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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仁敬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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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5 22:45 조회1,3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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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왕후의 지문] 숙종 7년 신유(1681, 강희 20) 2월 22일(병오)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삼가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을 생각하건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깊이 생각하셔서 미리 우리의 금상 전하(今上殿下)를 세워 세자(世子)를 삼으시고, 이미 또 옛 제왕(帝王)의 흥망 성쇠(興亡盛衰)가 비필(妃匹)로 말미암지 않는 바 없음을 생각하셨는데, 비필(妃匹)의 어짊은 대개 족성(族姓)의 덕미(德美)에 근본하니, 촉(蜀)·도(塗)·신(莘)·지(摯)가 바로 그러하다. 이에 우리 인경 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께서 간택[睿簡]을 받으시어, 신해년 4월 초3일 갑신에 대혼(大婚)의 정례(正禮)를 갖추니, 우리 전하(숙종)께서 머물고 계시던 제궁(齊宮)에서 친영(親迎)하셨다. 예(禮)를 마치자, 종묘(宗廟)에 고(告)하였으며, 중외(中外)의 군자(君子)들에게 반교(頒敎)하시기를, ‘황류(黃流)의 술을 받힘에 옥찬(玉瓚)에 담기에 합당하니, 믿을 것인저!’ 하셨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씨(金氏)의 적관(籍貫)은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인데, 그 원류(源流)가 대개 신라(新羅)의 김성(金姓)에서 나왔다. 왕(王)에게 왕자(王子) 흥광(興光)이 있었는데, 장차 국란(國亂)이 있을 것을 알고 스스로 광주(光州)에 피하였다. 그후 잇달아 8대가 평장사(平章事)가 되자, 사람들이 그 사는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본조(本朝)에 와서 휘(諱) 김국광(金國光)은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을 섬겨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아들 휘 김극유(金克?)는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이었고, 그 증손(曾孫) 휘 김계휘(金繼輝)는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총명(聰明)하고 박달(博達)하여 선조조(宣祖朝)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들 휘 김장생(金長生)은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으로써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벼슬이 참판(參判)이었는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원공(文元公)으로, 이분이 왕후(王后)의 고조(高祖)가 되신다. 그 아들 휘 김반(金槃)은 일찍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간흉(奸凶) 이계(李?) 등을 논박(論駁)하여 배척(排斥)하고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구출(救出)한 것으로서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밝혔다. 그리고 그 아들 휘 김익겸(金益謙)은 생원시(生員試)에 장원 급제(壯元及第)하고, 병자년·정축년의 변란(變亂) 때 마음속으로 구차하게 모면(謀免)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강도(江都)에서 입근(立?)하였는데, 그 배필(配匹)이 우리 선조(宣祖)의 외증손(外曾孫) 윤성(尹姓)이며, 이분이 김만기(金萬基)를 낳으셨다.
〈김만기는〉 일찍이 병조 판서(兵曹判書)·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군수(郡守) 한유량(韓有良)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참판(參判)과 생원(生員)을 모두 충청도(忠淸道) 회덕현(懷德縣)의 정민리(貞民里)에 장사(葬事)지냈는데, 술인(術人)이 말하기를, ‘반드시 덕행(德行)이 있는 임사(任?) 같은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왕후(王后)께서 과연 숭정(崇禎) 기원(紀元) 34년 신축년 9월 초3일 을묘 인시(寅時)에 경사(京師) 회현방(會賢方) 사제(私第)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이미 태어났으나, 울음소리가 끊어져 희미하므로, 집안 사람들이 혹시나 하고 염려하였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다친 곳은 없고 성질(性質)이 그러합니다.’ 하였다. 이미 말을 배워서는 말을 가볍게 꺼내지 아니하나, 꺼내면 반드시 이치가 있었다. 그리고 보행은 더디고 느렸으며, 함부로 뜰 계단을 내려가지 아니하였고, 스스로 타고난 존귀(尊貴)함이 있었다. 동배(同輩)와 서로 만났을 때 곁에 있는 자들이 병아리를 희롱하거나 공기놀이를 하거나 배[梨]·밤[栗]을 다투거나 엿과 떡을 갖거나 간에 평소 꼼짝도 않은 채 단정히 앉아 보지 않은 것같이 하였으며, 함께 먹을 때에는 반드시 기다렸다가 모두 모인 후에야 먹었다. 또 화려[芬華]한 물건을 애호(愛好)하지 아니하였고, 의복(衣服)이 비록 때가 묻고 해졌다 하더라도 싫어하는 적이 없었으며, 곱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가 있어도 부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 주려고 하면, ‘좋다.’ 