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자료

조선왕조실록(諱 雲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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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7 11:20 조회1,5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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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임 부제학 김운택의 옥중 졸기] 경종 2년 임인(1722, 강희 61) 12월 3일(갑인)

원임 부제학 김운택(金雲澤)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김운택의 자(字)는 중행(仲行)인데, 문충공(文忠公) 김만기(金萬基)의 손자이다. 젊어서 고제(高弟)로 급제했는데, 임금이 시권(試券)을 뜯어보고는 기쁜 빛이 얼굴에 넘쳐 흘렀었다. 아우는 김민택(金民澤)인데, 자(字)가 치중(致仲)이다. 또한 고제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 김운택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자상하여 문예(文藝)를 좋아했다. 김민택은 사람됨이 침심(沈深)하여 큰뜻이 있었으며, 용모가 풍만하고 미목(眉目)이 훤해서 바라보면 엄숙하였다. 그의 아망(雅望)은 김운택만 못하였지만 마음속의 기변(機變)은 더 나았으므로, 사람들이 공보(公輔)의 기국이라고 여겼었다. 경종(景宗)이 병이 있어 저사(儲嗣)가 없고 환관이 용사(用事)하게 되자, 김운택은 사직(社稷)이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을 알고 이에 김민택과 함께 이정소(李廷?)에게 소장을 올려 저사를 세우기를 청하도록 권고하였는데,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공경(公卿)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충헌공(忠憲公) 김창집(金昌集)·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가 경(卿)들을 인솔하고 들어와 경종을 뵙고 대비(大妃)에게 아뢰어 저사를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밤 시각(時刻)이 끝나게 되자 경종이 대전(大殿)에 나와서 대비가 내린 휘지(徽旨)를 내어 영종(英宗)을 책립(冊立)하여 왕세제(王世弟)로 삼았으니, 이는 본디 김운택 형제의 계모에 의한 것이었다. 김운택은 처음 영변부(寧邊府)에 찬배(竄配)되고, 김민택은 선천부(宣川府)에 찬배되었는데, 목호룡(睦虎龍)이 무옥(誣獄)을 크게 일으키자, 김운택이 체포되었다. 최석항(崔錫恒)이 국문(鞫問)하는 일을 위임 받았는데, 이이명(李?命)이 독대(獨對)한 일에 대해 신문하니 김운택이 정색하고 최석항을 책망하기를,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이 일을 묻는 것은 다만 무함이 선왕에게 미칠 뿐만이 아니다. 천하 후세에서 성상을 어떻게 여기겠는가?”하였다. 최석항이 기운이 꺾여서 이에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이 김운택을 비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선왕에게 관계되어 신자(臣子)로서는 감히 물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인하여 도성(都城)을 나갔다. 다시 소장을 올려 극력 영구(營救)하였지만 끝내 구제하지 못하였다. 김운택이 마침내 옥중에서 죽으니, 그때 나이 50세였다.
그리고 장령 윤회(尹會)가 김민택이 실상 거괴(巨魁)라고 논했기 때문에 드디어 체포되어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자복(自服)하지 않고 옥중에서 죽었는데, 그때 나이 45세였다. 김민택이 죽음에 임하여 옷소매를 찢어 절명서(絶命書)를 지어 아우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다. 나야 죽은들 무슨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 영변(寧邊)의 길이 멀어서 나의 혼백(魂魄)이 꿈에서나마 중씨(仲氏)를 만나고 싶었지만 또한 갈 수가 없으니, 매우 슬프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종(英宗) 원년에 하교(下敎)하기를,
“적신(賊臣)이 천총(天聰)을 속여 가리고 나라의 군병(權柄)을 마음대로 휘둘러 선인(善人)과 양사(良士)들을 매우 많이 죽였으니, 그 봉인(鋒刃)의 참독함을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긴다. 그들을 모두 복관(復官)시키라.”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운택이 비로소 복관되어 이조 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김민택도 복관되어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원전】 41 집 389 면(수정실록)
[주]공보(公輔) : 정승(政丞).


