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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南節義錄中 光山人 拔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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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7-03-25 14:03 조회1,88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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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丙戌義蹟]

金文發
號는 芙蓉亭이요 본은 광산이니 천성이 공손하고 廉簡하였다. 태조 甲戌(1394년)에 전라수군절제사로서 왜선을 격파하였고 태종 丙戌(1406년) 秋에 제주와 죽도에 침입한 왜선 1척을 水軍團撫使로서 포획하여 전공으로 전라 충청 都體察追捕使에 拜되였으며 그후 남원 보성 등지에서 또한 많은 전공을 세워 경기 충청 전라 경상 水軍節制使를 역임하였다.(光山)

[中宗庚午義蹟]

金곤<車昆 : 시중공후 밀직사사공파(주부공파-판결사공파계)
字는 可兼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숙공 周鼎의 후요  主簿 致섬<金舌의 子로 중종 경오(1510년) 왜침에 제주판관으로서 文定公 柳順汀과 함께 수백급을 참살하였다. 己巳(1509년)에 掌隸院判決事를 제수하였다.(長城)

[壬辰義蹟]

金德弘
광주인이요 司評 珝의 증손이요 習讀 鵬燮의 子로 牛溪 成渾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어려서 부친을잃고 二弟 德齡 德普로 더불어 모부인께 효성을 극진히 하였다. 壬辰에 公은 擧義의 뜻으로서 모부인께 告訣하고 仲弟 德齡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 적을 토멸하지 못하면 살아 돌아가지 않을 각오인바 노모시하에 형제가 다같이 죽는 것은 불가한 일이니 너는 돌아가 모친을 봉양하라」하고 홀로 招討使 高敬命 陣으로 들어가 금산전에서 高公과 함께 순절하였다. 正廟朝에 持平을 贈하고 義烈祠에 享하였으며 유적을 간행토록 명하였다.(光州 )

金瑾
字는 爾점<王占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후요 好仁의 자로 官이 副司果에 이르렀다. 壬辰(1592년)에弟 瓚으로 金千鎰을 쫓아 의거하여 癸巳(1593년)에 진주에서 순절하였다. 宣武原從勳에 錄하고 軍資監僉正을贈하였다(康津)

金時獻 : 시중공후 밀직사사공파(사의공파)
字는 大元이니 號는 河隱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숙공 周鼎의 후로 성질이 方剛하고 기상이 磊落하였으며 己丑(1589년)에 제주 목사로 부임하였다가 還歸하였다. 癸巳(1593년)에 倡義使 金千鎰로 더불어 진주에서 순절하였다. 宣武原從一等功勳에 錄하고 承旨를 贈하였다.(羅州)

金基命
字는 應汝요 號는 義菴이요 본은 광산이니 감사 金文發의 後로 宣廟朝에 熙川郡守鎭管兵馬節制都尉가되었다. 壬辰(1592년)에 倭寇가 침입하여 大駕가 播遷하자 공은 熙川任所로부터 義旅數千을 募得하고 평양으로진격하여 적을 공격하였고 그 후 權慄 元帥를 쫓아 행주에서 대첩을 하였으며 癸巳(1593년)에 진주로 입성하여 副隊長으로써 倡義使 金千鎰 兵使 崔慶會등으로 더불어 籌策을 參謀하다가 城이 陷落되여 순절하였다.弦窩 高光善이 行狀을 撰하였다.(光州)

金光運
字는 彦久요 號는 克念齋요 본은 광산이니 충숙공 深의 後요 贈判書 景憲의 子로 栗谷 李珥 문하에서 수업하였다.壬辰에 倡義使 金千鎰 幕下에서 강화의 수비등 歷戰의 공을 세우고 軍中에서 死하매 參議를 贈하였다. 公의 子 斗南은 무과에 등제하여 遺命으로써 家동<人童을 인솔하고 군량을 募聚하여 復讐를 맹서하고 倡義使 金千鎰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中樞에 陞拜하였다 龍丘 徐鳳翊이 行狀을 撰하였다.(羅州)

金混
자는 進彦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안공 良鑑의 후요 同樞 安宙의 자로 명종 辛亥에 출생하였다. 기골이 俊偉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매양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읽으면서 鞠躬盡췌의 뜻을 품었다. 임진에친명을 받들어 家동<人童과 兵糧 兵器를 領運하고 三島任啓英陣으로 赴하였다가 다시 장수에 주둔한 崔慶會幕으로 赴하여 一隊의 兵으로서 적을 추격하여 方張의 세력을 阻알하고 세번이나 奇功을 세우매 崔公이 行在에 啓聞하여 直長을 제수하였다. 공은 조정의 은총에 감격하고 乘勝長驅하여 湖津의 舟橋에 이르렀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七晝夜의 혈전끝에 무수한 참획을 하고 마침내 飛矢에 中하여 적에게 포로되어 抗議不屈타가 遇害殉節하였다. 從奴 鐵金이 집에돌아와 同樞公에게 공의 전사한 사실을 고하매 同樞公이 이르기를 「吾兒가 죽을 바를 얻어 죽었으니 내 어찌 한이 있으리요」하였다.공의 처 卞氏는 14세 孤兒인 弘業을 데리고 공의 시체를 찾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매 號泣하고 돌아와 공의 衣履로써 先롱下에 장사지내고 마침내 裁命殉從하였으며 子 弘業은 杜門謝世하고 五柳를 심어 靖節의 遺촉을 遇慕하니 이로부터 동명이 五柳村이 되였다. 齊州 梁會甲이 殉忠碑文을 撰하였다.(寶城)

