켜 유시(諭示)하기를,
“경(卿)과 더불어 이야기 하고자 하니 가히 만나볼 수 있겠느냐.”
하거늘 김광재(金光載)가 그때에 병중(病中)에 있으면서도 부액(扶腋)하여 입견(入見)하니 왕이 말하기를,
“연령(年齡)과 안색(顔色)은 심히 쇠(衰)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런 병이 있는 것은 어인 일인고?”
하고 오래 탄석(歎惜)하다가 유사(有司)에게 명(命)하여 거소(居所)에 정표(旌表)하기를 영창방(靈昌坊) 효자리(孝子里)라 하고 그 마을의 약간호(若干戶)에 부역(賦役)과 조세(租稅)를 면제(免除)하여 이를 봉사(奉事)케 하였다. 김광재(金光載)가 효제(孝悌)를 돈후(敦厚)히 행하고 집에 있어도 생산(生産)을 다스리지 아니하였으며 좌우(左右)에 금(琴)과 서(書)를 두고 즐거워하였다. 죽음에 미쳐서 그 처에게 이르기를,
“남자(男子)가 부인(婦人)의 손에서 절명(絶命)하지 아니하는 것은 예(禮)이니 여러 비(婢)와 함께 물러가는 것이 옳다.”
하고 또한
“고성(高聲)과 질언(疾言)으로써 나를 요란(擾亂)케 하지 말라.”
고 하였다. 문간(文簡)이라 시(諡)하였다. 아들은 김흥조(金興祖)인데 재주가 뛰어나고 지조(志操)가 있어 관(官)이 군기 감(軍器監)에 이르렀으며 수원(水原)·해주(海州)를 역재(歷宰)하였고 김제안(金齊顔)·김정(金精) 등과 더불어 신돈(辛旽) 주살(誅殺)하기를 모의(謀議)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살해되었다.

光載, 字子輿, 生而身長二尺餘, 父母異而絶愛之, 忠宣朝, 登第, 補成均學官, 從忠惠王如元, 以勞授司僕寺丞, 遷都官正郞, 曹힒作亂伏誅, 王被執如元, 光載曰, 吾君危矣, 吾忍獨免乎, 往從之, 王復爵, 東還, 除軍簿摠郞, 콷銓選, 累遷判典校寺事, 王素憚光載嚴直, 左右群小, 又多忌之, 無所籍口, 乃曰, 金公愛靜, 仕進非其志, 王信之, ?其職, 忠穆立, 拜右副代言, 轉知申事, 用事, 大臣惡不附已, 奏改版圖判書, 王尋悔, 除密直副使提調銓選, 陞知司事, 忠定卽位, 開書筵, 以光載爲師, 固辭, 拜僉議評理, 仍掌銓選, 時德寧公主, 頗干預政事, 王不能沮, 光載奮然而出, 公主再召, 竟不應, 俄遷三司右使, 白王曰, 文選, 吏曹主之, 武選, 兵曹主之, 摠于政房, 自權臣始, 非令典也, 請復舊制, 王從之, 然必欲用光載, 命兼典理判書, 恭愍立, 杜門不出, 凡十二年, 奉養其母, 朝夕盡禮, 母歿, 廬墓終制, 每祭, 必涕泣不止王聞而嘉之, 使人諭曰, 思與卿語, 可使得見乎, 光載, 時抱疾, 扶入見, 王曰, 年顔非甚衰也, 而有斯疾何耶, 歎惜久之, 命有司, 旌表所居曰, 靈昌坊孝子里, 復其里若干戶, 以奉事焉, 光載, 敦行孝悌, 居家不治生産, 左右琴書, 湛如也, 臨歿, 謂其妻曰, 男子不絶於婦人之手, 禮也, 可與衆婢退矣, 且戒毋高聲疾言, 以擾我也, 諡文簡, 子興祖, 倜쩤有志, 官至軍器監, 歷宰水原·海州, 與金齊顔·金精等, 謀誅辛旽, 事洩爲所害.