[김운택(金雲澤) 인물정보]

* 1673(현종 14)∼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중행(仲行), 호는 백운헌(白雲
軒).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인 만기(萬基)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진구(鎭龜)이다.
* 1699년(숙종 25)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1704년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 1717년에 평안도감진어사(平安道監賑御史)로 나갔고,
* 1719년 부수찬 조상건(趙尙健)과 함께 위패사건(違牌事件)으로 파직당했다가 다시 승지로 기용된 뒤
세자의 명에 의해 충청도균전사(忠淸道均田使)가 되었다.
* 그뒤 부제학·호조참판·형조참판에 이르렀으나,
* 1722년에 신임사화로 소론이 집권하자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반역을 도모한다는 목호룡
(睦虎龍)의 무고로 노론 4대신과 함께 장살(杖殺)되었다.
*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가족사항
부(父) 김진구(金鎭龜) 조부(祖父) 김만기(金萬基) 증조부(曾祖父) 김익겸(金益兼)
외조부(外祖父) 이광직(李光稷) 처부(妻父) 심량(沈?)
형(兄) 김보택(金普澤) 제(弟) 김민택(金民澤) 제(弟) 김조택(金祖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國朝榜目]

[주] 신임사화 [辛壬士禍]
이미 숙종대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하여 사문(斯文)시비를 벌였으나, 경종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논지가 바뀌었다. 신임사화라는 용어는 당대부터 쓰였으나, 화를 입은 노론측의 입장이 반영된 용어이다. 노소론 사이의 대립에 왕통문제가 개입된 것은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인 경종이 세자로 책봉되고 뒤에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노론측은 장희빈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모해하였으므로 사사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데 반해, 소론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4년간 대리청정을 하다가 숙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延?君: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노론이 이 과정에서 두 차례의 태도 변화를 보임으로써 소론측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辛丑獄事). 신임사화는 이러한 와중에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告變事件), 즉 남인(南人)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고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변으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 옥사는 노소론간의 대립이 경종 즉위 후 왕에 대한 충역 시비의 형태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 자체는 경종대의 문제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 문제는 영조대에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었다.

숙종 38년(1712)10월 10일(이건명·이희조·김운택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운택(金雲澤)을 사서(司書)로 삼았다.【원전】 40 집 466 면

숙종 43년(1717)3월 1일(어사 홍계적·김운택 등을 각도에 보내다)
어사(御史)로 뽑힌 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이명언(李明彦)·조영복(趙榮福)·윤양래(尹陽來) 등을 패초(牌招)하여 각도로 나누어 보냈다.【원전】 40 집 639 면

6월 20일(암행 어사 김운택이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다)
평안도 암행 어사(暗行御史) 김운택(金雲澤)이 조정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전 증산 현감(甑山縣監) 박태적(朴泰迪)·희천 군수(熙川郡守) 박진규(朴震圭)는 청렴하고 간명하다 하여 포상하고, 전 창성 부사(昌城府使) 김석보(金錫保)·철산 부사(鐵山府使) 허양(許樑)·함종 현령(咸從縣令) 이제(李濟)·용강 현령(龍岡縣令) 안정(安鉦)·태천 현감(泰川縣監) 신겸제(申兼濟)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법을 어겼다 하여 나문(拿問)하였다.【원전】 40 집 654 면

8월 7일(홍문록 행하여 김운택 등을 선발하다)
부제학(副提學) 이의현(李宜顯) 등이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여 김운택(金雲澤)·조상건(趙尙健)·윤혜교(尹惠敎)·정운주(鄭雲柱)·조상경(趙尙絅)·김취로(金取魯)·이덕수(李德壽)·윤순(尹淳)·김상윤(金相尹)·유척기(兪拓基) 등 10인을 뽑았다.~
【원전】 40 집 670 면

[주]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임명할 때 그 1차의 선거(選擧)기록. 교리·수찬의 선임은 7품 이하의 홍문관 관원이 방목(榜目)을 조사하여 피선될 만한 자를 초출(抄出)하고 홍문관 부제학 이하 응교(應敎) 등이 여기에 원점(圓點)을 찍게 하고 이 원점 하나를 1점으로 하여 득점자 순으로 후보자를 선출함.