하면서 절대로 아까와하는 적이 없었다. 나이 7, 8세가 되자, 집안에 깊숙이 들어앉아 나가지 아니하고 예(禮)를 익혀 10세가 되니, 또 조달(早達)하였다. 일찍이 혼인(婚姻)이 있었는데, 마침 노인네[?艾]들이 모여 구경하고는 또 꽃구경을 하자고 청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저 집은 이웃이고, 친척이다.’ 하였으나, 모두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혹시라도 외부의 사람이 있을까 두렵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모(父母)가 말하기를, ‘만약 여자가 아니라면, 마땅히 명유(名儒)가 되어 전열(前烈)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로부터 덕성(德性)이 날로 진보하여 온공(溫恭)하고 화수(和粹)하며 장중(莊重)하고 공손해서, 사람들은 오만하고 게으른 용모(容貌)와 비속(鄙俗)한 말이 있음을 보지 못하니, 육친(六親)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덕선(德選)을 받들게 되니, 이때 대개 10세였는데, 선대왕(先大王)께서 두루 절충[折中]하고 응대(應對)하는 바가 마땅함을 가상(嘉尙)하게 여기셨으며, 여러 여관(女官)들로 모두 말하기를, ‘천제(天帝)의 누이 동생과 같다.’ 하였다. 이미 간선(簡選)되어 별궁(別宮)에 있을 때 부친이 때때로 들어가서 비로소 《소학(小學)》을 가르쳤는데, 단지 한 번 음독(音讀)만 가르쳤으나, 그 뜻을 익숙하게 통하였으며,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읽었고, 또 문득 암송(暗誦)하였다. 그리고 겸해서 《내훈(內訓)》을 한 번 보고는 끝내 잊지 않았고, 사람들이 말하는 고금(古今)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 듣기를 좋아하여,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이미 위로 삼궁(三宮)과 사성(四聖)을 받드는 데 정성(精誠)과 공경(恭敬)을 다하였고, 혼정 신성(昏定晨省)을 감히 몸이 아프다고 해서 혹시라고 폐하는 적이 없었으며, 종일 곁에서 모시면서 공경하고 삼가니, 사성(四聖)께서 권애(眷愛)하심이 매우 돈독하였다. 그러나 은혜에 친압(親狎)하고 사랑을 믿는 뜻은 털끝만큼도 마음속에 가지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정사(政事) 때문에 선대왕(先大王)께서 종일 별전(別殿)에 계시니, 왕후(王后)께서 유모(孺慕)함을 금하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갑인년에 거듭 대상(大喪)을 두 번이나 만났는데, 애모(哀慕)함이 예(禮)에 넘치니, 시어(侍御)하던 사람들로서 그 순지(純至)한 성효(誠孝)에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중곤(中?)에 정위(正位)하니, 판서(判書)를 승진시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삼고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하였으며, 그 어머니 한씨(韓氏)를 서원 부부인(西原府夫人)에 봉하였다. 생원(生員)은 이미 인조조(仁祖朝)에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領議政)을 가증(加憎)하고, 후에 광성 보사(光城保社)로 훈록(勳錄)하고, 광원 부원군(光源府院君)으로 추봉(追封)하였으며, 부인 윤씨(尹氏)는 부인(夫人)의 고신[眞誥]을 받았다.
왕후(王后)께서 이미 궁내(宮內)의 일을 이어받아 주장해 다스리게 되었는데,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면서 옛날의 성비(聖妃)를 모범삼아 후세(後世)에 사가(私家)의 은택(恩澤)을 구하지 않은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다. 항상 성덕(聖德)을 보필(輔弼)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 연사(宴私)의 뜻이 동정(動靜)에 나타나지 아니하였고, 잠경(箴警)이 연거(燕居)에 끊이지 아니하니, 우리 전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조(內助)에 힘입은 바가 진실로 많았다.’ 하셨다. 존속(尊屬)을 접대(接待)하는 데 여러 가지로 주장하는 것이 모두 곡진하여 예의로운 마음이 있었고, 내사(內史)를 다스리는 데 은혜와 위의를 아울러 갖추니,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였으며, 복어(服御)의 여러 가지 일은 반드시 분수에 넘치게 사치한 것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본가(本家)에 서간(書簡)을 통하면서 안부(安否) 이외의 일에는 언급하지 아니하였고, 묻는 것은 농사[稼穡]가 잘 되었는지 못되었는지, 질역(疾疫)이 치열한지 누그러졌는지 민생(民生)의 질고(疾苦)에 대한 것일 따름이었다.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의 재이(災異)는 위급하고 두려운 데 더욱 진념(軫念)하셔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말씀 가운데 가득했으며, 성심(誠心)으로 가엾게 여겨 슬퍼하시는 바가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이에 우리 전하께서 만약 형벌하시고자 하면 풍화(風火)의 조짐을 두려워하셨으니, 우리 성비(聖妃)의 타고나신 자질(資質)의 아름다움과 가법(家法)의 훌륭함은 진실로 속일 수가 없다.
