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자료

조선왕조실록(諱 長生)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5 22:33 조회1,648회 댓글7건

본문

전 형조 참판 김장생의 졸기 인조 9년 신미(1631, 숭정 4) 8월 9일(경술)

전 형조 참판 김장생(金長生)이 죽었다. 장생은 자(字)가 희원(希元)으로 자질이 돈후하고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였다.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따라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여 마음을 오로지 쏟아 독실히 좋아하였다. 독서할 적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매일 경전(經傳)과 염락(濂洛)의 여러 책들을 가지고 담겨 있는 뜻을 탐색하였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낮으로 사색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 귀취를 얻고난 다음에야 그쳤다. 또 고금의 예설(禮說)을 취하여 뜻을 찾아내고 참작하여 분명하게 해석하였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하였다. 일찍이 신의경(申義慶)이 편집한 상제서(喪制書)를 정리하고 절충하여 《상례비요(喪禮備要)》라고 이름하였는데, 세상에 유행하였다. 장생은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며 화기가 애애하였으나, 일의 시비를 논하고 사람의 선악을 분변할 때는 엄정한 말과 낯빛으로 굽히거나 흔들림이 없었다.
선조(宣祖) 초에 유학을 존숭하여 장려하였는데, 상신(相臣) 박순(朴淳)이 성인의 경전에 침잠하고 옛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는다고 그를 천거하자 드디어 벼슬하여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다. 상이 반정(反正)하여 덕이 높은 이를 구하였는데, 장령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 왔다. 이때 상이 바야흐로 사묘(私廟)에 직접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예관(禮官)이 ‘상이 친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왕통을 이은 이상 본생(本生)의 어버이에 대해 두 아버지를 모신다는 혐의가 없으니 축사(祝辭)에 의당 아버지[考]로 일컫고 아들로 일컬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장생이 수천 마디의 말로 상소를 올려 그 설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이는 모두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이 일어나자 장생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옳지 않음을 힘껏 말하였으나 끝내 쓰이지 않았다. 장생은 조정에 있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은데다가 나이도 많았으므로 드디어 청하여 연산(連山)으로 돌아갔는데, 형조 참판으로 불렀으나 장생은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집에서 병으로 죽으니 나이 84세였으며, 학자들이 사계(沙溪) 선생이라고 일컬었다.부고(訃告)를 아뢰자 제사와 부의(賻儀)를 하사하고 이조 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장례 때에는 본도(本道)에게 조묘군(造墓軍)을 지급하도록 하였는데, 원근에서 장례에 모인 자가 거의 1천 명이나 되었다. 뒤에 장유(張維)가 경연에서 시호를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예를 의논한 것이 합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원전】 34 집 440 면

김장생(金長生) 인물정보
1548(명종 3)∼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출신.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집(集)은 그의 아들이다.

[가계·관력]
*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
의 문하에 들어갔다.
* 1578년(선조 11)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
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 그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
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 그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의 직을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고, 1596년에 한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 이듬해 봄에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함으로써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 1601년에 조정에서 《주역구결 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 이듬해에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 그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 1610년(광해군 2)에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그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그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
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하고, 집의의 직을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중요한 정사(政事) 13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하여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
하여,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 같은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
로 온 세자를 호위하고,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하여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학문·교육]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을 뿐더러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같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그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아들 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 그리고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고 있었지만, 예학(禮學)분야는 송익필로부터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저술]
인조 즉위 뒤 서얼출신이었던 송익필이 그의 아버지 사련(祀連)의 일로 환천(還賤)된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하여 서원을 세웠을 뿐더러 1만8천여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해 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沙溪先生全書, 儒敎淵源(張志淵),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선조30년(1597)12월 6일(김장생·유색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장생(金長生)을 단양 군수(丹陽郡守)에~【원전】 23 집 346 면

광해군1년(1609)8월 26일(~김장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김장생(金長生)을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삼았다.【원전】 31 집 450 면

인조1년(1623)
3월 23일(장령 김장생이 노병으로 사양하면서 이귀 등에게 서신을 보내어 8조목을 경계하다)
장령 김장생(金長生)이 노병으로 사양하고 이르지 않았다. 이어 이귀(李貴)·김류(金?)·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에게 서신을 보내 임금을 보좌할 것, 민생을 구제할 것, 폐주를 보전할 것, 옥사를 삼갈 것, 인재를 수용할 것, 기강에 진작할 것, 공도를 넓힐 것, 탐욕의 폐풍을 혁신할 것 등 여덟 조목을 간곡히 경계하였는데, 그 서신의 대략에,
“국가가 불행하여 적신(賊臣)이 날뜀으로써 2백 년 예의의 나라로 하여금 모두 금수의 지경으로 빠지게 하였는데, 일찍이 구국 혁신의 대공이 이처럼 갑자기 공들의 손에서 이루어질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이미 땅에 떨어진 기강을 바로잡고 망해가는 국운을 부지하였으니 이는 실로 불세출의 의거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시작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유종의 미가 어려운 것이니, 반드시 시종 선처하여 인심이 흡족해 한 후에야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고 사우(師友)를 저버림이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어 인심에 차지 못하면 훗날 말하는 자는 필시 오늘날의 의거는 나라를 위해 역적을 토벌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귀를 위해 한 것이라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무한한 행복은 또한 무한한 걱정이다.’ 하였듯이 오늘날의 책임은 전부 공들의 몸에 모인 것이라 삼가 공들을 위해 걱정하는 바이다.
임금이 즉위한 처음에는 오직 보좌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의당 가언(嘉言)과 지론(至論)으로 날마다 상 앞에 개진하면서 좌우로 보도하여 요순(堯舜) 이상의 임금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서경》에 이르기를, ‘처음을 조심하여 마침을 삼가라.’고 하였으니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오늘날의 형세는 마치 꺼꾸로 매단 것을 풀어 놓은 격이다. 기갈이 극심할 때에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 맹자의 말에 ‘일은 옛사람에 비해 절반이나 공로는 반드시 배나 된다.’는 것이 바로 지금을 두고 한 말이다. 만약 그대로 폐습을 답습하며 급급히 구제하지 않는다면 크게 기대하던 나머지 필시 백성들이 실망할 것이다. 난리 후 백성을 괴롭히던 폐정과 잡세를 모두 면제하며 공안을 고치고 방납을 막은 후에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이 위로될 수 있을 것이다.
폐조가 윤리와 기강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화를 취한 데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으나 일국에 군림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고, 세자는 실덕(實德)은 없으나 특별한 과오도 드러나지 않았으니, 더럽더라도 참고 둘 다 목숨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실로 성세(聖世)의 미덕이다. 처음에는 도로에서 와전하기를, 세자가 반란군에게 잘못되었다고 하였으나, 며칠 안 되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병인 반정 때 세자와 왕자가 모두 보전되지 못한 데 비하여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직 여러분이 끝까지 잘 주선하여 후세의 구실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또한 훌륭하지 않겠는가. 병인 반정 때에는 주문(奏聞)이 명확하지 못하여 양위라고 일컬었으니, 노산군(魯山君) 때의 일과 같은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중원 사람들이 오랫동안 의심을 품어 심지어는 그대 나라 상왕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까지 하였다. 지금은 솔직하게 말하여 전일과 같은 일이 없게 하라.
역적이 창궐하여 그 무리들이 많다. 모후를 유폐하고 강상을 무너뜨린 것, 유폐와 시해를 청한 상소, 정청한 처사 등 그들의 죄상을 추구하면 비록 모두 죽이고 용서하지 않아도 가하다. 그러나 왕자(王者)의 옥을 다스리는 법에 있어 차등의 분별이 없을 수 없다. 오형(五刑)과 오류(五流)의 경중 대소가 법전에 소상히 실려 있으니, 저울대를 잡고 신중히 살펴 혹시라도 남형이 없게 하라. 흉도라 해서 꼭 죽이고자 하지 말고 같은 무리라 해서 꼭 용서하고자 하지 말라. 그리고 인척이라 해서 의심을 두지 말고 거짓 명성으로 해서 꺼리지 말라. 죽일 수도 있고 안 죽일 수도 있는 자에게는 되도록 가벼운 형을 가하라. 세상에선 오왕(五王)의 유화(遺禍)로 경계를 삼으나 이는 군자의 말이 아니다.
지난 폐조 때에는 사람을 위해 벼슬을 택하고 정사는 재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간신배를 신임하고 현량한 자들을 내쫓아 끝내는 나라를 잃고 말았다. 지금의 계책은 먼저 조정을 바루고 널리 인재를 거두어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의(私意)를 막는 데 있다. 피차를 논할 것 없이 현량하면 곧 등용하며,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여 모두 그 직위에 적합한 연후에 백관들이 협력과 화합을 이룰 것이며 모든 업무가 밝아질 것이다. 정청(庭請)한 무리와 인척 중에는 쓸 만한 사람이 있어도 먼저 이들을 등용하여 임금의 사심을 열어 놓고 사방에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된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관직은 오직 어진 인재에게 내린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서관(庶官)은 임금이 친애하는 사람을 시키지 않는다.’고 하였다.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국가의 치란은 기강의 수립 여하에 달려있고, 기강의 수립 여하는 임금이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달렸다. 진실로 임금의 강단을 분발하고 나라의 대강(大綱)을 정리하여 상하가 서로 노력해서 상호 협력의 조화를 이루며, 백관들이 서로 규계하여 각기 분당하는 사심이 없으며, 상줄 건 상주고 벌줄 건 벌주어 권장과 징계를 적절히 하며, 어진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며 좋고 나쁜 것을 제대로 밝히며 궁부(宮府)가 일체가 되어 내외가 서로 도운 연후에야 조리가 바르고 매사가 순조로와 나라의 다스림이 날로 빛나는 발전을 이룩할 것이다.
정의와 영리, 공과 사의 분별은 성인의 말씀에 몹시 분명하다. 진실로 위에 있는 사람이 먼저 대본(大本)을 세우고 공명 정대한 길을 넓히고 일대의 선치를 크게 천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고질적으로 쌓인 폐습을 혁신할 수 있겠는가. 폐조가 사심을 따르고 공의를 무시한 처사를 말할 만한 것이 비일비재하지만 사람을 쓰고 과거를 보이는 것에서 더욱 심하였다. 현우(賢愚)와 재부재(才不才)를 막론하고 오직 뇌물 바친 다소 만을 보았으므로 결국 나라가 나라 꼴이 못 된 것이다. 반드시 이 두 가지 일을 공정히 하고 이 공정심을 미루어 나아가 모든 분야에 확장시켜, 한가지의 일도 공정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 한 사람도 공정으로 말미암지 않는 자가 없은 후에야 요행을 바라는 것과 부정한 벼슬길을 막을 수 있어 치도(治道)가 크게 변할 것이다.《서경》에 이르기를, ‘치도에 승강이 있으며 정치는 그 풍속으로 말미암아 변한다.’고 하였으니, 풍속을 바꾸는 것은 오직 임금의 심기 일전에 있는 것이다. 지금 탐욕의 풍속이 세상을 옮겨 놓았고 사욕의 물결이 하늘에 닿았다. 조정의 치란과 민생의 고난이 이로 말미암는 것이다. 반정 초기니, 먼저 본원을 맑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검약으로 아랫사람을 통솔하여 혼탁한 자를 물리치고 청백한 자를 등용하며, 아랫사람을 해치고 웃사람을 이롭게 하던 폐정을 모두 혁파하고, 백성을 해치고 자신을 살찌우던 수령을 일체 제거하여 염치를 숭상하며 지치(至治)를 기필하라. 공들도 청렴 조신으로 처신하여 조정을 격려하며, 주고 받는 일을 반드시 엄격하고 정직하게 하여 정국(靖國) 때 삼대장(三大將)의 소행과 같이 하지 말라.나는 공들이 거사한 이후 기쁜 마음은 적고 걱정되는 생각이 많다.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며 걱정되는 마음이 조금도 풀리지 않는다. 지금 공들의 성대한 덕업으로 태평을 이룩한다면 내 비록 물러나 초야에 있어도 또한 그 혜택을 받는 것이 많으리라. 지금 정목(政目)을 보건대 나로 대관(臺官)을 삼았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오랫동안 버려진 중에 이처럼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니, 의당 신병을 참고 나아가 새 임금에게 사은하며 그 화기 넘치는 존안을 뵙고 물러나 제공들과 함께 두루 주선하여 성대한 업적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해야 할 것이나, 나이 80에 가깝고 보니 두 귀를 전혀 들을 수 없다. 일찍부터 조정에 있던 자라도 물러나야 할 처지인데 더구나 몸을 부축받고 다니며 다시 벼슬의 반열에 수행하겠는가. 이에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진심을 말하여 멀리 있는 나의 얼굴을 대신한다. 여러분은 채택하여 처리해 주기 바란다. 그러면 그 보다 더한 다행이 없겠다.”
하였다. 이귀 등이 이 글을 받고 크게 기뻐하면서 이 글을 상에게 올렸다. 상이 이를 보고 나서 가상히 여기며 찬탄하였다.【원전】 33 집 514 면