11월 21일(김운택을 홍문록에 초선하다)
이조(吏曹)에서 김운택(金雲澤)을 홍문록(弘文錄)에 초선(抄選)하였다.【원전】 40 집 683 면

12월 10일(김운택을 평안도 청북 감진 어사로 삼다)
김운택(金雲澤)을 평안도 청북 감진 어사(平安道淸北監賑御史)로 삼았다.【원전】 40 집 685 면

숙종 44년(1718)2월 7일(도당에서 홍문록을 선임하여, 김운택·김동필·남일명 등 11인을 뽑다)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을 선임하였는데, 김운택(金雲澤)·김동필(金東弼)·남일명(南一明)·김상옥(金相玉)·조상경(趙尙絅)·김취로(金取魯)·조상건(趙尙健)·윤순(尹淳)·김상윤(金相尹)·윤혜교(尹惠敎)·유척기(兪拓基) 등 11인을 뽑았다.【원전】 41 집 3 면

2월 27일(도목정을 행하여, 조관빈·박필주·김운택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김운택(金雲澤)을 부교리(副校理)로【원전】 41 집 8 면

7월 17일(감진 어사 김운택이 평안도 산군의 누리 피해를 아뢰고 포제하기를 청하니 허락하다)
평안도(平安道) 산군(山郡)에 누리의 피해가 있었다. 감진 어사(監賑御史) 김운택(金雲澤)이 아뢰고
포제(포祭)를 행하도록 청하자,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원전】 41 집 29 면

[주]포제(?祭) : 농작물(農作物)에 충해(蟲害)가 심할 때 이를 기양(祈禳)하기 위하여 포신(?神)에게 지내는 제사. 포신은 재해(災害)의 신임.

윤 8월 9일(박사익·김운택·이교악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운택(金雲澤)을 부수찬(副修撰)으로【원전】 41 집 34 면

윤 8월 20일(도목 정사를 행하여, 김유·박사익·김운택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여 3일 만에 마쳤는데,김운택(金雲澤)을 부교리(副校理)로~
【원전】 41 집 35 면

[주]도목정사 [都目政事] 고려 ·조선 시대에 이조와 병조에서 관원의 치적을 조사하여 출척(黜陟)과 이동(異動)을 행하던 인사제도. 조선시대에는 매년 6월과 12월에 관리 적격자의 선발 ·임면 ·전근 ·승진 등을 심사하였으며, 중요하거나 긴급한 인사가 아니면 비록 관원의 자리가 비어도 도목 이외에는 새로 보임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관직에 따라서는 1년에 4도목의 인사이동이 있었다.

9월 7일(김운택을 교리로 삼다) 김운택(金雲澤)을 교리(校理)로 삼았다.【원전】 41 집 37 면

12월 17일(조언신·조태구·김운택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 김운택(金雲澤)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원전】 41 집 47 면

숙종 45년(1719)5월 14일(이관명·김운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운택(金雲澤)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원전】 41 집 67 면

7월 26일(윤석래·신절·김운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운택(金雲澤)을 응교(應敎)로 삼았다.【원전】 41 집 76 면

10월 8일(이기익·김운택·김창흡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운택(金雲澤)을 승지(承旨)로 초수(超授)하였으며【원전】 41 집 85 면

10월 10일(비국에서 황귀하와 김운택을 각각 경상·충청 좌도 균전사로 삼다)
비국(備局)에서 ~김운택(金雲澤)을 충청 좌도 균전사(忠淸左道均田使)로 삼았다.【원전】 41 집 85 면
[주]비국(備局)·:비변사 [備邊司].주사(籌司)라고도 한다.조선시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한 문무합의기구(文武合議機構).

