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황제 김염(김마리아 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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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7-01-05 09:33 조회2,2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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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황제 김염(金焰) (김마리아의 사촌동생)
김염(본명: 德麟, 보명: 麟鉉)은 1910년 4월 7일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필순(김마리아 숙부)은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국최초로 면허를 받은 의사다.
신민회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김필순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했고
김염은 중국국적을 취득했다.
부친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어린 김염은 상하이의
고모(김순애, 즉 김규식의 부인)에게 의탁한다. 고모부 김규식 또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생활이 어려웠다.
고학으로 중 고등학교에 다니던 김염은 집을 나와 1927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하이의 영화계에 들어간다.1929년부터 당대의 뛰어난 감독 쑨유(孫瑜)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여배우 란링위(阮玲玉)와 함께 주연한 “野草閑花”(1932)의 성공으로 중국최고
남자배우가 되었다. 이 후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두어 중극전역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황제”로 뽑혔다.
지금까지 중국영화 100년 역사에서 오직 김염 만이 “영화황제”로 소개된다.
그는 조선인교포협회인 <朝僑協會>를 조직하고 조선인 학교를 후원하는 등 동포들을 도왔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자신의 싸인이 든 브로마이드를 판매하여 항일자금을 지원했고
상하이사변 후에는 구국운동에 참가했으며 부상병들을 구호했다.
1934년 배우 王人美와 결혼하여 딸 김비원(1929년생)을 낳았다.
김염이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항일영화로 특히 “壯志凌云”(1936)은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가장먼저 필름을 찾아 없애 버린 영화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참전을 결심하고 전투기 조종사 시험을 쳤지만 낙방하였으며, 1938년 일본이
제안한 합작영화의 출연 요구를 거절하고 홍콩으로 피신한다. 1947년 여배우 칭이(秦怡)와 재혼,
신중국 수립 후 상하이 영화제작소 극단장을 맡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를 "국가일급배우"로
임명했는데 이 직책은 장관보다 높은 대우였다.
1962년 위 수술 후유증으로 영화계를 은퇴하고 끝까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이례적으로 중국영화계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김염과 부인 칭이는
상하이 부근의 수용소에 격리수용되었다. 부부가 감금되어 있던 기간에 어린소년이었던
아들 김첩은 정신장애를 일으켰는데 돌봐줄 부모가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김첩(金小麟1937년생)은 폐인이 된 후에도 정신장애가 낫지않았다.
1962년에 위 수술 후유증으로 병상에 있게 된 김염은 1983월 27일 이른셋의 나이로
상하이 화동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1996년 4월 28일 KBS 일요스페셜 김염의 다큐멘터리 <상하이의 영화황제>(김광철 PD)가 방영되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 김염과 상하이
이제 상하이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새벽공기가 차다. 멀리 황포강 연안의 건물들이 희뿌옇게
깨어나고 있다. 김염의 혼백과도 작별해야 될 시간이다. 귀국을 앞두고 어젯밤 나는 김염이
조석으로 다녔을 영화의 거리 화하이중루(회해중로)를 걸었다. 그 거리의 유서 깊은 영화관인
궈타이덴엥웬(국태전영원)을 돌아섰을 때는 김염의 신비스러운 광채를 본 듯도 하였다.
우(왕)왠루(왕원로)에도 가보았다. 살구꽃이 만발한 이 길을 칭이(진이)와 함께 거닐며
사랑을 속삭였다는 김염의 초상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20대의 김염, 중국의 소녀팬들뿐 아니라 미국의 여성팬들까지 열광케 했던 명배우 김염.
그 거대한 산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전 중국 영화 역사상 '영화황제」의 칭호를 들었던
단 한 사람. 무용가 최승희와 독립운동가 김산(그는 33세에 트로츠키 분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 민족의 자랑으로 삼았던 사람. 1930년대에 주연작이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영예상을 받고
뉴욕에서까지 그의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사람. 그의 브로마이드를 사려고 선남선녀들이
개봉관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는 사람. 그러나 동료 영화배우였던 장칭(강청)이 주도했던
문화대혁명 때는 커피와 버터를 좋아한 반혁명 양파분자라 하여 철저히 매도당하기도 했던 사람.
전설적 미남배우 루돌프 발렌티노를 뺨칠 만한 외모를 가졌던 그 김염은 그러나 단순한
미남 배우만은 아니었다. 그는 영화로 항일했던 의남배우였고 귀골의 사상배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 금교의 두터운 벽에 갇혀 한번 떠난 서울 땅을 끝내 다시 밟지 못한 채
병고에 시달리다 비문 하나 없이 이역에서 스러진 비운의 예술가였다.
도시도 인생처럼 유전하는 것일까. 확실히 하나의 도시 역사속에는 그 예술적 에스프리가
가장 잘 빛나는 하나의 시기가 있다. 고도일수록 그렇다. 상하이의 예술적 기운은 아무래도
1930년대에 극점으로 발화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정치-사회적으로는 이 시기에 두 차례에
걸쳐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고 급기야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어 육지 속의 섬처럼 고립되어 버렸던
최악의 시기였다. 시가지가 서구 열강의 조계지로 찢겨나가는 수모까지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예술, 특히 영화를 말할 때는 동양의 할리우드 상하이의 30년대를 빼놓을 수 없다. 중국영화는
홍콩을 망라하여 그 뿌리가 상하이에 있고 그것도 30년대의 상하이에 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영화황제 김염이 서 있다.
아름다운 남자 김염.
처음 그에 대해 들은 것은 오래 전 베를린의 한 화랑에서였다. 내가 개인전을 열었던 그 화랑에는
나이 든 중국인 여성 한 사람이 아르바이트 일을 나오고 있었다. 상하이 출신인 그녀는 상하이의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특히 전설적 미남배우 「진옌'을 많이 이야기했다.
조선인이라 했지만 전혀 생소했다. 그러다가 연전에 일본인 학자 스즈키 쓰네카쓰가쓴
김염의 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그 김염이 베를린에서 들은 「진옌」인 것을 알았다.
가슴이 뛰었다. 일찍이 『아리랑의 노래』의 저자인 미국인 저널리스트 님 웨일즈는 김염과
그의 예술을 극찬하는 글을 남긴 바 있는데 그녀는 김염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남자의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정신의 힘과 아름다움이
우러나 오려면 적어도 2대의 내력이 필요한 것일까.
김염의 자취를 찾아 상하이로 떠나기 전 나는 서울 그의 친인척들을 먼저 만났다. 그러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김염가는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였다. 그의 가계를 펼치자
곧 한국 근대 「기독교사」와 「의학사」와 「독립운동사」가 함께 딸려나왔다.
김염의 조카 김윤옥씨에 이어 경실련 서경석 목사의 부친 서재현(94) 장로를 찾아뵙고 상하이에서
지척에 살았다는 외사촌아우 덕린(김염의 본명)에 대해 소상하게 들을 수 있음은 다행이었다.