4월 14일(장령 김장생이 사직을 청하다)
장령 김장생(金長生)이 소명을 받고 올라와서 아뢰기를,
“신은 천품이 조잡하고 학술도 천박해서 세상의 일에 어느 한 가지도 능한 것이 없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초야에 묻혀 지내 오면서 스스로 시골에서 여생을 마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교화를 펴시는 시대를 만나 맨 먼저 분에 넘치는 직책을 제수받게 되었으니, 의리상 마땅히 즉시 대궐에 나아가 사은 숙배해야 했던 것인데, 나이가 거의 80에 가까워 근력이 이미 다 떨어졌기 때문에 일찍이 나아가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감히 상소를 올렸었습니다. 그러나 성은이 중첩되고 소명이 여러 번 내려지면서 가교를 타고 오라는 명까지 계셨으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저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어 병을 무릅쓰고 등정하였는데 다행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혈기 쇠모되고 정신이 혼미하여 몸을 부축받으며 반열에 나가는 것만도 이미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종묘 사직이 다시 안정되고 윤기가 회복되어 퇴폐한 기강을 엄숙히 떨쳐야 되는 때인 만큼 용렬하고 노쇠한 신이 결코 감당해낼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신의 직을 깎아 개정하시어 부당한 분수를 편케 하소서.”하니, 상이 답하기를,“내가 즉시 인견하고는 싶지만 마침 재계 중이라서 그러지 못한다. 사직하지 말고 직책을 살피도록 하라.”하였다.ㅋ`【원전】 33 집 524 면

5월 10일(김장생과 박지계를 인견하여 선비의 습속 등을 논의하다. 따로 바친 김장생의 별서)
상이 장령 김장생(金長生)과 지평 박지계(朴知誡)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나라에 제사지내는 일이 있었던 관계상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도 즉시 인대(引對)하지 못하였으므로, 당초에 지성으로 오기를 청했던 뜻에 어긋난 점이 있게 되었다.”
하니, 김장생이 아뢰기를,“신의 나이가 올해로 일흔 여섯이니 전부터 조정에 있었던 사람이라도 치사(致仕)해야 합니다. 더구나 저는 시골에 묻혀 살면서 마땅히 물러나야 할 시기를 이미 넘긴 사람인데, 외람되게 중책을 맡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국가의 사체로 보더라도 어찌 풍헌(風憲)을 담당하는 곳을 일개 병이나 다스리는 양로원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하고~
상이 이르기를,“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학문과 덕행이 훌륭하다는 말을 익히 듣고 항상 한번 보기를 원했으나 그러지 못했는데, 이제 서로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니, 김장생이 아뢰기를,“성은을 거듭 내리시고 후대하여 주시므로 감히 시골에 물러가지 못하고 그저 한번 이라도 천안(天顔)을 우러러 뵌 뒤에 시골에 물러가 여생을 마치려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간절히 귀향을 간청하였으나 상이 부드럽게 타이르며 윤허하지 않았다. 김장생이 아뢰기를,
“이도 다 빠지고 귀도 먹어 언어로는 상달할 수 없기에 별록(別錄)으로 바칩니다. 그리고 사묘(私廟)에 관한 일은 진정 소루하고 미천한 신이 참람되게 의논드릴 수 없는 것이긴 하나 언관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감히 소회를 개진한 것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개진한 내용이 무척 좋았으나 이미 정했기 때문에 그대로 따를 수 없었으니 매우 미안하게 되었다.”하였다. 상이 김장생의 별록을 다 열람한 뒤에 또 이르기를,
“이 밖에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거든 말하라.”하니, 김장생이 아뢰기를,
“반정(反正)의 거사를 일으키시어 강상(綱常)을 일으켜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키신 일이야말로 예전에 없었던 위대한 업적이십니다. 김류(金?)·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과는 모두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이므로 일찍이 개인적으로 글을 써 보낸 적이 있는데, 위로 번거롭게 예람(睿覽)까지 하시게 되었으므로 지극히 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생각하는 바는 모두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앞으로 만약 선처해야 될 일에 미진한 점이라도 있게 된다면 후세의 비난을 받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나는 재주도 없고 덕망도 없어 눈 앞에 닥친 일도 빠뜨리고 있는데, 시행해야 될 일들을 대부분 여유가 없어 못하고 있다.”하였다. 김장생이 아뢰기를,
“듣건대 현재 《논어》를 강하고 있다 하는데, 제 생각에는 《대학》만은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원컨대 《논어》가 끝나면 바로 《대학》을 강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대학연의(大學衍義)》를 함께 강하고 있는데 《대학》과 어찌 다르겠는가?”하였다. 김장생이 아뢰기를,“《대학연의》는 《대학》에 비해서 절실하지 못할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도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었다. 스스로 차례로 해나가겠다.”
하였다. 박지계가 주자서(朱子書)를 강할 것을 청하자, 김장생이 이를 인하여 또 나아가 아뢰기를,
“주자서는 경서(經書)보다 못할 듯싶습니다. 소신의 의견으로는 《소학(小學)》이 오륜과 관계된 책이니 이것이 절실할 듯싶습니다. 그리고 《심경(心經)》이나 《근사록(近思錄)》도 먼저 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학문을 하는 근본은 주경(主敬)에 달려 있으니,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공부라 하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공경하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마음이 전일하지 못하니,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하였다. 박지계가 아뢰기를,“근래에 예양(禮讓)하는 풍조가 완전히 없어졌으니, 지금 마땅히 선비의 습속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선비의 습속은 그렇다 하더라도 조정의 풍토는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
하자, 김장생이 아뢰기를,“임금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면 조정이 바르게 되고, 조정이 바르게 되면 선비들의 습속은 저절로 바로잡힐 것입니다.”하였다. 김장생이 또 아뢰기를,
“즉위하신 초기에 전결(田結)을 기준으로 거둬들이는 포(布)를 면제하라고 명하셨으므로 인심이 무척 기뻐들 하였는데, 지금 도로 거둬들이라고 명하셨다는 말을 듣고 중외에서 모두가 신의를 저버렸다고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당초에 오래도록 거둬들이지 못한 것을 면제하라고 명했었는데, 그 뒤 바로 감군(監軍)이 나온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이미 거둬들인 것은 그대로 바치도록 한 것이다.”하자, 김장생이 아뢰기를,“어떤 사람은 이미 바쳤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 바치지 않았다면, 이 또한 고르지 못한 일인 듯싶습니다.”하였다. 상이 이어 승지에게 명하기를,“여름철 의복감을 해당 조로 하여금 구해서 보내도록 하라.”하였다. 김장생이 바친 별서(別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 오늘날 일으키신 반정의 거사로 바른 기강이 다시 확립되고 종묘 사직이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즉위하신 초기에 백성들 모두가 춤추고 기뻐하며 태평 세월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도(道)를 바라고 다스려지기를 구하시는 전하의 뜻이 처음에 마음 먹은 것과 같지 않게 되면, 고무되었던 백성들이 도리어 실망하게 될 것이니, 이 시기를 한번 놓칠 경우 다시는 수습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제왕이 정치를 하는 요체로는 학문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현의 말씀을 토론하고 그 정밀한 의리를 탐구하여 몸에 체득하고 마음으로 징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이 마음을 어둡지 않고 성성(惺惺)하게 가지시고 마치 고요한 물처럼 담박하게 지니고 계시다가, 일단 생각이 일어나게 되면 공(公)과 사(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분을 살피시어 사욕은 더욱 맹렬히 극복하시고 선한 일은 최대한도로 넓게 확대시켜야 할 것입니다.이렇게 하면 일상 생활을 해 나가시는 동안에 천리의 올바름을 자연히 터득하시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요순(堯舜)의 이른바 ‘오직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라.[惟精惟一]’는 것이며 공자의 이른바 ‘자기 사욕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라.[克己復禮]’는 것이며 자사(子思)의 이른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홀로 있을 때를 삼가라.[恐懼謹獨]’는 것이며 맹자의 이른바 ‘마음을 거두어 들이고 사단을 확충하라.[收放心擴充四端]’는 것이며 주자(周子)의 이른바 ‘무위의 성(誠) 자리에서 선악의 기틀이 나옴을 잘 살피라.[誠無爲幾善惡]’는 것입니다. 성현께서 서로 전하신 요체도 그 대략을 살펴보면 이 정도에 불과한데, 더구나 임금에게는 한 생각을 하는 사이에 국가의 치란과 흥망이 달려 있음이겠습니까.
오늘날 경연에서는 형식만 차리고 숫자만 때우려고 하지 마시고 유신(儒臣)을 친근히 접하시어 의리를 강론하면서 조금도 숨김없이 각자의 소견을 다 말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성학(聖學)이 날로 고명해져 홀로 계시는 그윽한 경계에서도 반드시 단정하고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시면서 감히 나태해지지 못하도록 하시고 이 마음을 환한 해처럼 지니도록 하소서. 한 생각이 움틀 때에 사욕을 이기고 선을 확충시켜 끊임없이 각고의 공부를 해 나가신다면 요순의 덕과 삼대의 정치가 바로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원전】 33 집 533 면