金彦希
字는 汝聖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贈參判 誠의 子로 선조 己酉에 司馬에 中하였다.壬辰에 金景壽 金弘宇등 수백인으로 더불어 장성 남문밖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과 의곡을 募聚한 후 復讐將 高從厚를 쫓아 진주로 입성하여 力戰拒敵하다가 성이 함락되매 칼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입하여 이십여급을 참살하고 마침내 순국하였다. 掌樂院正을 贈하고 宣武原從勳에 錄하였다.(長城)

金大成
字는 成之요 본은 광산이니 大司諫 崇祖의 증손이요 典翰  紀의 孫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志節이 慷慨하였다. 壬辰에 招討使 高敬命의 격문에 응하여 家동<人童과 軍糧을 募聚하여 금산진으로 운송하고 이때 본 군수 南宮現이 喪을 만나 귀향하여 성주가 공석이 되자 생원 李應鍾등 54인으로 더불어 協謀하여顯城을 수비하였으며 계사에 또한 병기 군량을 募聚하여 진주 復讐將 高從厚 幕下로 운송하였다.(靈光)

金富行
字는 士潤이요 호는 蘊菴이요 본은 광산이니 密直使 天利의 後요 감찰 緣의 子로 문학이 著世하였으며천거로 참봉이 되였다. 임진에 義旅를 倡率하고 彪義將 沈友信 幕下로 赴하여 黃澗의 전투에서 많은 捷功을 세우고 계사에 진주로 입성하여 力戰 8일만에 성이 함락되매 沈公으로 더불어 矗石樓로 올라가 남강으로 投死하였다. 兵曹參議를 贈하였다.(務安)

金大民
字는 邦彦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僉使 언의 子로 임진에 左義兵將 任啓英을 쫓아 영남에서 屢捷을 하고 癸巳에 副將 張潤을 쫓아  진주로 입성하여 力戰하다 死하였다.(寶城)

金信民
字는 和之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掌令 孝愼의 현손으로 무과에 등제하여 훈련원 副正이 되였다. 임진에 종형 대민으로 더불어 擧義하여 義兵將 任啓英을 쫓아 嶺湖間에서 屢捷을 하고 癸巳에 副將 張潤으로 더불어 진주로 입성하여 力戰同死하였다.宣武原從勳에 錄하였다
(寶城)

金允明
字는 仲誠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贈 參議 希古의 子로 선조 甲申에 무과에 등제하였다.壬辰에 大駕가 西幸할새 공은 備邊郞으로서 먼저 臨津에 이르러 선박 50여척을 소집해 놓고 大駕를 대기하여 이날밤 大雨를 무릎쓰고 배를 저어 大駕를 무사히 護渡하매 선조께서 공을 돌아보며 이르기를「그대는 참다운 충신이로다 」하였고 博川에서 또한 큰비를 만나 前衛가 甚히 疎略했음에도 불구하고공이 大駕를 扈從하여 전진하니 선조께서 기특히 여겼다.體府의 소청으로 裨將을 제수하매 공은 兩湖를왕래하며 機務를 경리하니 體相이 공의 才局을 칭탄하였다. 癸巳에 繼義兵將의 從事官과 明將의 運粮差使로써 많은 勞積을 쌓고 丁酉에 臨陂顯令 鄭叔度 등으로 더불어 勤王 約會를 하였다가 병이 극하여卒하였다. 扈聖原從勳에 錄하고 兵曹參議를 贈하였다.(長興)

金德齡
字는 景樹요 본은 光州니 持平 德弘의 弟로 短小精悍하고 絶倫한 神勇이 있었으나 항상 스스로 도晦하였으며 伯氏를 쫓아 牛溪 成渾 문하에서 수학하여 17세에 이미 문장이 성취하였다.임진에 伯氏를 쫓아 起義하여 전주에 이르렀다가 伯氏의 명으로 귀향하여 모부인을 봉양하였다.

癸巳에 모부인의 喪을 당하여 守制中 金應會 宋濟民이 공에게 起義할 것을 권하고 담양부사 李景麟과 장성부사 李貴가 서로 方伯 李廷암에게 천거하고 인하여 조정에 啓聞하여 戰具를 자급하매 공은 부득이 墨衰로 起義하여 종제 德休와 함께 담양에 이르러 本府人 李寅卿으로 더불어 義旅 50여명을 募得하고 도내 列邑에 격문을 발하니 分朝로부터 翼虎의 호를 賜하고 行在로 啓達하여 승지를 特除함과 동시 忠勇의 호를 加賜하고 사신을 보내어 奬論하였다. 甲午에 영남으로 격문을 발할새 「담양으로부터 동래 부산을 거쳐 대마도와 일본 大坂을 바로 공격한다」는 路文을 發하고 남원으로 진격하여 광한루앞 울창한 임목을 한칼로 휘둘러 馳馬場을 만든후 膽략있는 崔聃齡을 불러 부장을 삼고 郭再祐에게 글을 보내 同仇의 뜻으로서 권면하였다.공은 이때 진중에 들어온 두마리의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어 倭營에 보이니 적이 더욱 습服하였다.

