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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여행 23(諱 續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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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4 21:23 조회1,534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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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공민왕 4년(1355) 윤(閏) 1월
정미(丁未)에 홍유구(洪有龜) 신군평(申君平)으로 우·좌대언(右左代言)을 삼고 이서룡(李瑞龍) 김속명(金續命)으로 우·좌부대언(右左副代言)을 삼고 김원명(金元命)으로 감찰 집의(監察執義)를 삼고 이몽경(李夢庚)으로 감찰 장령(監察掌令)을 삼고 이색(李穡)으로 내서사인(內書舍人)을 삼고 이연경(李延慶)으로 흥안군(興安君)을 삼고 강중상(姜仲祥)으로 진원군(晉原君)을 삼았다.
丁未, 以洪有龜·申君平, 爲右左代言, 李瑞龍·金續命, 爲右左副代言, 金元命, 爲監察執義, 李夢庚, 爲監察掌令, 李穡, 爲內書舍人, 李延慶, 爲興安君, 姜仲祥, 爲晉原君.

공민왕 11년(1362) 6월
감찰대부(監察大夫) 김속명(金續命)이 사직(辭職)하거늘 윤허(允許)치 아니하였다.
監察大夫金績命, 辭, 不允.

공민왕 12년(1363) 윤(閏) 3월
.....신축(辛丑)에 호종(扈從)한 공(功)을 녹적(錄籍)할새....
찰대부(監察大夫) 김속명(金續命) 전 판도판서(前版圖判書) 김원명(金元命)...... 2등 공신을 삼았다.
...又錄辛丑扈從功,...監察大夫金續命·前版圖判書金元命爲一等功臣...

공민왕 13년(1364) 1월
경진(庚辰)에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김속명(金續命)으로 서북면 체복사(西北面體覆使)를 삼았다
庚辰, 以贊成事宋卿, 知密直司事, 金續命, 爲西北面體覆使

공민왕 13년(1364) 3월
기묘(己卯)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김속명(金續命)으로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를 삼았다
己卯, 以知密直司事金續命, 爲慶尙道都巡問使.

공민왕 13년(1364) 5월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김속명(金續命)이 왜(倭) 3,000명을 진해현(鎭海縣)에서 쳐 이를 크게 부수고 첩보(捷報)를 드리거늘 왕이 의(衣) 주(酒) 금대(金帶)를 하사하고 전사(戰士)에게 차등 있게 벼슬을 주었다.
慶尙道都巡問使金續命, 擊倭三千於鎭海縣, 大破之, 獻捷, 王, 賜衣酒金帶, 爵戰士有差.

공민왕 14년(1365) 3월
기사(己巳)에 원나라가 이부 시랑(吏部侍郞) 왕타례독(王朶例禿) 이부주차(吏部奏差) 호천석(胡天錫)을 보내와 왕을 책(冊)하여 태위(太尉)를 삼고 인하여 주(酒)를 하사하였으며......... 왜(倭)가 창릉(昌陵)에 들어와 세조(世祖)의 진영(鎭影)을 취(取)하여 돌아가거늘 김속명(金續命)으로 동서강 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를 삼았다
己巳, 元, 遣吏部侍郞王朶例禿·吏部奏差胡天錫, 來冊王, 爲太尉, 仍賜酒........ 倭, 入昌陵, 取世祖眞以歸, 以金續命, 爲東西江都指揮使.
경신(庚辰)에 유탁(柳濯)으로 도첨의 시중(都僉議侍中)을 삼고 ...... 이인임(李仁任) 김속명(金續命)으로 삼사·우·좌사(三司右左使)를 삼고....
庚辰, 以柳濯, 爲都僉議侍中....... 李仁任·金續命, 爲三司右左使

공민왕 14년(1365) 9월
경오(庚午)에 권적(權適)으로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를 삼고 목인길(睦仁吉) 김속명(金續命)으로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삼고 지용수(池龍壽)로 지도첨의(知都僉議)를 삼고 김원명(金元命)으로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삼고 ....
庚午, 以權適, 爲僉議?成事, 睦仁吉·金續命, 爲僉議評理, 池龍壽, 知都僉議, 金元命, 爲三司左使

공민왕 16년(1367) 12월
갑진에 김속명(金續命)으로 평양도 도순문사(平壤道都巡問使)를 삼았다.
甲辰, 以金續命, 爲平壤道都巡問使.