5월 29일(성균관에 사업 3원을 두고 김장생·장현광·박지계를 임명하다)
성균관에 사업(司業) 3원(員)을 두고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박지계(朴知誡)를 임명하였다
【원전】 33 집 535 면

8월 8일(주강에 《논어》를 강하면서 김장생을 입시하게 하다)
상이 주강에 문정전에서 《논어》를 강하면서 사업 김장생(金長生)을 입시하게 하였다.
【원전】 33 집 545 면

10월 22일(사업 김장생이 노병으로 사직하고 규계의 말을 진달하니, 너그러이 비답하다)
사업 김장생(金長生)이 노병으로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 이어 규계(規戒)의 말을 진달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고 즉시 올라오라고 하였다.【원전】 33 집 555 면

윤 10월 15일(사업 김장생이 재차 소장을 올려 사직하다)
사업(司業) 김장생이 소명에 응하지 않고 재차 소장을 올려 사직하니, 답하였다.
“누차 소장만 올리고, 오랫동안 올라오지 않으니, 나의 마음이 매우 서운하다. 사피하지 말고 봄날이 따뜻해지거든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원전】 33 집 558 면

인조2년(1624)2월 24일(이식을 이조 좌랑으로, 김장생을 상의원 정으로 삼다)
이식(李植)을 이조 좌랑으로 김장생(金長生)을 상의원 정으로 삼았다.【원전】 33 집 586 면

3월 25일(이수광·정온·김장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장생(金長生)을 집의로~ 【원전】 33 집 603 면

4월 1일(집의 김장생이 사직하다)
집의 김장생(金長生)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원전】 33 집 607 면

6월 24일(조익·유백증·김장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장생(金長生)을 사업으로~ 【원전】 33 집 625 면

8월 24일(김장생·유백증·정백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장생(金長生)을 공조 참의로~【원전】 33 집 637 면

10월 22일(김장생에게 원자의 강학관을 겸하게 하고, 이시영·이항에 대한 인사를 실시하다)
공조 참의 김장생(金長生)에게 다시 원자(元子)의 강학관(講學官)을 겸하게 하였다. 장생은 일찍이 강학관으로 있다가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승진되면서 체임(遞任)되었는데,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경연에서 다시 보도(輔導)하게 할 것을 청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원전】 33 집 650 면

11월 5일(부호군 김장생이 노쇠하고 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다)
부호군(副護軍) 김장생(金長生)이 노쇠하고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이유로 상소하여 시골에 돌아가 여생을 마치게 해 주기를 청하니, 답하였다.“그대가 연로하다고는 하나 근력은 쇠약하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물러가려는 생각만 하지 말고 원자(元子)를 잘 교회(敎誨)하여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원전】 33 집 654 면

인조 3년(1625)2월 5일(정엽·김장생이 가자를 사양하다)
좌부빈객(左副賓客) 정엽(鄭曄), 부호군(副護軍) 김장생(金長生) 등이 상소하여 새로 내려 준 가자(加資)를 사양하니, 답하였다.“상소를 살펴보고 경들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경들이 지성껏 원자(元子)를 교회했으므로 내가 아름답게 여기며 감탄한 지 오래이다. 경들은 사양하지 말라.”【원전】 33집 676 면

인조 4년(1626)2월 30일(정원에서 김장생의 낙향을 말릴 것을 건의하다)
정원이 아뢰기를,“행 호군(行護軍) 김장생(金長生)이 오늘 향리로 내려가려 한다고 합니다. 지금의 숙덕인(宿德人)이나 노성인(老成人)으로서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니, 그로 하여금 조정에 있게 한다면 유익한 점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그가 산림(山林)에 있더라도 참으로 불러와야 할 터인데 이제 올라왔는데 갑자기 내려가게 한다면 성상께서 어진이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도리에 있어 그의 거류(去留)를 방임한 채 가버려도 모르는 것은 부당한 처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직소에 대한 답에, 봄이 따스해지거든 올라오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지금 그를 내려가게 하는 것은 전일 하교한 뜻과 같습니다. 신들의 구구한 의견이 이와 같기에 황공스럽게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경들의 말이 옳다. 만류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장생은 한때의 숙덕(宿德)이요 순유(醇儒)로서 반정(反正) 초기에 제일 먼저 권우(眷遇)를 받았다. 그런데 사묘(私廟)를 숭봉하는 법제를 논의할 적에 ‘주상은 바로 선묘(宣廟)를 계승하였다.’는 설을 진달하였으므로 상이 드디어 싫어하게 되었다. 계운궁(啓運宮)의 초상에 이르러서는 장생이 ‘전하께서는 소종(小宗)의 지손(支孫)으로서 선조(宣祖)의 대통을 계승하셨으니 이는 한 선제(漢宣帝)의 경우와 서로 같은 것으로 할아버지의 후사가 되고 남의 후사가 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숙질(叔姪)의 복(服)을 입어야 하고 삼년상을 입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고 했는데 이원익과 정경세의 말도 서로 합치되었다. 이리하여 온 조정이 모두 이 논의에 따라 기복(期服)으로 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결국 장기(杖期)의 복을 입게 되었다. 이 때문에 상의 뜻에 맞지 않아 예우(禮遇)가 갑자기 쇠하여졌다. 이제 그가 떠남에 있어 정원이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단지 만류하라고만 답하였으니, 성심으로 어진이를 대우한다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게 되었다. 애석한 일이다.
【원전】 34 집 78 면

인조 5년 정묘(1627) 1월 19일(비국의 요청에 따라 정경제·장현광 김장생에게 관직을 수여하다)
정경세(鄭經世)·장현광(張顯光)을 경상 좌·우도 호소사로, 김장생(金長生)을 양호(兩湖) 호소사로 삼았는데, 이는 비국(備局)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원전】 34 집 160 면

인조6년(1628)10월 21일(김장생을 형조 참판에 제수하였으나 사직을 상소하다)
김장생(金長生)을 불러 형조 참판으로 삼았으나 장생이 오지 않고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이 올라오기를 내 날마다 바란다.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원전】 34 집 301 면

효종8년(1657)5월 14일(김장생의 시호에 대한 전 이조 참의 송준길의 상소문)
전 이조 참의 송준길(宋浚吉)이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않고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사람이 임금 스승 아버지 세 분에게서 생성(生成)되는데 한 가지 도리로 섬기는 것은 천지의 변함없는 법이며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신은 젊어서 고 참판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워서 실로 옛 사람이 말한 것처럼 망극한 은혜가 있는데 신만큼 오랫동안 섬겨서 자세히 아는 자가 없습니다. 시론(時論)이 두 길로 나뉜 후로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자들의 마음이 서로 다르고 비방과 칭찬이 반반입니다만, 장생에 이르러서는 피차를 막론하고 이구동성으로 후덕한 군자라고 하니 도가 훌륭하고 덕이 높음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 저서들을 살펴보면 세교(世敎)에 보탬이 되는 것이 또한 한둘로써 셀 수 없으니 진실로 성세(聖世)의 종장(宗匠)이고 유가(儒家)의 표적(標的)입니다.
엊그제 듣건대 경연관이 건의하여 시호(諡號)의 은전을 내려 주라고 청하자 생시의 관직 품계로는 시호를 내리는 규례에 해당하지 않는데도 성명께서 특별히 소청을 허락하셨다 합니다. 이에 유림들이 활기를 띠고 유생들이 반색하며 모두 성명께서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는 훌륭한 뜻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이윽고 또 들으니 유사가 문경(文敬)과 문원(文元)으로 주의(注擬)할 것을 의논하여 정하였다고 합니다. 대저 경(敬)은 성학(聖學)의 기본인데다 장생이 항상 힘쓴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칭호가 아니겠습니까만, 사람의 자품과 기상에 각각 걸맞는 바가 있으니 반드시 서로 걸맞아야만 진실로 공론에 부합되고 후세에 보일 수 있을 것이며 이를 받은 자의 마음 역시 편안합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장생은 순진하고 온후하며 너그럽고 온화한 기상이므로 두 번째의 예비 시호가 진실로 딱 맞는 제목입니다만 한스럽게도 논의한 자가 두 번째에다 두었습니다. 이것은 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장생을 본 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여론의 소재는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경(敬)’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원(元)’이 그 사람에게 걸맞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여 사물에 맞춰 공평하게 베풀어서 모두 마땅하지 않음이 없으니 취하거나 버리는 데에 반드시 잘 처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이 이름은 한 번 정해지면 영원히 고치기 어려우므로 진실로 마땅함을 잃으면 무궁한 한을 남길 것으로 여기는데 그 관계된 바가 또한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역사를 고찰해 본 적이 있습니다. 송(宋)나라 조정에서 처음 주자(朱子)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하였는데 중론이 부족하게 여기자 재차 의논하여 ‘문(文)’이라고 고쳤으며, 또 생전에 시호에 대해 맞지 않는 점을 논박한 자가 있었는데 주자가 옳게 여기었습니다. 또 어른들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 조종조 때에 유사가 어떤 신하에 대한 예비 시호를 써 올리자 성상이 적당치 않다고 하여 다시 써 올리라고 분부하니 경연의 신하가 주석한 여섯 글자 중에서 선택하여 비하(批下)해 주기를 청하였고, 고 유신 성혼(成渾)의 시호는 인조 대왕이 특별히 둘째 번 예비 시호를 선택해 비하하였으니, 당시 성상의 뜻이 필시 범연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일 송나라의 예대로 한다면 비록 이미 결정한 것이라도 고칠 수 있는데 하물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또 우리 선조의 전례가 있는데이겠습니까. 만약 성명께서 특별히 살피시어 옛 것을 참작하고 오늘에 맞춰서 실정에 맞는 글자를 골라서 정해 주신다면 유신(儒臣)을 숭상하고 보답하는 도에 있어서 지극히 아름답게 되어 유감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삼가 보건대, 옛 사람 중에 혹 자기 스승에게 사사로이 시호를 올린 자가 있었고, 송나라에 이르러 문헌의 성대함이 삼대(三代)에 비길 수 있었는데 횡거(橫渠)의 학도들 역시 이를 하였으니, 대개 그 스승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논의를 그 생도보다 더 잘 아는 자가 없으므로 사실과 벗어나게 시호를 지어 스승에게 누가 되게 하는 것은 의리상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고 참찬 신 백인걸(白仁傑)은 늙고 병들어 이미 퇴임한 후에도 그 스승 조광조(趙光祖)를 위해 자력으로 대궐에 나와 은전을 내려 주라고 빌었습니다. 이러한 선배의 독실한 의리의 기풍에 대해 신은 항상 감격하고 흠모하였으나 질병이 매우 깊어 몸을 일으킬 길이 없기에 감히 글로 대신하여 외람되이 번거롭게 하니, 신은 진실로 인걸의 죄인입니다.”하니, 답하기를,
“상소한 말은 진실로 옳으니 짐작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원전】 36 집 95 면

5월 14일(고 참판 김장생에게 시호를 내리다)
특별히 고 참판 김장생(金長生)에게 문원(文元)이란 시호를 내렸다.
【원전】 36 집 96 면

효종9년(1658)10월 21일(문원공 김장생과 판중추부사 김집의 서원에 액호를 내리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과 판중추부사 김집(金集)의 서원에 액호(額號)를 내렸다.【원전】 36 집 156 면