진주에 이르러 둔전을 크게 배풀고 戰守의 계책을 세우매 선조께서 諸道 義兵으로 하여금 전부 忠勇將幕下에 종속토록 명하였다. 적이 공의 威名을 듣고 초상을 그려 서로 보며 石底將軍이라 칭하고 兵을 거두어 감히 얼씬을 아니하매 공은 병을 인솔하고 의령에 이르러 곽재우로 더불어 鼎岩아래 깊은 湫를사이에 두고 적과 대진하였다.공은 적이 상류의 얕은 여울에다 標木을 세운 것을 보고 郭公에게 그 연고를 물었던바 郭公이 이르기를 「적이 반드시 오늘밤에 강을 건너 우리를 습격할 것이오 」하매 공은이르기를 「그러면 兩陳이 한 곳에 있을 수 없소 」하고 그 표목을 깊은 곳에 옮겨 세운 후 강을 건너잠복하고 있다가 밤이 깊어 적이 과연 표목만을 향하여 강으로 들어오자 공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고 뒤를 습격하여 적의 태반을 강물에 몰사시켰다.

공은 진주로 돌아와 조정에 여러번 출전의 명을 청하였으나 이때 明將 沈惟敬이 화의를 추진하는 판이요 또한 공의 전공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作奸하는 관계로 끝내 출전의 명을 얻지 못하자 공은 大功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 오직 술로써 鬱懷를 풀다가 마침내 무고로 인하여 被逮되었다.영남 유림들의 상소로 공의 무죄가 판명되어 선조로부터 위로를 받고 말까지 하사 받고 돌아왔으나 丙申에 도다시 飛言으로 인하여 被逮되였다.이때 조정에서는 덕령이 공중을 비행하여 체포할 수 없다고 모두 말하였으나오직 승지 徐성이 이르기를 「덕령이 배반할리 만무하옵니다 」하였던바 선조께서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러면 네가 가서 체포하여 오라 」하매 성이 진주에 이른즉 이미 옥여 갇히어 있다가 從容이 포박에 응하고 금부로 나아갔다. 이때 조정에서는 鄭琢 金應南等 모든 대신이다 무죄를 주장하여 공을力救하였으나 영상 柳成龍이 홀로 이르기를 「이 후에 만일 不虞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때는 신인 책임을 짓지 않겠나이다. 」하였다. 공은 옥중에서 春山火燃之歌를 짓고 8월 21일 마침내 옥사하니 적은 공이 처형되었다는 말을 듣고 술을 마시며 서로 축하하였고 진주를 비롯 전국의 士女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슬퍼하여 岳武穆의 죽음에 비하였다.공이 처음 起義할적에 칼을 무등산에서 만들었는데 청백의 기운이 하늘에 뻗히고 산이 56일 동안을 울었으며 칼이 완성되자 허리에 차고 麗末의 名將 鄭地의 鐵衣를 입고 鄭將軍의 묘에 祭告할제 칼이 스스로 풀어저 땅에 떨어지기를 세번을 하니 사람들이 不祥의 증조라 하더니 공이 과연 혈육도 없이 옥사하고 부인 이씨마저 丁酉에 추월산에서 적을 만나 순절하였다.

顯廟朝에 특명으로 伸雪하여 參議를 贈하였고 肅廟朝에 義烈祠에 享하여 賜祭하고 判書의 贈職을 나리었으며 正宗朝에 忠壯의 諡號와 좌찬성의 증직을 나리고 賜祭하였다. 돌을 세워 忠孝理라 표하고 부인이씨에게도 旌閭를 명하였으며 유적을 간행토록 명하여 御製序文을 부치었다.(光州)

金弘宇
字는 伯容요 본은 광산이니 판서 仁雨의 後요 생원 景熹의 子로 梧陰 尹斗壽 문하에서 游學하여 文行으로 稱聞하였다.壬辰에 金景壽 李應鍾 金齊閔 諸公으로 더불어 장성 남문 밖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곡 5백석을 募聚하여 義穀將 奇孝會에게 付하여 行在로 漕納하고 의병 8백인을 募聚하여 金克厚에게 付하여 진주로 입성케 하였다. 癸巳에 문과에 등제하고 丁酉에 明將 楊鎬를 쫓아 素沙에서 捷功을 세웠으며 그 후 兵曹 禮曹의 正郞을 거쳐 남원부사로 出宰하였다. 光恩副尉 金箕性이 행장을 撰하였다.(高敞)

金德宇
字는 彦容이요 호는 良村이니 판서 仁雨의 後요 생원 景熹의 子로 松川 梁應鼎 문하에서 游學하여 經學에 全心하였다.壬辰에 金齊閔 李應鍾 金景壽등 수백인으로 더불어 장성 남문 밖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 8백인을 募聚하여 晋城의 倡義使 金千鎰 陣中으로 보내고 의곡5백석을 募聚하여 義穀將 奇孝會에게 付하여 行在로 漕納할새 공은 本顯 都有司로서 형 光宇와 함께 활약하였다. 갑자에 노병으로 인하여 친히 활동하지 못하게 되자 子 汝剛을 명하여 도내 동지와 함께 兵穀을 倡募케하였고  丁卯에 本顯 召募有司로서 吳益昌과 함께 義穀을 募聚하여 行在로 船輸하였다. 亂平에 礪山에 이르러 鶴駕를 祗送하고 돌아오매 嘉善으로 陞秩하여 同樞를 제수하였다.(茂長)

