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숙공에 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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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6-12-18 23:08 조회1,68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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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은 1228년에 태어나 1290년에 졸하신 분으로
젊은 시절 부성위(富城尉)로 있을 때 몽고대군(蒙古大軍)의 침략을 기민(機敏)하게 막아
칭송(稱頌)을 받았으며 고려 元宗5년에 文科에 壯元及第, 누증(累增)하여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와 상장군(上將軍)을 지냈으니 文武를 겸비(兼備)한 분이라 할 것입니다.
첨의부(僉議府)는 1275년(忠烈王1)에
고려의 三省 制度가 元나라 제도와 같음을 피하라는 元의 요구에 의해서
중서, 문하, 상서성(中署, 門下, 尙書省)을 合하여 첨의부라 했는데
문숙공의 관작(官爵)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는 정 2품계(正二品階)로 平章事와 같았으므로
公의 玄孫인 護軍公(諱 南浩)의 墓表를 호군공의 曾孫인 忠貞公(諱 克成)이 撰하면서
문숙공의 관작을 平章事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문숙공의 묘지명(墓誌銘)에는 知僉議府事로, 충숙공의 墓誌銘에는 知都僉議府事로 되어있는바
이 中 문숙공묘지명에 있는 知僉議府事가 맞습니다.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는 1293년(忠烈王19)에 개칭(改稱)한 이름이며
문숙공은 이보다 3年 前인 1290년에 卒 하였기 때문입니다.
문숙공에 관하여 알려져 있지 않은 두 개의 글을 紹介 합니다.
1.문숙공을 무등산의 祠廟에서 祭祀함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光山縣 祠廟 條에 無等山 神祠는 고려때 나라에서 祭祀를 지냈는데
東征元帥 金周鼎을 城隍神으로 모셔 祭祀지낸 곳으로 本朝(朝鮮)에서는 本邑에 命令하여 春秋로 祭祀를 지내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城隍神의 由來는 <周禮>의 臘祭八神에서 由來한 것으로 성황신(城隍神)의 최초의 기능은 城의 安全을 지켜주는 것이었으나 後에 사람들은 그 地域의 가뭄과 홍수, 흉년과 풍년을 管掌할뿐 아니라 吉凶禍福을 主管하며 나아가 저승의 일도 모두 그가 관장할 수 있다고 여겨 城隍神은 玉皇上帝로부터 人間世界에 내려가 全權을 委任 받은者로 여겼던 것입니다.
道敎에서는 凶惡한 것을 물리치고 國家의 安全을 保佑하는 神이며 한 地方의 亡靈들을 管轄한다고 하였으며 元代에 이르러 성황신을 나라의 守護神으로 여겨 나라에서 祭祀하였으니
高麗에서는 文宗(1047-1082)때 부터 城邑의 守護神으로 여겨 首領이 직접 行祭하는 國行官制로하여 이미 이승 사람이된 英雄과 淸廉한 官吏를 그 지방의 城隍神으로 받들어 그들의 靈魂이 生前처럼 百姓들을 保護해 주고 正義를 俱現하여 善良한 百姓을 便하게 해 주기를 祈願하는 祭를 올렸던 것입니다.
城隍祠 制度는 高麗時代에 크게 盛行하여 醮祭(道敎祭祀)도 함께 盛行, 護國延基를 바라는 齊醮行事가 크게 行하여 졌으며 朝鮮朝에 들어와 趙光祖(1482-1519)等의 上疏로 道敎行事를 管掌하던 昭格署가 革罷된후 차츰 시들해져 壬辰亂以後에는 醮祭를 올리는 儀式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위 史料에 依하면 文肅公께서는 死後 200餘年 동안 無等山의 祠廟에서 國祭와 邑(牧)祭로
祭享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2. 동문선에 있는 郭預의 글
文肅公과 同時代人으로 高宗42년(1255)에 文科에 壯元 及第한 郭預(1232-1286)는
元宗4년(1263)에 王命을 받고 日本에 건너가 倭寇들의 高麗 侵犯의 즉각 中止와
잡혀간 高麗사람들의 送還을 要求하고 충분한 賠償을 받아 내었던 사람인데
그가 文肅公에 關하여 지은 글이 東文選 11卷에 있으니 그 글 內容에 依하면 文肅公께서는
日本을 征伐하였으며 鎌倉幕府에서 보배로운 貢物을 바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東文選에 있는 郭預의 글입니다.
上鎭邊 金相公 周鼎
-(東)邊(日本)을 鎭壓한 金周鼎 相公에게 올리다- / 郭預
國政을 맡아서 左相이 되고
軍士를 거느리고 東邊을 鎭壓하네
幕下에 들어온 이 文士가 많고
營을 잇달아 擁衛한 武將 勇士들
다락에서 울리는 북소리 새벽 氣運 雄壯하고
城에서 부는 피리 哀切한 밤중
黃石公*을 찾아서 計策을 묻네
붉은 장막* 내리고 詩書를 討論
鎌倉幕府에서 보배로운 貢物 바치게 하고
玉塞에는 깃발을 거두어 치웠네
儀仗이 조용하니 수리와 매가 부르짖고
밭이랑엔 駿馬가 뜨음하게 매어있네
軍情이 든든하여 믿을만하고
地面은 깨끗하여 흠 할 곳 없네
吳나라 평정하는 배 고치지 마소
峴山에 올랐던 記念碑*를 물에 넣으소
가을 뒤엔 거울도 높이 걸어야하고
달 가운데 桂樹 가지 나누기가 臨迫했네
將相으로 宗伯*을 兼하온 몸이
餘暇 없도록 하늘이 시키시네.
註:
*黃石公- 秦代의 兵法家. 黃石公이 素書六편의 책을 劉邦의 功臣인 張良에게 주었다고
하며 黃石公의 三略을 曹操가 所有 하였다 고함. 中國 奇門의 重興祖임.
*붉은 장막-後漢의 名儒 馬融이 늘 높은 마루에 앉아 붉은 縫紗帳을 내리고 生徒들을
敎授했다는 데서 引用했는데 여기서는 글을 가르치는 帳幕뒤에 軍士가 늘어섰다는 뜻.
*峴山의記念碑-晉나라 杜預가 後世에 이름을 남기기를 좋아하여 碑石들을 만들어서 功績을 새겨
하나는 峴山위에 세우고 하나는 萬山 아래 못(池)물 속에 넣으면서 <後에 山이 못이 되고 못이
山이 될는지 모르므로 碑石을 이렇게 둘을 準備 하였다> 한데서 引用.
*宗伯-禮部侍郞을 말함인데 여기서는 考試官을 뜻함(文肅公은知貢擧였음).
參考文獻: 新增東國與地勝覽, 東文選, 淸州郭氏高麗時代文獻錄,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朝鮮民俗考/성봉.
* 위 글은 대종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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