갑인년 이후로 적신(賊臣)이 무함(誣陷)과 패역(悖逆)으로 동요(動搖)시킬 것을 꾀하여, 처음에는 친경(親耕)을, 이어서 친잠(親蠶)을 권하고, 빈어(嬪御)를 갖추게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장차 요염(妖艶)을 미끼로 하여 진출(進出)해서, 이간(離間)하는 계책을 삼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바람과 우뢰(雨雷)가 위세를 떨치는 바람에 친경(親耕)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고 간교한 음모가 중도에서 저지(沮止)되니, 어찌 왕후(王后)의 덕성(德性)이 천지(天地)를 두려워하여 음즐(陰?)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후 또 예론(禮論)을 청탁하여 장차 한두 신하(臣下)를 도륙(屠戮)하려 하는데, 광성(光城)에 미친 뒤에 따라서 그 이상에까지 미쳤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왕후(王后)께서는 평안(平安)하고 돈인(敦仁)하셔서 스스로 위태하지 아니하였고, 오로지 종사(宗社)를 걱정하여 옥도(玉度)에 허물이 없었으니, 비록 우리 전하의 신성(神聖)하신 예지(睿智)에 힘입었다 하나, 또한 효성스러운 덕행(德行)이 위로 조종(祖宗)을 감동(感動)시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신년 10월에 두창(痘瘡)에 걸렸는데, 상감을 염려하여 스스로 아픈 것조차 잊었다. 헛소리[夢語]를 하는 데까지 이르러 부원군(府院君)이 여의(女醫)가 진맥(診脈)하는 데 따라 들어가면, 반드시 병을 참고 일어나 앉으면서 몸을 단정히 하여 공경(恭敬)을 다하였는데, 어깨와 등을 곧바로 세우는 것이 병들지 않았을 때와 같았다. 대점(大漸)함에 이르러서 정신(精神)이 조금도 흐려지지 아니하더니, 마침내 26일 신해 해시(亥時)에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詳殿)에서 승하(昇遐)하셨다. 이때 위로 자전(慈殿)의 뜻을 받들어 전하께서 창경궁(昌慶宮)에 이어(移御)하셨었는데, 부음(訃音)을 듣고 몹시 슬퍼하고 상심해 하시고는 내어(內御)에게 명하여 모든 월제(月制)와 일제(日制)의 일은 모두 궐내(闕內)에서 구비(具備)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대개 평일(平日)에 인자(仁慈)하고도 검소(儉素)하셨던 마음을 본받아 저자[市律]와 같이 번거롭고 요란하지 않고자 함이었다.
군신(群臣)이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인경(仁敬)이라 하였는데, 주(註)를 살펴보건대, 인자함을 베풀고 의(義)를 행한 것을 인(仁)이라 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儆戒)한 것을 경(敬)이라 한다. 능호(陵號)를 익릉(翼陵)이라 하고, 전우(殿宇)를 영소전(永昭殿)이라 하였다. 길(吉)한 날을 가려 신유년 2월 22일 병오 묘시(卯時)에 예장(禮葬)하였는데, 흠위(?衛)와 의물(儀物)은 모두 간략한 것을 따랐다. 능(陵)은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에 있는데, 도성(都城)에서 20리가 된다.
근신(近臣)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한유(韓愈)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서는 석인(碩人)을 노래하여 이에 종친(宗親)을 서술하였고, 《예기(禮記)》에서는 아내를 얻는 것을 논하여 반드시 효제(孝悌)를 가려서 대대로 행의(行義)있는 자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신이 삼가 우리 성비(聖妃)를 살펴보건대, 그 세족(世族)의 출신을 추구해 보면, 진실로 왕자(王者)의 후예(後裔)로서, 고려(高麗) 5백 년 동안 이어져 오며 찬란하게 빛났고, 본조(本朝)에 와서는 명경 대유(名卿大儒)가 조손(祖孫)에 서로 잇달아서, 마침내 성녀(聖女)가 태어나 경실(京室)에 와서 내치(內治)를 성취하고 왕화(王化)를 도왔으니, 근원(根源)이 크고 내[川]가 풍성한 것은 마땅히 그러한 것이지만, 만약 신성(神聖)하신 우리 현종(顯宗)이 아니었더라면, 비록 성덕(盛德)이 많다 하더라도 어떻게 간선(簡選)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처음에 인선 대비(仁宣大妃)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원(文元) 김 공(金公)은 진실로 우리 선고(先考) 문충공(文忠公)의 스승이었는데, 이제 내가 그 자손(子孫)과 함께 왕가(王家)의 지어미가 되었으니, 또한 한결같이 기이하다.’ 하셨다.
아! 우리 성비(聖妃)의 씨족(氏族)의 덕행(德行)과 아름다운 일들이 이와 같이 성대(盛大)하였으니, 마땅히 길이 복록(福祿)을 누리시면서 우리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인자하신 은택(恩澤)을 함께 입게 할 것인데, 하늘이 불인(不仁)하셔서 갑자기 하령(遐齡)을 막으시어 우리 삼성(三聖)으로 하여금 위에서 비도(悲悼)하게 하시고, 아래로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울부짖게 하시니, 어찌 이른바 신(神)이란 진실로 밝히기 어렵고, 이치란 추고(推考)할 수 없다는 것인가? 비록 그렇다고 하나, 인(仁)이란 선행(善行)의 으뜸이고, 경(敬)이란 덕행(德行)의 기틀이고, 익(翼)이란 사려(思慮)가 깊고 원대한 것으로서, 지금 올린 시호(諡號)는 능호(陵號)와 더불어 실상(實狀)을 잘 나타내었으므로, 하늘 위에서 빛날 것이며, 영문(令聞)이 그쳐지지 않을 것이니, 공성(孔聖)께서 말한 바 대덕(大德)은 반드시 그 이름에서 얻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에 신은 가만히 깊이 느껴 거듭 슬퍼하는 바가 있는데, 기억하건대, 옛날에 일찍이 성조(聖祖)를 모시던 별전(別殿)에서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거처(居處)하시던 동합(東閤)을 가리키면서 성사(聖嗣)의 시기가 늦어짐을 깊이 한탄하셨는데, 하늘의 종방(宗?)을 도우심에 미쳐서 우리 전하께서 탄생(誕生)하셨지만, 성조(聖祖)께서는 이미 미처 보지 못하셨다. 그래서 우리 성비(聖妃)께서 공손히 종사(宗事)를 반드는 데 미치면, 항상 말씀하시기를, ‘많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성조(聖祖)의 영혼을 위로해 드려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제 곤의(坤儀)가 비게 되어 갑관(甲觀)을 열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성비(聖妃)의 덕행(德行)으로써도 끝내 성조(聖祖)의 유택(遺澤)을 입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 슬프도다.”
하였다.【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제술(製述)하여 바치었다.】
【원전】 38 집 519 면