숙종 46년(1720)1월 2일(양전 시행에 관한 전라도 균전사 김재로와 충청도 균전사 김운택의 논의)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전라도 균전사(全羅道均田使) 김재로(金在魯)와 충청도 균전사(忠淸道均田使) 김운택(金雲澤)이 품정(稟定)할 일로 인해 환조(還朝)하여 입대(入對)를 원하니, 세자(世子)가 소견(召見)하였다.~
김운택이 말하기를,
“신이 관장하는 양전의 일 가운데 정안(正案)을 작성하는 한 가지 사항이 진실로 또한 처리하기 곤란합니다. 마땅히 호남 균전사가 진달한 바에 따라 해야 할 듯한데, 만일 혹시 정월(正月) 이내에 양전을 끝마친 경우가 있다면, 마땅히 신이 본도(本道)에 있는 동안 정안을 작성하도록 하여 인준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 계산하고 판단하는 등의 일은 실로 범위가 넓어 결코 한 사람의 산원(算員)이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각 고을의 계산에 능한 사람들을 도회처(都會處)로 불러모아 사역(使役)시키되, 감관(監官)의 예(例)에 따라 급료를 지급하소서.”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김운택이 또 말하기를,
“양전은 실로 엄청난 일로서 관(官)과 민(民)이 현재 여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紙)·필(筆)·묵(墨)을 마련하기 어려움도 또한 보통 때의 배나 되는데, 봄이 지난 뒤에 또 호적(戶籍)의 역사가 있습니다. 호적 역시 긴요하고 중대한 일인데, 지금의 사세(事勢)로서는 실로 양역(量役)과 병행하기 곤란합니다. 예전에 간혹 흉년 때문에 시기를 물려 거행한 예가 있으니, 청컨대 이번에도 이 예에 따라 가을 쯤으로 늦추어 시행하도록 하소서.”하고~【원전】 41 집 93 면

경종 즉위년(1720)7월 7일(김운택·박필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운택(金雲澤)을 대사간(大司諫)으로【원전】 41 집 128 면

9월 26일(김운택·조상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운택(金雲澤)을 부제학(副提學)으로~【원전】 41 집 137 면

2월 22일(대사성 김운택이 상소하여 소유의 처벌을 풀어주는 것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
대사성(大司成) 김운택(金雲澤)이 상소(上疏)하여 소유(疏儒)의 해벌(解罰)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소유 임상극(林象極)·오명윤(吳命尹) 등은 번갈아 서로 투서(投書)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무욕(誣辱)하였으므로 선조(先朝)에서 먼 변방으로 내쳐 엄중히 징치(懲治)을 더하였고, 해를 넘긴 뒤 사전(赦典)으로 인해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림(士林)에게 유벌을 베풂은 실로 정도(正道)를 부지하고 사악(邪惡)을 배척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승선(承宣)이 이 무리의 죄명(罪名)을 아주 잊고 방자하게 진달하여 풀어 주기를 청하기에 급급하니, 신은 저윽이 놀라고 의혹스레 생각합니다. 전대로 그대로 두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벌을 풀었으니 도로 정지하는 것은 불가하다.”하였다. 대사성은 관례상 유생의 해벌을 관장하기 때문에 김운택의 상소가 이 일을 제기하여 막은 것이다.【원전】 41 집 150 면

4월 28일(이관명·김운택·신광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운택(金雲澤)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원전】 41 집 154 면

경종(1722) 2월 6일(김운택·김민택 등을 영변현·선천부 등지에 유배시키다)
김운택(金雲澤)을 영변현(寧邊縣)에, 김민택(金民澤)을 선천부(宣川府)에, 김조택(金祖澤)을 창성부(昌城府)에, 김성절(金盛節)을 용천부(龍川府)에, 이천기(李天紀)를 남평현(南平縣)에, 이덕준(李德峻)을 부령부(富寧府)에, 형의빈(邢儀賓)을 위원군(渭源郡)에, 조송(趙松)을 진주목(晉州牧)에 찬배(竄配)하였다.
【원전】 41 집 362 면(수정실록)

영조 즉위년 갑진(1724)11월 21일(광성 부원군의 손자이며 김운택의 아우인 김조택을 방송하다)
김조택(金祖澤)을 방송(放送)하였다. 김조택은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의 손자이며 김운택(金雲澤)의 아우이다. 지난날 임인년에 군흉(群凶)들의 계달(啓達)로 인하여 김운택·김민택(金民澤)의 여러 아우와 자질(子姪)을 모두 절도(絶島)에 유배(流配)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이 특별히 방송한 것이다.
【원전】 41 집 429 면

영조 17년(1741)10월 30일(김운택·김민택·조성복·이홍술 등에게 전일의 증직을 회복시키라고 명하다)
고 참판(參判) 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 고 교리(校理) 김민택(金民澤), 고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 고 대장(大將) 이홍술(李弘述)·윤각(尹慤), 고 통제사(統制使) 이우항(李宇恒)·이상집(李尙), 고 병사(兵使) 백시구(白時耉) 등 여러 사람에 전일의 증직(憎職)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을사년에 모두 여러 사람에게 증직할 것을 명하였는데, 정미년에 이르러 혹은 증직을 회수하기도 하고 혹은 추탈(追奪)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바로소 복관(復官)하였으나 아직 증직을 회복하지는 않았는데, 영의정 김재로가 연백(筵白)을 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이런 명이 있었다.【원전】 43 집 39 면

