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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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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晟峰 작성일06-12-18 23:14 조회9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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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어느 나라나 처음에는 왕실의 계보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선원세계, 왕대실록, 성원록이라 하여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각 씨족의 족보가 발달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에 대하여는 명백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중국의 漢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여러가지 문헌에 의하면 後漢 이후 중앙 또는 지방에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冠族이 성립됨에 따라 門閥과 家風을 중요시하는 사상이 높아져 이때부터 보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문벌의 전성기인 魏, 晉, 남북조 시대부터 九品中正法의 例에서 알 수 있듯이 각 지방의 名門豪族들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첩이 있었으며 지방 관청에는 각 명문집안의 분포와 榮枯盛衰를 기록해 두는 公案이 비치되어
있었다. 이 시대에 諸家의 족보를 蒐集審査한 뒤에 이것을 甲乙의 門閥로 구분하여 世族이 아닐 경우에는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隨, 唐 때에 와서는 대대적으로 정부에서 姓氏錄이나 씨족지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영향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 미쳤을 것임은 자명하며 우리나라를 통해서
중국의 제도와 문화가 일본에 전달되었던 경로를 감안할 때 일본에 전달된 족보제도가 唐初의 성씨록 편찬보다 1세기 늦은 서기 700년초에 "新撰姓氏錄"이라 하여 일본에서 편찬된 점과 1152년의 金之祐 묘지문과 1158년의 朴景山 묘지문, 1376년의 李齋賢 묘지문등, 고려시대의 여러 묘지문에서 신라시대 때의 조상부터 지문작성 당시까지를 기록하면서 "備在家牒", "在家譜", "家有譜", "世譜", "00氏譜"라고 한 기록을 참고 할 때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 앞서 족보제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宋代에 들어와서는 이제까지 官에서 定한 公的性格으로 띈 족보가 私的인 성격으로 변해 이때부터 족보의 기능이 官吏選拔에 推薦자료가 되었으니 따라서 同族의 收族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송대 이후의 족보는 곧 이와 같은 기능을 중심으로 민간에 널리 발달 하게 되었다

고려사회는 문벌귀족사회로써 사료에 의하면 가문이 한미한 층은 족보가 없었으며 공신자손과 명문귀족 가문의 경우는 족보가 유행하였고 신분에 따라 사회활동 및 출세의 제한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공신자손의 경우 그 자손이 그 공신으로부터 몇 대나 지난 자손이건 또 그 자손이 친손이건 외손이건 관계없이 蔭職에서 優待를 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믄에 자손들이 世系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더욱이 고려시대의 명문세족은 문벌이 낮은 가문과는 혼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족보를 반드시 필요로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은 물론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 형식을 도입한 것으로 볼수가 있지만 그러나 또한 족보의 편성 간행을 촉진시킨 그 당시 사회의 특수한 배경과 성격을 도외시 할 수는 없을것으로 여겨진다. 여러가지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문벌귀족에 있어서는 이른바 족보의 체제를 구비한 世系行列의 방식을 취한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系圖에 의하면 同行列에 있는 여러 인물이 같은 字根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당시 이미 系譜에 관한 관념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문종때에는 성씨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부책을 관에 비치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신분관계를 밝혔으며 그 당시는 족보의 유행이 한창이던 송과의 교류도 빈번하였던 시대여서 족보의 유행은 필연적인 현상이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그것이 그 당시는 출판사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에 의하여 족보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초부터 족보의 편성 간행의 필요가 더욱 절실하여 급속히 진전되었다. 왕실 자신이 벌족정치에 국가 형태를 취했을뿐만 아니라 유교를 국시로 삼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성족파별로 가승을 명백히 할 필요가 생겨 족보가 없는 집안은 행세할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성행하였는데 17세기 중엽까지의 족보들은 자녀를 남녀 구분없이 출생순으로 수록하거나 외손들까지도 세대나 범위의 제한없이 수록하였었다. 그 체제도 "家乘" "內外譜" "8高祖圖" "16高祖圖"라는 네종류로 되었었는데 위 보첩의 기록은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그 조상들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특히 8고조도와 16고조도는 아버지쪽과 어머니쪽을 구분하지 않고 남녀조상들을 모두 기록하였으니 이는 母系는 무시한 채 父系 中心으로만 되어있는 17세기 중엽이후 족보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따라서 조선전기에는 17세기 후반 이후처럼 부계친족 중심의 同族(姓)部落은 발달하지 않았다.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족보중 최고본으로 알려진 1476년에 간행한 안동권씨의 성화보에 수록된 약8000명중 안동권씨 남자는 38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여자쪽의 자손이며 또 1565년에 간행한 문화유씨의 가정보에 수록된 3800명중에 문화유씨는 1400명에 불과한 것은 오늘날의 족보와 다른 內外孫을 모두 수록한 子孫譜였기 때문이다.

족보는 각자의 家系를 족보로 취합하여 합동으로 기록보존하면서 족보체제로 되었는데 17세기 중엽 이후에 男系위주의 족보체제로 변질되게 되엇다.


임진왜란 때 많은 문헌들과 함꼐 각 성씨의 족보도 소실된 후 肅宗조 때 다시 많은 족보가 쏟아져 나왔다. 그 체계도 부계친족 중심으로 '詳內略外'와 '先男後女'의 원칙을 지켜 女系는사위와 그 一代에 한하고 부계를 중심으로 처의 4祖, 本貫, 忌日, 墓所가 구체적으로 기재되었다. 그 당시의 소위 양반들은 특권층으로 대게 지주들이였는데 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가지 조직을 강화해야 했으니 書院. 鄕約. 鄕廳 .두레. 契. 族譜등이 그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족보가 없으면 常民으로 전락되어 軍役을 지는등 사회적인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중종 때 확립된 군적수포제는 군역수행을 布나 돈으로 대신하게 한 제도였는데 양반은 징수대상에서 면제함으로써 군역면제를 원하는 양반들이 족보를 경쟁적으로 편찬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이른바 "役所志"라고 하는 탄원서를 관에 제출하여 軍案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그 때 탄원정당성의 입증자료로 반드시 족보를 제시하였다. 그래서 良民이 兩班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고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여 뇌물을 써가면서 족보에 끼려고 하는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일제치하에 있어서는 이민족 지배 때문에 학문이나 일반 사회문제의 연구보다는 관심이 동족결합에 쏠리게 되어 족보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매년 발행되는 각종 출판물중 족보 발행이 1위를 차지 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경제를 배우고 문예를 즐기고 사상을 연마하는것보다 일문 일가의 기록을 존중하는 것을 훨씬더 중대하게 여겼음을 알수 있다 즉 조선 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의취락 후편에 의하면 그 당시 우리나라 발행의 단행본 출판 허가 건수는 1933년에 861건 1934년에 1090건이였는데 족보의 발행건수는 1932년에 137건 1933년에 151건에 달하여 한국인 간행의 출판물중 족보의 발행은 항상 수위를 점하고 있으며 다시 10개년간 (1823-1932)의 족보 발행 횟수를 각 본관 성씨별로 살펴보면 일족이 가장 번영한 김해 김씨는 112회 연평균 12.5회, 밀양박씨가 88회, 경주 김씨가 69회, 전주이씨가 68회, 경주이씨가 55회, 평산신씨가 42회, 광산김씨가 38회, 안동권씨가 34회, 수원백씨가 27회의 순위로 되어 있다.

족보는 인쇄에 의한 간행 이외에 필사 또는 등사본등의 유포가 적지 않았을 것을 고려할 고려할 때 당시 족보의 발행이 얼마나 성행했던가를 짐작 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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