[인경왕후(仁敬王后) 인물정보]

* 1661(현종 2)∼1680(숙종 6). 조선조 숙종의 정비.
* 광주김씨(光州金氏)로, 장생(長生)의 4대손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딸이다.
* 1670년(현종 11)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義洞) 별궁(別宮)에 들어갔고, 다음해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1676년 정식으로 왕비의 책명(冊命)을 받았
다.
* 1680년 10월에 천연두(天然痘, 痘患)의 증세가 보였는데, 이때 숙종도 천연두를 겪지 않아서 약방도
제조(藥房都提調)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건의에 의하여 왕은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 왕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慶德宮)에서 죽었다.
* 경덕궁 영소전(永昭殿)에 위패가 모셔졌고, 능은 고양에 있는 익릉(翼陵)이다. 소생으로 두 딸이 있었
으나 일찍 죽었다.(딸이 3명이라는 기록도 있음)
* 1713년 존호(尊號) 광렬(光烈)이 올려졌고,
* 1722년(경종 2) 휘호(徽號) 효장명현(孝莊明顯)이,
* 1753년(영조 29) 존호 선목(宣穆)이,
* 1776년 존호 혜성(惠聖)이 각각 올려졌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璿源系譜, 燃藜室記述]

숙종 7년(16810)2월 17일(인경 왕후의 발인)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발인(發靷)과 현궁(玄宮)을 내리며 망곡(望哭)할 때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입시(入侍)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 때 대장(大葬)이 이미 가까와지니, 비로소 망곡(望哭)은 상의(常儀)에 의거하여 마련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자지(慈旨)로 인해서 외전(外殿)에 나아가지 않고 내전(內殿)에서 망곡하는 것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원전】 38 집 517 면

