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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장군과 우정(憂亭)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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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7-01-05 01:38 조회1,7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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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는 어른들이 나와 첫 대면을 하게 되면 곧잘 이렇게 묻고는 했다.

"너, 몇 살이냐?'

"열 살입니다."

"성이 무엇이냐?"

"김가입니다."

"어디 김씨냐?"

"광산 김가입니다." 물음의 뜻이 얼마나 똘똘한가 시험하는 것이라면 여기까지는 쉬웠다.
"누구 자손이냐?" 말문이 막힌다. 물어보나 마나 우리 할아버지 자손이지만 그런 답을 기대하고 묻는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 자손인가는 훨씬 커서도 몰랐고 '나는 어느 파인가?' 누가 물을까봐 은근히 겁이 났다. 아버지께 여쭤봐도 내가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는 명쾌한 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족보를 봐도 77년 판은 후령호군공파보(後領護軍公派譜)라고 하더니 92년에 새로 나온 것은 판도판서공파세보(版圖判書公派世譜)라고 다른 이름을 썼다. 세월이 흐르며 자꾸 분파(分派)하게 마련이고 기준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 가계의 직계를 쭉 훑어 올라가 보면 주목하고 기억해둬야 할 인물이 두 분이 계시다. 공교롭게도 한 분이 무신으로서 빛나는 전공을 세우셨다면, 또 한 분은 문과에 급제하고 또한 많은 시문(詩文)을 써서 그것이 문집으로 남아있는 정통 문신이다. 먼저 분이 고려 말에 활약한 17세(世) 김성우(金成雨) 장군이고 또 다른 한 분은 조선 중기 '연산군일기'나 '중종실록' '연려실기술' 등에 이름을 남긴 김장군의 고손(高孫)되는 21세(世) 우정 김극성(金克成) 할아버지이다. 17세니 21세니 하는 것은 광김<光山金氏>의 시조 되는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 아들 흥광(興光)할아버지부터 세어 나온 것이고 흥광 할아버지는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는 알지(閼智)부터는 23세손이다.

우선 호칭부터 정리해야겠다. 성(成)자우(雨)자 할아버지는 나에게 20대, 극(克)자성(成)자 할아버지가 16대 위이시니 까마득하게 높은 자리에 계시다. 그런 분들의 함자를 함부로 올리는 것은 물론 예의도 아닐뿐더러 죄송스럽고, 그렇다고 자꾸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는 것이나 이름 앞에 휘(諱)자를 계속해서 붙이는 것 또한 거추장스러운 일이다. 성우 할아버지는 워낙 무관 출신으로서 빼어난 활약을 하신 분이니까 김장군 또는 그냥 장군이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고향에서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으니 말이다. 극성 할아버지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과 충정공(忠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광성부원군은 호칭으로서는 복잡하고 충정공은 문정공이니 문숙공 등과 같이 민영환을 비롯하여 흔한 것 같아 고유성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우정집이라는 이름의 문집도 있고 해서 호를 따라 우정(憂亭)이라 하고 싶다.

행적을 살펴보면 김장군은 1327년, 그러니까 고려 27대 충숙왕 14년에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약관 18세에 절충장군에 제수되었다 한다. 절충장군이 무슨 직책인가 백과사전을 들춰봤더니 '조선시대 관계(官階)의 하나로 정3품 당상관의 서반(西班) 즉 무관에게 수여하던 칭호'라고 되어있는데 고려 때의 제도를 조선시대에 그대로 답습했다고 보고 이 해설 내용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 없을 듯하다. 장군은 23세 때 도만호(都萬戶) 겸 전라충청양호초토사(全羅忠淸兩湖招討使)에 발탁되어 무관으로서 탄탄대로에 들어선다. 이때 왜구들이 주로 식량을 약탈해가려고 해안 주변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였고, 1370년부터 20 년간은 남해안 뿐 아니라 서해안까지 진출하여 출몰이 극에 달하였다.
왜구의 잦은 침입은 어떻게 보면 김장군이 역사에 화려한 기록을 남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라우도 도만호로 있던 김장군에게 서해안 지역을 괴롭히는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이 떨어진다. 그리고 장군은 전주 나주 부령 등 전라도 지역 뿐 아니라 지금의 대천 보령 지역에서 큰 전과를 올린다. 65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보령 일대에서의 전쟁과 삶이 장군의 일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투는 크게 군입리(軍入里), 월전리(月戰里), 의평리(蟻坪里) 전투 등 3개 지역의 기록이 전사(戰史)에 남아있다.

