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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여행 20(諱 之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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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4 21:20 조회1,6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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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충렬왕 13년(1287) 12월
계미(癸未)에 허공(許珙)으로 첨의 중찬(僉議中贊)을...............임정기(林貞杞)·김지숙(金之淑)·김운(金?)·채모(蔡謨)로 모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癸未, 以許珙, 爲僉議中贊..... 林貞杞·金之淑·金?·蔡謨, 竝副知密直司事...

충렬왕 16년(1290) 1월
을축(乙丑)에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 홍자번(洪子藩)과 판밀직사(判密直司) 정가신(鄭可臣) 등이 군사를 병부(兵部)에서 훈련하고 안전(安캱)으로 경상도 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를 삼고 김지숙(金之淑)으로 전라도 도지휘사(全羅道都指揮使)를 삼았다.
乙丑, 僉議?成事洪子藩·判密直事鄭可臣等, 調兵于兵部, 以安캱, 爲慶尙道都指揮使, 金之淑, 爲全羅道都指揮使.

충렬왕 17년(1291) 10월
임신(壬申)에 도지휘사(都指揮使) 송분(宋분)을 경상도(慶尙道)에, 한희유(韓希愈)를 동북면(東北面)에, 김지숙(金之淑)을 서북면(西北面)에 각각 파견하였다
壬申, 分遣都指揮使宋분於慶尙道, 韓希愈於東北面, 金之淑於西北面.

충렬왕 19년(1293) 8월
원나라가 만호(萬戶) 홍파두아(洪波豆兒)를 보내와 조선(造船)하는 것과 보전고(寶錢庫)를 관령(管領)케 하고 부사(副使) 첨사정(瞻思丁)으로 군량(軍糧)을 관령(管領)케 하니 다시 일본을 정벌하려는 것이었다. 파두아(波豆兒)는 곧 홍군상(洪君祥)의 형(兄) 홍웅삼(洪熊三)의 아들인데 왕궁(王宮)을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비록 금의(錦衣)를 입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직분(職分)이 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이매 부끄러울 일이다.”
하고 재상(宰相)을 예우(禮遇)함이 심히 공손하며 왕궁(王宮)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馬]에서 내렸다. 도지휘사(都指揮使) 판밀직(判密直) 김지숙(金之淑)을 충청도(忠淸道)에 지밀직(知密直) 최유엄(崔有헪)을 전라도(全羅道)에 도첨의 참리(都僉議콷理) 김운(金?)을 경상도(慶尙道)에 각각 파견하여 배[船]와 좋은 쌀[糧米]을 갖추[備]게 하였다.
元, 遣萬戶洪波豆兒, 來管造船寶錢庫, 副使瞻思丁, 管軍粮, 將復征日本也, 波豆兒, 乃洪君祥兄熊三之子, 望三宮, 下馬流涕曰, 雖是衣錦還鄕, 職是勞民, 可愧也, 禮遇宰相, 甚恭, 過王宮, 必下馬. 分遣都指揮使判密直金之淑于忠淸, 知密直崔有헪于全羅, 都僉議콷理金?于慶尙道, 以備船粮.

충렬왕 20년(1294) 12월
신축(辛丑)에 원나라가 원정(元貞)이라 개원(改元)하였으므로 홀도해(忽都海) 등을 보내와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홍자번(洪子藩)으로 첨의 중찬(僉議中贊)을 삼고, 인후(印侯)로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를 삼고, 김지숙(金之淑)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삼고, 차신(車信)으로 밀직사(密直使)를 삼고, 안향(安珦)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장순룡(張舜龍)으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삼았다.
辛丑, 元, 以改元元貞, 遣忽都海等, 來頒詔. 以洪子藩, 爲僉議中?, 印侯, 爲僉議?成事, 金之淑, 判密直司事, 車信, 爲密直使, 安珦, 知密直司事, 張舜龍, 同知密直司事.