2월 22일(인경 왕후를 익릉에 장사지내다)

인경 왕후(仁敬王后)를 익릉(翼陵)에 장사하였다.【축좌 미향(丑坐未向)이었다.】 임금이 두 자전(慈殿)을 모시고 궁궐(宮闕)에서 망곡(望哭)하였다.
【원전】 38 집 519 면

숙종 7년(1681)8월 27일(인경 왕후의 연제를 행하다)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연제(練祭)를 행하였다.【원전】 38 집 548 면

10월 26일(인경 왕후의 상제를 행하다)
천둥과 번개가 쳤다.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상제(祥祭)를 행하였다. 이날은 바로 초기(初朞)인데, 전례(典禮)에 따라 11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13개월 만에 상제를 지내고 15개월 만에 담제(?祭)를 지내는 상제(喪制)를 행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에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다 백포(白袍)를 입고 오서대(烏犀帶)를 띠고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고 혼전(魂殿)을 향해 부복(俯伏)하여 곡하고 두 번 절하였다.【육승지(六承旨)와 사관(史官)은 모두 임금을 따라 백포(白袍)를 입고 오사모(烏紗帽)와 오각대(烏角帶)를 띠고 전(殿)에 올라 임금 뒤에 부복(俯伏)하되 곡(哭)은 하지 않는다. 승지와 사관 등은 대궐 안에서 입직(入直)하는 여러 신하와 동시(同時)에 곡하는 예를 행하는 데 참여해서 최복(衰服)을 벗을 수 없기 때문에, 입시(入侍)하는 것이 끝난 뒤에 곧바로 성정전(宣政殿) 문 밖에 나아가서 곡하는 예를 마친 뒤에 천답복(淺淡服)으로 갈아 입는다.】【원전】 38 집 558 면