부인 김명진 여사의 중국어 소개장과 주소 하나만을 달랑 들고 상하이에 내려 물어물어
김염의 부인 칭이 여사의 아파트를 찾았다.
마침내 우싱루(오흥로) 9층의 그 아파트에 도착하여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77세라는 나이로 미루어 허리 굽은 노인을 예상했는데 잘해야 오십이 될까말까 해 보이는
미모의 여성이 나를 맞았던 것이다. 『김염 선생님 사모님 되시는 칭이 여사를 찾아
한국에서 왔습니다』고 하자 그 「중년」 여성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제가 칭입니다.』 - - - 후략.
○ 김염.
본명 김덕린. 1911년 서울 출생. 조선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의사인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가서
영화계에 진출한 후 1932년 '영화황제'로 뽑혔을 만큼 최고 인기를 누렸다. 출연작이
모스크바 영화제의 영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버지 필순은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으로
의학서와 유기화학서 등을 번역하고 그 삽도를 그리기도 했다. 언더우드 목사와 애브슨 전도사등이
김필순 가에서 오랫동안 유숙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박사와 서병호(서재현 장로의 부친)가 고모부. YWCA 창설자였던 김필례, 여성 독립운동가 김구례가 고모이다. 또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가 사촌 누이이며, 형 덕봉은 남경의대 출신의 명의였고, 여동생 김위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상하이에는 그의 부인 칭이(진이)여사(77)와 아들이 살고 있다.
( 글-김병종·서울대미대교수 )
김염 회고전 소식 | 電影皇帝 김염 2004/07/20 16:26
http://blog.naver.com/cinephile1
올해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으로 마련
9월초 개막하는 제4회 광주국제영화제에 30년대 상하이(上海)에서 활약했던
조선인 배우 김염(金焰.본명 김덕린.1910-83)의 회고전이 특별전 프로그램의 하나로 마련된다.
서울 출신으로 두살 때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활황을 누리던 1930년대 상하이에서 여배우
완령옥(阮玲玉)과 함께 톱스타로 인기를 모았다. 32년 상하이의 영화신문 '전성'(電聲)이
실시한 독자투표에서 '영화황제(電影皇帝)'의 칭호를 얻었을 정도.
그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을 다룬 <애국혼>(愛國魂.감독 정기택)이나 항일영화
<장공만리>(長空萬里.손유) 등에 출연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큰 위안이 되기도 했다.
이후 김염은 계속 중국에서 살았으며 문화혁명기에는 농촌하방과 수용소 생활 등을 겪기도 했다.
이번에 열리는 '상하이의 조선인 배우-김염 회고전'에서는 <일전매>(1931년) <도화읍혈기>(1932년)
<모성지광>(1933) <대로>(1935) <장지릉운>(1936년) 등이 상영된다.
(서울=연합뉴스)
김염의 부인 진이(秦怡)여사와의 인터뷰 | 기획 2005/03/18 00:07
http://blog.naver.com/corea_007/60011015812
김염의 부인 진이(秦怡)여사와의 인터뷰
- 1930년대 상해의 항일영화황제, 김염_2
_2004/10 나영필 기자
<김염의 부인 진이(秦怡)여사와의 인터뷰>
김염의 삶과 영화세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김염의 최측근 인사와 김염 연구자들의
3각인터뷰를 게재한다. 이번 광주국제영화제 ‘1930년대 상하이 영화와 김염’ 포럼을 마치고
진이여사는 곧바로 상하이로 떠났다. 문화대혁명 시기 몸이 불편하게 된 아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김염선생을 만났고 함께 상해에서 생활했으며 현재 이남에 있는 김명진여사(85)의
전화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통역을 맡아 준 김명진여사에게
편집국의 이름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울러 김염선생과 진이여사의 유일한 혈육인 김첩씨의
건강을 기원한다. _편집자 주
- 김염과 그의 작품들이 중국영화사와 중국 후배 영화인들에게 어떻게 평가되는가?
반갑다. 중국인들은 김염을 영화황제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후배 영화인들은 중국영화예술의
시작을 김염으로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이의 연기와 고상한 정신세계는 영화인들에게 최고의
모범으로 되고 있으며 지속적인 경외심을 갖게 한다. 일반인들도 그이의 영화를 보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이의 연기는 아주 자연스럽고 감동적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김염의 외모 또한
너무나 매력적으로 잘 생겼기 때문에, 그이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후배 중에서 그이를 초월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 중국공산당원인 진이와 당원이 아닌 김염이 결혼했는데, 혹시 사상적 갈등은 없었는가?
당원으로 가입하기 전인 1947년 그이와 결혼을 했다. 우리는 사상적인 부분에서 아무런 갈등과
불편이 없었다. 둘이 그냥 좋아했고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 김염과 진이는 문화대혁명 때 간부학교에 격리조치되면서 아들이 정신질환을 얻게 되었는데,
김염은 강청(모택동주석의 부인)과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정작 김염은 강청을 잘 몰랐다. 다만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 때 중국은 모든 면에서 후퇴했다. 강청이 그렇게 한 목적은 모든 것을 부셔버리고
혼란을 조성해 자기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술인들을 비롯 대부분의 인텔리들을
숙청한 것이다. 그러나 그이는 모택동주석에 대해서는 굉장히 좋게 생각했다. 현재 중국인들은
모주석을 ‘공이 커서 과실을 덮는다(功大越過)’라고 평가하고 있다.
- 김염의 가족은 남, 북, 해외에 흩어졌고 지금은 많은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김염은 코리아 민족,
조국의 분단과 통일에 대해서는 평소 어떤 말들을 하였는가?
김염은 항일의식이 강하고 민족을 사랑한 애국적인 조선인이었다. 조국을 그리워 한 그이는
조국분단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당연히 그이는 남북통일을 절절히 원했으며 자주 그런 얘기를
했다. 그이의 어머니(정경순)와 누이동생(김위)이 이북으로 가서 살고 있었다.
(김위는 후에 번역부 차장을 지냈다_ 편집자 주)
주은래전총리가 1952년에 그이를 위문단 단장으로 해서 평양에 파송(파견)했다.
그때 평양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다 만났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나는 이북을 방문하지 않았다.
- 김염과 주은래의 일화를 듣고 싶다.
주은래와 그이는 여러 번 만났다. 남개중학의 동문(김염은 주은래의 후배)이었다. 그래서 주은래와
그이는 너무나 친숙했다. 한번은 주은래가 김염을 청해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며 이런 대화를 했다.
“당신은 조선사람 아닌가.” “맞다. 나는 조선의 서울에서 났다.” 그러니까 주은래가
“아, 그러면 당신은 우리 후마(부마 : 왕의 딸과 결혼한 사람)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이가 집에 와서
“주은래가 나를 부마라고 했다. 그러니 당신은 공주가 되었다!”라고 하며 막 웃었던 기억이 난다.