공민왕 23년(1374) 4월
정미(丁未)에 김자수(金子粹) 등에게 급제(及第)를 수여하였다. 최영(崔瑩)을 논난(論難)함으로써 대사헌(大司憲) 김속명(金續命)을 파직하고....
丁未, 賜金子粹等及第. 以論崔瑩, 罷大司憲金續命

우왕 3년(1377) 6월
경술(庚戌)에 비를 비는데 신우(辛禑)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5월 29일은 태조(太祖)의 기일(忌日)이다. 가뭄과 물난리를 없이하는 것이 태조(太祖)의 소원이므로 이날을 당하여 비오고 개이거나 하는 것이 그 기간(期間)을 잃지 아니하기를 400여 년인데 이제 이에 비가 오지 않으니 나의 어리고 덕(德)이 없음으로 천심(天心)을 편히하지 못하였음인가 또는 억울한 일이 있어서 이러한가”
하고 드디어 제물(祭物)을 물리고 재상(宰相)에게 말하기를,
“가뭄이 매우 심하니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반드시 이것은 원망과 원한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여러 번 죄인을 풀어주었는데 경(卿)들이 이를 따라 즐겨 행하지 아니하니 어찌 옳지 않은 일이 없겠는가”
하고 이에 2죄(二罪 교형(絞刑)과 참형(斬刑)) 이하를 풀어주었으나 오직 김속명(金續命)은 용서하지 아니하였다.
庚戌, 禱雨, 禑, 歎曰, 五月二十九日, 祖聖忌日也, 水旱無災, 祖聖之願, 故當此日, 雨暘不失其期者, 四百餘年, 今乃不雨, 以予幼퀖否德, 未厭天心乎, 抑有寃枉耶, 遂徹膳謂宰相曰, 旱災太甚, 豈無故哉, 必是寃怨所召, 肆予欲悅人心, 屢下恩宥, 卿等, 因循不肯行, 得無不可, 於是, 宥二罪以下. 唯金續命, 不原

공양왕 1년(1389) 12월
계해(癸亥)에 왕이 효사관(孝思館)에 나아가 우(禑)·창(昌)을 벤 것으로써 태조(太祖)에게 고(告)하였는데 축문(祝文)에 이르기를........처음 우(禑)가 이미 섰을 때 재상(宰相) 김속명(金續命)이 그 진(眞 공민왕(恭愍王)의 진자(眞子))이 아님을 말하니 이인임(李仁任)이 이를 추방하였고 신돈(辛旽)의 첩(妾) 반야(般若)가 스스로 말하기를, ‘우(禑)는 곧 나의 소생이라’ 하니 이인임(李仁任)이 이를 죽였나이다....
癸亥, 王, 詣孝思觀, 以誅禑·昌, 告于太祖, 祝文曰..........宰相續命, 言其非眞, 仁任放之, 旽妾般若自言, 禑, 乃吾所生, 仁任殺之,....
이인임(李仁任)이 이미 우(禑)를 세우고 우(禑)의 모(母) 반야(般若)를 죽여 그 입을 막을새 사평문(司平門)이 허물어졌고 고골(枯骨)을 묻으며 이가 공민왕(恭愍王)의 궁인(宮人)으로 실은 우(禑)의 모(母)가 된다고 말하니 구악(柩幄)이 불탔으며 이를 바꿨으나 또 불탔나이다. 재상(宰相) 김속명(金續命)을 내쫓고 김유(金庾)와 최원(崔源)을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기(氣)를 잃어 말이 신씨(辛氏)에 걸치면 깜짝 놀라 실색(失色)하며 족형(族刑)으로써 서로 경계하였나이다....
...仁任旣立禑, 殺禑母般若, 以滅其口, 司平門頹, 葬枯骨曰, 此恭愍王宮人, 實爲禑母也, 而柩幄災, 易之又災, 逐宰相續命, 殺金庾·崔源, 人皆喪氣, 言涉辛氏, 愕然失色, 以族相相戒....

