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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諱 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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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5 15:58 조회2,3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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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총제 김한의 졸기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8월 6일(을미)]

전 총제(摠制) 김한(金閑)이 졸(卒)하였다. 김한이 병들자 쌀과 콩 20석을 내려 주었고, 이에 이르러 또 쌀·콩 50석과 종이 1백 50권을 부의로 내려 주고, 또 관곽(棺槨)을 내려 주고, 사람을 보내어 치전(致奠)하였다. 정비전(靜妃殿)도 또한 중관(中官)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아들이 둘 있으니, 김유돈(金有敦)·김유장(金有章)이다.

[태종 3년 (1403)]
07/28(계묘) 익안 대군 이방의의 사위 김한에게 내구마 1필을 내려 주다
익안 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의 사위인 김한(金閑)에게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내려 주었다. 이방의(李芳毅)가 자류마(紫?馬) 한 필을 바쳤으므로, 임금이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원전】 1 집 271 면

[태종 4년 (1404)]
02/18(기축) 제릉의 비를 세우다. 그 비문의 내용
..........익안(益安)은 증 찬성사(贊成事) 최인두(崔仁?)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석근(石根)을 낳았으니 원윤(元尹)이고, 딸은 첨총제(僉摠制) 김한(金閑)에게 출가하였다....

09/26(갑자) 익안 대군 이방의의 졸기
익안 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가 졸(卒)하였다. 이방의는 태조의 제3자요, 임금의 동모형(同母兄)이다. 개국(開國)·정사(定社)의 훈로(勳勞)에 참여하여 대군(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성질이 온후(溫厚)하고 화미(華美)한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고, 손님이 이르면 술자리를 베풀어 문득 취하여도 시사(時事)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만년에 병으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는데, 임금이 자주 그 집에 거둥하여 연회(宴會)를 베풀어 위로함이 심히 후하였다. 졸(卒)함에 미쳐 임금이 심히 애도하고 친림(親臨)하여 전(奠)을 베풀고 배례(拜禮)를 행하였다. 철조(輟朝)하기를 3일 동안 하고, 상등으로 예장(禮葬)하고, 시호(諡號)를 안양(安襄)이라 하였다. 아들은 이석근(李石根)이니, 익평 부원군(益平府院君)에 봉해졌고, 딸은 총제(摠制) 김한(金閑)에게 시집갔다.【원전】 1 집 308 면

[태종 13년 (1413)]
08/20(병인) 종친의 딸을 옹주로 봉하다
종친(宗親)의 딸을 봉(封)하였다. 익안 대군(益安大君)의 딸로서 졸(卒)한 총제(摠制) 김한(金閑)의 처와, 진안 대군(鎭安大君)의 딸로서 대호군(大護君) 이숙묘(李叔畝)의 처와 전 판관 안종렴(安從廉)의 처와, 회안 대군(懷安大君)의 딸로서 조신언(趙愼言)의 처와 전 부사(副事) 박경무(朴景武)의 처를 옹주(翁主)로 삼았다.【원전】 1 집 683 면

[세종 13년 (1431)]
10/18(기유) 박갱·변상복 등의 아내에게 군주의 호를 내리다
.............. 김한(金閑)의 아내 이씨를 무진 군주(茂珍君主)로, 이자(李孜)의 아내 이씨를 재령 군주(載寧君主)로 삼았다.【원전】 3 집 350 면


[中軍都摠制府 副摠制 光山金公 諱 閑 祭壇碑銘 幷序]

