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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의 동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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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정 작성일06-12-19 10:12 조회1,8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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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中에서 秦 이전의 역사는 東夷族의 역사라 볼 수 있으나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사로 날조하여 놓았다. 즉 중국의 학자 章太炎은 "漢나라 때의 학자라는 사람들이 중국의 역사를 모조리 위조해 놓아서 漢나라 이전의 문화를 연구할 수 없게 死滅시켰다."고 했으며 梁啓超도 "歷代로 王朝가 갈리면 中國歷史와 當代 왕조에 불리한 기록들은 모두를 王命으로 깎고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中國史는 알 길이 없다."고 했다

歷代神仙通鑑(康熙帝 때 著述)과 綱鑑金丹(明나라 潘光祖 著述)에는 東方에 東戶氏가 일어나 250년을 다스리다가 드디어 太白山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의 자손이 7代를 이어 갔다. 이로 부터 여러 백년을 지난 뒤 마침내 동해에 성인이 나타나 六龍이 수레를 타고 밝음을 쫓아 百婁山(白山)에서 살았다. 그가 비로서 백성들에게 나무를 엮어 집짓는 방법을 가르쳐 준 까닭에 그를 有巢氏라 하였다. 유소씨가 200년을 다스리고 그 자손들이 8代를 이어 갔다. 유소씨가 동아역사에서 불을 맨 처음 만들어낸 사랍람이다. 그 뒤 여러 백년을 지나서 震에서 나온 太昊伏羲氏가 임금이 되었다. 司馬遷의 史記에 의하면 "태호복희씨는 東夷人으로서 그 성은 風氏이며 母는 화서(華胥)이다. 복희씨는 冀州의 雷澤(山東省 濟陰)가에서 잉태되었고 甘肅省에 있는 成紀에서 出生했다. 복희는 성스러운 덕이 있어서 天文을 보고 八卦를 그었다. 만물의 情을 살려 글자를 만들어 정치를 하였으며 그는 木德으로 임금이 되고 봄의 계절을 맡으니 周易에서는 帝가 震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震 땅에서 나온 임금이요 正月을 맡은 임금이어서 그 임금의 號는 太昊이며 이 震 땅의 위치는 東方에 있고 또 이것이 해의 밝음을 뜻하는 까닭에 太호라고 부르는데 호는 밝음을 뜻한다. 그는 훗날 冀州땅인 河南省의 陳이라는 땅에 가서 도읍을 정하고 동편인 太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111년간 임금자리에 있었다.

史記(권4 周本紀 제4 左傳 昭公 17)에 依하면 伏羲氏가 도읍을 한 陳땅을 뒷날 太昊의 터(墟)라 하고 周 武王이 舜임금의 공덕을 기리는 뜻에서 舜임금의 후손인 규滿을 이 陳땅에 封했다. 그래서 이 陳땅을 규氏姓이 차지했다고 하였다.

강감금단에 의하면 복희 여동생인 女와는 BC 3407년에 임금이 되었다.
史記(권130 末 神史記 三皇本紀)에 의하면 여와가 재위 15년만에 죽으니 神農氏는
여와의 外孫으로 (신농씨는 복희씨의 후손이니 춘추시대의 宿, 須, 句, 전, 臾, 는
모두 風氏의 후손이었으며 여와씨 역시 風姓이었다) 뒤에 임금이 되었다. 신농의
부친은 少典이고 母는 여와의 딸 安登이다. 신농은 陝西省 岐山縣 姜水가에서 자라난 까닭에 姓을 姜이라 하였고 火德으로 임금이 된 까닭에 炎帝라 했으며 또 농사법을 가르쳐 준 까닭에 神農이라 했는데 .八卦를 곱해서 64爻를 만들기도 했다.

사기(신사기 삼황본기)와 歷代神仙通鑑(권2, 제1節)에 의하면 姜氏姓을 가진 諸侯들 가운데 치우(蚩尤)가 있었다. 치우는 신농의 후손이다. 신농의 나라가 망한 뒤 州, 甫, 甘, 許, 戱, 露, 齊, 紀, 怡, 向, 申, 呂 등의 姓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강성의 후손이다.