金麒壽
字는 仁夫이요 호는 晩翁이며 본은 광산이니 麗末 章榮公 진<禾眞의 後요 都事 球의 子로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였고 학문이 宏博하였으며 천거로 참봉이 되었다. 壬辰에 도내 父老 金景壽 金齊閔 金弘宇등수백인으로 더불어 장성 남문 밖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兵穀을 募聚하여 兵穀有司로서 徐滾과 함께 行在로 漕納하였고 家동<人童과 義士 8백인을 復讐將 高從後 幕下로 보냈으며 또한 의곡을 運輸중 達川에서 적을 만나 수십급을 참살하매 선조께서 가상히 여겨 司僕寺正을 제수하고 宣武原從勳에 錄하였다.(高敞)

金聲振
字는 遠之요 호는 菊齊요 본은 광산이니 章榮公 진<禾眞의 後요 판서 仁雨의 6세손으로 誠孝가 出天하고 志氣가 慷慨하였다. 임진에 三從兄 弘宇와 佐郞 金景壽가  장성 남문 밖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義旅를 募聚한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로 더불어 勤王할 것을 맹서하여 가로되 「국사가 심히 艱難하여 君父가 몽진하는 이때 臣子로서 어찌 안일을 도모하리요 」하였다. 이떼 弟 聲徹이 칼을 들고 선봉이 되기를 청하매 공은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니 너는 집에서 老慈를 봉양하라 」하고 또한 부인 庾씨를 불러 부모 섬기는 범절과 자녀 기르는 도리를 이른후 죽음을 맹서한 용사수십인과 가동 수십명을 인솔하고 의청으로 付하여 方략을 贊劃한 후 金齊閔으로 더불어 稷山으로 진격하여 적 수십급을 참살하고 용인으로 進兵하였다가 沈惟敬이 강화를 도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돌아와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不就하였다. 丁酉에 남원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義旅를 인솔하고 의청으로 달려가 禦賊의 方략을 備陳하매 金景壽가 奬許하여 가로되 「연소한 서생이 능히 韜략을 아니 가히 더불어 일을 도모할만하다.」하고 運糧의 任事를 맡기였다.공은 金信男 등으로 더불어 적을 안성으로 추격하여 素沙에서 32급을 참살하고 倭劍 세자루를 奪取한 후 몸이 피로하여 나무아래서 잠깐 휴식하다가 추격해온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좌우 義士가 모두 탈출할 것을 권하매 공은 웃으며 이르기를 「장부가 어찌 亂에 임하여 구차이 살려 하리요 」하고 몸을 떨쳐 力戰하다가 순절하였다. 勉菴 崔益鉉이 傳을 撰하였다.(高敞)

金景男
字는 大述이요 號는 梅竹堂이요 본은 광산이니 司正 子進의 현손이요 參議 珩의 子로 중종 壬寅에 출생하였다. 氣節이 慷慨하고 文翰이 過人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親患에 露處祝天하고 때아닌 生瓜를 마른 넝쿨에서 구하여 供進하는 孝感이 있었다. 薦擧?로 登하여 참봉이 되였다. 壬辰에 장성에서  前佐郞金景壽등이 擧義한다는 소식을 듣고 義士 및 家동<人童과 義穀 箭簇 牛馬등을 領運하고 義廳으로 馳赴하여 諸公으로 더불어 籌策을 贊劃하고 稷山에 이르러 적과 접전하여 무수한 참획을 한후 용인으로 進屯하였다가 明將 宋應昌의 主和와 李如松의 敗報를 듣고 一軍이 통곡하매 公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一勝一敗는 兵家의 常事이어늘 어찌 통곡을 하리요" 하고 龍灣으로 馳赴하려다가 여산으로 遷屯하여 왕자의 환궁 소식을 듣고 罷兵하였다. 子 運海의 貴로써 호조참판을 贈하고 鰲山祠에 享하였으며 장성4가리에 倡義碑를 세웠다. 판서 趙鎭寬이 禮成祝을 撰하였다.(羅州)

金彦立
광산인이니 현감 麟의 현손으로 器局이 宏大하고 志節이 慷慨하였다.壬辰에 左義兵將 任啓英을 쫓아星州  開寧에서 連捷을 하였다.(寶城)

金弘烈
字는 敬淑이요 본은 광산이니 현감 自中의 後요 참봉 克通의 子로 용력과 지략이 過人하였으며 선조 戊子에 무과에 등제하여 守門將이 되였다. 壬辰에 家동<人童과 村丁 30여인을 인솔하고 진주로 赴하다가 중도에서 적을 만나 전사하였다. 宣武原從勳에 錄되였다.(興陽)

金貴仁
字는 愛賢이요 본은 광주니 어려서부터 지략이 있었다.壬辰에 鳳山戰鬪에서 3戰3捷하고 마침내 전사하였다.宣武原從勳에 錄되였다(光州)

金成遠
字는 剛叔이요 본은 광주니 贊成  감<王咸의 孫으로 명종 戊午에 司馬에 中하여 효행으로써 察訪이 되였다.壬辰에 兵使 黃進이 同福  현감으로부터 익산으로 移拜되매 공은 동복의 假官으로서 義旅를 慕聚하여一境을 안정시켰고 丁酉에 모친을 모시고 母后山으로 피난하였다가 적을 만나 母子 서로 翼蔽하고 遇害순절하니 後人이 母后山을 母護山이라 불렀다.(光州)