공양왕 2년(1390) 4월
갑오(甲午) 삭(朔)에 중관(中官)을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집에 보내 문병하고 사직을 취소케 하였으며....우(禑)가 즉위한 지 2년에 그 모(母)의 명씨(名氏)가 정해지지 못하매 재상(宰相)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천하에 그 아비를 분변치 못하는 자는 혹 있어도 그어미를 분면치 못한 자를 나는 듣지 못하였노라.’고 하다가 거의 피륙(被戮)되려 하더니 현릉(玄陵)의 모후(母后)가 힘써 구하여 죽음을 면하였고....
甲午朔, 遣中官于我太祖第, 問疾, 强起之,...禑立二年, 而其母名氏未定, 宰相金續命曰, 天下未辨其父者, 或有之矣, 未辨其母者, 我未聞也, 而幾見戮, 以玄陵母后力救, 得不死....

[고려사(高麗史) 지(志) 봉증(封贈)의 제도]

무릇 봉증(封贈)의 제도(制度)는 성종(成宗) 7년 10월에 교(敎)하여 문무상참관(文武常콷官) 이상의 부모와 처에게 봉작(封爵)하였다....
공민왕(恭愍王) 11년 11월에 김속명(金續命)이 상언(上言)하기를,
“지금 바느질하는 낭자(娘子)와 내료(內僚)의 여자도 또한 옹주(翁主)나 택주(宅主)로 봉한 예가 있으니 참람(僭濫)됨이 분수를 넘어 존비의 체통을 상실함이 심하오니 부득이한 종실(宗室)과 훈구(勳舊)를 제외(制外)하고는 봉작(封爵)을 허락하지 마시고 이미 봉한 자도 청컨대 이를 거두소서.”
라고 하였다.
凡封贈之制, 成宗七年十月, 敎, 文武常콷官以上, 父母妻, 封爵.
恭愍王十一年十月, 金續命上言, 今針線娘子·內僚之女, 亦有封翁主·宅主者, ?擬踰分, 殊失尊卑之體, 除不得已宗室勳舊外, 勿許封爵, 已封者, 請奪之.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김속명(金續命)]

