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東與地圖와 大東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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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宗正 작성일06-12-18 23:20 조회1,92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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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의 고찰
일반적인 사료에 의하면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는 김정호(?-1864)가 만들었다고 한다.김정호는 가난한 평민이고 가문도 미천했는데 지리에 뜻을 두고 전국을 누벼 1834년에 청구도(靑丘圖) 2첩을 완성했고 그것에 미비한 점이 있어서 1861년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했으며 여지승람의 설명을 위해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집성했고 또 지구도(地球圖)도 그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업적이 오히려 나라의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가 되어 흥선대원군에 의해 투옥되고 결국에는 옥사했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연구"라는 책을 보면 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토를 세 차례 백두산은 무려 여덟 차레나 답사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조선역대의 인물 중에 남다른 업적을 남긴 김정호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교과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 제4과에 "김정호"라는 글이 실리게 되면서 부터였다.
앞서 말한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하면 김정호는 황해도에서 자라다 서울로 이사해
만리동 고개에서 딸과 함께 말년까지도 가난하게 살면서 이 지도와 대동지지를 만들었고 결국 국가기밀누설죄로 옥사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지도와 대동지지는 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는것이 아니다.
"국립지리원"과 "한국지도원"에서는 지도를 만들기 위한 필수요건으로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을 들고있으며 그 다음으로 토지소유 개념도 따라야 한다
고 한다. 즉 측량학은 축지법, 제도, 축척술이 병행되어야 하고 수학에는 기하학이 따라 주어야하며 천체학에는 물리학이 보조되어야만 되고 광학에는 빛의 굴절현상을 물리적으로 응용하는 응용학이 뒤따라 주어야 한다. 이 네가지 기법외에도 각기 도법에 따라 투영법과 지표의 기복상태를 나타내는 여러 등고선식 등의 방법이 있으나
어떤 기법이 사용되든지 간에 모든 수리에는 그에 상응되는 기계분야 즉 과학이 수반되지 않으면 지도는 만들어 질 수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조선총독부의 기록이 조선병탄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책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니 김정호 당시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포루투갈,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이 동양에 진출했던 서세동점의 시기로서 이들만이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첨단기술을 가진 나라들 이었는데 그중 영국은 아시아 대륙에 뛰어든 선점국으로 대동여지도는 영국인의 손에 의하였으리라 보고있다.
1930년에 일본교과서인 "조선어독본"에 김정호를 소개했는데 이 때는 조선민족이 일본에 항거하던 때 였으므로 조성왕국은 무능하니 일본의 보호국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선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이니 제26대 고종(1863-1907)실록과 제27대 순종(1907-1910)실록이 있으나 "태조부터 제25대 철종(1849-1863) 까지를 순수한 "조선왕조실록"으로 인정하고 있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에 넣지 않는 이유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고종이 승하하고 난 8년후며 순종이 승하한 다음 해인 1927년 4월부터 1935년 3월까지 일본인들의 주도하에 이루어 졌는데 1927년 "이왕직"의 설치와 함께 임시고용원 10명과 집필생 26명이 1930년 4월에 초대 편찬위원장 시노다 를 시작으로 1932년 7월부터 경성제국대학의 오다 교수가 실질적 총 책임자가 되어 각위원회에서 편찬된 원고를 감색, 감증했으며 또 실록원고는 일본인 이왕직 장관의 결제를 얻어야 간행이 되었던 것으로 조선왕조는 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들 일본인의사관에 의하여 기록하다 보니 조선왕국에서 만들었던 대동여지도, 청구도, 지구도, 대동지지 등을 평민이며 미천한 가문출신으로 만리동 언덕길에서 딸의 도움을 받아 말년까지 가난하게 살던 김정호 개인이 지리에 눈을 떠 한반도 전국을 세번, 백두산을 여덟번 답사 하여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전국을 몇번 답사했다고 하여 지도가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므로 조선총독부에서 주장한 것은 거짓이라고 하는 학계의 주장이 맞다고 본다. / 종정.