金贊元
字는 士格이요 號는 悠悠亭이요 본은 광산이니 충숙공 深의 後요 현감 約의 子로 壬辰에 弟 載池와 郡中 同志 參奉 李宏中등 18인으로 더불어 兵栗을 募聚하여 광주 의병소와 崔慶長陣中과 郭再祐 軍中과任啓英 軍中으로 운송하고 법성포를 거쳐 行在로 漕納하였으며 또한 생원 李應鍾등 54인으로 더불어軍城을 수비하였다(靈光)

金致원<言原
字는 濟和요 號는 守眞堂이요 본은 광산이니 承文判校 彦거<王居의 後요 主簿 光符의 子로 孝友하고 勇略이 있어 元帥 權慄이 本州를 按驗時 公을 심히 器重히 여겼다.壬辰에 훈련 僉正으로서 力戰하여 몸에 數十處의 창상을 입고 돌아와 그 후 소명을 받았으나 赴戰하지 못하고 가재를 기울여 弟 致詮으로 하여금 代赴케 하였던바 弟가 전사하였다.(光州)

金得孝
字는 克廉이요 본은 광산이니 別提 億의 孫이요 僉正 璉의 子로 려力이 超衆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선조 丙子에 무과에 등제하여 主簿가 되였다. 壬辰에 충무공 이순신을 쫓아 宋大立 陣武晟등으로 더불어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정유에 露梁에서 전사하여 宣武原從勳에 錄되였다(羅州)

金萬同
字는 會一이요 본은 광산이니 佐郞 閱의 後요 참의 達孫의 증손으로 무과에 등제하여 主簿에 拜되였다.壬辰에 大駕를 扈從하고 丁酉에 충무공 이순신을 쫓아 寶花島에서 많은 참획을 하였다.  宣武原從勳에 錄되였다(興陽)

金永守
字는 德保요 본은 광산하니 지략이 있었고 병법에 通하였으며 무과에 등제하여 守門將이 되였다. 壬辰에 충무공 이순신을 쫓아 鳴梁戰에서 많은 적을 참살하고 순절하여  宣武原從勳에 錄되였다(咸平)

金聲遠:시중공후 밀직사사공파(주부공파-서암공파계)
字는 達聞이요 號는 秀岩이요 본은 광산이니 참판 淸의 증손이요 진사 克粹의 子로 慷慨한 大節이 있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壬辰에 白振南 文英凱등으로 더불어 戰船을 募聚하고 충무공 이순신을 쫓아 鳴梁戰에서 승첩을 하였고 甲子에 또한 義旅를 募聚하였다.(長興)

金西秀
字는 肅兼이요 본은 광산이니 관찰사 孝貞의 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담략이 있었으며 宣廟朝에 훈련원 主簿를 역임하였다.壬辰에 閑山戰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宣武原從勳에 錄되였다(樂安)
金博字는 思浩요 본은 광산이니 贊成 達孫의 後요 贈參議 彭壽의 子로 학식이 宏博하고 氣貌가 英偉하였으며 선조 辛卯에 司馬에 中하여 別薦으로 訓鍊正이 되였다. 壬辰에 金齊閔 金景壽 李應鍾등 수백인으로 더불어 장서에 義廳을 설치하고 공은 나주의 募義都有司가 되여 諸公으로 더불어 義士 8백여명을 募聚하여 晋城의 倡義使와 複讐將 陣中으로 보내었고 義穀 5백여석을 募聚하여義穀將 奇孝會에게 付하여 行在로 漕納하였으며 丁酉에 錦城 留陣將으로서 鎭兵을 인솔하고 남원으로 馳赴하여 奮身力戰하다가 성이 함락되여 兵使 李福男으로 더불어 순절하니 時年이 29세였다.宣武原從勳에 錄하고 戶役을 免케하였다.(羅州)

金壽淵
字는 汝深이요 본은 광주니 대사성 成玉의 後요 현감 混의 子로 명종 戊午에 무과에 등제하였다.
丁酉에 迪順副尉로써 三子 夢弼 夢齡 夢業과 함께 兵使 李福男을 쫓아 남원성을 守禦하다가 전사하여宣武原從勳에 錄되였다(務安)

金珽
字는 公瑞요 號는 九一이요 본은 광산이니 司藝 湖의 현손이요 참봉 仲謙의 子로 誠孝가 出天하고 문학이 著稱하였으며 명종 乙卯에 司馬에 中하였다.壬辰에 송강 정철과 충무공 이순신이 누차 공을 참모로 불렀으나 공은 이르기를 " 臣子의 도리는 마땅히 勤王을 먼저 해야 한다" 하고 弟 進士 玖로 더불어大駕를 龍灣에서 扈從하였다.공은 또한 忠憤을 읊은 詩一首를 明 提督 이여송에게 贈하니 제독이 보고 嘉贊하여 依履糧資등을 賜하였다.(長興)

金誨
字는 時望이요 본은 광산이니 충숙공 承晋의 後요 판서 應瑚의 孫으로 선조 丁亥에 무과에 등제하여 主簿에 拜하였다. 壬辰에 大駕를 扈從하고 서행하여 많은 勞績을 쌓고 回란後 摩下部伍를 인솔하고 富寧에서 적과 접전하여 무수한 참획을 하였다. 당시 奮取한 倭劍이 尙今까지 집에 傳해 온다.
 