[양촌선생문집 제35권 동현사략(東賢事略) 우사(右使) 김광재(金光載)]
공의 자는 자여(子輿), 호는 송당(松堂)인데, 쾌헌(快軒) 문정공(文正公)의 둘째 아들이다.
충숙왕 계축년(1313) 안진(安震)의 방(榜)에 급제하였고, 지순(至順) 경오년에 충혜왕을 따라 경사(京師)에 조회(朝會)하였으며, 지원(至元) 기묘년에 조적(曺?)이 난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매, 충혜왕이 경사로 불려 갔는데 그때에도 공이 따라갔으며, 다음해에 왕이 복위(復位)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오자 그 공로로 여러 번 승진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며, 또 다음해 가을에는 성균시(成均試)를 맡았으나, 왕이 소인들과 친하였으므로 공이 규탄할까 꺼려서 마침내 체직(遞職)하니 소인들이 더욱 기세를 부려 왕은 결국 계미년 겨울에 악양(岳陽)으로 귀양갔다. 갑신년에 충목왕이 즉위하여 불러 대언(代言)을 삼았고, 승진하여 밀직부사와 제조(提調)에 올라 전선(銓選)을 맡았다. 기축년에 충정왕이 즉위하여서는 공을 스승으로 삼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하더니 곧 우사(右使)로 임명하매 왕에게 아뢰어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문무관(文武官)의 선발을 이조ㆍ병조에 맡기게 하였다. 신묘년 겨울에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여서는 공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고 대부인(大夫人)을 봉양하였는데 효성을 다하였으며,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는 3년간 시묘(侍墓)하였고, 금상(琴祥 대상을 말함)이 지나서도 오히려 슬퍼 우니, 왕이 가상히 여겨 유사에게 명하여 공의 마을 문에 정표(旌表)하게 하였다.
신축년 겨울에는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고창(高昌)으로 갔었는데 그대로 그곳에서 눌러 살았다. 계묘년 봄에 가벼운 병을 앓았는데 하루는 부인에게,

"내가 이제 나이 70이니 죽은들 다시 무슨 한이 있겠소. 남자는 부인의 곁에서 죽지 않는 것이 예라고 하니, 여러 계집종들과 함께 물러가시오."
하고, 또 ‘큰 소리로 말하여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경계하고서 조금 있다가 죽었다.

[참고 김광재묘지명(金光載墓誌銘)] : 일부 오류 있음

송당선생 김공묘지명 병서(松堂先生 金公墓誌銘 幷序)