사기(권1, 오제본기 제1)에는 백이가 강태공의 조상이라(佰夷太公之祖也)했고
史記(권32, 齊太公世家篇)에는 강태고 呂尙은 東夷之士로서 神農의 후손인 동시에 또 佰夷의 후손이기도 하다. 그의 성은 姜이요 이름은 牙이다. 그의 조상인 백이가 舜임금과 堯임금을 도와서 큰 공을 세웠으므로 이 때에 백이를 지금의 산동성 臨淄縣 呂라는 땅에 封했는데 이 땅이 훗날에 齊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여기에서 말한 백이는 기자때의 백이와 숙제의 그 백이가 아니라 순임금 때 벼슬한 백이를 말한다.)

史記의 補史記에 의하면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이 모두 少典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가 모두 유와씨의 자손이며 황제의 어머니가 염제의 어머니 후손이므로
뒤에 강씨성인 염제와 희씨성인 황제가 다같이 소전씨로 부터 나온 것이고 황제는
소전국 임금 啓毘의 次子로 有熊國의 임금이 되었다. 그가 曲阜縣의 壽丘의 姬水가에서
출생했으므로 姓을 姬氏라 했다가 뒤에 公孫氏라 했고 또 이름을 헌원이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司馬遷의 史記에는 "黃帝는 白民에서 낳았으니 자신이 東夷에 屬한다"고 하였으며
前漢書(卷20)에는 염제신농의 왕비가 황제를 낳았다고 했으니 이는 황제가 신농의 자손임을 나타내고 있다.

禮記와 강감금단에 의하면 소호금천은 황제헌원의 長子이다. 그런데 1977년 중국의 사학자 당란이 소호국 유적을 탄소측정한 결과 5787년전의 것임을 알아냈다.그러므로 소호금천이 황제이전의 사람임을 알 수있다. 소호의 이름은 질 또는 摯요 姓은 己 또는 紀이다. 그는 쇠(金)의 德으로 임금이 되고 흰 것을 숭상한 까닭에 金天氏라 하였다.

좌전(소공 17년)을 보면 淡子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의 조상인 금천이 東夷人이라 했고

三國史紀 金庾信傳에는 新羅人은 스스로 金天의 後孫이라 한다
(羅人 自謂少昊金天之後)고 했으며

중국사학자 徐亮之는 그의 著書 <中國史前史話>(下篇 제4 灰陶文化)에서 "少昊金天氏 東夷部族 最早的 盟主"라 했고

삼국유사(紀異傳 第1)에 皇娥가 窮桑의 들에서 노닐더니 그 때 白帝子라는 神童이 있어 서로 사귀어 少昊를 낳았다고 하였다

중국의 辭海에 依하면 白帝는 五天帝의 하나고 少昊는 少호라고도 표기하여 황제의 아들이고 궁상에서 邑하니 號를 窮桑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中國古今人名大辭典에 少昊를 少호라고도 하고 그가 태호복희의 道法을 배우고 닦았으므로 太昊에 다음가는 사랍이라 하여 少昊라고 한 것이라고 하였다.

後漢書(권30)에 소호금천씨가 옛 奄나라인 魯나라 곡부의 북녘에 있는 궁상에서 임금이 되었다가 뒤에 곡부로 이거했다고 했다.

綱鑑金丹에 "전頊高陽(BC 2531-2436)의 조부는 황제헌원이요 부는 昌意이며 母는 女樞인데 이 여추가 전욱고양을 若水에서 낳았다."고 하였다.

史記(권1)에 전욱고양은 황제의 孫이요 昌意의 子라 하였다. 전욱고양의 뒤를 이은 임금은 제곡고신(BC3435- 2365)인데 강감금단에 제곡고신의 성은 姬씨요 그의 조부는 金天이고 부는 嬌極인데 河南省 박, 뒷날 殷의 서울이라는 땅에 도읍을 정했다 했으며

史記(권13)에 堯임금(BC 2357- 2360)은 제곡고신의 아들이며 姓은 伊祁, 또는 祁이며 이름은 放勳이고 황제헌원의 5대손이라고 했다.