11월 1일(인경 왕후 담제 뒤의 제례에 관한 예조의 논의)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번 인경 왕후(仁敬王后) 담제(?祭) 뒤의 제례(祭禮)는 한결같이 을해년 인열 왕후(仁烈王后) 국상[國恤] 때의 담제 뒤의 사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것이 적당한데, 본조(本曹)에는 상고할 만한 문서(文書)가 없으며, 실록(實錄)에도 드러난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풍악을 잡히는 것을 거론(擧論)하지는 않았지만, 《오례의(五禮儀)》의 사시(四時)·납일(臘日) 및 속절(俗節)·삭망(朔望)에 혼전(魂殿)에 섭사(攝事)하는 의식을 상고하여 보니 소주(小註)에 만약 내간상(內艱喪)을 먼저 당했을 경우 15개월 만의 담제를 지낸 뒤의 제사에는 제복(祭服)을 입고 풍악을 잡히며, 초하루의 제사에는 풍악은 없고 음복(飮福)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영소전(永昭殿)의 담제 뒤 제사는 종묘(宗廟)의 제사 의식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런데 영소전과 익능(翼陵)의 참봉(參奉)이 조석 상식(朝夕上食) 때에 당연히 천담복(淺淡服)으로 행사했다면, 오향제(五享祭) 및 속절·삭망의 제사에 참여할 때의 복색(服色)은 헌관(獻官)과 달라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오향제 등의 제사 때에는 한결같이 헌관의 복색에 의거하여 행사하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원전】 38 집 560 면



숙종 34년(1708)3월 26일(임금이 영소전에 전작하고 친히 제문을 짓다)
임금이 영소전(永昭殿)에 전작(奠酌)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었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아득히 현덕(賢德)을 생각하니 한(漢)나라 마후(馬后)에 견줄 만합니다. 난금(蘭襟)은 고요한데 아름다운 법도는 엄숙하였습니다. 검약(儉約)하기를 힘쓰고 사치[華鮮]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탁룡(濯龍)에서 사사로운 일을 끊으니 궁정(宮庭)이 숙연(肅然)하였습니다. 제계(齊?)와 주이(周珥)가 항상 곁에 있어 경계(警戒)하니 6년 동안 장추궁(長秋宮)에 있으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조심하여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예전 경신년에 창황(蒼黃)하게 나갔다 돌아오니, 이미 임구(臨救)하지 못하였고 또 임상(臨喪)하지 못하였습니다. 흐르는 세월이 점점 지나가서 벌써 30년이 지나갔으니, 길이 생각하건대 어찌 마음이 괴롭지 않았겠습니까? 더구나 이 경덕(慶德)은 영각(靈閣)이 가까이 있으므로 첨배(瞻拜)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한 번 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 좋은 날을 가려서 우리 원량(元良)과 같이 정성스러운 말로써 권하오니, 이 드리는 잔에 흠향(歆饗)하시기를 바랍니다.”하였다.【원전】 40 집 291 면

숙종 39년(1713)3월 9일(광렬이라는 존호를 영소전에 올리다)
영소전(永昭殿)에 올린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중신(重宸)의 현저한 공렬(功烈)을 찬양하여 성대한 의식을 이에 거행하고, 원비(元妃)의 가지런한 아름다움을 우러러 생각하여 가호(嘉號)를 추천(追薦)하나이다. 이전(彛典)이 이에 있으니, 성덕(盛德)이 더욱 빛나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인경 왕후 전하(仁敬王后殿下)께서는 높은 가문에 상서로움이 생겨서 즉위하시기 전에 배위(配位)가 되시었습니다. 의범(懿範)은 일찍이 거룩하여, 그로 인해 숙목(肅穆)한 기풍이 이루어졌고, 남모르는 공력으로 내조를 하여 그를 힘입어 영장(靈長)의 경사가 이룩되었습니다. 선령(仙齡)이 감소되어 궁중(宮中)을 다스리는 일을 끝까지 못하셨으나, 보명(寶命)이 새로우매 성덕(聖德)이 더욱 숭고합니다. 거룩한 아름다움을 찬양(讚揚)하여 큰 칭호를 올리는 것은 실로 고사(故事)에 따른 것이요, 지존(至尊)을 짝하시어 현책(顯冊)을 받는 것은 이에 상규(常規)가 있습니다. 어찌 감히 아름다움을 찬양하여 형용하겠습니까. 임금의 높은 공과 빛나는 덕에 아울러 빛내는 것이 진실로 마땅할 것입니다. 뭇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다 기뻐하여 성대한 예(禮)를 이에 거행하나이다. 신 등은 대원(大願)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보책(寶冊)을 받들어 ‘광렬(光烈)’이란 존호(尊號)를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왕후 전하(王后殿下)께서는 부디 명림(明臨)을 하시어 굽어 융성(隆盛)함을 받으셔서, 큰 복을 종사(宗祀)에 펼쳐 만년 무강(萬年無彊)토록 하시고, 유순한 덕화가 궁중에 영원히 전하여 이남(二南)과 동일한 법칙이 되게 하소서.”
하였다.【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가 지어 올렸다.】【원전】 40 집 487 면