김속명(金續命)은 중찬(中贊) 김지숙(金之淑)의 손(孫)이니 성품이 청직(淸直)하여 거리낌없이 말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감찰 집의(監察執義)에 제배(除拜)되었는데 대부(大夫) 원의(元?)와 지평(持平) 홍원로(洪元老)와 더불어 협심(協心)하여 규탄(糾彈)하고 법(法)을 집행(執行)하매 아부(阿附)하지 아니하였으며 무릇 관(官)에 임명되는 자로 허물이 있으면 곧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아니하니 이에 내인(內人)과 환수(宦竪)들이 그를 미워하므로 드디어 모두 파면(罷免)되었다가 여러번 옮겨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다. 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남행(南幸)하매 김속명(金續命)이 호종(扈從)하였으므로 공(功)을 책(策)하여 2등(等)을 삼고 토전(土田)과 장획(臧獲 노비(奴婢))을 하사(下賜)하였고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전임(轉任)하여 사임(辭任)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왕이 재이(?異)로 인하여 구언(求言)하매 김속명(金續命)이 헌납(獻納) 황근(黃瑾) 등과 더불어 상언(上言)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원수(元首)가 현명하고 고굉(股肱 재상(宰相))이 어질면 서사(庶事)가 편안하지만, 원수(元首)가 번잡(煩雜)하여 통일이 없고 고굉(股肱)이 게으르면 만사(萬事)가 타락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기품(氣?)이 침중(?重)하시고 춘추(春秋)가 방성(方盛)하시어 즉위한 지 날이 오래 되시매 국사(國事)를 두루 아시고 만전(萬全)의 지혜(智慧)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많이 믿지 아니하시고 환관(宦官) 승도(僧徒) 잡류(雜類)의 말만 때로 신청(信聽)하시며 비록 대신(大臣)이라도 일사(一事)를 의론하고 일언(一言)을 말하려면 반드시 상지(上旨)를 물어 승순(承順)하여 시행(施行)케 하므로 아첨하는 것이 풍속(風俗)을 이루고 직언(直言)하는 길이 두절(杜絶)하였으니 이것이 덕정(德政)의 가장 큰 실책(失策)입니다. 지(地 기본(基本))는 신도(臣道)인데 이제 상벌(賞罰)이 밝지 못하므로 대소(大小)의 신하가 게으르고 해이하여 관직을 비우고 있습니다. 또 군공(軍功)으로 인(因)하여 백정(白丁)이 갑자기 경상(卿相)에 진배(進拜)되고 노예(奴隸)가 외람히 조반(朝班)에 처(處)하여 신도(臣道)가 혼란하여 이로써 지진(地震)을 초치(招致)케 되었으니 청컨대 이제부터 신상필벌(信賞必罰)하고 명기(名器)를 중석(重惜)하소서. 옛날에는 군사(軍士)를 뽑으면 토전(土田)을 주는 고(故)로 군사(軍士)가 모두 먹을 것이 족(足)하여 정역(征役)하는 것을 꺼리지 아니하였는데 근자(近者)에는 부호(富豪)와 권세가의 겸병(兼幷)함이 천백결(千百結)에 이르러 일찍이 1무(畝)도 군부(軍夫)에게 미침이 없으므로 그 징발(徵發)되어 적진에 나아갈 무렵에는 거의 모두가 해체(解體 분리(分離))하거든 하물며 적개(敵愾)를 바라리요. 청컨대 선군(選軍)과 급전(給田)하는 법(法)을 복구(復舊)하소서. 전후좌우가 모두 바른 사람이면 군주(君主)가 뉘와 더불어 부정(不正)을 하리요. 형여(刑餘 환관(宦官))와 음류(陰類 여자)를 전하(殿下)께서 날와 더불어 서로 압근(狎近)하여 비리(鄙俚)하고 무계(無稽)한 말 듣기를 기뻐하여 밤이 늦도록 잠자지 아니하고 해가 높이 솟아야 이에 일어나고 대신(大臣)을 멀리하매 훌륭한 계책과 올바른 의논이 저절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겨울에 뇌성(雷聲)하고 지진(地震)하는 것은 허물이 실(實)로 이에 있는 것이니 이제부터 삼전(三殿)의 환자(宦者)는 각각 10인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태거(汰去)하시고 정인(正人)과 단사(端士)만을 항상 시측(侍側)케 하소서. 