효종10년(1659)윤3월 28일(김장생·김집·이이·이색 등을 제향하는 서원들에 액호를 내리라고 명하다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을 함께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의 액호(額號)를 돈암(遯巖)이라고 내리고, 이이(李珥)·이색(李穡)·김정(金淨)·송인수(宋麟壽)를 함께 제향하는 서원의 액호를 신암(莘菴)이라고 내리고, 김인후(金麟厚)를 제향하는 서원의 액호를 필암(筆巖)이라고 내리고, 송인수(宋麟壽)·정렴(鄭)을 함께 제향하는 서원의 액호를 노봉(魯峯)이라고 내리고, 이황(李滉)·정구(鄭逑)를 함께 제향하는 서원의 액호를 연경(硏經)이라고 내리고, 이이(李珥)를 제향하는 서원의 액호를 송담(松潭)이라고 내리고, 노신(盧?)의 사우(祠宇)의 액호를 당주(?洲)라고 내리고, 이항복(李恒福)을 제향하는 서원의 액호를 화산(花山)이라고 내리라고 명하였다.【원전】 36 집 187 면

현종 6년(1665)5월 1일(예관을 보내어 김장생·조헌·송상현·이순신에게 제사지내게 하다)
예관을 보내어, 유신 증 영의정 김장생(金長生), 충신 증 이조 판서 조헌(趙憲), 증 이조 판서 송상현(宋象賢), 증 우의정 이순신(李舜臣)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원전】 36 집 463 면

현종 9년(1668)12월 5일(유희춘, 김상용·김상헌, 김장생, 조익의 서원에 사액하다)
담양(潭陽)의 유희춘(柳希春), 정주(定州)의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안성(安城)의 김장생(金長生), 광주(廣州)의 조익(趙翼) 등의 서원에 편액을 하사하였는데, 좌참찬 송준길의 청에 의한 것이었다
【원전】 36 집 601 면
현종 10년(1669)11월 7일(길재·김장생의 서원에 액호를 내리다)
예조 정랑 남궁옥(南宮鈺)을 보내, 길재(吉再)와 김장생(金長生)의 서원에 액호(額號)를 내렸다.
【원전】 36 집 652 면

숙종 8년(1682)3월 16일(연산 진사 유후 등이 김장생의 문묘 종사를 청하다)
연산 진사(連山進士) 유후(柳?) 등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소청(疏請)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원전】 38 집 584 면