충렬왕 21년(1295) 1월
기사(己巳)에 정가신(鄭可臣)으로 첨의 시랑 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를 삼고, 인후(印侯)로 세자 이사(世子貳師)를 삼고, 김흔(金흔)으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김지숙(金之淑)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己巳, 以鄭可臣, 爲僉議侍郞?成事, 印侯, 爲世子貳師, 金흔 知都僉議司事, 金之淑, 判三司事

충렬왕 21년(1295) 7월
을해(乙亥)에 판삼사사(判三司事) 김지숙(金之淑)을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 축하하였다
己亥, 遣判三司事金之淑, 如元, 賀聖節

충렬왕 22년(1296) 2월
갑진(甲辰)에 김지숙(金之淑)으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삼고, 안향(安珦)으로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삼고, 김군(金?)과 이덕손(李德孫)으로 함께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삼았다. 동부밀직사사(同副密直司事) 이혼(李混)이 파직되었다.
甲辰, 以金之淑, 知都僉議司事, 安珦, 爲三司左使, 金?·李德孫, 쯂副知密直司事. 同知密直司事李混, 罷.

충렬왕 23년(1297) 12월
임인(壬寅)에 김지숙(金之淑)으로 첨의 참리(僉議콷理) 세자 이사(世子貳師)를 삼고, 안향(安珦)으로 첨의 참리(僉議參理) 세자리보(世子梨保)을....
壬寅, 以金之淑, 爲僉議參理世子貳師, 安珦, 爲僉議콷理世子貳保

충렬왕 26년(1300) 11월
.....한희유(韓希愈)로 도첨의 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 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를, 김지숙(金之淑)으로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를, 최유엄(崔有엄)으로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以韓希愈, 都僉議侍郞贊成事判軍簿司事, 金之淑, 都僉議贊成事判監察司事, 崔有엄, 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

충선왕 즉위년(1298) 5월
이날에 조인규(趙仁規)로 사도(司徒) 시중(侍中) 참지광정원사(參知光政院事)를......김지숙(金之淑)으로 동지광정원사(同知光政院事) 참지기무(參知機務)를.....
是日, 以趙仁規, 爲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金之淑, 同知光政院使參知機務,

충선왕 즉위년(1298) 7월
무술(戊戌)에 다시 관제(官制)를 고쳐 홍자번(洪子藩)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 중찬(僉議中贊) 판전조사(判銓曹事)를 삼고 .....김지숙(金之淑)으로 첨의 참리(僉議參理) 판공조사(判工曹事)를 삼고...
戊戌, 復改官制, 以洪子藩, 爲三重大匡僉議中贊判銓曹事......金之淑, 爲僉議參理判工曹事...