치국(治國)하는 도(道)는 경사(經史)에 쓰여있고 불서(佛書)로써 치국(治國)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불법(佛法)을 과신(過信)하므로 무리의 승려들이 이로 말미암아 간알(干謁)하여 사정(私情)을 이루니 원컨대 이제로부터 치류(緇流 승도(僧徒))가 금달(禁?)에 출입(出入)하는 것을 단절(斷絶)하시고 다시 경연(經筵)을 열어 날로 치도(治道)를 묻고 항상 성현(聖賢)의 서(書)를 관람하여 이단(異端)의 설(說)을 섞지 마소서. 여알(女謁)은 위정(爲政)하는 데 큰 해독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침선낭자(針線娘子)와 내료(內寮)의 여(女)도 또한 옹주(翁主)와 택주(宅主)로 봉(封)한 자가 있어 참람히 분(分)에 넘게 의주(擬注)하여 자못 존비(尊卑)의 체면(體面)을 잃었으니 이제부터 종실(宗室)과 훈구(勳舊)를 제외하고는 봉작(封爵)하는 것을 허락(許諾)하지 말며 이미 봉(封)한 자는 청컨대 탈환(奪還)하소서. 전리(田里)의 휴척(休戚 희우(喜憂))은 수령(守令)에게 있는 것인데 이제 비록 대성 정조(臺省政曹)에서 보거(保擧)하라는 영(令)이 있으나 모두 그 면정(面情)에 따라 그 천거(薦擧)한 바가 문자(文字)를 모르는 자까지 있으니 원컨대 이제부터 헌(軒)에 임(臨)하여 인견(引見)하시어 그 명(名)과 실(實)을 조사하여 천거(薦擧)한 것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거든 반드시 거주(擧主)를 벌(罰)하소서. 전(傳)에 이르기를, ‘사(赦)할 것이 없는 나라도 그 정사(政事)가 반드시 공평(公平)하다. 강아지풀[?츛]을 기르는 자는 가곡(嘉穀)을 해(害)하고 간귀(姦?)에게 은혜(恩惠)를 베푸는 자는 양민(良民)을 도적질 하며 수한(水旱)을 감소(感召)하는 것은 자주 사(赦)하는데 있다’하였으니 원컨대 이제부터 죄지은 자를 용서함으로써 간악(姦惡)을 키우지 말게 하소서.”
하니 왕이 대간(臺諫)을 불러 힐문(詰問)하매 대간(臺諫)이 면쟁(面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므로 왕의 노(怒)가 심하거늘 지도첨의(知都僉議) 유숙(柳淑)이 진언(進言)하기를,
“이미 직언(直言)을 구하시면서 언자(言者)에게 노(怒)하시는 것이 가하오리까.”
하니 왕의 노(怒)가 이 때문에 조금 풀리었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천배(遷拜)되고 나가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었는데 왜적(倭賊) 3천여인이 진해현(鎭海縣)에 침구(侵寇)하거늘 김속명(金續命)이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급히 치매 적(賊)이 창황(倉皇)하여 미쳐 승선(乘船)하지 못하고 이에 현(縣)의 북산(北山)에 올라 나무를 쪼개어 녹각책(鹿角柵)을 쌓아 지키거늘 김속명(金續命)이 다시 진격(進擊)하여 대패(大敗)시키고 드디어 소획(所獲)한 병장(兵仗)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중사(中使)를 보내어 의주(衣酒)와 금대(金臺)를 하사(下賜)하고 전사(戰士)에게는 차등 있게 작(爵)을 주었다. 얼마 후에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제배(除拜)하고 단성 규의 보리 공신호(端誠揆義輔理功臣號)를 하사(下賜)하였으며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전직(轉職)하였다가 뒤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최영(崔瑩)을 논(論)함으로써 파면(罷免)되었다.