숙종 11년(1685)9월 30일(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을 변호하자 답하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유고(遺稿)를 진헌(進獻)하였다. 이어서 홍수주(洪受疇)의 상소의 말이 무패(誣悖)하였음을 분변하여 말하기를,
“가만히 엎드려 듣건대, 성명(聖明)께서 옥당(玉堂)에 명하여 신의 스승인 문원공 김장생의 유고를 올리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윤음(綸音)이 한 번 나오자 사류(士流)들이 기뻐하고 경축(慶祝)하면서 ‘우리 성상(聖上)께서 장차 이를 표장(表章)하여 시행(施行)할 것이다.’ 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이와 같았다면 이는 참으로 천재 일우의 기회입니다. 대저 유학을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성절(盛節)입니다마는 이제나 예나 이러한 일이 적막(寂寞)해져서 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무슨 다행으로 천한 신하가 늙어도 아직 죽지 않고서 몸소 직접 이를 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명을 들은 이래로 수집(?輯)하고 편마(編摩)하며 그 와오(訛誤)된 것을 정정(訂正)하고 중복된 것은 깎아 없애어 이루어진 것이 합계 수천만언(數千萬言)입니다.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까지 합하여 선사(繕寫)하여 삼가 올립니다. 아! 오늘날 어느 곳에서 찾아오겠습니까? 다만 오늘날 뿐 아니라 전고(前古)에 구하여도 짝하여 비길 것은 드물다 하겠습니다. 선사(先師)의 학문(學問)은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이외에는 한결같이 낙민(洛?)의 여러 책을 주로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그의 행실(行實)이 상도(常道)가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말에는 법칙(法則)이 있어서 그 단란(斷爛)하고 영쇄(零?)한 것에 나타난 것까지도 순수(純粹)하게 한결같이 바른 데서 나왔습니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할 적에 그 좌명(佐命)의 여러 신하들은 대부분 지구(知舊)와 문생(門生)들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글로 수천 자(字)를 지어서 그들을 교회(敎誨)하였는데, 그 가운데 폐주(廢主)를 보전하라는 한 조항은 더욱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옛부터 혁명(革命)으로 폐위(廢位)당한 임금으로서 탈이 없는 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光海君)이 폐위된 뒤에 인조께서 대우해 주신 은혜가 지극하고 극진하였습니다. 유효립(柳孝立)이 역모(逆謀)를 꾸며 ‘사흘 뒤에 복위(復位)시키고 높여서 상왕(上王)을 삼는다’고 하는 말까지 있었으니, 광해군의 위태한 것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런데도 처치(處置)하여야 한다는 말이 최명길(崔鳴吉)이나 장유(張維) 등 여러 신하들의 입에서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두 인조의 성덕(盛德)이었으며 그리고 선사(先師)께서 규도(規導)한 효과입니다. 이와 같이 현자(賢者)는 국가에 유익한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일에서 어진 사람의 일단(一端)을 살피소서. 신이 이미 이 유고를 올리면서도 그분에게 끼친 무망(誣罔)을 깨끗이 씻지 않는다면 이는 홀로 선사를 저버릴 뿐 아니라 실로 전하께서 덕(德)있는 이를 높이고 어진이를 좋아하는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듣건대, 근자에 사헌부(司憲府)의 신하들이 상소하여, 이이(李珥)가 머리를 깎았다는 말을 제기(提起)하면서 김장생을 끌어다가 증거를 삼았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문성공(文成公) 이이는 타고난 자질(資質)이 매우 높아서 나이 겨우 5, 6세에 이미 학문(學問)을 하는 방법을 알았으며, 열 살이 되어서는 경서(經書)를 모두 통달(通達)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도(道)가 다만 이것뿐이겠는가?’ 하고는 이에 불교와 노교(老敎)의 여러 서적(書籍)들을 두루 보았는데도 그 가운데서 가장 좋아했던 것이 《능엄경(楞嚴經)》 한 책이었습니다. 그것은 대개 그 책의 내용이 안으로는 심성(心性)을 말한 것이 십분 정미(精微)하였고, 밖으로는 천지(天地)를 세밀하게 분석하여 그 굉활(宏?)함을 다 연구했기 때문이니, 만약 이이 같이 식견이 높고 사리에 밝은 이가 아니었다면 어린 나이에 어찌 그것을 알아서 자세히 체험했겠습니까? 그가 산에 들어가서는 또한 유도(儒道)로써 선(禪)에 맞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친구들에게 이별을 알리는 편지에 이르기를, ‘기(氣)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같이 얻는 것이지마는, 이것을 잘 기르면 마음에 부림을 당하고 잘 기르지 못하면 기(氣)에 부림을 당한다. 그러니 기(氣)가 마음에 부림을 당하면 한 몸의 주인(主人)이 되어서 성현(聖賢)이 됨을 기약하게 되지만, 마음이 기(氣)에 부림을 당하면 칠정(七情)을 통제할 수가 없어서 우광(愚狂)함을 면하기 어렵다. 옛사람이 기(氣)를 잘 기른 이가 있으니 맹자(孟子)가 그분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이는 물은 흘러가는 것이고 산은 높다는 것을 취했을 뿐 아니라 그 동정(動靜)의 본체(本體)를 취한 것이다. 그러니 어진 자와 지혜로운 자의 기(氣)를 기르는데 산과 물을 버리고 어디서 구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풍악(楓岳)에 들어갔을 적에 여러 승려(僧侶)들이 불경(佛經)을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 달랐는데,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이곳은 아무개의 말이 옳고, 이곳은 아무개의 말이 틀린다.’고 하니, 승려들이 놀라면서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합니다. 그가 일찍이 고요히 앉아서 생각을 집중(集中)하다가 문득 선지(禪旨)가 틀렸음을 깨닫고서 말하기를, ‘이는 다른 기묘(奇妙)한 것은 없고, 다만 이 마음이 달아나는 길을 절단(截斷)하여 정신(精神)을 한곳에 집중시켜 고요함이 극(極)하여 허명(虛明)한 지경에 나아가려고 함이니, 이는 성인(聖人)의 체용(體用)이 한 근원이라는 뜻과는 다름이 있다’고 하여, 드디어 포기하고 돌아와서 성인(聖人)의 학문(學問)에 전심(專心)하였습니다. 그의 이른바 산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습니다. 머리를 깎았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무망(誣罔)한 것이니, 그에게 과연 이러한 일이 있었으면 노승이 어찌 ‘조대(措大)라고 불렀겠습니까? 그리고 임억령(林億齡)은 어찌하여 ‘이생(李生)’이라고 하였겠습니까? 설사 이이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제자인 김장생에게서 증명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절대로 이러한 사실이 없는데도 김장생에게 과연 이러한 말을 하였다면 이는 마치 아비가 훔친 양(羊)을 아들에게 증언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사헌부(司憲府)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김장생은 학식(學識)이 고명하다’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이러한 말이 되며 이것이 과연 의리(義理)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고(故) 참찬(參贊) 신 송준길(宋浚吉)과 더불어 함께 김장생이 말한 것을 들으니, ‘일찍이 변형(變形)하였는지를 율곡(栗谷)에게 은근히 물었더니, 답하기를 「비록 변형은 아니하였지만 그렇다 해서 마음이 푹 빠지는 데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했습니다. 이는 비록 절절(切切)하게 분변하여 상소(上疏)하지는 아니하였지마는, 그가 머리를 깎지 않았다는 실상(實狀)은 자연히 나타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이(李珥)의 기상(氣象)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사헌부(司憲府)의 신하들은 장유(張維)의 말을 인용하여 ‘머리를 깎은 것은 이는 조잡한 행적이어서 분변할 것도 못되기에 김장생도 또한 이렇게 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들이 또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깎지 않았던 실상(實狀)을 자세히 진술(陳述)하였다고 말합니까?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깎지 않았던 실상을 자세히 말하는데도 유독 김장생만이 말하였다고 하면 또한 그 홀로 무슨 마음에서였겠습니까? 신은 가만히 김장생을 위하여 원통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고명한 제자로서 증언하였으면 이이가 머리 깎은 사실은 마침내 변명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이이가 만난 것이 어찌 그다지도 심합니까? 또 조잡한 행적이어서 말하기가 어렵지 않았다고 하니, 가만히 생각하건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옛적에 주자(朱子)는 비록 젊어서 도겸(道謙)을 스승으로 삼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의 친구들이 머리를 깎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매우 엄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니 과연 이이같은 고명한 견식으로 오히려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 이는 주자(朱子)의 문하(門下)의 죄인이 되는 것이니, 어찌 적전(嫡傳)이라 이르겠습니까? 을해년 이래로 한쪽 사람들의 장소(章疏)에서 비록 이이를 매우 헐뜯어 무욕(誣辱)하였습니다만, 머리를 깎았다는 말은 끝내 감히 멋대로 말하지는 못하였으니 어찌 성묘(聖廟)에 숭보(崇報)한 뒤에 다시 제기하여 무패(誣悖)함을 더하는 것입니까? 사헌부 신하들의 말한 것은 그 일을 드날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억누르는 것 같기도 하여 진상(眞相)을 찾아 낼 수가 없는데 그들이 널리 끌어온 여러 설들은 이것이 모두 헛된 말들이었습니다. 대저 정이천(程伊川)이 정명도(程明道)의 행장(行狀)을 쓸 적에 과연 불교(佛敎)와 노교(老敎)에 출입(出入)하였다고 말하면서도 곧 돌이켜 육경(六經)에서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다만 불교와 노교에 출입하였다고만 쓴 것입니까? 주자가 장횡거(張橫渠)를 찬양(贊揚)하였을 적에도 그가 불교에서 도망하여 나와 바른 데로 돌아왔음을 밝혔습니다. 이것이 과연 지금 사람들처럼 다만 산에 들어갔던 것만을 말하고 유교로 돌아온 사실을 말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습니까? 또 정명도는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이 설치한 관직에 벼슬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정이천(程伊川)은 그러한 일을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에 그가 지은 행장(行狀) 가운데에는 빼 버렸습니다. 이는 어버이[親]를 위하여 휘(諱)하고 현인(賢人)을 위하여 휘(諱)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선(善)하지 못한 잘못을 드러내면서도 그를 높인다고 말한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사헌부(司憲府)의 신하들이 그러한 실상(實狀)은 구명(究明)하지도 않고 장황하게 속이고 위협하여 온 세상을 협지(脅持)하려 하고 있으니 이 또한 괴이(怪異)하지 아니합니까? 그들이 끌어다가 증명한 송시영(宋時瑩)은 신의 종형입니다. 송시영이 맨 먼저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해야 한다는 의논을 내었는데 그의 첫째번의 상소에는 다만 이이(李珥)의 학문과 도덕이 순수(純粹)한 것만을 들었고, 채진후(蔡振後) 등이 이이가 산에 들어갔던 사실을 들어서 욕하고 헐뜯자 송시영 등의 둘째번의 상소에 드디어 이이가 젊어서 비록 선(禪)에 물들었던 과실(過失)은 있었지마는 즉시 이를 깨닫고 바른 데로 돌아왔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시배(時輩)들이 다만 과실(過失)이 있다고 말한 것과 같겠습니까? 이렇게 동일하지 않는 말을 끌어모아서 억지로 동일한 것처럼 만드는 것이 실로 지금 세상의 큰 병통이라 하겠습니다. 범상(凡常)한 언어(言語)에 있어서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성조(聖祖)의 신한(宸翰)이겠습니까? 대저 성조께서 이이의 상소에 답한 것에 이른바 호걸(豪傑)다운 선비라고 한 것은 바로 정자(程子)·장자(張子)·주자(朱子) 세 분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의 인증(引證)의 중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를 과연 바로 배척하여 과실이 있다고 하기를 헌부(憲府) 신하들의 말과 같겠습니까? 그의 이른바 ‘작은 과실이 있다.’고 한 것은 말에 짐작(斟酌)이 있음을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마음대로 끌어다 붙여서 아래로 자기들의 말과 같게 하려 하였으니 이는 너무나 기탄(忌憚)이 없다 하겠습니다. 대저 이이의 과실(過失)은 들면서도 바른 데로 돌아왔던 사실은 들어 말하지 않은 것은 채진후와 유직(柳稷) 등의 말이었습니다. 이이의 어렸을 때 작은 과실은 과실이라 할 것이 없다는 것은 신 등의 말입니다. 그리고 채진후와 유직의 말과 같이 하면서도 억지로 신 등의 말에 합치려는 것은 시배(時輩)들의 말입니다. 시배들이 다만 이 말만을 주장하여도 넉넉히 그 말을 과장하여 세상을 위협할 수가 있는데도 또 반드시 머리를 깎았다는 말을 들어서 김장생까지 욕하려고 합니다. 저들이 반드시 ‘이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장유(張維)의 말이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장유가 기록했다는 것은 진실로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백히 분변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김장생이 그의 스승에 대해 말하는데 막대(莫大)한 결점을 말하면서도 일찍이 조심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고 하여 헌부의 신하들의 말과 같았겠습니까? 대저 군자(君子)가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선(善)을 들으면 드날리고 그의 허물을 들으면 살핍니다. 보통 사람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든 더구나 그의 스승의 과실(過失)을 초래(招來)하는 것인데 조심하거나 머뭇거린 적이 없었다면 이는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사헌부(司憲府)의 신하들이 처음에는 이이를 높이지 않았었고 뒤에는 김장생에게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황홀하여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이가 머리를 깎았다고 여기는 듯하다가 또 머리를 깎지 않은 것 같이 합니다. 그리고 김장생이 스승을 더럽힌 것 같이 하다가 또 스승을 더럽히지 않은 것 같게도 하였습니다. 또 주자(朱子)가 장횡거(張橫渠)를 찬양하였던 것을 가져다가 끌어다 부회(傅會)하여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리려고 했으니 이 어찌 정자(程子)가 비난했던 ‘관중(關中)의 글을 일삼는 자의 폐단’ 뿐이겠습니까? 신이 이미 스승이 더럽혀진 일을 가리어 밝혔습니다만, 벗들도 또한 인륜(人倫)의 하나입니다. 신이 고(故) 생원(生員) 김익겸(金益兼)과는 성(姓)이 다른 형제(兄弟)입니다. 병자년에 오랑캐들이 참호(僭號)할 때에 김익겸이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며야 되겠는가? 만일 노중련(魯仲連)처럼 동쪽 바다에 빠져 죽지 않는다면 장차 산에 들어가서 말라 죽을지언정 맹서코 오랑캐는 되지 않겠다’고 하더니 강도(江都)의 변고(變故)에 과연 그 말을 실천(實踐)하였습니다. 그 외의 권순장(權順長)과 이돈오(李惇五)도 모두 지사(志士)인데 함께 절의(節義)를 심었으니 해·달과 더불어 빛을 다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고 말을 함으로써 김익겸 등이 세웠던 절의를 어두워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대저 절의가 밝게 드러나면 가국(家國)이 이로써 부지(扶持)되겠습니다만 절의가 어두워지면 세도(世道)가 따라서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유(先儒)들이 조조(曹操)가 감히 한(漢)나라를 탈취하지 못한 일로써 당고(黨錮)의 형벌로 죽었던 선비들의 썩은 뼈에 공(功)을 돌렸던 것입니다. 선조(宣祖) 때에 절의를 배척하는 의논을 저술한 자가 있었으므로, 선조께서 이를 학궁(學宮)에다 방(榜)을 붙여 보게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송나라 도읍을 남쪽으로 옮긴 때에 태어나서 조금이라도 절의가 있는 사람이면 표장(表章)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성현(聖賢)들이 절의를 귀하게 여긴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김익겸 등이 억눌림을 당하는 것도 또한 세도(世道)의 다행이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문원공(文元公)의 문집(文集)을 조용하게 살펴본 뒤에 마땅히 예문각(藝文閣)에 보내어 문정공(文正公)의 문집(文集)과 함께 똑같이 간행(刊行)해서 나의 뜻을 표하겠다. 아! 슬프다. 세도(世道)를 생각하여 보니 근심하고 탄식함을 어찌 견디겠는가? 사람들의 마음이 나쁜 데 빠져서 의리(義理)가 어두워지고 막혔다. 홍수주(洪受疇)와 같은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윤증(尹拯)을 위해 한편이 되어서 방자스럽게 상소를 올려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한 것이 끝이 없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죄인으로서 세도(世道)의 크나큰 변고(變故)이다. 이제 신변(伸辨)하는 장소(章疏)를 살펴보니 의리가 밝게 드러나서 그들의 간담(肝膽)을 부수어 길이 후세(後世)에까지 남길 말이 있을 것이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권순장(權順長) 등의 일에 이르러서도 이것이 또한 의리(義理)가 밝지 못한 데서 이루어진 것 아님이 없으니 더욱 개탄(慨歎)하는 바이다. 또 생각하여 보니 이렇게 변괴(變怪)가 백출(百出)하고 시세(時勢)가 위태스러운 날을 당하여 경의 석덕(碩德)과 중망(重望)이 아니고서는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할 수가 없다. 그러니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하는 나의 뜻을 본받아서 멀리하려는 마음을 빨리 돌려 속히 올라와서 경을 생각하는 나의 회포를 위로하라.”
하고, 이어서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봉조하(奉朝賀)의 상소 가운데 말한 권순장(權順長) 등의 일은 지금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다’고 말하는 자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을 말

댓글목록

정암님의 댓글

정암 작성일

숙종 12년 병인(1686)1월 12일(문원공 김장생과 문정공 송준길의 문집을 운각에서 출간케 하다)
~이어 전교하기를,“문원공(文元公)【곧 김장생(金長生)이다.】의 문집을 열람한 후 승정원에 내려보내어 문정공(文正公)【곧 송준길(宋浚吉)이다.】의 문집과 함께 운각에 회부하여 일체 출간케 하라.”
하였다.【원전】 39 집 57 면

숙종 27년(1701)5월 29일(예조에서 김장생을 문묘에 종향하는 일을 대신과 논의할 것을 건의하다)
예조(禮曹)에서 최운익(崔雲翼) 등이 상소한 내용을 가지고 복주(覆奏)하기를,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은 일찍이 사전(師傅)의 묘를 체득하여 도학(道學)이 순정(醇正)하였고, 천륜(天倫)의 차서를 발휘하여 경법(經法)과 권변(權變)에 중도(中道)를 얻어 한 세대의 종유(宗儒)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풍교(風敎)를 돕는 데 공과 덕이 있었으니, 융숭한 보답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묘(聖廟)에 배향(配享)하는 일은 신(臣)들만으로 경솔히 단정할 바가 아니니, 여러 대신(大臣)들과 재외 유신(在外儒臣)들에게 순문(詢問)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판(判)하기를,“옳다.”
하였다.【원전】 39 집 599 면