조선사람이 중국의 여성과 결혼했으니 부마라고 한 것이다.(당시 여배우 진이의 명성은 최고였다_
편집자 주)그만큼 주은래와 김염은 허물없이 지냈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미쳤다.
- 내년 중국영화 100주년 기념 100작품 중에 선정될 김염의 영화 3편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년이면 중국영화는 100주년이 된다. 그 100주년의 역사에 공헌한 수많은 사람이 있겠지만 중국은
김염을 단연 그 원조로 생각하고 있으며 격을 달리 하고 있다. 100주년 영화제에 상영될 김염의 영화는
분명 3개가 포함될 것이다. <대로>가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다른 두 개는 아직
선정하지 못했다. 선정작업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100주년 영화제는 해남도 삼야지방에서 개최될
가능성이 많다. 아니면 북경이다. 그런데 이번에 상해의 직원들이 해남도에 가보자고 했는데,
피곤해서 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중국영화박물관을 북경에 건립할 예정인데, 그 박물관의 일부를
할애해 영화황제 김염의 영화들을 비중있게 전시하려고 한다. 중국정부와 중국영화계로서는
최상의 예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 아들의 건강은 어떠한가. 인터뷰에 감사한다.
아들의 건강이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병원에 가서 진찰도 받고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 고맙다.
전화통역_김명진선생. 정리_나영필 realism@ncorea.co.kr
김염(金焰)의 매력에 빠지다. | 중국 문화안내 2005/08/09 13:07
(http://blog.naver.com/decochina/60015957605)
중국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김염과 그의 영화를 연구하기 위한 계획서를 한 재단에
제출했다.
연구비 수혜여부와 상관없이 이번 기회에 김염에 대한 나름의 연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지난 중국여행중 7월 17일로 기억된다.
그날 아침 중국 CCTV 10에서 김염에 대한 다큐가 방영되었다.
호텔식당으로 아침을 먹으러 가자는 친구의 말에
중요한 프로니까 봐야 된다고 혼자가서 먹고 오라고 했는데,
중국어를 못하는 친구는 혼자가는게 안심이 안되는지 빨리 먹고와서 보자고 재촉이었다^^
대충 죽으로 떼우고 빵 몇개를 집어들고는 친구에게 천천히 먹고 올라오라고 하고는
재빨리 방으로 올라와 티비앞에 앉았다.
김염에 대한 이야기는 정확하게 막 시작되고 있었다.
김염과 그의 출연작을 중심으로 길지 않은 간략한 다큐정도였고,
책을 통해서 거의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참 우연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 그의 멋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또 흥분이 되었다.
김염의 몇몇 출연작을 소개하면서
<쉬리>, , <실미도>등의 화면을 함께 교차시켰다.
다시 말해 영화속 김염의 모습들,
그의 절규하는 모습과 <쉬리>의 최민식을 교차시키고
누워있는 김염과 에서의 이병헌의 모습,
웃옷을 벗고 달리는 김염과 <실미도>에서 설경구, 허준호등의 모습을 비쳐줬다.
묘한 감동이 느껴지는 화면이었다.
김염과 함께 출연했거나 그를 기억하는 중국 영화계 원로들의 증언에서
또 다른 감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김염이 3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여러가지 요인들 중,
당시 김염의 등장은 기존의 남자배우들과는 완전히 차별되는
멋지고 세련된, 백마탄 왕자의 분위기였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앞다투어 김염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도 신선하다.
김염의 사진을 보면, 그 말들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김염이 더욱 매력적인건, 그가 그런 자신의 외모와 인기에 편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라는게 여자애들이 눈물이나 흘리는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
그는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을 평생 지켜나간 인물이다.
항일정신을 강하게 투영하고 있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진취적이고 개척적인 용감한 젊은이상을 구축했고,
그의 인기를 이용해 선전도구로 삼으려는 일본의 집요한 제안과 협박에 불응
영화를 접고 상해를 탈출한다.
김염은 건축에 뜻을 두기도 했고, 조종사를 희망하기도 했다.
여러스포츠와 미술등을 즐기는 그대로 다재다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김염은 신중국 성립후에도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부에서 그에게 영화계 고위직을 맡긴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예우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김염과 그의 영화에는 중국과 한국의 굴곡많은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 한국인으로서의 김염의 모습이다.
30년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한국인들을 지원했다는 점과
김산을 만난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50년대에 북한에 계신 어머니를 방문했다는
사실 속에서 그의 모습과 생각을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
물론 중국이나 한국 어느 한쪽에서의 입장만을 견지할수는 없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계셨지만, 또한 동시에
중국으로 입적하고 중국말을 사용하고 중국영화에 출연하고 중국사람과 결혼하고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중국과 한국을 모두 사랑했다고 볼수 있다.
김염은 중국영화의 황제이기도 하고, 말하자면 최초의 한류스타일수도 있으며,
독립운동가의 아들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의 행적을 따라 우리의 현대사를 돌아볼
수도 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고,
높은 평가와 함께 적극적인 재조명, 합당한 예우가 따랐으면 좋겠다.
영화작품
출연작 영화 1957 폭풍속의 매
출연작 영화 1936 장지릉운
출연작 영화 1934 대로
출연작 영화 1934 들장미
출연작 영화 1933 모성지광
출연작 영화 1932 야초한화
출연작 영화 1931 도화읍혈기
출연작 영화 1931 일전매
출연작 영화 항일영화 장공만리
출연작 영화 잃어버린 사랑
*김염은 1929년 데뷔해서 1962년 은퇴할 때 까지 33년간 모두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 김염에 관한 책을 소개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상하이 올드 데이스> 박규원 저
"상하이 올드 데이스"는 논픽션이고 크게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필순의 이야기,
두번째 그의 아들이자 중국에서 영화 황제의 삶을 살았던 김염의 이야기,
세번째 저자 박규원이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필순과 작은 외할아버지인 김염의 삶을
추적해 나가는 이야기다.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다큐성이 가미된 까닭에 비교적 감정선이
크게 부각되지 않아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이렇게 역동적이고
역사적이랄 수도 있는 이야기가 소설로 쓰여졌다면 아마 나같은 사람은
읽기를 포기하거나 닭살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기분을 감출수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 박규원의 외가는 그 집안의 역사가 곧 한국 독립 운동사의 역사라
할 정도로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역사의 시발점에 서있던 사람이 김필순이지만 그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인 김염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영화황제라 불릴 정도로
성공한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동안 중국과의 관계 때문인지
국내에선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몇년전엔가 어떤 잡지에서
그 사람 기사를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 책을
읽으며 그나마 기억이 났다.