신우(辛禑) 때에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개천(改遷)되었는데 그 때 전라도(全羅道) 군사를 모집하여 동강(東江)을 둔수(屯守)하고자 하매 찬성(贊成) 목인길(睦仁吉)이 그 군사(軍士)로써 기전(畿甸)의 제도(諸島)에 가서 왜(倭)를 잡고자 하니 우(禑)가 이를 허락(許諾)하거늘 김속명(金續命)이 불가하다 하고 말하기를,
“이제 문정(門庭)에 도적(盜賊)이 없고 하늘이 차서 얼어붙는데 불러모은 병사는 멀리서 와서 피폐(疲弊)하고 전함(戰艦)은 완전치 못하며 또한 대신(大臣)은 경솔(輕率)히 나가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김속명(金續命)이 태후(太后)의 외척(外戚)으로 궁중(宮中)의 일을 전총(專摠)하매 강직(剛直)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외기(畏忌)하였으며 집정(執政)하매 죽이고자하는 자까지 있었는데 나가 양광 경상도 안찰사(楊廣慶尙道按察使)가 된 것은 대개 그를 배척(排斥)함이다. 태후(太后)가 머물러 두고자하여 유실(柳實)을 불러 물으니 유실(柳實)이 말하기를,
“이제 북쪽에 변경(邊警)이 있으매 대신(大臣)은 지방으로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태후(太后)가 드디어 중사(中使)를 보내어 중지시켰다. 그 때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임견미(林堅味) 등이 전권(專權)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매 탐독(貪?)하기를 싫어함이 없었는데 오직 김속명(金續命)을 꺼려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김속명(金續命)이 일찍이 병들어 집에 있는데 경복흥(慶復興)·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이 문병(問病)하거늘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고제(古制)에는 양부(兩府)에 5성(省)과 7추(樞) 뿐인데 이제 하루 동안에 제수(除授)한 재추(宰樞)가 50인에 이르니 물의(物議)를 어찌하리오.”
하매 경복흥(慶復興)이 말하기를,
“부득이한 것이다.”
하거늘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이제 재추(宰樞)로서 녹(祿)을 도적하고 시위(尸位)하고 마음이 부정(不正)한 자는 나와 같음이 없다.”
하매 이인임(李仁任)이 말하기를,
“공(公)이 바르지 않다 하면 누가 바르겠는가.”
하매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내가 도당(都堂)에 반식(伴食)하면서 무릇 서사(署事)할 적에 마음은 그르게 여기면서 입으로는 옳다하였으니 마음 부정(不正)함이 누가 나와 같으리오.”
라고 하니 지(池)와 이(李)가 깊이 원한을 품었다. 지윤(池奫)이 그 처로 하여금 우(禑)의 유온(乳?)과 교결(交結)하여 궁금(宮禁)에 출입(出入)하면서 권세(權勢)를 부르고 회물(賄物)을 받아 김속명(金續命)이 이를 기롱(譏弄)하니 지윤(池奫)이 듣고 더욱 미워하였다. 마침 반야(般若)의 사건(事件)이 일어나매 양부(兩府)와 대간(臺諫) 기로(耆老)들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변론(辯論)하는데 밀직(密直) 권중화(權仲和)가 서연 진강(書筵進講)으로서 홀로 이르지 아니하거늘 김속명(金續命)이 당리(堂吏)에게 이르기를,
“왕모(王母)가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속(速)히 변정(辨定)하여 이로써 국인(國人)의 의심(疑心)을 풀 것이어늘 서연(書筵)이 무슨 소용(所用)인가.”
하고 조금 있다가 탄식(歎息)하기를,
“천하(天下)에 그 부(父)를 분변(分辨)하지 못한 자는 혹 있지만 그 모(母)를 분변(分辨)하지 못한 자는 내가 아직 듣지 못하였다.”
라고 하니 이에 이인임(李仁任) 등이 사의(司議) 허시(許時)와 김도(金濤) 등을 사주(使嗾)하여 그를 탄핵(彈劾)하기를,
“인신(人臣)이 되어 경(敬)에 그침은 천하(天下) 고금(古今)의 상전(常典)인데 신(臣)으로서 불경(不敬)한 것은 죄(罪)가 이보다 더 큼이 없다. 근자(近者)에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의론(議論)하는 데 김속명(金續命)이 가히 말하지 못할 말을 발언(發言)하였으니 불경(不敬)함이 이에 더 심하리오. 청컨대 국치(鞠治)하소서.”
하여 소(疏)를 거듭 올렸으나 태후(太后)가 힘써 구(救)하여 이에 문의현(文義縣)에 유배(流配)하고 드디어 유실(柳實)을 파면(罷免)하고 박임종(朴林宗)으로 대체(代替)하니 유실(柳實)은 김속명(金續命)의 소천(所薦)이오 박임종(朴林宗)은 이인임(李仁任)의 인친(姻親)이었다. 김속명(金續命)이 이미 유찬(流竄)되매 태후(太后)가 좌우수(左右手)를 잃은 것과 같으니 이때 사람이 애석(哀惜)히 여겼다. 12년에 졸(卒)하니 충간(忠簡)이라 시(諡)하였다.