정조 3년(1779)3월 15일(홍계적·김운택에게 시호를 내리고 김복택에게 추증하다)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이 아뢰기를,
“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은 모두 청렴한 지조와 바르고 깨끗한 명망을 지니고서도 끝내 시행하여 보지 못한 채 신축년·임인년에 억울하게 죽었으므로 선조(先朝)에서 이미 증직(贈職)은 하였습니다만 아직 증시(贈諡)는 하지 못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마땅히 역명(易名)의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김복택(金福澤)도 경신년 무렵에 억울하게 죽었는데 선조(先朝)에서 즉시 억울함을 씻어주고 관작(官爵)도 회복시켜 주었으며 또 누차 연석(筵席)에서 느끼는 마음이 있다는 하교를 발표하였었습니다. 추증(追贈)하는 은전을 이 사람에게 시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김성행(金省行)의 예(例)에 의거하여 증질(贈秩)하고 아들을 녹용(錄用)하게 하소서.”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원전】 45 집 103 면

12월 13일(홍문관에서 김운택·홍계적의 시호를 추가로 개정토록 청하다)
홍문관에서 아뢰기를,
“김운택(金雲澤)·홍계적(洪啓迪) 두 신하는 다 순국(殉國)하는 정성으로 왕사(王事)를 위하여 죽었고 특별히 명하여 사시(賜諡)한 것은 참으로 충성을 장려하시는 성의(盛意)에서 나왔으니, 시호(諡號)에 ‘충(忠)’ 자를 가하지 않은 것이 공론에 어그러진다는 것은 참으로 말하는 자가 아뢴 바와 같습니다. 또 신들이 본관(本館)에서 의시(議諡)한 고례(故例)를 살펴보았더니, 종전에는 이미 하비(下批)한 뒤에 시호를 고친 것이 한두 번뿐이 아니고 혹 한 사람의 시호를 두 번 고치거나 세 번 고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이 두 신하의 시호도 추개(追改)하도록 명하시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하였다.【원전】 45 집 142 면

정조 5년(1781)11월 21일(김운택의 시호에 휘호와 휘자를 잘못 쓴 것 때문에~)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증 판서(判書) 이맹전(李孟專)의 시호(諡號)의 말망(末望)은 곧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휘호(徽號)인데, 낭료(郞僚)가 알려 줌으로 인하여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증 판서 김운택(金雲澤)의 시호의 부망(副望)은 국계(國系) 11세(世)의 휘(諱)와 같은 글자이기 때문에 일찍이 고(故) 상신(相臣) 송인명(宋寅明)의 시호에 처음 명하였다가 곧바로 고쳤습니다. 이는 신이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던 것인데, 단지 신의 정신이 가물거리는 탓으로 부아(赴衙)하였을 적에 미처 이정(釐正)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곳에 따라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바야흐로 엄한 견책이 속히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두 신하의 시호는 아울러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다시 의정(議定)하게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신하의 시망(諡望)을 하나는 휘자(諱字)를 의입(擬入)하였고 하나는 휘호를 의입하여 낙점(落點)을 받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당초 관관(館官)이 흐리멍덩하여 조찰(照察)하지 않은 것이 어찌 소루한 데 그칠 뿐이겠는가? 이런 일은 전에 있지 않던 것이니, 무거운 견책을 시행해야 하는 데 합치된다. 회좌(會坐)에 참여하였던 관관들은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킴으로써 사면(事面)을 보존시키라. 원망통(原望筒)은 정원으로 하여금 세초(洗草)하게 하라.”하였다.【원전】 45 집 282 면

정조 6년(1782)10월 5일(김운택·이맹전에게 시호를 내리다)
~판서 김운택(金雲澤)에게는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증 판서 이맹전(李孟專)에게는 정간(靖簡)이란 시호를 내렸다.【원전】 45 집 32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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