박규원 집안의 제보로 김염의 이야기는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지기도 했는데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하지만
오히려 박규원은 이때부터 집안 어른들의 일대기를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
8년여 동안 중국, 미국등을 돌아다니며 할아버지들의 역사를 추적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건강이 나빠지기도 하고 집안 사람들의 몰이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신도 모를 집념과 열정으로 결국 이 책을 탄생시킨다.
김필순 집안의 자식들은 모두 그 당시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들었던
교육의 혜택을 누렸다. 그것은 확실히 혜택이었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중국, 미국, 남,북한에서 제각기 분리된 삶을 살아야 했다.
중국에 남아있던 김염은 말년이 되어서야 형제들과 간신히 연락이 가능했고
한국의 형제는 미국을 통해서 중국의 형제와 3자 편지를 주고 받아야 했다.
동생은 형 김염이 보낸 편지를 읽을 기력이 안돼 품에 품고만 있다가
세상을 떠났고(누가 읽어 주었을 수는 있다) 중국의 김염이 죽은뒤 그의
책상 서랍에서 동생이 보내준 돈 200달러가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북한으로 떠난 동생은 생사도 알 수 없다.
그 모든것이 하나의 인생이며 소중한 인생이다.
당사자들은 역동적으로 그 시대를 살았고 행복했을지 모르나 정작
글로서 그들의 행적을 읽는 나는 솔직히 눈물이 난다.
그들의 화려했던 시기보다 말년의 행적에 더 관심을 가지며 그 이면을
생각하는 나는 확실히 마이너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_-;;;
"상하이 올드 데이스"의 문체는 프로작가가 쓴것이 아닌만큼 평범하고 쉽다.
그러나 혈족에 관한 것인만큼 뭐랄까 절절한 애정이 배어난다.
사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그 시대에 관한 진지한 고찰이나 비판, 혹은
주인공들의 생에 대한 이면등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런것들을 알기 위해서라면 아마도 역사책을 뒤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들의 한 손녀가 오로지 조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으로
스스로의 발품을 팔아가며 지극히 사랑을 담아 헌정한 책이다.
당연히 감탄과 찬사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한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 책은 또한 저자 박규원의 자신찾기로의 여행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넉넉한 집안의 중년의 평범한 한 주부, 아들 하나를 키워 유학 보냈고
서서히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되짚어 보기 시작한 시기에
매력적인 두 인물의 생애에 빠져들면서 박규원 씨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도 의미를 키웠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 저자 박규원씨는 김마리아 열사의 숙부인 김필순씨의 장남 김덕봉씨의 외손(母 金潤玉1931년생,
父 朴勝燁 밀양인)으로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하였다.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동생인 작은 외할아버지 김염의 자취를 따라 중국과 미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8년동안 취재하였다. 많은 자료를 수집하는 가운데 독립운동의 선두에 섰던 외증조부 김필순 할아버님을 비롯한 외가쪽 집안의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발굴하여 이 책에서 소게하고 있다. 2003년<올해의 논픽션 대상 수상작>이다.
아래는 김염연구가 저자 박규원씨의 인터뷰 기사다.
- 1930년대 상해의 항일영화 황제, 김염 -_
_2004/10 나영필 기자
- 김염의 생애흔적을 8년 동안이나 취재하게 된 이유나 배경은 무엇인가?
1995년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역사에 전혀 기록되지 못한 당신의 할아버지 김필순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셨다. 부모님은 KBS에 알렸고 방송국에선 수락하여 「일요스페셜」을 만들었는데
주인공은 김필순의 3남 ‘상하이의 영화황제 김염’이었다. 난 그 기록영화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우리 가족 중 나만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기록영화를 본 후 그를 더 알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를 따라가는 여행을 하게 되었으며 8년이 걸려 나의 작은외할아버지
김염을 내 후손에게 알려주기 위해 책을 쓰게 되었다.
- 김염은 아버지인 김필순의 항일투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김염은 중국 민중 편에 서서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미루어 생각해 보건데 이것은 아버지의 삶에서
받은 영향이 아니겠는가? 그는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와 할머니였다고 얘기했다.
그는 7남매 중 가장 아버지를 많이 닮은 아들이었다.
- 김염은 고모부 김규식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배우가 되었는데 김규식과 그 항일투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그 시대에 살던 김규식은 당연히 김염이 배우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김염은 자신을 공부시켜 준
고모부인 김규식에게 늘 고마워했다. 성공한 후 김염은 그를 자주 찾아갔다. (고모부가) 하는 일의
숭고함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고모부를 적극 도와주며 진심으로 존경했다.
- 김염과 진이가 중국영화사와 중국영화계에서 응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진이여사는 살아있는 중국영화의 산 증인이자 중국의 보물이며,
김염은 중국 영화역사 100년 중 유일하게 황제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중국이란 큰 나라에서
그런 존경과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나라 잃은 조선인 출신이라는 것이 기적 같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많은 화교들조차 “그는 최고였다(He was top)”라고 얘기한다.
- 김염의 생애를 한 마디로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그는 살아있는 동안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모든 민중과 함께 호흡하고자 했던
영화예술인이었다. 조선인이면서도 전 중국인들의 진정한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100년 중국영화역사상 유일하게 황제 칭호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 불꽃을
스크린 위에 원 없이 지펴 올렸으며 그 뜻을 이루었던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 영화인 김염의 최대 업적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는 중국 초기 영화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 당시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단계이며
고전극 방식에서 현대극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최초로 할리우드식 신세대 스타 개념을 민중에게 심어준 배우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영화의 예술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키는데 배우 신분을 넘어 영화예술가로서 초기 중국영화를 이끈 사람 중의 하나다.
- 김염의 생애가 최근년에야 언론에 조명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는가?
중국과 우리나라가 수교된 지 12년이 된다. 누가 강제적으로 막은 것은 아니다.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알려질 일이었다. 나도 1995년 어머니로부터 배우 할아버지가 친척 중에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새로이 매일 알아가지 않았는가. 후손에게 전해주고 싶어 그의 어린시절이나 그를 깊이 알고 있는 친척, 친지들을 찾아 8년의 세월을 들여 책을 쓴 것이다. 그것이 우연히 민음사에서 주관한 1회 다큐멘터리
대상을 받게 되었다. 그 후로도 계속 다각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
- 김염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소개에서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김염의 삶이 당시 일본, 중국, 조선의 시대상황을 집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회적 화제에
그치곤 한다. 김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영화계에 관계하고 있는 분들의 경우 조선인으로서 13억 인구의 중국에서
영화황제 칭호를 받는 인물을 소개하거나 연구하는 분들이 너무 없다. 전문적이고 실력있는
연구가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또 김염은 직접 조선영화에는 출현하지 않았으나,
그는 상해 조선영화인들의 활동을 적극 도와주며 간접적으로 조선영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나라 영화계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대종상이나
청룡상 등의 큰 영화제 시상식에서 그를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고,
그 영화제의 깊이와 권위를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년은 중국영화 100주년이므로
중국에서 이와같은 행사가 많이 개최될 것이다.