공양왕(恭讓王) 초에 좌상시(左常侍) 윤소종(尹紹宗) 등이 말하기를,
“신우(辛禑)가 이미 서매 신돈(辛旽)의 비첩(婢妾) 반야(般若)가 스스로 임금의 어머니라 말하였으나 이인임(李仁任) 등이 속여 우(禑)는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이 소행(所幸)한 까닭으로 궁인(宮人)의 소출(所出)이라 하였으나 그 성명(姓名)을 밝히지 못하니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천하(天下)에 그 부(父)를 분변(分辨)치 못한 자는 혹 있지만 어찌 그 모(母)를 분변(分辨)치 못하는 자가 있느냐’하니 이인임(李仁任)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명덕 태후(明德太后)의 구원(救援)을 힘입어 겨우 유찬(流竄)을 당하였고 몸은 비록 죽었으나 충의(忠義)는 사람을 감동(感動)케 하였으니 빌건대 포시(褒諡)를 추가(追加)하시고 그 묘(墓)에 조제(弔祭)하고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여 이로서 충혼(忠魂)을 위로(慰勞)하소서.”
하니 이를 청종(聽從)하였다
金續命, 中贊之淑之孫, 性淸直敢言, 恭愍初, 拜監察執義, 與大夫元휆·持平洪元老, ?心彈糾, 執法不阿, 凡拜官者, 有疵累, 輒不署告身, 於是, 內人宦竪惡之, 遂皆見罷, 累遷左副代言, 王避紅賊南幸, 續命扈從, 策功爲二等, 賜土田臧獲, 轉監察大夫, 辭, 不允, 王以?異, 求言, 續命與獻納黃瑾等上言, 書云, 元首明哉, 股肱良哉, 庶事康哉, 元首叢?哉, 股肱惰哉, 萬事墮哉, 殿下, 氣??重, 春秋鼎盛, 卽位日久, 備촎國事, 智出萬全, 多不信人, 宦官僧徒雜類之言, 有時信聽, 雖大臣議一事出一言, 必候上旨, 承順施行, 以故諂諛成風, 直言路絶, 此德政之最失者也, 地者, 臣道也, 今賞罰不明故, 大小之臣, 怠弛曠官, 又因軍功, 白丁驟拜卿相, 짿隸濫處朝班, 臣道淆亂, 以致地震, 請自今信賞必罰, 重惜名器, 古者選軍, 給之土田, 故兵皆足食, 不憚征役, 近豪勢兼幷, 至千百結, 曾無一畝, 及於軍夫, 及其徵發赴敵之際, 率皆解體, ?望敵愾乎, 請復選軍給田之法, 左右前後, 皆正人也, 君誰與爲不正, 刑餘陰類, 殿下日與相狎, 樂聞鄙俚無稽之言, 夜分不寢, 日中乃興, 疎遠大臣, 嘉謀?議, 無自而入, 冬雷地震, 咎實在玆, 自今三殿宦者, 各留十人, 餘悉汰去, 正人端士, 常令侍側, 治國之道, 布在經史, 未聞以佛書致治者也, 殿下過信佛法, 群쥁緣此, 干謁濟私願, 自今斷絶緇流出入禁쩋, 復開經筵, 日訪治道, 常觀聖賢之書, 勿雜異端之說, 女謁爲政之大害, 今針線娘子·內寮之女, 亦有封翁主·宅主者, 僭擬踰分, 殊失尊卑之體, 自今除宗室勳舊外, 勿許封爵, 已封者, 請奪之, 田里戚休, 在於守令, 今雖有臺省政曹保擧之令, 皆徇面情, 其所薦擧, 至有不識字者, 願自今, 臨軒引見, 核其名實, 擧非其人, 必罰擧主, 傳曰, 無赦之國, 其政必平, 養?츛者, 害嘉穀, 惠姦?者, 賊良民, 感召水旱, 在於數赦, 願自今, 毋赦有罪, 以長姦惡, 王召臺諫詰之, 臺諫面爭益切, 王怒甚, 知都僉議柳淑進曰, 旣求直言, 而怒言者可乎, 王怒爲之小解,
