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계공 휘 일경(諱 一鏡)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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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정 작성일07-02-19 14:12 조회2,36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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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newhis19@hanmail.net
몇 년 전 받은 전화 한 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덕일 선생님이십니까? 저 아계 후손입니다.”
필자는 선조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의 후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분은 자꾸 경종과 영조 임금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학 세대가 아니라 호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아계의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봐 삼가면서 조선 후기에 아계라는 호를 썼던 인물들을 떠올려보았다. 한 명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의 후손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계 후손의 전화를 받다
‘아계(?溪) 김일경(金一鏡·1662~1724).’
조심스럽게 확인해보니 과연 ‘일자 경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필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김일경의 후손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김일경은 조선 후기 그 누구 못지않게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유명한 만큼 금기시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소론 강경파이던 그는 경종 원년(1721) 12월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신축환국(辛丑換局)을 달성한 주역이었다. 그러나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사형됐던 인물이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그는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섰다. <영조실록>의 사관이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8일)라고 부기할 정도로 영조를 부인했다. 경종에게는 사육신 못지않은 충신이던 그는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부대시처참(不待時處斬)됐다. 연좌된 그의 자식들도 절멸됐다. 게다가 영조 31년 나주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김일경의 아들 중에 혹시 살아남은 자가 있을지 모르니 찾아서 처단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고, “역적 김일경의 종손 가운데 성명을 바꾸고 중이 된 자가 있다”는 정보가 있자 발본색원을 지시할 정도로 김일경의 후손은 영조·노론과는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던 처지였다. 그리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노론이 계속 집권했기 때문에 김일경은 신원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후손 중 한 명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노론은 조선 멸망에 협조한 대가로 일제시대 때도 그 세력을 온존했으며, 특히 역사학계는 노론 유력 가문의 후예로서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에 참가했던 한 사학자가 해방 이후에도 태두의 지위를 누리는 바람에 김일경은 학문적으로도 신원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 저서를 보고 비로소 노론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는 역사학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암에 걸려 있었던 그분은 2년쯤 뒤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는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역사의 붓을 잡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이켜보곤 한다.
필자 자신이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질 때문인지 필자는 역사의 음지에 가려진 시대와 인물들에게 더 큰 관심이 갔다. 그러나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는 이유가 판단 대상이다. 아계 김일경처럼 왕권을 위협하는 거대 정당에 맞서 싸우든지, 백호 윤휴(尹?)처럼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맞서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든지, 명재 윤증(尹拯)처럼 증오의 시대에 사랑의 정치를 역설하다가 은둔하든지, 이가환·이승훈처럼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를 지향하다가 사형되든지, 소현세자처럼 열린 미래를 지향하다가 독살되든지 했어야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몇 년 전 받은 전화 한 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덕일 선생님이십니까? 저 아계 후손입니다.”
필자는 선조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의 후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분은 자꾸 경종과 영조 임금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학 세대가 아니라 호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아계의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봐 삼가면서 조선 후기에 아계라는 호를 썼던 인물들을 떠올려보았다. 한 명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의 후손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계 후손의 전화를 받다
‘아계(?溪) 김일경(金一鏡·1662~1724).’
조심스럽게 확인해보니 과연 ‘일자 경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필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김일경의 후손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김일경은 조선 후기 그 누구 못지않게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유명한 만큼 금기시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소론 강경파이던 그는 경종 원년(1721) 12월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신축환국(辛丑換局)을 달성한 주역이었다. 그러나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사형됐던 인물이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그는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섰다. <영조실록>의 사관이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8일)라고 부기할 정도로 영조를 부인했다. 경종에게는 사육신 못지않은 충신이던 그는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부대시처참(不待時處斬)됐다. 연좌된 그의 자식들도 절멸됐다. 게다가 영조 31년 나주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김일경의 아들 중에 혹시 살아남은 자가 있을지 모르니 찾아서 처단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고, “역적 김일경의 종손 가운데 성명을 바꾸고 중이 된 자가 있다”는 정보가 있자 발본색원을 지시할 정도로 김일경의 후손은 영조·노론과는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던 처지였다. 그리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노론이 계속 집권했기 때문에 김일경은 신원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후손 중 한 명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노론은 조선 멸망에 협조한 대가로 일제시대 때도 그 세력을 온존했으며, 특히 역사학계는 노론 유력 가문의 후예로서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에 참가했던 한 사학자가 해방 이후에도 태두의 지위를 누리는 바람에 김일경은 학문적으로도 신원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 저서를 보고 비로소 노론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는 역사학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암에 걸려 있었던 그분은 2년쯤 뒤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는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역사의 붓을 잡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이켜보곤 한다.
필자 자신이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질 때문인지 필자는 역사의 음지에 가려진 시대와 인물들에게 더 큰 관심이 갔다. 그러나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는 이유가 판단 대상이다. 아계 김일경처럼 왕권을 위협하는 거대 정당에 맞서 싸우든지, 백호 윤휴(尹?)처럼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맞서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든지, 명재 윤증(尹拯)처럼 증오의 시대에 사랑의 정치를 역설하다가 은둔하든지, 이가환·이승훈처럼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를 지향하다가 사형되든지, 소현세자처럼 열린 미래를 지향하다가 독살되든지 했어야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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