공(公)의 휘(諱)는 한(閑)이요 성(姓)은 김씨(金氏)니 광산인(光山人)이다. 그선(其先)은 신라왕자 휘(諱) 흥광(興光)이니 광주 서일동에서 삶으로 인(因)하여 적(籍)이 되니 곧 지금의 평장동이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진(禾+眞)이니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이며 시호(諡號)는 장영(章榮)이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영리(英利)니 판군기감사요 조(祖)의 휘(諱)는 정(鼎)이니 추성(推誠) 보리공신(輔理功臣) 중대광(重大匡) 광성군(光城君)이요 고(考)의 휘(諱)는 약채(若采)니 신조(新朝)에 들어가 벼슬이 충청도 도관찰출척사요 비(?)는 원주원씨(原州元氏)니 정당문학 시(諡) 문정공(文定公) 송수(松壽)의 녀(女)니 정정(貞靜)한 곤범이 능히 군자(君子)의 짝이 될만하더라 우왕(禑王)丁巳(西紀一三七七)年에 고정리(高井里)집에서 공(公)을 낳으니 공(公)이 나면서 영오(穎悟)하고 자람에 효우(孝友)가 근천(根天)하더니 불행(不幸)히 백씨(伯氏)께서 조세(早世)하고 형수께서 고아(孤兒)를 업고 멀리와 한 집에 살면서 공(公)이 형수 받들기를 자모(慈母)같이 하고 조카 무육하기를 친아들같이 하여 지극히 성경을 다하며 종사(宗祀)를 잇게 하여 이로부터 현철(賢哲)과 충량(忠亮)이 서로 이어나서 동방(東方)의 갑벌(甲閥)이 되었으니 지금 연산(連山)의 김씨(金氏)는 실로 공(公)의 아름다운 덕(德)을 힘입었도다. 누가 공경하고 우러러 보지 않으리오 관찰사공의 상사(喪事)를 당(當)하여 조카와 아우로 더불어 노묘(盧墓)하여 슬퍼하며 모상(母喪)에 또한 같이하니 그 효우(孝友)의 돈독함이 대개 이와 같더라 벼슬은 중군도총제부(中軍都摠制府) 부총제(副摠制)에 이르렀다. 무진(戊辰)(一四四八)年 十月 七日에 졸(卒)하니 수(壽)는 七十二요 고양(高揚)에 장사(葬事)하였다. 尙(配)은 회인현주(懷仁縣主) 이씨(李氏)니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의 녀(女)요 태종조(太宗朝)에 선혜옹주(善惠翁主)로 추봉(追封)되었다. 병자(丙子)(西紀一四五六)年 三月 二十六日에 졸(卒)하였고 묘(墓)는 양지교동(陽智橋洞)이니 지금의 안성군 고삼면 월향리 자좌(子坐)다 2남과 2녀를 낳으니 장남(長男)은 영동현감(永同縣監)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추증(追贈) 받은 유돈(有敦)이요 다음은 통정대부 돈령부직장 광주부윤 유장(有章)이요 장녀(長女)는 감찰(監察) 해양(海陽) 김경재(金敬哉)에게 출가(出嫁)했고 다음은 연일(延日) 정철권(鄭鐵拳)에게 출가(出嫁)했다. 유돈(有敦)은 연안김씨(延安金氏) 문익공(文翼公) 여지(汝知)의 녀(女)를 맞이하여 4남을 낳으니 장(長)은 오(?)니 내금위(內禁衛)요 제(濟)는 평시서령(平市署令)이요 섭(涉)이요 옥(沃)이니 참봉(參奉)이요 유장(有章)은 평산신씨(平山申氏) 첨정 응철(應喆)의 녀(女)를 맞이하여 2남을 낳았으니 장(長)은 빈(濱)이니 부호군(副護軍)이요 면(沔)은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이요 시호(諡號)는 장도(莊悼)다 증현손(曾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슬프다 여러번 병선(兵?)을 겪어 고비위(考?位)의 묘(墓)를 잃은지 오래더니 七代孫 풍기군수(豊基郡守) 상빈(尙賓)에 이르러 백방(百方)으로 찾아서 다행히 비위(?位) 유궁(幽宮)을 발견하여 지금까지 수호(守護)하나 고위(考位)의 산소(山所)는 마침내 실전(失傳)하였으니 애통함을 이길 수 없도다. 이에 자손들이 설단(設壇)하자는 의논을 제창(提唱)하여 모두 예(禮)에 합당(合當)하다 하고 드디어 마음과 힘을 합하여 비위묘(?位墓) 상단(上段)에 제단(祭壇)을 설립(設立)하니 시종역사(始終役事)를 감독한 분은 공(公)의 十八代孫 현수(賢洙)씨다. 역사(役事)를 마치고 현수(賢洙)씨가 나에게 현각문(顯刻文)을 지으라 하니 스스로 돌아보건대 글 할줄 모르는 나로서 어찌 감히 감당하리오 사양하기를 여러번 하였으나 재삼 간청하므로 졸렬(拙劣)함을 잊고 이어 명(銘)하노니 광산(光山)의 망족(望族)이요 평장(平章)의 고택(古宅)이라 효도로써 몸을 가다듬어 충성으로써 나라를 도왔도다. 지금(至今)토록 후곤(後昆)들이 유택(遺澤)을 입었도다.

왜구(倭寇)의 침략이 어찌 저와 같이 거칠고 혹독한고 산소가 실전(失傳)하니 애통한 한이 간절하고 지극하도다 아! 자손(子孫)들이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이에 돌을 다듬어 이에 명(銘)하고 이에 새겼도다. 그 우모(寓慕)할 곳을 만드니 단(壇)의 높이 열자로다. 자손이 보호하니 길이 길이 보전하리라.