정리_나영필 realism@ncorea.co.kr
김염(본명: 德麟, 보명: 麟鉉)은 1910년 4월 7일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필순(김마리아 숙부)은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국최초로 면허를 받은 의사다.
신민회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김필순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했고
김염은 중국국적을 취득했다.
부친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어린 김염은 상하이의
고모(김순애, 즉 김규식의 부인)에게 의탁한다. 고모부 김규식 또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생활이 어려웠다.
고학으로 중 고등학교에 다니던 김염은 집을 나와 1927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하이의 영화계에 들어간다.1929년부터 당대의 뛰어난 감독 쑨유(孫瑜)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여배우 란링위(阮玲玉)와 함께 주연한 “野草閑花”(1932)의 성공으로 중국최고
남자배우가 되었다. 이 후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두어 중극전역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황제”로 뽑혔다.
지금까지 중국영화 100년 역사에서 오직 김염 만이 “영화황제”로 소개된다.
그는 조선인교포협회인 <朝僑協會>를 조직하고 조선인 학교를 후원하는 등 동포들을 도왔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자신의 싸인이 든 브로마이드를 판매하여 항일자금을 지원했고
상하이사변 후에는 구국운동에 참가했으며 부상병들을 구호했다.
1934년 배우 王人美와 결혼하여 딸 김비원(1929년생)을 낳았다.
김염이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항일영화로 특히 “壯志凌云”(1936)은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가장먼저 필름을 찾아 없애 버린 영화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참전을 결심하고 전투기 조종사 시험을 쳤지만 낙방하였으며, 1938년 일본이
제안한 합작영화의 출연 요구를 거절하고 홍콩으로 피신한다. 1947년 여배우 칭이(秦怡)와 재혼,
신중국 수립 후 상하이 영화제작소 극단장을 맡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를 "국가일급배우"로
임명했는데 이 직책은 장관보다 높은 대우였다.
1962년 위 수술 후유증으로 영화계를 은퇴하고 끝까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이례적으로 중국영화계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김염과 부인 칭이는
상하이 부근의 수용소에 격리수용되었다. 부부가 감금되어 있던 기간에 어린소년이었던
아들 김첩은 정신장애를 일으켰는데 돌봐줄 부모가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김첩(金小麟1937년생)은 폐인이 된 후에도 정신장애가 낫지않았다.
1962년에 위 수술 후유증으로 병상에 있게 된 김염은 1983월 27일 이른셋의 나이로
상하이 화동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1996년 4월 28일 KBS 일요스페셜 김염의 다큐멘터리 <상하이의 영화황제>(김광철 PD)가 방영되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 김염과 상하이
이제 상하이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새벽공기가 차다. 멀리 황포강 연안의 건물들이 희뿌옇게
깨어나고 있다. 김염의 혼백과도 작별해야 될 시간이다. 귀국을 앞두고 어젯밤 나는 김염이
조석으로 다녔을 영화의 거리 화하이중루(회해중로)를 걸었다. 그 거리의 유서 깊은 영화관인
궈타이덴엥웬(국태전영원)을 돌아섰을 때는 김염의 신비스러운 광채를 본 듯도 하였다.
우(왕)왠루(왕원로)에도 가보았다. 살구꽃이 만발한 이 길을 칭이(진이)와 함께 거닐며
사랑을 속삭였다는 김염의 초상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20대의 김염, 중국의 소녀팬들뿐 아니라 미국의 여성팬들까지 열광케 했던 명배우 김염.
그 거대한 산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전 중국 영화 역사상 '영화황제」의 칭호를 들었던
단 한 사람. 무용가 최승희와 독립운동가 김산(그는 33세에 트로츠키 분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 민족의 자랑으로 삼았던 사람. 1930년대에 주연작이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영예상을 받고
뉴욕에서까지 그의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사람. 그의 브로마이드를 사려고 선남선녀들이
개봉관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는 사람. 그러나 동료 영화배우였던 장칭(강청)이 주도했던
문화대혁명 때는 커피와 버터를 좋아한 반혁명 양파분자라 하여 철저히 매도당하기도 했던 사람.
전설적 미남배우 루돌프 발렌티노를 뺨칠 만한 외모를 가졌던 그 김염은 그러나 단순한
미남 배우만은 아니었다. 그는 영화로 항일했던 의남배우였고 귀골의 사상배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 금교의 두터운 벽에 갇혀 한번 떠난 서울 땅을 끝내 다시 밟지 못한 채
병고에 시달리다 비문 하나 없이 이역에서 스러진 비운의 예술가였다.
도시도 인생처럼 유전하는 것일까. 확실히 하나의 도시 역사속에는 그 예술적 에스프리가
가장 잘 빛나는 하나의 시기가 있다. 고도일수록 그렇다. 상하이의 예술적 기운은 아무래도
1930년대에 극점으로 발화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정치-사회적으로는 이 시기에 두 차례에
걸쳐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고 급기야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어 육지 속의 섬처럼 고립되어 버렸던
최악의 시기였다. 시가지가 서구 열강의 조계지로 찢겨나가는 수모까지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예술, 특히 영화를 말할 때는 동양의 할리우드 상하이의 30년대를 빼놓을 수 없다. 중국영화는
홍콩을 망라하여 그 뿌리가 상하이에 있고 그것도 30년대의 상하이에 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영화황제 김염이 서 있다.
아름다운 남자 김염.
처음 그에 대해 들은 것은 오래 전 베를린의 한 화랑에서였다. 내가 개인전을 열었던 그 화랑에는
나이 든 중국인 여성 한 사람이 아르바이트 일을 나오고 있었다. 상하이 출신인 그녀는 상하이의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특히 전설적 미남배우 「진옌'을 많이 이야기했다.
조선인이라 했지만 전혀 생소했다. 그러다가 연전에 일본인 학자 스즈키 쓰네카쓰가쓴
김염의 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그 김염이 베를린에서 들은 「진옌」인 것을 알았다.
가슴이 뛰었다. 일찍이 『아리랑의 노래』의 저자인 미국인 저널리스트 님 웨일즈는 김염과
그의 예술을 극찬하는 글을 남긴 바 있는데 그녀는 김염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남자의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정신의 힘과 아름다움이
우러나 오려면 적어도 2대의 내력이 필요한 것일까.
김염의 자취를 찾아 상하이로 떠나기 전 나는 서울 그의 친인척들을 먼저 만났다. 그러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김염가는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였다. 그의 가계를 펼치자
곧 한국 근대 「기독교사」와 「의학사」와 「독립운동사」가 함께 딸려나왔다.
김염의 조카 김윤옥씨에 이어 경실련 서경석 목사의 부친 서재현(94) 장로를 찾아뵙고 상하이에서
지척에 살았다는 외사촌아우 덕린(김염의 본명)에 대해 소상하게 들을 수 있음은 다행이었다.