지정(至正) 신사년(충혜왕 복위2, 1341) 나(이색)는 14세로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했다. 그때 뜰에서 선생이 관복(袍笏)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우뚝 솟은 태산처럼 엄숙하여 여러 선비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감히 떠들지 못하였다. 그후 문생(門生)이 되어 오가며 가르침을 들었다. 따뜻한 말과 부드러운 낯빛으로 나라의 법도를 밝히고 인재를 이끄는데에 부지런히 힘썼고 풍속이 날로 쇠퇴해가는 것을 탄식하셨다. 집안에서는 재산을 모으는데 힘쓰지 않고 좌우에 거문고와 책을 가까이하며 담박하였다. 동쪽 언덕에는 소나무를 심고 남쪽 연못에는 연꽃을 키웠다. 매년 뜰에 목단꽃이 피면 술과 음식을 갖추고 문생들을 불러놓고 대부인(大夫人)에게 장수를 기원하고, 형제와 자손들이 화기애애 하였다. 효성과 우애의 지극함이 천지신명에게 통하여 대부인(大夫人)은 91세의 나이를 누렸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었다.
병신년(공민왕 5, 1356) 3월 대부인(大夫人)께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문정공(文正公) 묘 곁에 장사지내고 그 곁에서 복제(服制)를 마치었다. 선생은 평소 병이 있어 행보가 힘들었지만 조석으로 음식을 올리고 청소하는 것을 반드시 직접하며 조금도 빠뜨리지 않았다. (지금) 나라의 풍속에 부모의 무덤 지키는 것을 노비에게 대신하게 하고 그들의 신역(身役)을 면제해주었다. 선생은 차마 부모에게 가볍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직접 행하였다. 근래의 재상들에게서 듣지 못한 일이다.
선생의 성은 김씨, 이름은 광재(光載), 자는 자여(子輿), 호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다. 광주(光州)사람인 사공 김길(司空 金吉)의 후손이다. 사공(司空)은 태조를 도운 공이 있었다. 그의 먼 후손은 중랑장(中郎將) 광서(匡瑞)이다. 중낭장이 삼사사(三司使) 위(偉)를 낳았다. 삼사사는 대장군(大將軍) 경량(鏡亮)을, 대장군은 감찰어사 수(須)를 낳았다. 원종초 삼별초(三別抄)가 (고려가 원에) 복속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반란을 일으켜 해도(海島)에 들어갔다. 어사(須)가 영광(靈光)을 지키다 죽었다. 어사는 국자좨주(國子祭酒) 고영중(高瑩中)의 손자인 몽경(夢卿)의 딸과 결혼하였다. 고씨는 102세까지 살았다. 처음에 고씨가 샛별(明星)이 가슴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쾌헌선생(快軒先生)인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을 낳았다. (문정공)은 네 임금을 섬긴 원로로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고문역할을 하였으며, 정승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국초이래 문장을 모아 『해동문감(海東文鑑)』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지금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성균시를 관장하고 예부시(禮部試)의 지공거(知貢擧 : 과거 고시관)를 역임하였다. 뽑은 선비 가운데 이름난 사람이 많았다. 죽계 안근재(竹溪 安謹齋 : 安軸)와 최졸옹(崔拙翁 : 崔瀣) 등이 특히 뛰어난 사람이다. 행수낭장(行首郎將) 김의(金儀)의 딸이 첫 부인이며, 아들 하나를 두었다. 광식(光軾)으로 벼슬이 선부의랑(選部議郞)에 올랐다. 태조 아들 효은태자(孝隱太子) 후손인 시랑(侍郞) 왕정단(王丁旦)의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3남 2녀를 두었다. 큰 아들 광철(光轍)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密直使)에 올랐다. 둘째가 선생(光載)이며, 셋째는 광로(光輅)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큰 딸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밀양군(密陽君)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공의 형제 세사람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대부인(大夫人)은 평생토록 나라로부터 녹을 받았다. 박씨(둘째 사위)의 아들 넷과 안씨(첫재 사위)의 손자 셋도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공은 지원(至元) 갑오년(충렬왕 20, 1294) 정월 갑자일에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키가 두 자가 넘어, 부모가 기특하게 생각하여 특별히 사랑하였다.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서 황경(皇慶) 계축년(충숙왕 즉위, 1313) 과거에 급제하였다. 좌주인 일재선생 권정승(一齋先生 權政丞 : 權漢功)은 공이 예의가 밝은 것을 사랑하여 후하게 대하고 성균학관(成均學官)으로 임명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충혜왕 즉위, 1330) 충혜왕(忠惠王)을 따라 원나라 수도에 간 공으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임명되고 곧 도관정랑(都官正郞)으로 옮겼다.
후지원(後至元)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 충혜왕이 조적(曹?)에 폐위될 뻔 했다가 다행히 이겨냈으나, 그의 무리가 많이 (원나라) 권세가들에 붙어 자신들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왕이 원나라의 수도에 갈 때에 공은 ‘우리 임금이 위태롭다. 내가 차마 혼자만 면할 수 있겠는가’하고 따라 갔다. 천자의 은덕에 힘입어 (충혜왕이) 왕위를 회복하고 고려에 왔다. 경진년(충혜왕 복위1, 1340) 가을 7월이었다. 군부총랑(軍簿摠郞)으로 관리를 임명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성균제주 삼사좌윤 판전교시사(成均祭酒 三司左尹 判典校寺事)로 관직을 옮겼지만 항상 관직(館職)과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다음해 가을 성균시를 주관하여 지금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인 성사달(成士達) 등 99인을 뽑았다. 당시 선비를 잘 뽑았다고 칭송되었다. 충혜왕이 평소에 공의 엄격함을 꺼렸고 (왕의) 주변도 공을 싫어하였다. 핑계댈 말이 없어 결국 ‘김공은 고요함을 사랑하며 벼슬에 나서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그것을 믿어 공의 관직을 옮기게 하였다. 군소(群小 : 소인배)들이 더욱 날뛰었다. 계미년(충혜왕 후4, 1343) 겨울 악양(岳陽)의 화(禍)가 일어나 충혜왕이 별세하였다.