吳越春秋에 의하면 夏나라의 禹王도 자기 자신을 嘉夷(가이=훌륭한 東夷)라고 自讚했으며 우임금이 나이 30에 장가들지 않았는데 塗山에 이르렀을 때 혼기를 놓쳐 제도에 벗어날까 염려했으나 그래도 사양해서 말하기를 내가 장가들려면 반드시 應報가 있으리라 했는데 때마침 白狐九尾가 나타나 응보를 禹임금에게 만들어 주었다. 우임금이 말하기를 "白은 나의 의복 빛깔이요 九尾는 지극한 數로서 내가 왕이 될 증거이다. 塗山의 노래에도 '유유白狐 九尾方方'이라는 말이 있다. 나의 집안은 훌륭한 東夷로서 손님으로 와서 王노릇을 하면서 집을 이루고 王室을 이루었으며 나는 저(彼=中國)를 昌盛하게 했으니 내가 장가듦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舜임금은 孟子와, 史記評林 等 中國古典에 東夷人이라고 되어 있으며 중국사학자
서양지와 임해상은 舜임금을 殷민족의 始祖라 했으며 東夷人이며 산동반도에 정착,
황하문명을 연 민족이 동이민족이라고 하였다.

1992년 12월 30일 홍콩의 중국계 신문인 文匯報와 大公報는 서기전 2300년의 垓字陶磁器가 (古朝鮮時代 우리겨레의 옛터인)山東省 추평현 丁公村에서 出土되었는데 이 도자기에는 기원전 2300년전에 사용한 한자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보도했다.

風俗通에 의하면 "舜임금은 그 이름이 무궁화(橓)를 나타내며 白衣를 입었다."고 했으며 史記에 "殷민족은 白衣를 입었다"고 되어 있으며

史記(卷 1)에 "舜임금(BC 2255-2208)은 東夷族으로 복주(복州) 雷澤縣의 姚丘에서 낳았으므로 그의 姓은 姚氏요 이름은 重華"라 했다고 되어 있다.

중국사학자 林惠祥은 그의 著書 <中國民族史>에서 東夷人인 舜임금은 殷나라의 조상이요 또 殷字는 곧 夷字이며(殷字作夷) 夷字는 射字에서 나누어져 된 글자인데 殷人들은 살고양이(놜理)를 쏘기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林惠祥은 또 朝鮮과 殷은 같은 系統아며 東夷와 貊은 同族이라고 하였다.

史記(권3, 殷本紀 제3)에 殷니라 시조 설(契, 卨, 薛)은 帝곡高辛의 子로 東夷族이요
名이 天乙(하늘)이며 東夷人이라고 했다.

中庸(右 제30章 言未道也)에서 子思는 孔子가 堯 특히 舜의 思想을 繼承했다고 했으며

稽古錄(권 4, 有虞氏 下)에 孔子는 "後世雖有作者 虞舜不可及也己矣"라 하였고
史記(권 47., 孔子世家 17)에 孔子는 殷나라 湯王의 後孫이라고 했으며

孟子(권 12)에 孟子는 孔子의 학문과 道는 貊道라 하였으니 濊貊의 道라는 뜻이다.

呂思勉 童書業 두 사람이 共著한 古事辨(제7冊 제1편 p. 92)에 殷이 東夷族이라는
것은 중국학계의 定說이라고 하였으며

禮記(檀弓篇)에 "夫子曰丘也 殷人也"라 했고

史記(권47, 孔子世家 제17)에 공자가 "나는 殷나라 사람이다"라 했으며

論語(권9, 子罕 제9)"子欲居九夷 或曰 陋之如何 子曰君子居之 何陋之有"라 했으니 즉
공자는 구이에 살기를 원했다. 누추해서 어찌 하겠는냐고 누가 물으니 군자가 사는데 어찌 누추함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韓人 공자는 九夷에서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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