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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금천씨는 동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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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宗正 작성일06-12-19 10:07 조회1,4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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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昊金天氏는 東夷族

소호금천씨의 本고장은 남만주 봉천 요동지방이었는데 그는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 겨려다. 소호금천씨는 일찌기 산동반도에 진출하여 중국역사의 始源的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山海經이라는 중국사서에 "少昊의 나라는 동해밖에 있는 나라"라고 하였다.

중국의 사학자 당란(唐蘭)은 "소호금천씨의 나라가 산동성 曲阜에 도읍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1977년 7월 16일자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은 중국의 光明日報를 인용, 다음내용을 보도하였다.

1) 大汶口 文明의 분포지는 山東省 濟南市의 약 100Km 남방으로부터 강소성 북부에 이르기 까지 7만평방Km에 달하는 지역이다. (충청, 전라, 경상 남북도의 면적과 비슷)

2) 방사성 탄소의 측정에 의하면 대문구 문명은 578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 상한을 거금 4천년전으로 하고 또한 考古遺品도 仰韶, 龍山의 2大 문명을 上限으로 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역사는 약 6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4) 산동성 寧陽에서 한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거기에는 死者와 함께 귀중한 陶器, 象牙로 만든 器物, 나무로 만든 궤짝 등 200여점이 묻혀 있었다.

5) 대문구 문명은 농업, 수공업, 목축업 등을 영위하였으며 또한 문자를 갖는 등 고도의 문명이었다.

6)대문구 문명 당시에는 이미 少昊라는 나라가 있었다. 소호국은 산동성 곡부지방에 있었다.

7) 소호국을 지배한 자는 질(質= 摯= 少昊金天)이라는 영웅이었다.

위의 보도내용으로 소호금천의 나라가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건국되었음을 알 수 있다.

呂不韋가 지은 <呂氏春秋>에 "그 날은 庚申日이고 그 임금은 少昊다. 庚申은 金의 날로 소호는 金德으로 천하에 군림하였다. 그러므로 金天이라 하였다."소호국의 國祖 摯가 등극한 날인 庚申日은 우리의 민속에 이어오고 있으니 디딜방아에 庚申年 庚申月 庚申日이라고 기록하는 습관은 "이 방아도 소호씨가 왕위에 오른 날에 탄생했다."는 뜻이다.

소호의 나라는 高辛氏의 帝 곡이 이어 받았는데 제곡은 은나라의 조상이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이 그 후 중국의 서북부 내몽고에 위치한 농西지방에서 匈奴 冒頓씨의 한 후국(一候國)을 건설하였다. 漢나라 高祖 유방이 40만 대군으로 모돈을 쳐들어 갔으나 포위당하여 유방도 7일간 먹지 못하였다. 한나라의 陳平이 畵工에게 命하여 절세의 미인을 그리게 하여 투기가 심한 모돈의 처 閼氏에게 사자를 보내어 많은 금품과 함께 그 미녀의 화상을 제시하면서 우리 황제가 이 절세의 미녀를 모돈에게 제공하고 항복하려 한다고 하였다. 알씨가 그러한 미녀에게 모돈의 총애를 빼앗길가 염려하여 모돈에게 "한이 강성한데 대군이 추적해 오기전에 적당한 조건으로 포위를 풀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설득하니 이에 모돈이 한고조 유방과 결의형제하고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 뒤 기원전 140년에 한무제가 제위에 오르자 대장군 衛靑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흉노와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 때 위청의 누이의 아들인 郭去病이 포기장군이 되어 기원전 120년에 병사 1만명으로 농서지방에 쳐들어가 折蘭王을 살해하고 盧候王을 참하여 渾邪王을 사로 잡았으며 포로 8천9백60명을 얻고 休屠의 祭天金人을 몰수하였다.

이에 외몽고지방에 본거지를 갖고 있던 선우(單于- 匈奴의 天子)가 연패하는 혼사왕과 휴도왕을 소환하여 처벌하려 하니 혼사왕과 휴도왕은 漢나라에 투항하기로 뜻을 모았다가 휴도왕이 뉘우쳐 한나라에 항복하지 않으니 혼사왕이 휴도왕을 암살하고 자신의 무리 10만명을 이끌고 漢에 투항했다. 이때 休屠王의 太子인 14세의 日제가 그의 아우 倫과 함께 모친 閼씨를 모시고 한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다. 휴도왕의 나라는 중국서북부에 위치한 지금의 武威郡이다. 14세에 포로가 된 일제는 처음에 漢나라 왕실의 養馬奴였다가 養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부마도위 광록대부가 되었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가 두 아들을 법도 있게 가르쳤으므로 일제의 모친이 사망하매 무제가 알씨의 화상을 甘泉宮에 그려놓고 친필로 "匈奴王妃閼氏"라 하였다.