충선왕 2년(1310) 11월
을미(乙未)에 첨의 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한 김지숙(金之淑)이 죽었다.
○ 乙未, 僉議中贊致仕, 金之淑, 卒.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김지숙(金之淑)은 화평부(化平府 전남(全南) 광주(光州))의 사람으로 부(父)는 김련(金鍊)이니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용지(容止 행동(行動))를 익혀서 일에 임(臨)하면 과단함은 없으되 사람들이 장자(長者)라 일컬었고 관(官)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원종조(元宗朝)에 김지숙(金之淑)은 장군(將軍)이 되고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에 적중(敵中)에 빠져 탈출(脫出)할 꾀가 없으므로 스스로 바다에 투신(投身)하여 물결 따라 출몰(出沒)하니 적(敵)이 소정(小艇)으로 쫓아가서 이를 건져 진도(珍島)에 이르러 장차 베어 써 보이려 하니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이 구하여 풀어주고 일면(一面 방면(方面))을 지키게 하였다. 김지숙(金之淑)이 가만히 적(敵)의 정상(情狀)을 두 번이나 관군(官軍)에게 첩보(諜報)하였던 바 진도(珍島)가 패함에 미쳐 왕이 그 충의(忠義)를 가상히 여겨 관직으로써 상(賞)하였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여러번 옮겨 밀직사사(密直司事)가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원(元)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니 교지인(交趾人)이 먼저 들어와서 뜰에 공물(貢物)을 진열(陳列)하는지라 김지숙(金之淑)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비록 작으나 태조(太祖)가 의(義)를 떨친 처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신복(臣服)하였고 형제의 맹(盟)이 있고 생구(甥舅)의 친(親)이 있으니 원컨대 먼저 폐물(幣物)을 설(設)하고 축하(祝賀)를 펴게 하소서.”
하니 제(帝)가 이를 청종(聽從)하고 자리를 제후(諸侯)의 반열(班列)에 하사(下賜)하였다. 김지숙(金之淑)은 예모(禮貌)가 상한(詳閑 자세하고 조용함)하였으므로 보는 자가 아름답게 여겼다. 첨의 참리(僉議參理) 동지광정원사(同知光政院事) 참지기무(콷知機務)를 지내고 이어 평리(評理)로 고치고 찬성사(贊成事)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에 승진하였다. 때에 활리길사(闊里吉思)가 행성 평장(行省平章)이 되매 모든 노비가 그 부모의 한쪽이 양인(良人)인 자는 양인(良人)됨을 허락하고자 하거늘 재상(宰相)이 이를 중지시키는 자가 없는지라 김지숙(金之淑)이 말하기를,
“세종황제(世宗皇帝)가 일찍 첩첩올(帖帖兀)을 보내 와서 국사(國事)를 감독할 때 조석기(趙石奇)란 자가 있어 양인(良人) 되기를 호소하니 첩첩올(帖帖兀)이 상국(上國)의 법(法)을 쓰고자 하였으나 일을 아뢰매 세조(世祖)께서 조(詔)하여 본국의 구속(舊俗)에 따르도록 하였으니 이 예(例)가 그대로 있으니 가히 변경치 못할 것이라.”
하니 활리길사(闊里吉思)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중찬(中贊)을 더하여 치사(致仕)하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졸(卒)하니 나이 73이다. 성품이 청렴 결백하고 강정(剛正)하여 중외(中外)에 역임하매 다 성적(聲績)이 있었다. 아들은 김인근(金仁瑾)·김인연(金仁沇)이요 두 딸은 집이 가난하므로 출가(出嫁)하지 못하고 여승(女僧)이 되었다(출가부분은 오류 인듯)
金之淑, 化平府人, 父鍊, 美風儀習容止, 쬜事無斷而人稱爲長者, 官至콷知政事, 之淑, 元宗朝, 爲將軍, 三別抄之亂, 陷賊中, 無計得脫, 自投海隨波出沒, 賊以小艇, 追及取之, 至珍島, 將斬以徇, 承化侯溫, 救解之, 使當一面, 之淑, 密以賊狀, 再達于官軍, 及珍島敗, 王嘉其忠義, 賞以官, 忠烈朝, 累遷密直司事, 以判三司事, 如元賀聖節, 交趾人先入陳庭實, 之淑奏曰, 我國雖小, 自太祖奮義之初, 首先臣服, 兄弟有盟, 甥舅有親, 願先設幣陳賀, 帝從之, 賜坐諸侯王列, 之淑, 禮貌詳閑, 觀者美之, 歷僉議콷理同知光政院事콷知機務, 尋改評理, 陞?成事判監察司事, 時闊里吉思, 爲行省平章, 凡奴婢其父母一良者, 欲聽爲良, 宰相莫有止之者, 之淑謂曰, 世祖皇帝嘗遣帖帖兀來監國, 有趙石奇者訴良, 帖帖兀欲用上國法, 事聞, 世祖詔從本國舊俗, 此例具在, 不可變更, 闊里吉思, 不敢復言, 加中?致仕, 忠宣二年, 卒, 年七十三, 性廉潔剛正, 歷仕中外, 皆有聲績, 子仁瑾·仁沇, 二女以家貧, 未嫁爲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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