갑신년(1344)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여 공을 우부대언(右副代言)에 등용하고 곧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권력을 잡은 대신이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여 왕에게 아뢰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왕이 후회하여 곧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고 관리 뽑는 일을 맡게 하였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기축년(1349)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여 서연(書筵)을 열고 공을 스승으로 삼았으나, 공은 사양하였다. 첨의부(僉議部)에 들어가 평리(評理)가 되고, 광정대부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으로 관리 뽑는 일을 맡았다. 곧 바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 관직이 바뀌었다. 왕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문관의 인사는 이조(吏曹)에서 관장하고 무관의 인사는 병조(兵曹)에서 관장하는 것인데, 정방(政房)에서 이를 모두 관장한 것은 권신(權臣)들이 시작한 것으로 훌륭한 제도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신의 말을 들어 옛 제도대로 하면 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르면서, 반드시 공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공에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하게 하였다.
신묘년(충정왕 3, 1351) 겨울 10월 현릉(玄陵 : 공민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공은 두문불출하며 대부인(大夫人)인을 봉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예를 다하였다. (대부인이 돌아가셔서) 여묘(廬墓)살이를 마치자, 시중 홍양파선생(洪陽坡先生 : 洪彦博)과 당시 재상들이 가서 위로하자, 공은 ‘나의 나이 예순 셋인데 처음 이곳에 살면서 하루아침에 몸이 아침이슬처럼 먼저 죽어 친척들에게 부끄러움이 될까 늘 걱정하였는데 (다행히)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덕’이라고 하면서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렸다. 여러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탄복하였다. (여묘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신주[版位]를 집 북쪽 모퉁이에 놓고서 제사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그치지 못하였다.
오랜 병으로 문밖에 나서지 못하였다. 공민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공에게 ‘공과 함께 얘기하고자 생각한지 오래되었으나, 과인을 만나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아들과 조카들의 부축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왕은 ‘나이와 얼굴은 그렇게 쇠하지 않았는데, 병이 있는 것이 어쩐 일인가’하면서 오랫동안 안타까워 하였다.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 孝子里)로 하고, 그 마을의 몇몇 호에게 조세를 면제해주고 제사지내는 것을 돕게 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11에 홍건적을 피하여 고창현(高昌縣 : 지금의 경북 안동지역)에 가서 계속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 봄 3월 작은 병에 걸렸는데, 기동하고 말하는 것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14일 째가 되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일흔넷이니 무엇을 한스럽게 생각하겠는가. 남자는 부인의 품에서 죽지 않는 것이 예에 맞으니 여러 비와 함께 물러가시오. 또 큰 소리와 빠른 말로 나를 소란스럽게 하지 마시오’라 하고 조금 있다 죽었다. 평소 (스스로를) 수양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들과 사위가 관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아무 달(某月) 갑자에 덕수현(德水縣)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다.
공은 문하평장(門下平章)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의 따님과 결혼하여 자식 둘을 두었다. 아들 흥조(興祖)는 쾌활하며 큰 뜻을 가졌다. 벼슬이 중현대부 군기감(中顯大夫 軍器監)에 올랐고, 수원과 해주 지방관을 역임하여 그 치적이 두드러졌다. 취성(鷲城 : 辛旽)의 손에 죽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를 안타까워하였다. 딸은 봉선대부 내부부령(奉善大夫 內府副令) 박문수(朴門壽)에게 시집갔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손자는 남녀 약간명이 있다. 군기감(흥조)은 감찰대부 신중전(申仲全)의 딸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낭장 송의번(宋義番)에게 시집갔다. 내부부령(박문수)은 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 총(叢)은 학문을 좋아하고 뜻을 키웠는데 전봉선대부 좌우위 보승호군(前奉善大夫 左右衛 保勝護軍)이다. 작은 아들 포(苞)는 진사로 전의녹사(典儀錄事)이다. 외증손(外曾孫)도 약간 있으나, 모두 어리다. 호군(護軍 : 외손자 총)이 공의 행장을 주며 한산 이색(韓山 李穡)에게 묘지명을 요청하면서, ‘그대가 마땅히 묘지명을 지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묘지명을 지었다.
아아, 선생의 덕행과 정사(政事)가 이같이 두드러지니 그 자손이 마땅히 많아야 하는데, 군기감(軍器監)에게 후사가 없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요 하늘의 좋아하고 미워함이 사람과 다른 때문이다. 아아 슬프도다. 다행히 박씨(사위)가 남았는데 선비가 공을 세워 그의 외할아버지를 드러낸 사람이 역사에 적지 않다. 박씨는 힘써야 할 것이다. 힘써야 할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동쪽에 언덕 있어 소나무 푸르니 군자의 집이다.
연못에 물 가득하여 연화 향기 맑으니 군자의 덕이로다.
나가서 임금 섬김에 정치와 문장으로 우리 왕국 바로잡았고
들어와 부모를 모시는데 나이 들수록 더욱 참되어 우리 민속(民俗)을 교화시켰다.
선생의 명성이 해동에 가득하여 영원토록 모범이 되리니. (해석자 : 박종기)