부인 김명진 여사의 중국어 소개장과 주소 하나만을 달랑 들고 상하이에 내려 물어물어
김염의 부인 칭이 여사의 아파트를 찾았다.
마침내 우싱루(오흥로) 9층의 그 아파트에 도착하여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77세라는 나이로 미루어 허리 굽은 노인을 예상했는데 잘해야 오십이 될까말까 해 보이는
미모의 여성이 나를 맞았던 것이다. 『김염 선생님 사모님 되시는 칭이 여사를 찾아
한국에서 왔습니다』고 하자 그 「중년」 여성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제가 칭입니다.』 - - - 후략.
○ 김염.
본명 김덕린. 1911년 서울 출생. 조선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의사인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가서
영화계에 진출한 후 1932년 '영화황제'로 뽑혔을 만큼 최고 인기를 누렸다. 출연작이
모스크바 영화제의 영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버지 필순은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으로
의학서와 유기화학서 등을 번역하고 그 삽도를 그리기도 했다. 언더우드 목사와 애브슨 전도사등이
김필순 가에서 오랫동안 유숙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박사와 서병호(서재현 장로의 부친)가 고모부. YWCA 창설자였던 김필례, 여성 독립운동가 김구례가 고모이다. 또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가 사촌 누이이며, 형 덕봉은 남경의대 출신의 명의였고, 여동생 김위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상하이에는 그의 부인 칭이(진이)여사(77)와 아들이 살고 있다.
( 글-김병종·서울대미대교수 )
김염 회고전 소식 | 電影皇帝 김염 2004/07/20 16:26
http://blog.naver.com/cinephile1
올해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으로 마련
9월초 개막하는 제4회 광주국제영화제에 30년대 상하이(上海)에서 활약했던
조선인 배우 김염(金焰.본명 김덕린.1910-83)의 회고전이 특별전 프로그램의 하나로 마련된다.
서울 출신으로 두살 때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활황을 누리던 1930년대 상하이에서 여배우
완령옥(阮玲玉)과 함께 톱스타로 인기를 모았다. 32년 상하이의 영화신문 '전성'(電聲)이
실시한 독자투표에서 '영화황제(電影皇帝)'의 칭호를 얻었을 정도.
그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을 다룬 <애국혼>(愛國魂.감독 정기택)이나 항일영화
<장공만리>(長空萬里.손유) 등에 출연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큰 위안이 되기도 했다.
이후 김염은 계속 중국에서 살았으며 문화혁명기에는 농촌하방과 수용소 생활 등을 겪기도 했다.
이번에 열리는 '상하이의 조선인 배우-김염 회고전'에서는 <일전매>(1931년) <도화읍혈기>(1932년)
<모성지광>(1933) <대로>(1935) <장지릉운>(1936년) 등이 상영된다.
(서울=연합뉴스)
김염의 부인 진이(秦怡)여사와의 인터뷰 | 기획 2005/03/18 00:07
http://blog.naver.com/corea_007/60011015812
김염의 부인 진이(秦怡)여사와의 인터뷰
- 1930년대 상해의 항일영화황제, 김염_2
_2004/10 나영필 기자
<김염의 부인 진이(秦怡)여사와의 인터뷰>
김염의 삶과 영화세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김염의 최측근 인사와 김염 연구자들의
3각인터뷰를 게재한다. 이번 광주국제영화제 ‘1930년대 상하이 영화와 김염’ 포럼을 마치고
진이여사는 곧바로 상하이로 떠났다. 문화대혁명 시기 몸이 불편하게 된 아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김염선생을 만났고 함께 상해에서 생활했으며 현재 이남에 있는 김명진여사(85)의
전화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통역을 맡아 준 김명진여사에게
편집국의 이름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울러 김염선생과 진이여사의 유일한 혈육인 김첩씨의
건강을 기원한다. _편집자 주
- 김염과 그의 작품들이 중국영화사와 중국 후배 영화인들에게 어떻게 평가되는가?
반갑다. 중국인들은 김염을 영화황제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후배 영화인들은 중국영화예술의
시작을 김염으로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이의 연기와 고상한 정신세계는 영화인들에게 최고의
모범으로 되고 있으며 지속적인 경외심을 갖게 한다. 일반인들도 그이의 영화를 보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이의 연기는 아주 자연스럽고 감동적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김염의 외모 또한
너무나 매력적으로 잘 생겼기 때문에, 그이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후배 중에서 그이를 초월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 중국공산당원인 진이와 당원이 아닌 김염이 결혼했는데, 혹시 사상적 갈등은 없었는가?
당원으로 가입하기 전인 1947년 그이와 결혼을 했다. 우리는 사상적인 부분에서 아무런 갈등과
불편이 없었다. 둘이 그냥 좋아했고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 김염과 진이는 문화대혁명 때 간부학교에 격리조치되면서 아들이 정신질환을 얻게 되었는데,
김염은 강청(모택동주석의 부인)과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정작 김염은 강청을 잘 몰랐다. 다만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 때 중국은 모든 면에서 후퇴했다. 강청이 그렇게 한 목적은 모든 것을 부셔버리고
혼란을 조성해 자기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술인들을 비롯 대부분의 인텔리들을
숙청한 것이다. 그러나 그이는 모택동주석에 대해서는 굉장히 좋게 생각했다. 현재 중국인들은
모주석을 ‘공이 커서 과실을 덮는다(功大越過)’라고 평가하고 있다.
- 김염의 가족은 남, 북, 해외에 흩어졌고 지금은 많은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김염은 코리아 민족,
조국의 분단과 통일에 대해서는 평소 어떤 말들을 하였는가?
김염은 항일의식이 강하고 민족을 사랑한 애국적인 조선인이었다. 조국을 그리워 한 그이는
조국분단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당연히 그이는 남북통일을 절절히 원했으며 자주 그런 얘기를
했다. 그이의 어머니(정경순)와 누이동생(김위)이 이북으로 가서 살고 있었다.
(김위는 후에 번역부 차장을 지냈다_ 편집자 주)
주은래전총리가 1952년에 그이를 위문단 단장으로 해서 평양에 파송(파견)했다.
그때 평양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다 만났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나는 이북을 방문하지 않았다.
- 김염과 주은래의 일화를 듣고 싶다.
주은래와 그이는 여러 번 만났다. 남개중학의 동문(김염은 주은래의 후배)이었다. 그래서 주은래와
그이는 너무나 친숙했다. 한번은 주은래가 김염을 청해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며 이런 대화를 했다.
“당신은 조선사람 아닌가.” “맞다. 나는 조선의 서울에서 났다.” 그러니까 주은래가
“아, 그러면 당신은 우리 후마(부마 : 왕의 딸과 결혼한 사람)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이가 집에 와서
“주은래가 나를 부마라고 했다. 그러니 당신은 공주가 되었다!”라고 하며 막 웃었던 기억이 난다.