일반적인 사료에 의하면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는 김정호(?-1864)가 만들었다고 한다.김정호는 가난한 평민이고 가문도 미천했는데 지리에 뜻을 두고 전국을 누벼 1834년에 청구도(靑丘圖) 2첩을 완성했고 그것에 미비한 점이 있어서 1861년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했으며 여지승람의 설명을 위해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집성했고 또 지구도(地球圖)도 그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업적이 오히려 나라의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가 되어 흥선대원군에 의해 투옥되고 결국에는 옥사했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연구"라는 책을 보면 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토를 세 차례 백두산은 무려 여덟 차레나 답사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조선역대의 인물 중에 남다른 업적을 남긴 김정호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교과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 제4과에 "김정호"라는 글이 실리게 되면서 부터였다.
앞서 말한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하면 김정호는 황해도에서 자라다 서울로 이사해
만리동 고개에서 딸과 함께 말년까지도 가난하게 살면서 이 지도와 대동지지를 만들었고 결국 국가기밀누설죄로 옥사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지도와 대동지지는 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는것이 아니다.
"국립지리원"과 "한국지도원"에서는 지도를 만들기 위한 필수요건으로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을 들고있으며 그 다음으로 토지소유 개념도 따라야 한다
고 한다. 즉 측량학은 축지법, 제도, 축척술이 병행되어야 하고 수학에는 기하학이 따라 주어야하며 천체학에는 물리학이 보조되어야만 되고 광학에는 빛의 굴절현상을 물리적으로 응용하는 응용학이 뒤따라 주어야 한다. 이 네가지 기법외에도 각기 도법에 따라 투영법과 지표의 기복상태를 나타내는 여러 등고선식 등의 방법이 있으나
어떤 기법이 사용되든지 간에 모든 수리에는 그에 상응되는 기계분야 즉 과학이 수반되지 않으면 지도는 만들어 질 수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조선총독부의 기록이 조선병탄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책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니 김정호 당시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포루투갈,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이 동양에 진출했던 서세동점의 시기로서 이들만이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첨단기술을 가진 나라들 이었는데 그중 영국은 아시아 대륙에 뛰어든 선점국으로 대동여지도는 영국인의 손에 의하였으리라 보고있다.
1930년에 일본교과서인 "조선어독본"에 김정호를 소개했는데 이 때는 조선민족이 일본에 항거하던 때 였으므로 조성왕국은 무능하니 일본의 보호국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선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이니 제26대 고종(1863-1907)실록과 제27대 순종(1907-1910)실록이 있으나 "태조부터 제25대 철종(1849-1863) 까지를 순수한 "조선왕조실록"으로 인정하고 있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에 넣지 않는 이유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고종이 승하하고 난 8년후며 순종이 승하한 다음 해인 1927년 4월부터 1935년 3월까지 일본인들의 주도하에 이루어 졌는데 1927년 "이왕직"의 설치와 함께 임시고용원 10명과 집필생 26명이 1930년 4월에 초대 편찬위원장 시노다 를 시작으로 1932년 7월부터 경성제국대학의 오다 교수가 실질적 총 책임자가 되어 각위원회에서 편찬된 원고를 감색, 감증했으며 또 실록원고는 일본인 이왕직 장관의 결제를 얻어야 간행이 되었던 것으로 조선왕조는 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들 일본인의사관에 의하여 기록하다 보니 조선왕국에서 만들었던 대동여지도, 청구도, 지구도, 대동지지 등을 평민이며 미천한 가문출신으로 만리동 언덕길에서 딸의 도움을 받아 말년까지 가난하게 살던 김정호 개인이 지리에 눈을 떠 한반도 전국을 세번, 백두산을 여덟번 답사 하여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전국을 몇번 답사했다고 하여 지도가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므로 조선총독부에서 주장한 것은 거짓이라고 하는 학계의 주장이 맞다고 본다. / 종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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