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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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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情岩 작성일06-12-18 23:07 조회1,5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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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중공 및 대종회 홈페이지가 시조공 신위 문제로 논쟁중인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신무왕편을 보면 짧은 재위기간 때문에 기록이 빈약하여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는 것이며,
김부식이 노나라에 빗댄 사론을 보면 신무왕자라고 면주를 달 수 없었던 선조님들을 이해할 수
있을것 같고,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당시의 역사를 혁명으로 재평가 하는 사론도 있는바
차분하게 너무나 짧았던 비운의 왕의 기록을 옮겨봅니다.

[원문]
神武王立 諱祐徵 元聖大王孫均貞上大等之子 僖康王之從弟也 禮徵等旣淸宮禁 備禮迎之卽位 追尊祖伊禮英 一云孝眞 爲惠康大王 考爲成德大王 母朴氏眞矯夫人爲憲穆太1)后 立子慶膺爲太子 封淸海鎭大使弓福爲感義軍使 食實封二千戶 利弘懼 棄2)妻子遁山林 王遣騎士 追捕殺之 秋七月 遣使如唐 遺淄靑節度使奴婢 帝聞之 矜遠人 詔令歸國 王寢疾 夢利弘射中背 旣寤瘡發背 至是月二十三日 薨 諡曰3)神武 葬于弟兄山西北

論曰 歐陽子之論曰 『魯桓公 弑隱公而自立者 宣公 弑子赤而自立者 鄭公 逐世子忽而自立者 衛公孫剽 逐其君而自立者 聖人於春秋 皆不絶其爲君 各傳其實 而使後世信之 則四君之罪 不可得而掩耳 則人之爲惡 庶乎其息矣』 羅之彦昇 弑哀莊而卽位 金明 弑僖康而卽位 祐徵 弑閔哀而卽位 今皆書其實 亦春秋之志也
(三國史記 卷 第十)

주) ▶ 1) 原本 「大」.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 2) 原本 「」. 「棄」의 古字.
▶ 3) 原本 「白」.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三國史節要 「吾」. 舜 「吾」.

[번역문]

신무왕(神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우징(祐徵)으로, 원성대왕의 손자 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이고 희강왕의 사촌 아우이다. 예징(禮徵) 등이 궁중을 깨끗이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할아버지 이찬 예영(禮英) <또는 효진(孝眞)이라고도 하였다.>을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죽은 아버지를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존하였으며, 어머니 박씨 진교부인(眞矯夫人)을 헌목태후(憲穆太后)로 삼고, 아들 경응(慶膺)을 태자로 삼았다. 청해진 대사 궁복을 감의군사(感義軍使)로 봉하고 식읍 2천 호를 봉해 주었다. 이홍(利弘)은 두려워 처·자식을 버리고 산 속으로 도망하였는데, 왕이 기병을 보내 뒤쫓아가 잡아 죽였다.


가을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에게 노비를 주었더니, 황제가 그것을 듣고 먼 곳 사람이라 불쌍히 여겨 조칙으로 그들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게 하였다. 왕이 병으로 몸져 누웠는데, 꿈에 이홍이 활을 쏘아 왕의 등을 맞추었다. 잠을 깨어나 보니 등에 종기가 났다. 이 달 23일에 이르러 왕이 죽었다. 시호를 신무(神武)라 하고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지냈다.


사론(史論): 구양자(歐陽子)가 논하였다.

『노(魯)나라 환공(桓公)은 은공(隱公)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고 선공(宣公)은 자적(子赤)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된 사람이며, 정(鄭)나라 여공(公)은 세자(世子) 홀(忽)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고 위(衛)나라 공손표(公孫剽)는 그의 임금 간()을 내쫓고 스스로 임금이 된 사람이다. 성인(聖人)이 춘추(春秋)에서 그들이 임금이 된 것을 하나도 잘라 내버리지 않은 것은 각각 그 사실을 전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위의] 네 임금의 죄는 사람들의 귀를 가릴 수 없는 것이 되어, 사람들이 [그런] 악한 짓을 그치기를 바랬던 것이다.』

신라의 언승(彦昇)은 애장왕을 죽이고 임금 자리에 올랐고, 김명(金明)은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우징(祐徵)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지금 그 사실을 모두 기록하는 것 또한 춘추(春秋)의 뜻이다.(삼국사기 권 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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