松堂先生金公墓誌銘幷序

至正辛巳予年十四赴成均試在庭中望見先生具袍笏端坐儼然如泰山喬嶽群士屛氣不敢譁旣爲門生往來聽敎則溫言柔色推明國典?誘人材??不已慨然有風俗日頹之歎居家不理生?左右琴書澹如也裁松東岡植蓮南池每歲庭中牧丹花開具酒食召門生上太夫人壽兄弟子姓怡〃愉〃孝悌之至通于神明太夫人享九十一歲之壽嗚呼盛矣歲丙申三月太夫人以病卒葬于皇考文正公之墓次居其傍終制先生素以病艱於行步然朝夕奠?掃必親無少輟國俗守父母墳多以奴代私爲復其身先生不忍褻其親躬行之盖近世宰相所未有也先生姓金氏諱光載字子輿號松堂居士光州人司空金吉之後也司空佐 大祖有功其裔孫諱匡瑞中郞將中郞將生諱偉三司使三司使生諱鏡亮大將軍大將軍生監察御史諱須元初三別抄者不樂內附叛入海島御史守靈光死之御史娶國子祭酒高公諱瑩中之孫某官諱夢卿之女年至百二歲初高氏夢見明星入懷中生快軒先生文正公諱台鉉以四世元老爲國蓍龜政丞致事?集國初以來文章目曰海東文鑑行于世掌試成均知貢擧所取士多聞人竹溪安謹齋崔拙翁尤其傑然者也先娶行首郞將金儀之女生一男曰光軾官至選部議郞繼室以 太祖子孝隱之後侍郞諱丁旦之女生三男二女長光轍及第官至密直使次先生次光輅及第女長適政堂文學安牧次適密陽君朴允文公之昆季三人旣登科大夫人受?祿終其身朴氏子四人安氏孫三人皆登科時人歆之公以至元甲午正月甲子生旣生而身長二尺餘父母異之絶愛之旣冠中皇慶癸丑科座主一齋先生權政丞愛其知禮厚待之補成均學官至順庚午從 忠惠王京師以勞授司僕寺丞遷都官正郞後至元己卯 忠惠王幾爲曹?所廢而幸勝之然其?多附勢必將甘心焉及 王如京師公曰吾君危矣吾忍獨免乎哉往從之賴 天子聖明復爵東還實庚辰秋七月也以軍簿?郞?銓選事累轉成均祭酒三司左尹判典校寺事皆兼館職知製敎明年秋掌試成均取今知密直司事成士達等九十九入時稱得士 忠惠王素憚公嚴左右又多忌之顧無所籍口?曰金公愛靜仕進非其志也 上稍信之乃?其職群小益張癸未冬岳陽之禍起矣甲申 忠穆王立起公爲右副代言遷至知申事用事大臣惡不附已白授版圖判書未幾 上悔之?拜密直副使提調銓選事陞知司己丑 忠定王立開書筵以公爲師公固?入僉議爲評理匡靖大夫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仍提調銓選事俄改三司右使入告于 王曰文選吏曹掌之虎選兵曹掌之?于政房自權臣始非令典也殿下如聽臣言仍舊便從之然必 公命公兼典理判書辛卯冬十月 玄陵嗣位公杜門不出奉養大夫人朝夕盡禮及其琴祥侍中洪陽坡先生與一時名卿往勞苦之公曰吾年六十三始居于玆常?一旦身先朝露以爲宗族羞獲至今日考?之德也言畢泣下諸公皆泣下嘆服旣還設版位於堂北隅每行事泣不止以舊病不出門 玄陵聞其風使使諭公曰思與公語久矣不識可使寡人得見乎公惶恐子姪扶以入 上曰年?非甚衰也而有斯疾何耶嘆惜者久之命有司旌表所居曰靈昌坊孝子里復其里若干戶以奉祀焉辛丑冬十一月避紅賊至高昌縣因留居之癸卯春三月感微恙起居語言無少變十四日旣晩謂夫人曰吾今年七十死復何恨男子不絶於婦人之手禮也可與衆婢退矣且戒無或高聲疾語以擾我也俄而絶平日所養可知巳子壻扶柩遷京某月甲子葬于德水先塋公娶門下平章謚良簡金公諱承澤之女生子二人男曰興祖倜?有志官至中顯大夫軍器監歷使水原海州政績頗著死於鷲城之手人至今憐之女適奉善大夫內府副令朴門壽新羅始祖奕居世之後也孫男女若干人軍器娶監察大夫申仲全之女生一女適郞將宋義番內府生二男長?好學尙志前奉善大夫左右衛保勝護軍季苞進士典儀錄事外曾孫若干人皆幼護軍以公行狀徵銘於韓山李穡曰子宜銘乃受而?之嗚呼先生之德行政事表〃如此?其子孫之多也而軍器監無後是天之未定也是天之好惡與人殊也嗚呼悲夫幸而朴氏存焉士之樹立以顯其外大父者史不絶書朴氏其勉?其勉?銘曰
惟東有岡有松蒼〃君子之宅池水之盈蓮香之淸君子之德出以事君有政有文正我王國入以事親愈老愈眞化我民俗先生之風被于海東永世攸則我作斯銘匪私先生史筆之直

〔출전:『牧隱文藁』권1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보학자료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