장군 휘하의 고려군은 대천해수욕장으로부터 17킬로 북동방향 청라 쪽 성주산 일대에 본영을 설치하고 해상 감시가 용이한 해망산에 전방초소를 운용하였다. 적의 선박 침입을 염두에 두고 좌우로 보병과 기병을 매복했다가 적의 선박이 군입포 주변을 통하여 접안하려 할 때 화살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다음 지휘통제가 흐트러진 상태로 상륙하는 왜군을 향해 후방에 있던 기병이 질풍노도처럼 내달아 근접전투로 한껏 무찔렀다. 일부 살아서 내륙으로 접근하는 자들은 흑포 일대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비대에 의해 섬멸되었다. 바다 쪽의 망을 본다고 해서 해망산(海望山)이요, 왜군들이 들어오는 포구라 해서 군입포(軍入浦)요, 왜군들이 죽으며 검붉은 피가 흘렀다 해서 흑포(黑浦)라는 지명을 갖게되었다고 한다.

군입리로 진입하려다가 낭패를 본 왜구들은 이번에는 7킬로 남쪽 월전리를 택해 야간에 침입하려는 것이 탐지되었다. 적들이 상륙은 했지만 오랜 항해로 인하여 몹시 피로해있다는 점을 간파한 장군은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를 기다렸다가 달이 떠오르는 시간에, 왜구들이 타고 온 선박들을 모두 부셔 패주하더라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하고 기습공격을 개시하여 완전히 섬멸하였다. 달밤에 전투를 한 곳이라 후세 사람들이 월전리(月戰里)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군입리, 월전리에서 참패한 왜구들은 이번에는 규모를 한층 키워 대선단(大船團)으로 공격해왔다. 장군은 소수병력으로 대응하는 척 하면서, 지금은 청천저수지로 변한 복병이 부근과 갬발 등 주변 산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적들이 분지 안으로 접근하자 뒷길을 막고 주력부대가 일제히 공격하니 이때 죽어 널브러진 왜구들의 시체 더미가 마치 개미떼 같았다. 그래서 후에 이들 전첩지를 복병(伏兵)이 와 갬발<蟻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복병이에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대로 내려오며 부근에서 드물게 큰 고래등 같은 장군의 후손 기와집종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천의 대규모 간척지 논이 개간되며 여기 공급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청천을 막는 저수지 건설계획이 발표되었다. 마침 그 때 지역의 국회의원이 바로, 나중에 재무장관도 한 종친(宗親)이었는데 그 계획을 막지 않아 종가가 수몰되게 하였다고 집안 어른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차기 국회의원에 찍어주지 말도록 낙선운동을 벌렸던 것이다. 그 영향이 크게 작용하여 그 친척은 그때 의원 뺏지를 달지 못하게 되었다. 아마 낙선운동사를 연구한다면 한 테마가 될만한 일이었다.
장군이 이끄는 군대와 왜구와의 전투로 인하여 생긴 지명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장군과 관련된 전설 또한 많이 떠돌고 있다.

장군이 65세 되던 1392년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고려의 국통(國統)이 무너졌다. 장군은 '하늘은 어찌하여 같은 임금을 섬기던 충신끼리 거역과 순종의 갈등을 주셨는가. 진충보국(盡忠報國)하려 했건만 나라가 없어지니 나는 어디로 가란 말이냐?' 탄식하며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월치산 상봉에 올라 큰 바위를 번쩍 들어 송도를 향해 집어 던졌다. 멀리 날아가 발산 아래 떨어졌는데 이 바위를 월암(月岩), 그 산을 장군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장군은 나라와 자신의 운명이 하나임을 알고 일전(一戰)을 결심했으나 실기하여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비통한 마음에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며 자결하려할 때 고락을 같이한 백옥마(白玉馬) 가 옆에 있었다. 고삐를 놓으며 "네 갈 길을 가거라."해도 떠나지 않아 "너도 나를 따르겠단 말이냐?" 물으니 머리를 숙여 수긍의 표시를 했다 한다. 결연히 용비도(龍飛刀)를 빼어 옥마를 베고 스스로 자처(自處)하며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한다. 따져보니 내 몸에는 1,048,576 분지 1의 장군 피가 흐른다. 다시 말하여 내 몸에 흐르는 피를 1,048,576 등분을 했을 때 그 한 쪽이 장군의 피인 셈이다.