숙종 43년(1717)2월 29일(문원공 김장생을 문묘에 배향토록 명하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라고 명하였다. 태학생(太學生) 조겸빈(趙謙彬)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인군(人君)이 일에 임하여 청단(聽斷)하는 도리는 그 말이 따를 만하면 곧 청종(聽從)하고 망설이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 일이 결단할 만하다면 곧 단행하여 오래 버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국론이 귀일(歸一)되었는지를 살피고, 또 향례(享禮)가 마땅한지를 살피고 나서 흔쾌하게 따르고 빨리 결단하는 것이 천둥이 격렬하고 바람이 나는 듯이 한다면 어찌 성주(聖主)의 명정(明政)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선정신(先正臣) 문원공 김장생은 동방의 대현(大賢)이고 아조(我朝)의 유종(儒宗)으로서, 성혼(成渾)·이이(李珥)를 이어서 집대성하고 정자(程子)·주자를 이어서 도통을 전하였으므로, 여러 조정의 예우(禮遇)를 받고 한 세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두 현신(賢臣)과 함께 성무(聖?)에 종향(從享)하고 사전(祀典)을 나란히 벌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팔도에서 합사(合辭)하고 관학(館學)에서 소리를 같이하여 전후의 선비들이 해마다 부지런히 청한 지 이제 40년이 되어 갑니다. 우리 성명(聖明)께서 이미 선정의 도덕이 종사(從祀)하는 은전(恩典)에 합당함을 환히 아시나, 다만 신중히 하는 것이 지나치기 때문에 유음(兪音)을 아직 내리지 않으시니, 사림(士林)이 답답하게 여기는 것이 오래 갈수록 더욱 절실합니다. 지난번 윤현(尹俔) 등이 전에 청한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비지(批旨)가 온순(溫諄)하고 수작이 메아리가 울리듯 하여, ‘내가 바야흐로 잠자코 있는 가운데 마음에 깨닫는 바가 있다.’고 하교하시기에 이르셨으므로, 온 나라 안의 선비들이 모두 용동(聳動)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욕례(縟禮)의 거행을 얼마 안 가서 보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사문(斯文)이 다행하고 성덕(聖德)이 매우 빛나는 때입니다. 바라건대, 흔쾌하게 명명(明命)을 내리셔서 빨리 성대한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사문을 행복하게 하소서.”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어진이를 높이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다.”
하였다. 일전에 여섯 도의 유생의 상소에 비답(批?)한 가운데에 말한 것은 진실로 뜻한 바가 있어서 이제까지 망설이던 것과 매우 달랐다. 이튿날 조겸빈 등이 다시 상소하여 성대한 전례를 빨리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선정의 도덕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도 이렇게 망설인 것은 대개 신중히 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나, 중외(中外)의 선비들이 합사하여 같은 목소리로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한 것이 수십 년이 되었고 매우 간절하니, 공의(公議)가 있음을 대개 알 수 있다. 온천에 가서 제사하는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므로 청한 바를 특별히 윤허한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성대한 전례를 빨리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예조(禮曹)에서 5월 20일을 배향하는 길일(吉日)로 가리고, 또 하루 전에 대성전(大聖殿)에 고유(告由)하고, 본가(本家)에 예관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교서(敎書)를 내리게 하고, 또 종사한 이튿날에 팔방에 반교(頒敎)하기를 청하였다. 대개 구제(舊制)에 따른 것인데, 임금이 옳게 여겼다.
【원전】 40 집 639 면

숙종 43년(1717)3월 12일(김장생·김집 등의 무덤에 유제하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무덤에 유제(諭祭)하고,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이순신(李舜臣)·송인수(宋麟壽)·김정(金淨)·송상현(宋象賢)·이귀(李貴)의 무덤에 제사하게 하였다.【원전】 40 집 641 면

5월 14일(예조에서 문원공 김장생의 봉안을 건의하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승배(陞配)하는 일을 중외(中外)에서 일시에 거행해야 마땅할 듯한데, 팔도의 지방은 원근(遠近)이 같지 않고 드는 모든 제구도 갑자기 장만하기 어려울 것이니, 외방(外方)의 향교(鄕校)에서는 올 가을 석채(釋菜) 때에 고유(告由)하고, 봉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원전】 40 집 649 면

정암님의 댓글

정암 작성일

5월 18일(증 영의정 문원공 김장생에 관한 유고문)
승지(承旨) 이성조(李聖肇)를 보내어 증(贈) 영의정(領議政)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사당에 유고(諭告)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임금이 정학(正學)을 표창하는 것은 선비의 추향을 정하기 위함이고, 성묘(聖廟)에 선현(先賢)을 올리는 것은 도통(道統)을 밝히기 위함인데, 욕례(縟禮)를 거행하려 하니, 공론이 다 같았다. 내가 생각하건대, 본조(本朝)에서는 치도(治道)에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학교(學校)·상서(庠序)를 크게 갖추니, 문도(文道)가 개선되어 총명(聰明)한 호걸(豪傑)이 잇달았고 명세(名世)가 이어 나왔는데, 인문(人文)의 극성(極盛)을 더한 것은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였다. 경(卿)을 생각하건대,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대현(大賢)에게 배우니, 그 넓고 깊은 것으로 말하면 땅이 만물을 지고 바다가 만물을 적시는 기상이고, 그 독실함을 말하면 남보다 백배 힘쓰는 공부이었다. 처음에는 스스로 간절히 물어서 근사(近思)하다가, 마침내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워서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하니, 성명(性命)의 정미(精微)한 온오(蘊奧)가 큰 근본을 환히 알고 이기(理氣)의 선후(先後)하는 분별은 끼친 뜻을 더욱 밝혔다. 나이가 더욱 높아지면서 덕이 밝아지고, 체(體)가 서고 나서는 용(用)이 행해지니, 탐구하고 강론(講論)한 공(功)은 멀고 가까운 곳에서 감화(感化)되었고, 완책(玩?)하고 침잠(沈潛)한 보람은 날로 고명(高明)해졌다. 뜻이 깊은 예절과 의심스러운 글에 대해서도 자세히 분석한 것이 많고, 길흉(吉凶)의 상례(常禮)·변례(變禮)에 대해서도 뭇 논설을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크고 작고 높고 낮은 사람들이 다 훌륭한 은혜를 입었으니, 한 세상에서 태산(泰山)·북두(北斗)처럼 뛰어났으며, 어두운 거리에서 해·별처럼 밝았다. 그래서 성조(聖祖)께서 불러서 나라 사람들의 긍식(矜式)을 삼게 하시니, 정심(正心)·성의(誠意)의 학문은 임금을 바르게 하는 일을 먼저 하였고, 천덕(天德)·왕도(王道)의 요체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아아! 포부를 다하지 못하였어도 전형(典型)은 남아 있으나, 숙속(菽粟)의 맛과 포백(布帛)의 무늬가 귀한 줄 아는 자가 드물다고 말하지 말라. 강수(江水)·한수(漢水)에 빨고 가을 볕에 쬐었다 한 데에서 덕을 사모하는 것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공문(孔門)의 사과(四科)에서는 덕행(德行)이 십철(十哲)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고, 증자(曾子)의 삼성(三省)에서는 충서(忠恕)가 일관하여 전해졌으니, 그 공은 옛것을 이어서 뒤를 열었고, 그 교화는 세상에서 표준이 되어 풍속을 투텁게 하였다. 영재(英才)를 즐겨 길러 큰 문하에서 많은 선비가 나왔고, 정도(正道)를 크게 밝혀 후학(後學)이 모두 모범을 우러렀으니, 어찌 한 나라에서만 본받겠는가? 또한 백대(百代)의 사종(師宗)이다. 이증(?贈)은 다시 더할 수 없는데 숭보(崇報)는 미처 그 실상에 맞지 못하니, 또한 성무(聖?)에 종향(從享)하는 예(禮)가 모두 마땅하다고 한다. 대개 문정(文正)이 높인 논의가 어찌 좋아하는 바에 아첨한 것이겠는가? 뭇사람의 뜻이 3기(紀) 동안 답답해 하였고, 뭇사람의 호소가 팔방에서 더욱 조급해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을 널리 묻기 전에 이미 내 뜻이 먼저 정해졌으니, 어진 사람을 무함하고 바른 사람을 헐뜯는 버릇이 그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도(道)를 지키고 유(儒)를 높이는 정성을 지금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을 문묘(文廟)의 곁채에 종사(從祀)하여 통서(統緖)를 전철(前哲)에 잇고, 위서(位序)를 문성(文成)의 다음에 둔다. 음풍농월(吟風弄月)한 것이 의연(依然)함은 석담(石潭)의 함장(函丈)이고, 승당입실(升堂入室)하여 황연(?然)히 행단(杏壇)에 섭제(攝齊)하였으니 큰 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여기에 낄 수 있겠는가? 아마도 하늘의 뜻이 선택하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대하지 못하므로 구원(丘原)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향사(享祀)는 길이 보존되므로 가묘(家廟)에서 조천(?遷)하지 않도록 다시 명하고, 성화(聖化)를 창명(彰明)하여 군심(群心)을 위답(慰答)한다. 아아! 공이 큰 자는 그 보답이 반드시 클 것이고 덕이 두터운 자는 그 미치는 것이 반드시 요원할 것이니, 영령(英靈)이 잠잠히 도우면 국맥(國脈)의 연장을 이룰 것이고, 문교(文敎)가 성하게 일면 세도(世道)의 형태(亨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글을 지었다.【원전】 40 집 650 면

정암님의 댓글

정암 작성일

영조 3년(1727)6월 29일(이서오는 이이의 손자이고, 김천택은 김장생의 손자인 까닭에 관직에 탁용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변사(備邊司)의 당상(堂上)을 소견(召見)하고,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김천택(金天澤)을 곧바로 6품으로 승진시킬 것을 명하고, 전(前) 봉사(奉事) 이서오(李?五)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뽑아 쓰게 하게 하니, 이서오는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손자이고, 김천택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다.【원전】 41 집 638 면

정조 즉위년 (1776)
9월 26일(황해도 유생 이면유 등이 문원공 김장생을 소현 서원에 추배하기를 상소하다)
황해도 유생 유학(幼學) 이면유(李勉儒) 등이 상소하기를,
“소현 서원(紹賢書院)이 해주 석담(海州石潭)에 있는데 문원공(文元公) 신(臣) 김장생(金長生)은 이이(李珥)의 정통을 물려받아 추배(追配)되었는데, 선정신 문정공 송시열은 곧 문원공의 정통을 물려받았으니, 소현 서원에 추배하여 도통(道統)의 전수를 빛나게 하소서.”
하니, 상량(商量)하겠다는 것으로써 비답을 내렸다. 원유(院儒) 이태빈(李泰彬) 등이 또 상소하여 청하니 예조에 계하(啓下)하였는데, 예조에서 시행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44 집 630 면

정조 9년(1785)6월 24일(도목 정사를 행하고 이황·이이·김장생·송시열의 자손을 녹용하도록 명하다)
~ 또 하교하기를,“우리 왕조(王朝)는 오로지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명분(名分)과 의리가 지금까지도 이를 힘입어 왔다. 그렇다면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여 장려(奬勵)하는 방법이 어찌 마땅히 해야 할 일 가운데 급선무가 아니겠는가?”하고, 이어서 선정(先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라 명하였다【원전】 45 집 531 면

정암님의 댓글

정암 작성일

[송자대전(宋子大全) 제212권 사계 선생(沙溪先生) 어록 ]

[문] 《대학(大學)》 경(經) 1장(一章)에 하나는 ‘치지는 격물에 있다.[致知在格物]’ 하였으니, 이는 격치(格致)로서 다만 한 가지 일[一事]일 뿐이요, 하나는 ‘물(物)이 이른 다음에 앎이 이른다.[物格而後知至]’ 하였으니, 이는 또 분명 두 가지 일[兩件事]입니다. 그 서로 다른 점을 듣고 싶습니다.