조선사람이 중국의 여성과 결혼했으니 부마라고 한 것이다.(당시 여배우 진이의 명성은 최고였다_
편집자 주)그만큼 주은래와 김염은 허물없이 지냈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미쳤다.
- 내년 중국영화 100주년 기념 100작품 중에 선정될 김염의 영화 3편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년이면 중국영화는 100주년이 된다. 그 100주년의 역사에 공헌한 수많은 사람이 있겠지만 중국은
김염을 단연 그 원조로 생각하고 있으며 격을 달리 하고 있다. 100주년 영화제에 상영될 김염의 영화는
분명 3개가 포함될 것이다. <대로>가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다른 두 개는 아직
선정하지 못했다. 선정작업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100주년 영화제는 해남도 삼야지방에서 개최될
가능성이 많다. 아니면 북경이다. 그런데 이번에 상해의 직원들이 해남도에 가보자고 했는데,
피곤해서 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중국영화박물관을 북경에 건립할 예정인데, 그 박물관의 일부를
할애해 영화황제 김염의 영화들을 비중있게 전시하려고 한다. 중국정부와 중국영화계로서는
최상의 예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 아들의 건강은 어떠한가. 인터뷰에 감사한다.
아들의 건강이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병원에 가서 진찰도 받고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 고맙다.
전화통역_김명진선생. 정리_나영필 realism@ncorea.co.kr
김염(金焰)의 매력에 빠지다. | 중국 문화안내 2005/08/09 13:07
(http://blog.naver.com/decochina/60015957605)
중국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김염과 그의 영화를 연구하기 위한 계획서를 한 재단에
제출했다.
연구비 수혜여부와 상관없이 이번 기회에 김염에 대한 나름의 연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지난 중국여행중 7월 17일로 기억된다.
그날 아침 중국 CCTV 10에서 김염에 대한 다큐가 방영되었다.
호텔식당으로 아침을 먹으러 가자는 친구의 말에
중요한 프로니까 봐야 된다고 혼자가서 먹고 오라고 했는데,
중국어를 못하는 친구는 혼자가는게 안심이 안되는지 빨리 먹고와서 보자고 재촉이었다^^
대충 죽으로 떼우고 빵 몇개를 집어들고는 친구에게 천천히 먹고 올라오라고 하고는
재빨리 방으로 올라와 티비앞에 앉았다.
김염에 대한 이야기는 정확하게 막 시작되고 있었다.
김염과 그의 출연작을 중심으로 길지 않은 간략한 다큐정도였고,
책을 통해서 거의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참 우연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 그의 멋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또 흥분이 되었다.
김염의 몇몇 출연작을 소개하면서
<쉬리>, , <실미도>등의 화면을 함께 교차시켰다.
다시 말해 영화속 김염의 모습들,
그의 절규하는 모습과 <쉬리>의 최민식을 교차시키고
누워있는 김염과 에서의 이병헌의 모습,
웃옷을 벗고 달리는 김염과 <실미도>에서 설경구, 허준호등의 모습을 비쳐줬다.
묘한 감동이 느껴지는 화면이었다.
김염과 함께 출연했거나 그를 기억하는 중국 영화계 원로들의 증언에서
또 다른 감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김염이 3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여러가지 요인들 중,
당시 김염의 등장은 기존의 남자배우들과는 완전히 차별되는
멋지고 세련된, 백마탄 왕자의 분위기였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앞다투어 김염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도 신선하다.
김염의 사진을 보면, 그 말들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김염이 더욱 매력적인건, 그가 그런 자신의 외모와 인기에 편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라는게 여자애들이 눈물이나 흘리는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
그는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을 평생 지켜나간 인물이다.
항일정신을 강하게 투영하고 있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진취적이고 개척적인 용감한 젊은이상을 구축했고,
그의 인기를 이용해 선전도구로 삼으려는 일본의 집요한 제안과 협박에 불응
영화를 접고 상해를 탈출한다.
김염은 건축에 뜻을 두기도 했고, 조종사를 희망하기도 했다.
여러스포츠와 미술등을 즐기는 그대로 다재다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김염은 신중국 성립후에도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부에서 그에게 영화계 고위직을 맡긴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예우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김염과 그의 영화에는 중국과 한국의 굴곡많은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 한국인으로서의 김염의 모습이다.
30년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한국인들을 지원했다는 점과
김산을 만난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50년대에 북한에 계신 어머니를 방문했다는
사실 속에서 그의 모습과 생각을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
물론 중국이나 한국 어느 한쪽에서의 입장만을 견지할수는 없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계셨지만, 또한 동시에
중국으로 입적하고 중국말을 사용하고 중국영화에 출연하고 중국사람과 결혼하고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중국과 한국을 모두 사랑했다고 볼수 있다.
김염은 중국영화의 황제이기도 하고, 말하자면 최초의 한류스타일수도 있으며,
독립운동가의 아들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의 행적을 따라 우리의 현대사를 돌아볼
수도 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고,
높은 평가와 함께 적극적인 재조명, 합당한 예우가 따랐으면 좋겠다.
영화작품
출연작 영화 1957 폭풍속의 매
출연작 영화 1936 장지릉운
출연작 영화 1934 대로
출연작 영화 1934 들장미
출연작 영화 1933 모성지광
출연작 영화 1932 야초한화
출연작 영화 1931 도화읍혈기
출연작 영화 1931 일전매
출연작 영화 항일영화 장공만리
출연작 영화 잃어버린 사랑
*김염은 1929년 데뷔해서 1962년 은퇴할 때 까지 33년간 모두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 김염에 관한 책을 소개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상하이 올드 데이스> 박규원 저
"상하이 올드 데이스"는 논픽션이고 크게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필순의 이야기,
두번째 그의 아들이자 중국에서 영화 황제의 삶을 살았던 김염의 이야기,
세번째 저자 박규원이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필순과 작은 외할아버지인 김염의 삶을
추적해 나가는 이야기다.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다큐성이 가미된 까닭에 비교적 감정선이
크게 부각되지 않아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이렇게 역동적이고
역사적이랄 수도 있는 이야기가 소설로 쓰여졌다면 아마 나같은 사람은
읽기를 포기하거나 닭살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기분을 감출수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 박규원의 외가는 그 집안의 역사가 곧 한국 독립 운동사의 역사라
할 정도로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역사의 시발점에 서있던 사람이 김필순이지만 그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인 김염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영화황제라 불릴 정도로
성공한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동안 중국과의 관계 때문인지
국내에선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몇년전엔가 어떤 잡지에서
그 사람 기사를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 책을
읽으며 그나마 기억이 났다.
박규원 집안의 제보로 김염의 이야기는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지기도 했는데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하지만
오히려 박규원은 이때부터 집안 어른들의 일대기를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
8년여 동안 중국, 미국등을 돌아다니며 할아버지들의 역사를 추적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건강이 나빠지기도 하고 집안 사람들의 몰이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신도 모를 집념과 열정으로 결국 이 책을 탄생시킨다.