金孝生
字는 寶卿이요 본은 광산이니 直提學 瞻의 後요 府使公 喜의 子로 무과에 등제하여 主簿에 拜되였다.壬辰에 龍灣에서 大駕를 扈從하고 丁酉에 從弟 孝先으로 더불어 鄕兵을 규합하여 많은 적을 참살하였다. 宣武原從勳에 錄되였다(寶城)

金禧周
字는 良佐요 號는 蓮隱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숙공 周鼎의 後요 府使 貴祥의 현손으로 智勇이 過人하였다.壬辰에 義旅를 倡率하고 의주에 이르러 적 수십급을 참살하고 勢窮力盡 自刎殉節하였다.宣武原從勳에 錄하고 병조참판을 贈하였으며 海平 尹齊求가.행장을 撰하였다.(靈光)


[仁祖甲子義蹟]

金東達
字는 而行이요 號는 薇谷이요 본은 광산이니 鳳谷 東準의 弟로 天姿가 純粹하고 德業이 宏厚하였으며 선조 己酉에 司馬에 中하였다.甲子에 募義有司로서 兵穀을 募聚하여 의거 하였다가 亂이 평정되매 중지하였고 丁卯에 從子 聲夏로 더불어 號召使 金長生을 쫓아 方略을 協贊하여 金公의 薦으로 참봉이 되였으며 丙子에 또한 行在로 馳赴하다가 강화의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全州)

金汝剛
字는 希克이요 號는 松庵이요 본은 광산이니 참봉 麒瑞의 증손이요 同樞 德宇의 子로 문장이 夙就하고 효행이 出天하였다. 甲子에 辛惟一 吳전등으로 더불어 兵栗을 募聚하여 勤王하려 하였다가 란이 평정되매 子 南鎰 從姪 南式으로 하여금 兵糧을 募聚하여 勤王을 도모케 하였다가 강화가 성립되매 杜門廢擧하였다.(茂長)

金孝信
字는 士誠이요 본은 광주니 大司成  成玉의 後요 贈 參議 志의 子로 선조 庚子에 무과에 등제하였다.甲子에 龜城中軍으로서 适의 反狀을 점지하고 諸將을 檄論하여 寧邊에 이르렀다가 明璉의 심복 姜綽에게 밤에 저격당하여 머리에 세번의 칼을 받었으나 공은 외손으로 머리를 보호하면서 오른손으로 칼을빼어 綽을 追斬하고 군관 池繼催로 하여금 머리를 函에 담어 元帥府로 올리니 인조께서 錦段과 恩子를하사하여 창상을 치료하는데 보태쓰도록 하고 인하여 訓鍊都正을 제수하였으며 창상을 싸매고 평양에 이르니 元帥 張晩이 또한 위로하며 眞將軍이라고 稱하였다.忠淸水使를 제수하였으나 不取하고 後에 황해부사로 부임하였다가 未幾에 金創으로 卒하였다.振武原從勳에 錄되였다.(長興)

金介民
字는 弘仲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판관 濂의 子로 誠孝가 格天하고 담략이 절인하였으며 선조 辛亥에 무과에 등제하였다.甲子에 선전관으로서 玉城 張晩 幕下로 赴하여 錦南 鄭忠으로 더불어 鞍峴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振武原從勳에 錄되였다 延日縣監을 제수하였다가 얼마 아니되여 수원부사로 陞拜하였다.(寶城)

金尙하
字는 華仲이요 본은 광산이니 대사성 成玉의 後요 宣傳 仁毫의 子로 무과에 등제하였다.甲子에 都摠經歷으로서 鞍峴에서 적을 功破하여 振武原從勳에 錄되였다.(長興)

金仁邦
字는 子弼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참봉 得公의 子로 庚午에 무과에 등제하였다.甲子에 防禦使 金完을 쫓아 적을 討平하여 振武原從勳에 錄되였고 병자호란에 兵使 金俊龍을 쫓아 光敎戰에서 많은 적을 참획하였으며 辛巳에 御營軍을 거느리고 심양으로 들어가 兩宮을 扈從하고 돌아와 훈련판관에 拜되였다.(羅州)

金春景
字는 而華요 본은 광산이니 掌令 元龜의 後요 참봉 蘭芝의 子로 려力이 絶倫하였다. 甲子에 朴繼逸등으로 더불어 공주에서 扈駕의 公을 세워 振武原從勳에 錄되였다.(茂長)

金運海
字는 享遠이요 號는 碧流亭이요 본은 광산이니 首山亭 子進의 5세손이요 梅竹堂 景男의 子로 선조 丁丑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氣節이 激仰慷慨하고 지략이 過人하였으며 戊申에 무과에 등제하였으나 昏祖를 當하여 仕進에 뜻을 두지 아니하다가 인조반정에 勳勞를 세워 선전관이 되였다.甲子에 공주에서扈駕의 公을 세워 嘉善으로 陞秩하였고 癸未에 충청도 助防將에 拜되였으며 戰馬 甲胄 弓矢등의 상을恩蒙하였다. 그후 同知中樞府事에 拜되였고 3代의 追贈을 恩蒙하였으며 外職으로 곤양 宣川 富寧 안동 白翎의 守宰를 역임하고 후에 김해부사로서 謝病歸鄕 하였다.병자호란에 淸陰 金尙憲 이 虜中에 구인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詩를 지어 격려하기를 "차라리 蘇武의 苦節을 지킬지언정 李陵의 영화를 누리지 말라" 하였고 金公이 還國하매 70의 노령으로 천리를 跋涉하여 龍灣으로 出迎하고 후에 다시 石室로 往拜하였다.餘力齋 張憲周가 행장을 撰하였다.(羅州)


