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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諱 益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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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5 22:43 조회1,4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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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참판 김익경의 졸기] 숙종 1년 을묘(1675, 강희 14) 8월 15일(경오)

전(前) 참판(參判) 김익경(金益炅)이 졸(卒)하니, 나이가 47세이다. 김익경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인데, 사람됨이 염개(恬介)하여 지조를 지킴이 있었다. 늦게 과거에 올랐는데, 시대의 막힘을 만나서 임용되지 못하였고 수명도 길지 못하니, 사류(士類)가 이를 애석해 하였다.
庚午/前參判金益炅卒, 年四十七。 益炅, 文元公^長生之孫, 爲人恬介, 有操守。 晩登第, 値時之?, 未究其用, 年又不永, 士類惜之
【원전】 38 집 299 면


[김익경(金益炅) 인물정보]
* 1629(인조 7)∼1675(숙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계명(啓明). 서울출생. 아버지는
참판 반(槃)이고, 어머니는 연산서씨로 주(澍)의 딸이다.
*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
* 이듬해 집의가 되고 1664년 형조참의·동부승지,
* 1666년 호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원양도관찰사(原襄道 觀察使)와
* 1672년 대사헌을 지냈다. 이조참의를 거쳐
* 1674년 예조참판 때,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자 양성(陽城)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전리(田里)로 풀려나와 일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현종(1663)7월 5일(김시진·김익경·김수항·민응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경(金益炅)을 동부승지로~【원전】 37 집 324 면(개수실록)

현종 4년(1663)7월 6일(김시진·김익경·소두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경(金益炅)을 승지로~【원전】 36 집 372 면

현종 5년(1664)6월 10일(좌부승지 김익경이 함릉군 이해가 치사한 청을 허락할 것을 아뢰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가 물러나기를 구한 상소에 대해 이조가 회계한 것을 좌부승지 김익경(金益炅)이 진달하면서 아뢰기를,“청컨대 그의 청을 허락하여 인신의 그칠 줄 아는 지절을 면려하고, 조정에서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아름다움을 드러나게 하소서.”하니, 상이 답하기를,“오늘 허락치 않는 것이 영원히 치사(致仕)를 폐지하려는 뜻은 아니다.”하였다.【원전】 36 집 415 면

현종(1664)6월 21일(도목 대정을 하여 김익경·이만영·이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도목 대정(都目大政)을 하였다. 김익경(金益炅)을 형조 참의로~【원전】 37 집 386 면(개수실록)

현종 5년 갑진(1664)7월 26일(우부승지 김익경이 이충준에 대한 형조 문건을 논하자, 삭직시키다)
우부승지 김익경(金益炅)이 글을 올려 일을 논하다가 성상의 뜻에 거슬려 삭직되었다. 그 대략에,
“지난번에 삼가 이충준에 관한 형조 문건에 대한 재결 내용을 보니, 말씀의 취지가 지극히 엄하고 논죄가 지나치게 성급하였습니다. 그 당시 쟁집하지 못한 신의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 가슴 조이는 마음을 끝내 억제할 수 없어 이에 감히 우러러 전하를 어지럽힙니다.~
신은 그때 대방(代房)으로 문건을 출납하면서 소회를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쳐 성명의 그릇된 거조가 중외에 소문이 나게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신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죄입니다. 삼가 신의 직을 삭탈하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계(啓)자를 찍어 내려보냈다.익경의 말이 옳기는 하나 대방(代房)이 되었을 때 사건을 근거로 논열하지 않고 지금에서야 소를 올려 진술하니 진실로 때가 늦었다. 그러나 성상이 직언을 받아들이는 도리에 있어서는 다만 그 말의 타당한가 살필 뿐이지, 시기의 빠르고 늦음은 논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끝내 성상의 마음을 거슬려 그 직이 삭탈되고 용서받지 못하였으니, 언로에 어찌 방해가 되지 않겠는가.【원전】 36 집 426 면

8월 4일(교리 이정 등이 차자를 올려 김익경의 무죄를 논하다)
교리 이정(李程) 등이 차자를 올려 김익경의 무죄를 논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전】 36 집 427 면

현종 8년(1667)1월 10일(민유중·이시술·김익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경(金益炅)을 참지로~ 【원전】 36 집 537 면