[답] 물(物)을 대할 때에 앎[知]이 저절로 이르는 것이요, 물을 대하고 나서 다시 앎을 이루는 것이 아니므로 ‘치지는 격물에 있다.’ 한 것이다. 공효(功效)를 거두는 때로 말하자면 반드시 물의 이치가 다한 다음에야 앎이 곧 이르므로 선후(先後)의 차례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물이 이른 다음에 앎이 이른다.’ 한 것이다. 앞으로 재(在) 자를 보고 뒤에서 이후(而後) 자를 보면 그 뜻이 환해질 것이다.

[문] 물격의 설에 대해서는 퇴계의 해석이 비록 많기는 하나 끝내 석연치 못합니다.

[답] 그렇다. 정경임(鄭景任 정경세(鄭經世))은 경학(經學)이 정명(精明)하였지만 이 견해만은 투명하지 못하였다. 그는 곧,

“격물은 청객(請客 손님을 초청함)과 같고, 물격은 객래(客來 손님이 옴)와 같다.”
하였는데, 이 말대로라면 물(物)의 이치가 본디 저편[彼]에 있기에 사람[物]이 이른 다음에야 내 마음에 내도(來到)한다는 뜻이니, 어찌 어긋나지 않겠는가. 오직 율곡의 설만이 통투하고 쇄락하다. 율곡은 대체로,

“물격(物格)이란 물리(物理)가 다 밝혀져서 조금도 미련이 없는 것이니 물리가 극처(極處)에 이른 것이다. 이는 바로 물(物)을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지지(知至)란 물리가 다 밝혀져서 조금도 미련이 없이 된 다음에 이에 따라서 나의 앎이 극처에 이른 것이다. 이는 지(知)를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하나같이 주자의 설에 근본을 둔 것이다.

[문] 어째서 주자의 설에 근본을 두었다고 말씀하십니까?

[답] 장구(章句)의 보망장(補亡章)에 ‘중물(衆物)의 표리(表裏)와 정조(精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물(物)을 가지고 한 말이고, 또 ‘내 마음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지(知)를 가지고 한 말이다. 《혹문(或問》에는 ‘물(物)에 있는 이치가 이미 극처에 도달하여 미련이 없게 되면 나에게 있는 앎도 이치의 도달한 바에 따라 극진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의 쇄락(灑落)한 것은, 견식(見識)이 통철(洞徹)함으로 말미암아 가슴속에 한 점의 물욕(物欲)도 없기 때문에 저절로 이렇게 된 것이다. 오래오래 쌓인 것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주자의 문인(門人)이,

“이는 흉중(胸中)을 쇄락하게 한 것입니다.”
하자, 주자가 아니라면서 말하였다.

“이는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암님의 댓글

정암 작성일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칠정은 기(氣)가 발(發)한 것이요,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다.”
하였는데, 퇴계(退溪)의 일생 동안 주장하는 바가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理)가 발하여 기(氣)를 따른다.’는 설이 있게 된 것이다. 율곡은 말하였다.

“사단도 본디 기(氣)를 따라 발하기는 하나, 기에 가리지 않고 곧바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의 발[理之發]이라고 한 것이요, 칠정도 본디 이(理)가 타기는 하나, 혹 기(氣)의 가림을 받기 때문에 기의 발[氣之發]이라 한 것이니 의당 활용(活用)하여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러나 칠정 가운데 또한 이(理)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순(舜)의 기뻐함과 문왕(文王)의 노여움이 이(理)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단 가운데도 기(氣)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주자가 이른바, 사단의 절도에 맞지 않는 것[四端之不中節]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선생(先生)이 일찍이 밤중에 나를 불러 놓고,

“심(心)ㆍ성(性)ㆍ정(情)ㆍ의(意) 등의 글자를 아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다만 주설(註說)에서 어렴풋이 보아 넘겼을 뿐인데, 어찌 분명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자, 선생이,

“심(心)은 그릇과 같고, 성(性)은 그릇에 담긴 물과 같고, 정(情)은 그릇에 담긴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다. 이 물을 저장해 두고 때로 쏟아내는 것이 그릇이듯이, 이 성(性)을 포용하고 정(情)을 발하는 것은 심(心)이니, 이는 심ㆍ성ㆍ정의 구별이다. 이 정이 발한 다음에 모획(謀劃)을 경영(經營)하는 것은 의(意)이고, 한 일[一事]을 지향(指向)하여 이루려고 하는 것은 지(志)이다. 사(思)와 지(志)는 서로 가깝되, 다만 지는 크고 사는 적다. 염려(念慮)는 사(思)의 붙이이지만 여(慮)에는 우탁(虞度)의 뜻이 있다.”
하고, 또 말하였다.

“정(情)은 바로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결에 불쑥 발출(發出)한 것이요, 자가(自家)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발출된 것으로 모획을 경영하는 것이 의(意)이니, 이렇게 된 후에야 비로소 자가(自家)로 말미암기 때문에 《대학(大學)》에서 성정(誠情)이라 하지 않고 성의(誠意)라고 한 것이다.”

박문(博文)ㆍ약례(約禮) 두 가지는 성문(聖門)의 학(學)에 있어, 수레로 말하면 두 바퀴와 같고 새로 말하면 두 날개와 같다. 율곡이 매양 이 말을 외어서 문인들을 가르쳤으나, 내가 본바 율곡은 박문(博文)의 공(功)은 매우 높았지만, 약례(約禮)에는 아직도 미진한 바가 있었다.

퇴계의 문집(文集) 가운데 스스로 낙(樂)을 말한 곳이 매우 많다. 옛날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시(詩)에 ‘즐거운 내 마음을 남들은 모르고서.[傍人不識余心樂]’라 한 것을 주자는 오히려 명도가 젊었을 때에 지은 것이라 하였다.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호)은 낙(樂)을 말한 곳이 많았는데, 그 첫째에 ‘참된 즐거움 마음에 사무쳐 어찌하지 못하네.[眞樂攻心不奈何]’라고 한 데 대해 주자는 웃으면서, 참된 즐거움이 아니라고 하였다. 지금 퇴계는 다만 고요한 곳에 물러가 살면서 뜻대로 글을 보며 시비(是非)가 이르지 않는 것을 낙(樂)으로 삼았으니, 이는 참다운 낙인 것이다. 그러나 공자(孔子)ㆍ안자(顔子)의 낙에는 미치지 못할 듯하다. 공자ㆍ안자의 낙에 대해서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와 주자(朱子)가 모두 방법만 제시하고 묘처(妙處)를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말하기 쉬운 것이겠는가.

내가 일생 동안 수용(受用)한 것은 사마 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의 봉호)이 평생 동안 자기의 행한 일을 남에게 숨김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온공(溫公)이 만일 신독(愼獨)의 공(功)이 없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이 한 구절(句節)은 선생이 항상 하는 말씀이었다. 《대학(大學)》의 성의장(誠意章)과 《중용(中庸)》 수장(首章)의 지결(旨訣)이 일성(日星)처럼 밝은데 선생의 가진 바는 더욱 친절(親切)하여, 미루어서 그 극(極)에 이르면 저절로 천지(天地)에 부끄러움이 없어 호연(浩然)히 형용할 수 없는 묘(妙)가 있을 것이니, 학자(學者)는 비근(卑近)하다 하여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후에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시호)이 신독(愼獨)이라 자호(自號)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계지 술사(繼志述事)의 효(孝)인 것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일찍이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는데, 구봉은 매우 영매(英邁)하여 글을 보는 데 막힘이 없었으며, 남도 자기처럼 잘 알 줄로 여기기 때문에 단번에 읽어 넘길 뿐 전혀 해설(解說)을 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 어리둥절하여 마치 배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하여 물러가 조용히 앉아서 이리보고 저리보고 십분 신고(辛苦)를 해 가며, 읽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읽곤 하여 밤낮으로 끝없이 한 후에야 점점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천백번 생각해 보아도 끝내 이해가 되지 않은 다음에야 선생에게 물었으니, 독서(讀書)에 나처럼 근로(勤勞)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너는 글을 쉽게 보아 넘기는데, 글을 쉽게 보아 넘기는 사람은 아는 것이 반드시 정밀하지 못하며, 아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면 지키는 것이 견고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젊었을 적에 색욕(色欲)을 방제(防制)하는 데 있어 매우 공력을 쏟았기 때문에, 아무리 관서(關西)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어도 끝내 색욕이 마음에 싹트지 않았다.

이군 유태(李君惟泰)가 나이가 많도록 장가들지 않자, 선생이 이천(伊川 정이(程?))이 주행기(周行己)를 꾸짖은 말을 써서 보여 주었다.

매양 곁에서 모시고 잘 적마다, 선생이 밤이면 반드시 관(冠)을 쓰고 앉아 조용히 음영(吟?)하며, 혹은 나를 불러 함께 얘기를 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서당(書堂)에서 자고 일찍 일어나 와서 뵙자, 선생이 말하였다.

“내가 오늘 밤에 《심경(心經)》의 대문(大文)을 죽 외었는데, 한 글자도 기억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생이 만년에는 다만 《의례문해(疑禮問解)》ㆍ《가례집람(家禮集覽)》을 찬수(撰修)하였고, 한가할 때는 《중용》ㆍ《대학》을 보았다. 일찍이 말하였다.

“수신(修身)ㆍ제가(齊家)를 하는 데는 《가례(家禮)》ㆍ《소학(小學)》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고, 치심(治心)ㆍ진학(進學)하는 데는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보다 더 긴요한 것이 없다. 또 《심경》은 간략하고 《근사록》은 방대하다.”

일찍이 《논어(論語)》 자로편(子路篇)의 ‘사람이 항구한 마음이 없으면 무당과 의원도 될 수 없다.[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는 대문을 진강(進講)하였는데, 그 주(註)에 ‘아무리 천역(賤役)이라도 더욱 항구한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雖小道 尤不可以無恒]’ 하였으므로, 내가 진언하기를,

정암님의 댓글

정암 작성일

“이 우(尤) 자는 분명히 유(?) 자인데, 글자가 서로 비슷함으로 인해 잘못된 것입니다. 유(?)는 옛날의 유(猶) 자입니다.”
하였으나, 상의 뜻은 그렇게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주자(朱子)는 한문(韓文 한유(韓愈)의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나는 천성이 본디 노둔(魯鈍)한 데다 또 경서(經書)만 읽기에도 마냥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일찍이 제자(諸子)의 글을 읽지 못하여 저술(著述)이 거칠게 되었다. 이것이 꼭 유자(儒者)에게 병통이 될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한문(韓文)을 겸해서 보아라.
그래서 물러 나와 한문 약간 편을 신재(愼齋 김집(金集))에게 수업하였다.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는 경학(經學)이 정밀 통투하고, 대절(大節)이 거룩하다.

일찍이,

“그대는 정송강(鄭松江 정철(鄭澈))을 어떤 인물로 보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소자(小子)의 부형(父兄)께서는 항상 그가 청직(淸直)하면서 협애(狹隘)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였다.

“옳다. 이분은 스스로 티없이 청백(淸白)함을 믿고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태도로 살다가 끝내 한 세상에 원수처럼 미움받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정자(程子)가 ‘학식이 높으면 국량(國量)도 커진다.’ 하였으니, 이분은 역시 학식이 높지 못한 소치이다.”