[仁祖 丁丙義蹟]

金德普
字는 子龍이니 충장공 德齡의 弟로 송강 정철과 霽峯 고경명 문하에서 수업하였다.壬辰倭亂에 충장공 幕下에서 많은 籌劃을 贊劃하다가 충장공이 禍를 입으매 향리로 돌아와 楓庵이라 自號하고 그후 조정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丁卯에 공은 와병중에 있다가 胡騎가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家동과 장사를 募聚하고 戰具를 마련하여 牛山 安邦俊으로 더불어 勤王할 것을 기약하였다가 병세가더하여 赴難하지 못하게 되매 이에 從氏 德宥를 勸起하여 牛山 安公 幕下로 赴케 한후 집으로 돌아와 病卒하였다. 正宗朝에 執義를 贈하고 義烈祠에 享하였으며 遺蹟을 간행토록 명하였다. 北軒 김춘택이戰後서를 지었다(光州)

金聲夏
字는 大叔이요 號는 守愚요 本은 광산이니 감찰 東準의 子로 孝友가 出天하고 志節이 慷慨하였으며 역학과 예학에 정통하였다. 丁卯에 號召使  김장생의 召募有司로서 兵糧과 병기를 借辨하고 공주로 赴하여 東宮을 扈從하고 남하하였으며 丙子에 숙부 東達을 쫓아 行在로 赴하였다가  강화의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후에 優老로써 折衝副護軍을 제수하였고 尤庵 송시열이 墓表를 撰하였다.(全州)

金成命
字는 樂夫요 號는 海隱이요 본은 광주니 壬辰殉節 憲의 子로 부친의 원수를 갚고져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여 戊午에 무과에 등제하였다.丁卯에 大駕를 扈從中 피난선이 풍파를 만나 67인이 표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인조의 命으로 음식물을 가지고 달려가 구출하다가 뜨거운 밥그릇에 이마를 데어 傷하니 인조께서 壯士라 칭하여 약을 주어 치료케하고 인하여 彌助項僉使를 제수하였다.(長興)

金東準
字는 而式이요 號는 鳳谷이요 본은 광산이니 고려시중 문정공 台鉉의 後요 생원 熙正의 子로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선조 丁巳에 司馬에 中하였다.丙子에 감찰로서 大駕를 扈從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金槃 諸公으로 더불어 화의를 排斥하다가 강화가 성립되매 비분을 참지 못하고 돌아와 시로서 술회하며 은거하였다. 저서에 啓蒙圖說 心性緖言 戴禮袞集錄등이 있다.卒하매 麟峰祠에 享하였고 우암 송시열이 誌碣을 撰하였다.(全州)

金得男
字는 善述이요 號는 梅竹軒이요 본은 광산이니 贈 右尹 영<音英의 孫이요 贈 左尹 憶昌의 子로 선조 戊午에 무과에 등제하여 副護軍에 拜 되였으며 인조반정에 翎戴의 功을 세워 靖社勳에 錄되였고 折衝將軍으로 陞拜되였다. 丙子에 공은 僉使로서 江都에 留陣하고 있었는데 이때 胡兵이 우리나라의 士女 수백명을 납치하여 지나간것을 보고 主帥가 諸將을 향하여 이르기를 "누가 능히 적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포로된 인사를 奪還하여 오겠는가" 하고 물으매 공이 팔을 떨치며 출전하기를 자원하고 諸官에게 入告하기를 청컨대 오늘 죽음으로써 결전하겠나이다. 하매 諸官이 嘉贊하고 戰馬와 비단을 賜하였다.공은 드디어 梁挺之등으로 더불어 出城迎擊하여 무수한 적을 참살하고 掠奪한 인물을 탈취한후 도주한 적을 부평까지 추격하였다가 日暮에 탈취한 적마를 타고 돌아오다가 적의 화살에 맞어 死하였다. 從奴 朴福이 생환하여 공의 殉節을 알리매 留守가 厚히 감하여 船便으로 裝送하였다.공의 妻 김씨가 통곡하며 이르기를 夫子가 이미 국가를 위하여 죽었으니 처는 마땅히 夫子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하고 斷食殉節하였다. 事聞되매 判尹을 贈하였고 縣廟甲寅에 江都祠에 享하였으며 純祖庚子에 旌閭를 명하고 參判을 加贈하였다.己丑에 梅谷에 建祠하였고 壬辰에 御製碑文으로 致祭하였으며 고종 壬辰에 병조판서의 증직과 忠毅의 諡號를 내리었다.北軒 金春澤이 행장을 撰하였다.(咸平)

金承善 : 시중공후 밀직사사공파(승의랑공파)
字는 必慶이요 본은 광산이니 대사헌 德龍의 後요 察訪 彦璧의 子로 勇力과 才器가 있었으며 무과에 등제하였다.丙子에 征虜校尉로서 義州府尹 林慶業을 쫓아 많은 전공을 세우고 死하였다.
(康津)

金汝璉
字는 의之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掌令 孝愼의 5대손으로 孝友가 卓異하고 志節이 慷慨하였다.丙子에 一門七從으로 더불어 牛山 安邦俊을 쫓아 의거하였다가 화의가 성립되매 돌아왔다.(寶城)

