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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귀정 김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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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7-01-07 11:16 조회1,2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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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요 학자인 휘 운상(運商)은 1632년에 출생하여 1703년에 졸하시었다.

공의 字는 군회(君會)요 號는 남귀정(南歸亭)이니
문숙공의 次子이신 첨의중찬공(시중의 별칭) 諱 유(流)의 次子 밀직사사공 諱 중간(仲幹)의 后로
금서공 휘 경성의 증손이요 죽촌공 휘 종도의 손이고 아버지는 장사랑공 휘 복규(復圭)요
어머니는 이천서씨니 공은 차자로 태어났다.

공은 난리중에 바다 위에 피난중인 배 위에서 낳았는데 파도가 위태로웠으나 무사하였다.
어려서부터 골격이 뛰어나고 총지가 뛰어났으며 어린나이에 경사(經史)를 일찍 관통하였다.

일찍이 탄식하여 말 하기를 '청빈한 선비의 가문에 태어나 학문에만 열중하고 헛된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은 부모에게 효성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러다 어느날 큰 노목(老木)을 가르키며 '사대부가 독서하지 않으면 입신할 수 없으니
장차 이 나무와 같이 썩을 것이다' 하고 그 나무 밑에서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였다.

통정대부 완산 이유하(李遊夏)가 지은 공의 행장에 이르기를 <공은 양친을 섬기되 효성을 다하며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도 맛있는 음식을 마련치 않음이 없었다.그런데 눈내리고 추운 겨울에
하루는 찬거리가 떨어져 걱정하던 중 홀연히 매가 꿩을 잡아 가지고 가다 공의 집에 떨어뜨리고
가는 기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병으로 신음하자 공은 주야로 옷을 풀지않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대변을 손가락으로 맛보며 간호했다. 그러나 병이 더욱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여
그 어머니에게 먹이니 45일간을 연명하였다.상사(喪事)를 당하여는 심히 애통하였으며 예를 쫓아
장사를 모시고 죽을 마시며 3년을 하루와 같이 시묘(侍墓)를 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탄하고
효자라 칭송하고 효열록(孝烈錄)을 간행하였다.
장년이 되어서도 학문은 높았으나 과거를 일삼지 않고 성리학에 전념하니 세 번이나
도내 유림들의 천거에 올라 전라도관찰사 원두표(元斗杓)가 장계를 올려 이르기를
호남 제 일인이요 해동무쌍사(湖南第一之人 海東無雙之士) >라 하였다.

공은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함이 독실하였고 학문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뒤 늦게 아버지의 명을 따라 진사시험에 응시하여 1666년에 합격하였다.

1672년에 아버지가 졸 하시니 평소 아버지께서 자미화(紫微花)를 사랑하였으므로
두 가지를 묘앞에 꺾어 심고 아침 저녁으로 슬프게 곡하였는데 그 나무가 마르지 않고
이듬해에 꽃이 피니 고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효수(孝樹)라고 불렀다.

복을 마친뒤 성균관에 들어가 당시의 이름있는 학자들과 교유하여 교화를 부식할 뜻을 가졌다.

공은 강상(綱常)이 어긋난 일이 있으면 상소로 논쟁하니 이 일은 시국에 맞지 아니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금성산 아래에 집을 짓고 글읽고 학문을 가르치는 일로 임무를 삼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많은 학자가 모여들었다.

許미수(許穆)가 일찍이 공의 집 앞을 지나면서 말하기를 '남주궐리(南州闕里)'라 하고
또 말하기를 '군회(君會)의 학문이 정묘하지만 그 위인이 태강(太剛)하다' 하였다.

1689년에 익능참봉을 제수하고 곧 장흥고 주부와 사헌부 감찰에 올랐다.
감찰이 되어 권력이 있고 귀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탄핵했으며 한 재상을 소척하니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위태롭게 생각하여도 의연히 동요하지 않았다.

남귀부(南歸賦)를 지어 뜻을 보이고 집으로 돌아와 자호(自號)를 남귀정(南歸亭) 이라 하였다.

공은 맑은 절개로 분수를 지키며 권력이나 재리(財利)에 탐하지 않으니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가 공의 시를 보고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행의를 들은지 오래이더니 이제 그의 시를 보니 金이요 玉이로다' 하고 공을
만나 보고자 하였으나 공이 만나 주지 않았다.

나주문묘를 중수할제 공에게 記를 청하여 쓰게하니 목사 권공(權公)이 보고 칭송하기를
'선생의 문장이 孔夫子의 기상을 잘 형용하여 영령이 내려와 묘정에 보이는 것 같다' 하였다.

평소 水石을 사랑하여 매년 봄과 가을에 門生과 친우들로 더불어 금산(錦山)정상에서 유람할제
계산(谿山)이 특수하고 林木이 울창함을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 모두 여기에 있도다.
사람이 그 연고를 물으니 하늘과 땅과 물(物)을 사람들이 그 論할 바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하루는 공이 지은 많은 글과 시, 소장을 모두 불사르고 말하기를
' 하는 것 없이 헛된 이름을 취했으니 무슨 쓸 곳이 있느냐 ' 하고
금성정사(錦城精舍)에서 졸하니 향년이 7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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