일찍이 《가례(家禮)》 친영조(親迎條) 부주(附註)의 ‘위포궤연(圍布?筵)’이라는 대문을 강(講)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전에 송강(松江)이 하루는 《가례》를 가지고 와서 이 주(註)를 가리켜 보이면서 ‘내가 이리저리 두루 연구해 보았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하였으니 자세히 설명해 주기 바라네.’ 하였다. 내가 하나하나 설명해 주자 송강이 매우 기뻐하면서 ‘이제야 답답증을 풀었으니 매우 다행스럽군.’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송강이 경연(經筵)에서 곧장 나에게로 찾아와 웃으면서 ‘오늘 참 신통한 일을 겪었네. 진강(進講)을 마치자, 상께서 《가례》를 내놓고 하문(下問)하기를 「이 대문을 내가 여러 번 연구해 보았으나 끝내 막혀 이해할 수 없으니, 여러 연신(筵臣)들은 시험 삼아 나를 위해 강설(講說)하라. 비록 한림(翰林)ㆍ주서(注書)라도 참으로 아는 자가 있으면 사양치 말라.」 하였는데, 그 대문이 바로 내가 엊그제 그대에게 물었던 것이었네. 여러 사람은 모두 감히 모르겠다고 대답하기에, 내가 하나하나 구두를 떼어서 그 뜻을 풀이하자, 상께서 하교하기를 「대단히 시원스럽다.」 하면서 재삼 칭탄(稱嘆)하고, 이어 「내가 글을 보는 데 있어 이 주(註)처럼 어려운 것은 없었다.」 하였네. 그리고는 연신에게 「모관(某官 정철을 말함)은 벼슬이 높아 일이 많은 사람인데도 오히려 글에 유의(留意)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그러지 못한가?」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부끄러워하며 사죄하였네. 그러자 나는 곧 「신(臣)도 몰랐었는데, 엊그제 김모(金某 김장생을 말함)에게서 배워 알았습니다.」 하고 싶었으나, 그 말이 입에 감돌면서도 끝내 감히 진달하지 못하였네. 물러 나온 뒤에 상사(賞賜)를 나에게 보내셨는데, 이는 실로 그대의 공이니 나누어 받아야겠네.’라고 했다.”
하였다.
소자(小子, 송시열 자신을 말함)가 그윽이 생각건대, 선묘(宣廟 선조대왕)께서는 만기(萬機)를 접하신 여가에도 오히려 이런 문자(文字)에까지 마음을 두었다. 또 모르면 그냥 두지 않고 이처럼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니, 대우(大禹 우 임금)가 조그만 사물(事物)에도 부지런했던 것과, 주공(周公)이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던 것이 어찌 이보다 더 훌륭하겠는가. 내가 숭정(崇禎) 병자년(1636, 인조14)에 사신(使臣) 인편을 통하여, 《가례》의 의의(疑義)를 초록(抄錄)하여 명(明) 나라 예부(禮部)에 물었는데, 사신이 돌아와 한 말에 의하면,

“예부(禮部)에 물어보았더니, 그 주사(主事)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우리가 주로 삼는 것은 황조(皇朝)의 예(禮)일 뿐이고 《가례》는 알 바 아니오.’ 했다.”
하였다. 대저 《가례》는 바로 민속(民俗)을 화성(化成)시키는 글인데, 예부가 일찍이 《가례》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가 군급(窘急)한 지경에 이르자 곧 잠꼬대 같은 말로 이 질문을 막았으니 매우 성실치 못하다. 이것으로써 황조(皇朝)의 사실(事實)을 알 수 있고, 또한 중조(中朝)가 주도(朱道 주자(朱子)의 도)를 숭상하지 않는 일단(一端)을 알겠다.

선생이 말하였다.

“율곡은 정미(精微)하고 긴요(緊要)한 곳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명백하게 설파하여 아무리 문리(文理)가 통창하지 못한 자라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하는데, 구봉(龜峯)은 분명하게 변석하려 하지 않으니 그의 뜻은 대체로 ‘내가 아무리 말해 보았자 남들이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는 것이므로, 그 기상(氣象)이 서로 같지 않다. 그러나 구봉도 남에게 학문하는 순서를 건너뛰게 하려 하지는 않았다. 퇴계(退溪)가 의례(儀禮)를 물어 온 사람에게 답(答)한 글에 ‘승중손(承重孫)의 아내에게 시어미가 있으면 종복(從服)하지 않는다.’는 등의 유(類)는 주자(朱子)의 본의(本意)가 아니다. 경임(景任 정경세(鄭經世))은 예학(禮學)을 전공한 사람이면서도 계운궁(啓運宮 원종비(元宗妃) 구씨(具氏))의 초상에 우연히 이 문제를 망발(妄發)했다가 최명길(崔鳴吉)에게 매우 군박(窘迫)을 당하였으니 애석하다.”

추숭(追崇)의 의논이 한창 성할 때에 선생이 말하였다.

“이 의논은 오직 이귀(李貴)와 박지계(朴知誡)의 소견만이 우연히 그렇게 되어 끝끝내 고집했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상의 뜻을 따르는 데 불과하였다. 정자(程子)가 도원(悼園 송 영종(宋英宗)의 아버지인 복왕(?王)을 말함)을 그르게 여겼던 것은 다만 고(考)라고 칭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지금 논의하는 자는 곧 ‘고라고 칭할 때는 정자가 그르게 여기지 않았으나, 황고(皇考)라고 칭한 다음에야 정자가 비로소 그르게 여겼다.’고 한다. 대저 황(皇) 자는 바로 현(顯) 자나 대(大) 자의 뜻이니, 곧 허자(虛字 중요한 뜻이 들어 있지 않은 글자를 말함)인 것이다. 정자의 뜻은 결코 여기에 있지 않았다.”

정암님의 댓글

정암 작성일

반정(反正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킴) 초는 바로 큰일을 함직한 기회였는데, 반정에 참여한 제인(諸人)들이 부귀(富貴)에만 뜻을 두었고, 또 이괄(李适)의 변(變)과 호란(胡亂)의 변을 만나 인심(人心)이 크게 괴란되므로, 상도 위태로운 국세(國勢)가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음을 알고는 고식적인 자세로 하루하루를 넘겼다. 천하의 이치가, 부진(不進)하면 반드시 퇴보(退步)하는 것이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내가 김첨(金瞻)ㆍ김수(金?)와의 세의(世誼)가 두터운 관계로, 비록 색목(色目)이 나누어진 뒤에까지도 오히려 서로 왕래하였다. 내가 일찍이 김첨에게,

“남들이, 송응개(宋應漑)가 율곡을 공박한 계문(啓文)이 공(公)의 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네.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하겠는가. 송응개 집에도 글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내 손을 빌겠는가.”
하였으니, 글을 잘한 사람이란 대체로 송응형(宋應?)을 가리킨 것이다. 인하여 시열(時烈)에게 말하였다.

“너의 집과 저들(송응개와 송응형을 말함) 집은 족속(族屬)으로서 서로 친하고 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그들의 견해에 말려들지 않기가 어렵겠다.”

이옥여(李玉汝 이귀(李貴))의 아내가 항상 실성(失性)하여 집에서 통곡을 하므로, 우리들은 매양 기아(飢餓)의 소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옥여(玉汝)의 기(氣)는 끝내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니, 어찌 석담(石潭 이이(李珥))의 여운(餘韻)을 관감(觀感)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황준량(黃俊良)이 이기(李?)에게 붙은 것을 매우 미워하여 심지어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쓴 발문(跋文)을 삭제하려고까지 하였다. 내가 일찍이 묻기를,

“선생께서 황준량을 이토록 통척(痛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제봉(高霽峯 고경명(高敬命))도 이량(李樑)에게 붙었으되, 율곡이 그를 취하여서는 심지어 빈상(?相)으로 있을 때에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기까지 하였는데 어째서 두 사람을 서로 다르게 보십니까?”
하자, 선생이 말하였다.

“고제봉이 젊었을 때에 그의 아버지인 맹영(孟英)이 이량(李樑)의 문객(門客)이 되었기 때문에 제봉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니, 황준량의 일과는 차이가 있을 듯하다.”

일찍이,

“평사(評事)인 너의 숙부(叔父)를 내가 일찍이 보지 못하였는데, 한번은 장유(張維)를 보고 ‘그대가 아는 사람 가운데 누가 제일류(第一流)인가?’ 하고 물으니, 장유가 ‘소생(小生)의 소견으로는 송방조(宋邦祚 송시열의 숙부임)를 제일류로 여깁니다.’ 하였다. 그후 무신년(1608, 선조41)에 과거급제를 하고 찾아왔기에 그의 의형(儀形)을 보고 담론(談論)을 듣고는 장유의 말이 헛말이 아님을 알았다.”
하였다. 선생의 의논은 충후(忠厚)하고 화평(和平)하여 박절한 말을 전혀 하지 않았으나,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에 이르러서는 매우 엄절(嚴截)하였다.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 정철(鄭澈)의 아들)이 송강(松江)의 유고(遺稿)를 인송(印送)해 왔는데, 그 발문(跋文)에 ‘얼신(孼臣 비천(卑賤)한 신하라는 뜻)이 국병(國柄)을 잡다.[孼臣秉柄]’라는 글귀가 있자, 선생이 급히 붓을 가져다가 그 옆에 주석(注釋)하기를 ‘얼신(孼臣)은 곧 이산해(李山海)이다.’ 하였다.

일찍이 말하였다.

“계미년 이전의 동서(東西 동인(東人)과 서인(西人))는 모두 사류(士流)가 서로 다툰 것이었기 때문에 율곡이 매양 보합론(保合論)을 폈지만, 계미년 이후에는 사(邪)와 정(正)이 나누어져 두 당(黨)으로 된 것이었다. 일찍이 김우옹(金宇?)을 보고 계미년의 일이 과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김우옹이 ‘소인(小人)의 짓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이 마치 소인이란 이름을 이경률(李景慄)ㆍ이징(李徵) 두어 사람에게만 돌리는 듯하여, 그 일대(一隊)의 사람들을 모두 면탈(免脫)시키려 한 것이 매우 가소로웠다.”

선생이 84세가 되어 신미년(1631, 인조9) 8월 3일에 별세하셨다. 그해 봄에 대문(大門) 밖 홰나무 밑에 나와 고서(古書)를 조용히 읊조리며 두어 차례 배회하면서,

“내가 스스로 근력(筋力)을 헤아려 보니 아직도 하루에 30리는 걸을 수 있겠다.”
하였다. 문인(門人) 이항길(李恒吉)에 의하면, 이해에 선생이 자기 집에 걸어서 왔다고 하는데, 그의 집과 선생의 본택(本宅)과의 거리는 5리 남짓하였다.

신미년에 석서(石西)에서 족인(族人)을 조문(弔問)하고 돌아갈 때 내가 임외(林外)에 나가 맞이하였는데, 말 위에 우뚝 앉은 모습이 마치 소년(少年) 같았다.

보학자료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