김필순 집안의 자식들은 모두 그 당시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들었던
교육의 혜택을 누렸다. 그것은 확실히 혜택이었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중국, 미국, 남,북한에서 제각기 분리된 삶을 살아야 했다.
중국에 남아있던 김염은 말년이 되어서야 형제들과 간신히 연락이 가능했고
한국의 형제는 미국을 통해서 중국의 형제와 3자 편지를 주고 받아야 했다.
동생은 형 김염이 보낸 편지를 읽을 기력이 안돼 품에 품고만 있다가
세상을 떠났고(누가 읽어 주었을 수는 있다) 중국의 김염이 죽은뒤 그의
책상 서랍에서 동생이 보내준 돈 200달러가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북한으로 떠난 동생은 생사도 알 수 없다.
그 모든것이 하나의 인생이며 소중한 인생이다.
당사자들은 역동적으로 그 시대를 살았고 행복했을지 모르나 정작
글로서 그들의 행적을 읽는 나는 솔직히 눈물이 난다.
그들의 화려했던 시기보다 말년의 행적에 더 관심을 가지며 그 이면을
생각하는 나는 확실히 마이너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_-;;;
"상하이 올드 데이스"의 문체는 프로작가가 쓴것이 아닌만큼 평범하고 쉽다.
그러나 혈족에 관한 것인만큼 뭐랄까 절절한 애정이 배어난다.
사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그 시대에 관한 진지한 고찰이나 비판, 혹은
주인공들의 생에 대한 이면등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런것들을 알기 위해서라면 아마도 역사책을 뒤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들의 한 손녀가 오로지 조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으로
스스로의 발품을 팔아가며 지극히 사랑을 담아 헌정한 책이다.
당연히 감탄과 찬사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한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 책은 또한 저자 박규원의 자신찾기로의 여행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넉넉한 집안의 중년의 평범한 한 주부, 아들 하나를 키워 유학 보냈고
서서히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되짚어 보기 시작한 시기에
매력적인 두 인물의 생애에 빠져들면서 박규원 씨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도 의미를 키웠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 저자 박규원씨는 김마리아 열사의 숙부인 김필순씨의 장남 김덕봉씨의 외손(母 金潤玉1931년생,
父 朴勝燁 밀양인)으로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하였다.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동생인 작은 외할아버지 김염의 자취를 따라 중국과 미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8년동안 취재하였다. 많은 자료를 수집하는 가운데 독립운동의 선두에 섰던 외증조부 김필순 할아버님을 비롯한 외가쪽 집안의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발굴하여 이 책에서 소게하고 있다. 2003년<올해의 논픽션 대상 수상작>이다.
아래는 김염연구가 저자 박규원씨의 인터뷰 기사다.
- 1930년대 상해의 항일영화 황제, 김염 -_
_2004/10 나영필 기자
- 김염의 생애흔적을 8년 동안이나 취재하게 된 이유나 배경은 무엇인가?
1995년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역사에 전혀 기록되지 못한 당신의 할아버지 김필순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셨다. 부모님은 KBS에 알렸고 방송국에선 수락하여 「일요스페셜」을 만들었는데
주인공은 김필순의 3남 ‘상하이의 영화황제 김염’이었다. 난 그 기록영화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우리 가족 중 나만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기록영화를 본 후 그를 더 알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를 따라가는 여행을 하게 되었으며 8년이 걸려 나의 작은외할아버지
김염을 내 후손에게 알려주기 위해 책을 쓰게 되었다.
- 김염은 아버지인 김필순의 항일투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김염은 중국 민중 편에 서서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미루어 생각해 보건데 이것은 아버지의 삶에서
받은 영향이 아니겠는가? 그는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와 할머니였다고 얘기했다.
그는 7남매 중 가장 아버지를 많이 닮은 아들이었다.
- 김염은 고모부 김규식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배우가 되었는데 김규식과 그 항일투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그 시대에 살던 김규식은 당연히 김염이 배우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김염은 자신을 공부시켜 준
고모부인 김규식에게 늘 고마워했다. 성공한 후 김염은 그를 자주 찾아갔다. (고모부가) 하는 일의
숭고함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고모부를 적극 도와주며 진심으로 존경했다.
- 김염과 진이가 중국영화사와 중국영화계에서 응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진이여사는 살아있는 중국영화의 산 증인이자 중국의 보물이며,
김염은 중국 영화역사 100년 중 유일하게 황제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중국이란 큰 나라에서
그런 존경과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나라 잃은 조선인 출신이라는 것이 기적 같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많은 화교들조차 “그는 최고였다(He was top)”라고 얘기한다.
- 김염의 생애를 한 마디로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그는 살아있는 동안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모든 민중과 함께 호흡하고자 했던
영화예술인이었다. 조선인이면서도 전 중국인들의 진정한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100년 중국영화역사상 유일하게 황제 칭호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 불꽃을
스크린 위에 원 없이 지펴 올렸으며 그 뜻을 이루었던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 영화인 김염의 최대 업적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는 중국 초기 영화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 당시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단계이며
고전극 방식에서 현대극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최초로 할리우드식 신세대 스타 개념을 민중에게 심어준 배우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영화의 예술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키는데 배우 신분을 넘어 영화예술가로서 초기 중국영화를 이끈 사람 중의 하나다.
- 김염의 생애가 최근년에야 언론에 조명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는가?
중국과 우리나라가 수교된 지 12년이 된다. 누가 강제적으로 막은 것은 아니다.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알려질 일이었다. 나도 1995년 어머니로부터 배우 할아버지가 친척 중에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새로이 매일 알아가지 않았는가. 후손에게 전해주고 싶어 그의 어린시절이나 그를 깊이 알고 있는 친척, 친지들을 찾아 8년의 세월을 들여 책을 쓴 것이다. 그것이 우연히 민음사에서 주관한 1회 다큐멘터리
대상을 받게 되었다. 그 후로도 계속 다각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
- 김염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소개에서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김염의 삶이 당시 일본, 중국, 조선의 시대상황을 집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회적 화제에
그치곤 한다. 김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영화계에 관계하고 있는 분들의 경우 조선인으로서 13억 인구의 중국에서
영화황제 칭호를 받는 인물을 소개하거나 연구하는 분들이 너무 없다. 전문적이고 실력있는
연구가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또 김염은 직접 조선영화에는 출현하지 않았으나,
그는 상해 조선영화인들의 활동을 적극 도와주며 간접적으로 조선영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나라 영화계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대종상이나
청룡상 등의 큰 영화제 시상식에서 그를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고,
그 영화제의 깊이와 권위를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년은 중국영화 100주년이므로
중국에서 이와같은 행사가 많이 개최될 것이다.
정리_나영필 realism@nc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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