경종 2년(1722) 5월 6일(인경 왕후·인현 왕후 등의 휘호와 존호를 제정하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좌참찬(左參贊) 강현(姜?)·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태좌(李台佐)·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광좌(李光佐)·형조 판서(刑曹判書) 박태항(朴泰恒)·공조 판서(工曹判書) 한배하(韓配夏)·지춘추(知春秋) 심단(沈檀)·대사간(大司諫) 이사상(李師尙)·집의(執義) 서명우(徐命遇)·부교리(副校理) 박필몽(朴弼夢) 등이 빈청(賓廳)에 모여
광렬 인경 왕후(光烈仁敬王后)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여
‘효장 명현(孝莊明顯)’이라 하고,
효경 인현 왕후(孝敬仁顯王后)는 ‘의열 정목(懿烈貞穆)’이라 하였으며, 혜순 왕대비전(惠順王大妃殿)은 존호(猷號)를 ‘자경(慈敬)’이라 하였다.【원전】 41 집 222 면

영조 29년(1753)12월 26일(숙종 대왕·인경 왕후·인현 왕후의 존호를 가상하고 책보를 올리다)
임금이 태묘(太廟)의 대향(大享)을 행하고 숙종 대왕의 존호(尊號)를 유모 영운 홍인 준덕(裕謨永運洪仁峻德),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존호를 선목(宣穆),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존호를 숙성(淑聖)이라 가상(加上)하고 책보(冊寶)를 올리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수조(受?)가 끝나고서 환궁(還宮)하니, 왕세자(王世子)가 홍화문(弘化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경조(京兆)에 명하여 방민(坊民)의 상언(上言)을 받아들이게 하고 기로(耆老)인 백성을 불러 고통을 하문하였다.【원전】 43 집 506 면

영조 52년(17761월 7일(숙종 대왕·인경·인현·인원 왕후의 존호를 정하다)
왕세손이 창덕궁(昌德宮)의 진전(眞殿)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전(殿)에 올라 휘호(徽號)를 정한 것을 아뢰고 내려와 자리로 돌아와서 사배례를 행하였다.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존호(尊號)는 배천 합도 계휴 독경(配天合道啓休篤慶)이라 하고,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존호는 혜성(惠聖)이라 하였으며,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존호는 장순(莊純)이라 하고,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존호는 휘정(徽靖)이라 하였으며, 육상궁의 존호는 수복(綬福)이라 하였으며, 대전(大殿)의 존호는 요명 순철 건건 곤녕(堯明舜哲乾健坤寧)이라 하였으며 휘령전(徽寧殿)의 존호는 인휘(仁徽)라 하고, 중궁전(中宮殿)의 존호는 성철(聖哲)이라 하였다.
【원전】 44 집 525 면

[익릉표석음기(翼陵表石陰記)]

광렬인경왕후(光烈仁敬王后) 김씨(金氏)는 숙종대왕원비(肅宗大王元妃)로 신축(辛丑) 9월 3일 탄생(誕生)하여 신해(辛亥)에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이 되었고 갑인(甲寅)에 왕비(王妃)로 진봉(進封)이 되었다. 경신(庚申) 10월 26일 승하(昇遐)하여 신유(辛酉) 2월 22일 명릉(明陵)의 북쪽언덕 축좌(丑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루었으니 향년 20세였다.
翼陵表石陰記
光烈仁敬王后金氏 肅宗大王元妃辛丑九月三日誕生辛亥冊 世子嬪甲寅進封 王妃庚申十月二十六日昇遐辛酉二月二十二日葬在 明陵北岡丑坐之原壽二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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