9월 4일(김익경·경최·여성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경(金益炅)을 대사간으로~【원전】 36 집 564 면

9월 14일(김익경 외 3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경(金益炅)·이익(李翊)을 승지로~【원전】 37 집 582 면(개수실록)

11월 8일(김익경을 형조 참의로, 권두추를 정언으로 삼다)
김익경(金益炅)을 형조 참의로~【원전】 37 집 589 면(개수실록)

현종(1668)6월 3일(김익경을 다시 조율하라고 하다)
금부가 아뢰기를,“김익경(金益炅)의 일을 의논해 아뢸 때에, 인물을 진퇴시키는 자리에 있지도 않으면서 사람의 통색(通塞)에 대해서 논하였다는 등의 말로 입계하니, 율문을 상고하여 중하게 죄를 정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율문을 두루 상고해 보았으나, 합당한 율문을 끝내 찾지 못하였습니다.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하여 장 1백(仗一百)으로 조율하여 입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비록 합당한 율문은 없더라도, 이미 무거운 쪽으로 죄를 정하라고 했는데 어찌 익훈(益勳)과 똑같이 조율을 할 수가 있는가. 중하게 법을 적용하라고 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일이 매우 놀랍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고 이 공사를 도로 내보내어 고쳐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원전】 37 집 612 면(개수실록)

현종 9년(1668)11월 18일(~김익경의 일에 대한 판부사 송시열의 상소)
판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
또 아뢰기를,“김익경(金益炅)의 통색(通塞)은 그의 형이 탄핵을 받기 이전에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사사로움에 치우쳤다고 여기고서 깊이 죄를 주셨습니다. 이민서(李敏?)가 뜻을 어긴 것은 남의 비밀을 들추어 곧은 체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닌데 멀리 낮은 고을에 임명한 채 오래도록 소환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모두 오늘 말해야 할 것들입니다.”하니, 상이 답하기를,“근실하고 간절한 말이 지성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다. 내 비록 불민하나 유념하여 성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원전】 36 집 599 면

현종 11년(1670)10월 9일(김익경·남이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경(金益炅)을 원양 감사(原襄監司)로~【원전】 36 집 677 면

11월 20일(강원 감사 김익경이 진휼을 청하다)
강원 감사 김익경(金益炅)의 장계에 따라 춘천(春川)·횡성(橫城)·낭천(狼川)·원주(原州) 등 4개 읍의 콩 1백 73석과 양구(楊口)·인제(麟蹄)·홍천(洪川)·정선(旌善)·평해(平海)·울진(蔚珍)·고성(高城) 등 7개 읍의 세포(稅布) 3동(同) 30필을 본도에 지급하여 진휼할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원전】 38 집 41 면

현종(1671)9월 13일(원양 감사 김익경이 도내에서 진휼을 잘한 수령을 계문하다)
원양 감사(原襄監司) 김익경(金益炅)이 도내에서 진휼을 잘한 수령을 계문하였다. 원주 목사(原州牧使) 허질(許秩)이 으뜸이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가자(加資)하고, 평해 군수(平海郡守) 박재(朴材), 홍천 현감(洪川縣監) 황윤(黃玧), 평강 현감(平康縣監) 조이후(趙爾後), 횡성 현감(橫城縣監) 송광순(宋光洵) 등에게는 모두 표리(表裏)를 내렸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홍처후(洪處厚)도 진휼을 잘한 수령을 계문하였다. 정평 부사(定平府使) 권숙(權?)이 으뜸이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고, 북청 판관(北靑判官) 이순선(李循先)에게 준직(準職)을 제수하였다.【원전】 38 집 78 면(개수실록)

현종(1672)3월 9일(이만영을 우윤으로, 김익경·원만리를 승지로 삼다)
~김익경·원만리를 승지로~【원전】 38 집 103(개수실록)

윤 7월 23일(이관징을 승지로, 김익경을 병조 참으로 삼다)
김익경(金益炅)을 병조 참의로~【원전】 38 집 121 면

현종 13년 임자(1672)8월 17일(김익경·이지익·이연년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경(金益炅)·이지익(李之翼)을 승지로~【원전】 37 집 25 면

11월 9일(목창명·김익경·이당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경(金益炅)을 대사간으로~ 【원전】 37 집 28 면