遷知密直司事, 出爲慶尙道都巡問使, 倭賊三千餘人, 入寇鎭海縣, 續命帥兵急擊之, 賊倉皇不暇乘船, 乃登縣之北山, 斫木爲鹿角柵, 守之, 續命復進擊, 大敗之, 遂獻所獲兵仗, 王喜, 遺中使賜衣酒·金帶, 爵戰士有差, 未幾, 拜三司左使, 賜端誠揆義輔理功臣號, 轉僉議評理, 後爲大司憲, 以論崔瑩, 罷, 辛禑時, 改三司右使, 時募全羅道兵, 屯守東江, ?成睦仁吉, 欲以其兵, 行畿甸諸島捕倭, 禑許之, 續命不可曰, 今無門庭之寇, 天寒?合, 募卒遠來疲弊, 戰艦未完, 且大臣不可輕出, 不聽, 續命以太后外戚, 專摠宮中之事, 剛直不撓, 人皆畏忌, 執政至有欲殺者, 出爲楊廣·慶尙道都安撫使, 盖斥之也, 太后欲留之, 召柳實問之, 實曰, 今北有邊警, 大臣不可出外, 太后遂遺中使, 止之, 時李仁任·池奫·林堅味等, 專權用事, 貪?無厭, 唯憚續命, 不敢肆, 續命嘗移病在第, 慶復興·仁任·奫問疾, 續命曰, 古制, 兩府省五樞七而已, 今一日所除宰樞至五十人, 如物議何, 復興曰, 不得已爾, 續命曰, 今宰樞, 竊祿尸位, 而心不正者, 無我若也, 仁任曰, 公不正, 誰爲正乎, 續命曰, 予伴食都堂, 凡署事心非口是, 心不正, 誰如我乎, 池·李深銜之, 奫使其妻, 交結禑乳춟, 出入宮禁, 招權納賄, 續命譏之, 奫聞而益惡, 會般若事起, 兩府·臺諫·耆老, 集興國寺辨之, 密直權仲和, 以書筵進講, 獨不至,
續命謂堂吏曰, 王母未定, 宜速辨以解國人之疑, 何用書筵爲, 旣而嘆曰, 天下未辨其父者, 容或有之, 未辨其母者, 我未聞也, 於是, 仁任等, 嗾司議許時·金濤等, 劾之曰, 爲人臣, 止於敬, 天下古今之常典也, 臣而不敬, 罪莫大焉, 近集議興國寺, 續命發口不可道之言, 不敬孰甚, 請鞫治, ?再上, 太后力救, 乃流文義縣, 遂罷柳實, 以朴林宗代之, 實續命所薦, 林宗, 仁任姻親也, 續命旣竄, 太后如失左右手, 時人惜之, 十二年, 卒, 諡忠簡, 恭讓初, 左常侍尹紹宗等言, 辛禑旣立, 辛旽婢妾般若, 自言君母, 仁任等, 詐以禑爲玄陵所幸故宮人所出, 求其名氏, 未定, 金續命以爲, 天下未辨其父者, 容或有之, 豈有未辨其母者乎, 仁任欲殺之, 賴明德太后之救, 僅得流竄, 身雖已沒, 忠義感人, 乞追加褒諡, 弔祭其墓, 錄其子孫, 以慰忠魂, 從之.

댓글목록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작성일

운영자 (2006-06-26 21:33:36) 
 
멀리 목포에서 정암님께서 귀중한 장문의 자료를 올려주셨네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수고 하셨습니다.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성봉 (2006-06-26 22:20:38) 
 
정암일가 고생이 많았습니다.

사료를 찾아 한편의 자료를 올리는데도 무척 힘이 드는데

무려 23편의 자료를 올리고 거기에 묘지문까지 함께 실었으니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가족모두 평안하시고 하시는 사업 날로 번창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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