일제가 포로로 잡혀온지 35년만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莽河羅가 무제를 살해하려고 했는데 이 때 김일제가 재빨리 망하라의 덜미를 잡아 뜰아래로 던져 무제를 구하였기 때문에 무제는 일제를 候로 封하고 일제가 사망하매 諡號를 敬候라 하였고
아들 賞을 투후로 삼았다. 이리하여 김일제를 비롯하여 國, 安, 常, 欽, 當, 遵, 등 후손이 투후의 벼슬을 하였다. 김일제에게 常과 建 두 아들이 있었는데 昭帝와 나이가 비슷하므로 3인이 친하게 지냈으며 상이 소제의 奉車(봉거)가 되고 건이 駙馬都尉가 되었다. 소제가 제위 13년만에 下世하고 宣帝가 등극하자 상이 光錄勳이 되었으며 상이 죽고 國이 투후벼슬을 이어 받았고 국이 아들없이 죽으니 일제의 둘째 아들 건의 손자 當에게 투후를 제수하였다. 전한서 기록에 의하면 투후 當의 모친 南은 곧 왕망의 生母였다.

前漢書의 王莽傳에 의하면 효원황후의 生父와 그 兄弟가 모두 元帝와 成帝때에 候가 되고 輔國의 位에 올랐으며 또한 金氏家에서 封을 받은 侯의 수가 9명에 달한다 하였다.

日제의 아우인 倫의 아들 安上은 宣帝때 闕內의 候가 되어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며 궁중과 부중의 실권을 장악했다. 안상에게 常, 岑, 敞, 明 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中郞將, 光祿大夫, 騎都尉가 되었다. 元帝가 8세에 太子가 되자 金敞이 中庶子(太子師)가 되어 은총을 받았으며 元帝가 즉위할 때 金當의 딸을 왕비로 맞아드렸다. 김일제전에는 왕망과 김당이 다같이 그들의 모친인 南의 아들이라 했으며 효원왕후전에는 효원왕후를 김당의 딸이라 하였다. 원제가 즉위한 후부터 김씨일문의 권세가 더욱 커졌다.

金敞은 涉, 參, 饒, 세 아들을 두었는데 成帝때 모두 侍中騎都尉 領三輔 胡越騎가 되었다.涉에게 湯, 融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다 諸曹將大夫가 되었으며 또 涉의 從父
欽의 아우 遷이 尙書令이 되니 이제 漢나라 王室은 金氏의 權力下에 있게 되었다.

漢書에 王莽의 群兄弟(六寸)는 모두 將軍 겸 侯가 되었는데 오직 莽의 부친 蔓은 일찍 사망하였다. 왕망의 伯父 대장군 鳳이 병으로 누우매 莽이 극진히 侍湯하니 鳳이 천거하여 莽을 荒門郞敎尉로 삼았다. 왕망이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일하니 크게 발탁되어 大司馬가 되었다. 38세의 망이 輔政을 맡았는데 얼마 후 元帝가 사망하고 成帝가 즉위하니 帝의 生母 金씨를 皇太后로 삼았다. 태후의 영향으로 자신의 친정형제
5人을 모두 候로 封하였다.

平帝가 나이 9세에 등극하니 김태황후가 섭정하였다. 김태황후는 莽에게 庶政을 맡겼으며 서기 3년에 莽은 11세의 平帝에게 자기 딸을 주어 皇后로 삼았으나 4년만에 平帝가 사망하였다. 왕망은 선제의 현손중 가장 나이 어린 2세의 劉영을 帝位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攝 皇帝가 되었으며 서기 9년에 쿠테타를 일으켜 新나라를 建國하였다. 王莽은 영특하여 대혁신정책을 단행하였다. 侯제도를 페지하고 토지를 국유화 하였으며 노예매매를 금하였고 평형물가제도를 실시하여 상인의 농간과 중간착취를 방지하였으며 화페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동북방민족의 소요와 흉년이 계속되어 이로 인한 도적떼 등으로 민심이 흉흉한 중에 劉秀의 군대가 洛陽을 공격하니 왕망의 侍從 空孫就가 왕망의 목을 베어 유수에게 바쳤다. 그 뒤 20여년간 전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로 들어 왔다는 학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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