5월 1일(대사간 김익경 등이 체차되다)
대사간 김익경, 정언 최후상, 집의 홍주국이 모두 패소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차되었다.
【원전】 38 집 146 면

12월 27일(김익경·심재·이유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김익경(金益炅)을 발탁하여 예조 참판으로 삼고~【원전】 37 집 56 면

현종(1674)2월 28일(상이 판서 조형 참판 김익경 등을 금부에 넘기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대왕 대비전의 복제가 과연 그러하다면 어째서 이제야 부표(付標)해 들인단 말인가?”
하니, 승지 정석(鄭晳)이 아뢰기를,
“예조에 물어 보았더니, 복제 단자(服制單子)가 계하(啓下)된 뒤에야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이제야 부표해 들여 지체시키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예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복제 문제 때문에 내일 성복(成服)을 미처 행하지 못할 염려가 있을 듯하다. 예조의 당상과 낭청 모두를 나문(拿問)해 처리하라.”하였다. 판서 조형(趙珩), 참판 김익경(金益炅), 참의 홍주국(洪柱國), 정랑 임이도(任爾) 전원이 금부에 넘겨졌다.【원전】 38 집 175 면(개수실록)

현종 15년(1674)4월 8일(이익상·최문식·조이병·김익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경(金益炅)을 호조 참판으로~【원전】 37 집 63 면

5월 12일(김익경·안후·유담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경(金益炅)을 대사간으로~【원전】 37 집 65 면

7월 6일(행 대사헌 김익경이 인피하자, 출사시키다)
행 대사헌 김익경(金益炅)이 아뢰기를,“삼가 듣건대, 어떤 유생이 소를 올려 대왕 대비께서 입은 복제에 대해 해조에서 정한 것이 예에 맞지 않다고 논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가 하달되지 않아 어떻게 말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는데다가 또 옳고 그름과 잘잘못에 대해 지레 논해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신은 그 당시 예관의 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면서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이하진, 정언 안후태가 김익경의 일에 대해 처치하기를,
“갑자기 정한 예였지만 역시 옛날의 예를 상고하였고 이미 지나간 일인데 혐의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출사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원전】 37 집 70 면

7월 15일(상복 제도의 일로 예조 판서 조형·참판 김익경 등을 하옥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초상 때에 해조가 상복 제도를 기년으로 결정하였는데 참으로 합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쓸데없는 말을 일으켜 기해년의 고례를 상고해 보지도 않고 또한 의논해 처리하자고 청하지도 않은 채 바로 표지를 붙였는가 하면 계사의 말도 명백하지 않았다.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마음에 중자와 서자에 대해서는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는 뜻을 품고 모호하게 개정한 그 죄를 면할 수 없다. 그때 예관과 낭관을 모두 잡아다 엄하게 문초하여 죄를 정하라.”하였는데, 예조 판서 조형, 참판 김익경, 참의 홍주국, 정랑 임이도가 모두 하옥되었다.【원전】 37 집 75 면

숙종 1년 을묘(1675)1월 10일(죄를 입은 예조의 조형·김익경·홍주국의 석방과 서용을 명하다)
죄를 입은 예조(禮曹)의 세 당상(堂上) 조형(趙珩)·김익경(金益炅)·홍주국(洪柱國) 등을 석방하여 서용(敍用)하라고 명하매, 오정창(吳挺昌)이 임금에게 말하여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관(禮官)은 남에게 구박당하였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석방하게 하였다.”
하였다.【원전】 38 집 234 면


[송자대전(宋子大全) 제84권 서(書)]
김경능(金景能)에게 보냄 - 을묘년(1675) 8월 29일

참판장(參判丈 김익경(金益炅))이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여 부음(訃音)을 받게 되니, 통곡만 나올 뿐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 모르겠네. 지난날을 회상하건대, 허목(許穆)이 재차 조정에 들어왔을 때 참판장이 동춘(同春)에게 ‘혹 나도 그에게 물들까 염려된다. 차라리 속히 나가서 이를 모면하는 것이 옳다.’ 하고, 드디어 외직으로 관동(關東)을 청하여 떠났었네. 나도 늘, 사부(士夫)의 몸가짐은 의당 그분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그런 풍채(風采)를 다시 뵐 수 없으니, 더욱 세도(世道)를 위하여 개탄하네. 이는 다 운기(運氣)에 관계된 바이라 어찌하겠는가. 보내 준 고기는 잘 받았네. 노병(老病)이 이미 심하여 소식(素食)을 오래 지속할 수 없으므로 내일부터 고기를 먹으려네.