방후손(傍後孫) 윤중(允中) 근서(謹書)

[懷仁縣主 追封 善惠翁主 全州李氏 墓碣銘 幷序]

옹주(翁主)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관(貫)은 전주(全州)이니 신라(新羅) 사공(司空) 휘(諱) 한(翰)으로 시조를 삼는다. 고조(高祖)는 도조대왕(度祖大王)이니 휘(諱)는 춘(椿)이요 증조(曾祖)는 환조대왕(桓祖大王)이니 휘(諱)는 자춘(子春)이며 조(祖)는 태조대왕(太祖大王)이니 휘(諱)는 단(旦)이요 자(字)는 군진(君晉)이요 호(號)는 송헌(松軒)이요 초휘(初諱)는 성계(成桂)요 자(字)는 중결(仲潔)이며 고(考)는 익안대군(益安大君) 휘(諱) 방의(芳毅)이니 태조대왕(太祖大王)의 第三子이다.
옹주(翁主)는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중군도총제부(中軍都摠制府) 부총제(副摠制) 광산(光山) 김한(金閑)에 하가(下嫁)하였는데 부용(婦容)과 부덕(婦德)이 구비하여 귀하다고 교만하고 거만하지 아니하여 남편을 섬기되 공경하고 시부모를 섬기되 효도로하며 친척 대접하기를 화목으로 하고 노복(奴僕)을 부리되 예로써 하니 상하(上下)가 차례가 있더라.
구(舅)의 휘(諱)는 약채(若采)이니 충청도(忠淸道) 도관찰(都觀察) 출척사(黜陟使)요 고(姑)는 원주원씨(原州元氏) 정당문학(政堂文學) 시(諡) 충정공(忠定公) 송수(松壽)의 따님이었는데 부모가 살았을 때 잘 봉양하고 죽었을 때 한됨이 없이 한결같이 예를 따라하니 친척이며 노복(奴僕)까지도 공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 없었다.
총제공(摠制公)이 몰(歿)함에 태종(太宗)은 쌀과 콩 二十石을 주었고 丙子 三月二六日에 옹주(翁主)가 졸(卒)하니 또 부의로 쌀과 콩 五十石과 백지(白紙) 百五十卷을 주고 관곽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 치제하고 정비전(靜 殿)에서도 중관(中官)을 보내어 제사하고 선혜옹주(善惠翁主)로 봉했다.
묘(墓)는 양지교동(陽智橋洞)인데 지금 안성군 고삼면 월향리 자좌원(子坐原)이다.
2남2녀를 낳았으니 장남(長男)은 유돈(有敦)이니 영동현감(永同縣監)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추증받았고 다음은

유장(有章)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녕부(敦寧府) 직장(直長) 광주부윤(廣州府尹)이요 여장(女裝)은 해양(海陽) 김경재(金敬哉)에게 출가했으니 감찰(監察)이요 다음은 연일(延日) 정철권(鄭鐵拳)에게 출가 했다.
유돈(有敦)은 4남이니 장(長)은 오( )이니 내금위(內禁衛)요 다음은 제(濟)이니 평시서령(平市署令)이며 다음은 섭(涉)이요 다음은 옥(沃)이니 참봉(參奉)이요 유장(有章)은 2남이니 장(長)은 빈(濱)이니 부호군(副護軍)이요 다음은 면(沔)이니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이요 시(諡)는 장도(莊悼)이고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슬프도다 여러번 병란을 겪었기 때문에 고비위(考 位) 묘소(墓所)를 실전(失傳)하였는데 七代孫 풍기군수(豊基郡守) 상빈(尙賓)이 백방으로 수심하여 다행히 비위( 位)의 묘소는 찾아서 지금(至今)까지 수호(守護)하였으나 부군(夫君)의 묘소는 마침내 잃은지라 부득이 지난 임술(壬戌)년에 비위( 位) 묘 뒤에 제단(祭壇)을 모으고 세일제를 올리는 중이다.
어느 날 그 十八世孫 홍수(弘洙)와 현수(賢洙)가 무덤에 현각(顯刻)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나 스스로 돌아보건대 덕이 없었고 식견이 얕아서 감히 이러한 큰 역사를 감당할 수 없으나 동족(同族)의 의리를 생각해서 또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그 대략만 추려서 위와 같이 쓰고 이어서 명(銘)하노니
옹주의 낳음은 떨기 계수 나무와 곤산에 옥이었고, 옹주가 졸함에 내린 부의 특별했도다.
월향리 양지에 봉분 높이 열자로다. 무덤에 표하려고 돌을 깍아 갈고 쪼았네.
저 무궁에 붙이니 바람과 비에도 부서지지 않으리라.

무인(戊寅) 만하(蔓夏)
방후손(傍後孫) 윤중(允中) 근찬(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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