우정 할아버지는 장군의 4대 후손, 그러니까 장군은 우정의 고조 할아버지다. 장구한 역사에 비하면 4대는 아주 가까운 것으로 느껴지지만 장군보다 147년 뒤인 1474년에 태어나셨고 1540년까지 장군과 비슷하게 66세까지 사셨지만 활약한 시대는 벌써 이조 9대 성종에서 11대 중종 연간으로 조선 중기이다. 22세 때인 연산군 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 2년 뒤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다시 장원급제하였다. 여러 직책을 거쳤으나 그 것이 지금으로 보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속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연산군에게 간하다가 화를 입을 뻔하였다는 것과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서 광성부원군에 봉하여졌고 57세 때인 중종 26년에는 권세가 하늘로 뻗쳤던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한때 전라도 흥덕(興德)이라는 곳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6년 뒤 김안로가 문정왕후 폐위를 모의하다가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임과 대사헌 양연에게 체포되어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자 우정은 복권되어 좌참찬으로 기용되고 우의정까지 오른다. 좌참찬만도 의정부의 정이품 벼슬로 꽤 높은 지위이다.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매사에 신중하고 자제심이 강하였고 예조판서를 세 번이나 지낼 정도로 문학에 뛰어났다. 그것은 6권의 우정집이라는 문집이 증명한다. 그러나 당시 사림(士林)과의 관계는 원만치 못하였다는 기록이니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고지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나는 우정이 권세와 알력과 모함이 난무하는 조정에서 우의정까지 올랐다는 것보다는 문학에 뛰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저희 조상 중에는 글을 남기신 분이 안 계신가요?"

오래 전에 아버지께 여쭤봤다.

"왜 없어? 우정집이라고 극자성자 할아버지가 쓰신 책이 있지."

"그것 좀 구할 수 없을 까요?"

그 때는 아무 답도 없으시더니 얼마 후에 구해놨다는 말씀이었다. 영인본도 아니고 두꺼운 남색 표지에 복사지를 사용해 양면을 카피한 복사본이었다. '憂亭集 全卷'이라는 제호는 아무 것도 없는 표지판 위에다 누군가가 흰 종이에 붓글씨로 직접 써서 오려붙인 것으로 여섯 권을 합본했고 맨 앞에 경연관(經筵官) 은진 송래희(恩津 宋來熙)의 서문이 있다. 다음에 1권부터 6권까지의 목록이 페이지 표시 없이 한꺼번에 열거되어있다. 본문 여섯 권의 내용이 끝나면 맨 뒤에 해양 정구석(海陽 鄭龜錫)의 발문이 있다. 서문을 쓴 송래희는 추적 결과 1791년부터 1867년까지 정조 고종 연간에 살았던 조선의 문신으로 1838년에 경연관이 되었다는 기록을 알아냈으나 발문을 쓴 정구석은 어떤 사람인지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서문이나 발문을 쓴 해가 공히 경신(庚申)으로 되어있어 이 문집이 책으로 묶이게 된 연도가 1860년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내용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등 유,무제의 시문을 비롯하여 각종 글이 실려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무오(戊午) 십이월 국상(國喪)전이라 토가 달린 것을 비롯하여 인수대왕대비전 춘첩(仁粹大王大妃殿 春帖)이 네 차례나 있는 것이다. 5, 6권은 부록이라고 해서 5권에는 교서(敎書) 행장(行狀) 가장(家狀) 비명(碑銘) 등이, 6권에는 각종 제문(祭文)과 만장(輓章)의 글만 모아놓은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고 고약한 기분에 싸이는 것은 이 책을 만지작거리기만 하지 나로서는 읽어서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전 문장이 물론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한문을 깊이 배우거나 연구하지 않아 실력이 못 미치는 것이 그 첫째요, 다음은 오언(五言) 칠언(七言) 등이 붙어있는 것은 예외겠지만 어디서 띄어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큰 난관이며, 판각(板刻)의 편의를 위해서인지 웬만한 옥편에는 나오지 않는 알아보기 힘든 약자를 많이 써서 사전을 찾으면서 해석해볼 엄두를 내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기본적인 한자 실력은 있는 편이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생각하고 배우든지 혹시 번역본이 있나 찾아보든지 앞으로의 숙제다. 왜 일찍이 한문공부를 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크다.

김장군과 우정. 두 분이 이름을 남기고 가신지 5, 6백년이 지났지만 우리 가문에 두 분에 버금갈만한 인물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 동란 등 수난의 역사 속에서 집안 사정도 어려움이 많았으나 꿋꿋하게 극복하고 이제는 꽤 기반이 잡혀있는 셈이니 후손들의 인성교육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머지 않은 장래에 가문을 빛낼 인물이 태어나고 또 만들어질 것을 기대한다.

*떠돌며 보며 생각한다 / blog.chosun.com/k1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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