예송 [禮訟]

조선 후기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 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문제(典禮問題)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성리학의 핵심문제이면서
왕위계승원칙(지금의 憲法과 같음)인 종법(宗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학파(栗谷學派)인 서인과 퇴계학파(退溪學派)인 남인간의
정권주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성리학 이념논쟁이었다.

〔1차 예송〕
인조에게는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봉림대군에게는 뒤에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방법이었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이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머니 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가서 첫째·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효종이 즉위해 주화파를 몰아내고
10년 동안 송시열 등 척화파 사림의 지지를 받아 북벌을 준비하다 갑자기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기간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이 논쟁을 1차예송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한다.
조대비 복상은 우선 정태화가 ‘장자이든 차자이든 1년이라’는
≪경국대전≫에 있는 규정을 내세워 기년상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허목과 윤선도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쟁이 확산되었다.
주자의 ≪가례≫에 따르면 부모가 장자에 대해서는 삼년상이고
차자 이하의 아들에게는 기년상이었다.

조대비는 효종의 어머니라서 신하가 될 수 없고
효종은 조대비에게는 둘째아들이므로 차자로서 기년상이 당연하고,
비록 왕위를 계승했으나

사종지설(四種之說 : 왕위를 계승했어도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 중
체이부정(體而不正 : 嫡子이면서 長子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어 기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서인의 주장이었다.

이는 ≪가례≫에 입각해 종법을 왕이든 사서인(士庶人)이든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수주자학파(守朱子學派)와

≪주례≫·≪의례≫·≪예기≫ 등의 고례에 입각해
왕에게는 종법을 사서인과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는 탈주자학파(脫朱子學派)간의 이념논쟁이었다.

또한, 이는 종법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위계승을 해야 하고,
효종은 원래 둘째아들로서 왕위계승의 자격이 없었는데
변칙적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않는가의 차이이기도 하였다.
우연히 이 때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살아 있어 이러한 기년상의 주장은
왕위계승이 효종의 아들 현종이 아니라
적통(嫡統)인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되기에 충분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오해의 소지를 기회로 윤선도는
이종비주(貳宗卑主 : 宗統을 宗統과 嫡統으로 나누어 임금을 천하게 함.)을 내세워
기년상을 주장하는 송시열 등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송시열 등에 대한 흉악한 모함으로 다루어져 유배가게 되었다.

이후 예송은 표면적으로는 복제문제라는 단순한 전례문제로 논의되지만
내면적으로는 송시열 등의 서인세력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고
남인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논쟁으로 비화되어
남인의 윤선도 구명운동과 더불어 지방유생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1차 예송은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죽고,
현종의 아들 이순(李焞)이 현종 8년 왕세자로 책봉되자 일단락되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송시열과 허적의 정책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차 예송〕
1673년(현종 14) 인선왕후(仁宣王后 : 효종비)가 죽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다시 예송으로 재현되었다.

≪가례≫에 따르면 효종비를 장자부(長子婦)로 보면 기년이요,
차자부로 보면 대공(大功 : 9개월)이고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따르면 큰며느리든 둘째며느리든 모두 기년이었다.

서인 쪽에서는 1차 예송 때처럼 차자부로 다루어 대공설을 주장하고
남인은 장자부로 다루어 기년상을 주장해 논쟁이 일어나는 것이
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갑인예송에서는 서인인 현종비의 장인 김우명(金佑明)과 김우명의 조카 석주(錫胄)가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인과 연결해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정해지고
정권은 허적(許積)을 비롯한 남인에게 기울었다.

이 때 현종이 갑자기 죽고 숙종이 즉위해 송시열과 그를 옹호하는 서인세력을 제거하고
윤휴·허목 등의 남인에게 정권을 맡겼다.
그러자 이에 반대해 서인들이 송시열 구명운동을 벌이고
효종의 차자 기년설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송시열을 제거하고 정권을 주도하려던 김석주가
오히려 남인세력에게 밀려 위태롭게 되자 다시
서인세력과 연결해 허적·윤휴 등을 역모로 몰아 남인세력을 제거하는,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이 일어나면서 예송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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