金義精
字는 君執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壬辰倡義 民의 子로 丙子에 6從兄 弟로 더불어 義旅를 倡起하여 牛山 安邦俊을 쫓아 여산에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매 통곡하고 돌아왔다.
(寶城)

金就砥 
字는 鍊平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壬辰殉節 大民의 孫으로 氣節이 慷慨하였다.丙子에 諸從 廷望 得善 廷生 汝璉 義精 廷一로 더불어 牛山 安邦俊을 쫓아 擧義하여 여산에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매 통곡하고 돌아왔다.(寶城)

金華俊
字는 士元이요 號는 棠溪요 본은 광산이니 진사 珽의 孫이요 참봉 式南의 子로 6세에 능히 文을 하였으며 인조 癸酉에 司馬에 中하고 동년에 문과에 등제하였다.丙子에 注書로서 휴가를 얻어 교외로 나왔다가 胡變을 듣고 行在로 馳赴하여 이미 굳게 닫혀있는 성문을 驍勇한 從奴의 부축으로 넘어들어가 많은 勞績을 쌓으매 同知로 特陞시켜 龍崗縣令을 拜하였다.(扶安)

金在寬
字는 士得이요 본은 광산이니 都摠制 繼志의 後요 聲咸의 子로 천성이 孝友하였으며 從祖 鳳谷 東準 문하에서 수업하였다.丙子에 從祖를 쫓아 大駕를 扈從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義士로 선발되어 城의 西門을 把守하면서 성벽으로 기어 올라오는 적 수십명을 발로 차 살상시키다가 화의가 성립되매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후  相國 李浣이 공의 智勇을 조정에서 啓薦하여 조정에서 공에게 무과 別第를 賜하여 宣傳으로서 무예를 시험하였는데 공이 능히 數百尺의 强弓을 잡아당기니 인조께서 雕弓을 特賜하였다.(全州)

金成一
字는 應乾이요 號는 歲寒齋요 본은 광산이니 부사 自敏의 後요 현령 俊民의 子로 姿貌가 魁偉하였다.현령공이 일찍 家奴에게 遇害되었는데 공이 가노를 체포하여 수검으로 참살하고 배를 갈라 간을 내어告殯한 후 公府에 나아가 자수하니 조정에서 공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旌閭를 명하였다.丙子에 남한산성에서 大駕를 扈從하는데 中夜에 어디선가 세번 부르는 소리가 나는지라 공이 놀래어 일어나 급히御駕를 잠깐 피하도록 청하고나니 곧이어 적의 포환이 떨어지는지라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宣傳官을 特授하였고 勸武科에 등제하여 官이 朔州 부사에 이르렀으며 우암 송시열이 傳을 立하였다.(潭陽)

金漢一
字는 敵萬이요 본은 광산이니 참봉 世饒의 孫이요 군수 益貴의 子로 무과에 등제하였다.甲子에 공주에서 扈駕하였고 丙子에 大駕를 扈從하고 남한으로 들어가 어명으로 佩刀를 하사받고 성을 순시하였으며 丁丑에 東宮을 扈駕하고 심양으로 들어 갔다가 돌아와 四邑을 歷宰하였다.孝宗朝에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長興)

金得元
字는 乃乾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贈副正 彦希의 子로 丙子에 弟慶元과 柳汝櫓 曺添등으로 더불어 兵糧을 募聚하여 南漢으로 勤王하매 인조께서 가상히 여겨 司猛階를 제수하고 義一襲을 賜하였다.화의가 성립되여 돌아와 卒하매 參議를 贈하였다.(長城)

金成俊
字는 英叔이요 본은 광주니 문숙공 周鼎의 後로 丙子에 同里 金禮立 兄弟로 더불어 南漢城에 赴하여 大駕를 扈從하매 인조께서 가상히 여겨 銀鞭과 手甲을 하사하였다.丁丑에 扈從科에 등제하여 訓鍊奉事를 제수하였다.(南平)

金億龍
字는 雲卿이요 본은 광산이니 直長의 後요 兵使 時一의 子로 膽略과 勇力이 絶倫하였다.丙子에 雲岩 李興발을 쫓아 청주에 이르렀다가.화의가 성립되매 통곡하고 돌아왔다.(光州)

金圭鎭 : 시중공후 밀직사사공파(사의공파)
字는 士周요 號는 間齋요 본은 광산이니 문숙공 周鼎의 後요 時獻의 孫으로 牛山 安邦俊과 從遊하였으며 蔭仕로 將仕郞 奉常寺 參奉이 되였다.甲子适亂에 鞍峴에서 捷功을 세워 振武原從勳에 錄되였고 丙子에 牛山 安邦俊으로 더불어 義旅를 倡率하고 청주에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매 통곡하고 돌아왔다.卒하매 左議政을 贈하였다(羅州)

金宗智 : 시중공후 밀직시사공후(주부공파-소암공파계)금서공파
字는 國寶요 본은 광산이니 문숙공 周鼎의 後요 處士 慶成의 子로 품행이 剛毅하고 孝友와 文行이 당세에 저명하였다. 丙子에 鄕隣諸義士와 더불어 赴難하였다가 화의가 성립되매 통곡하고 돌아왔다(咸平)

金璇 : 시중공후 밀직사사공후(주부공파-소암공파계)시서공파
字는 而獻이요 號는 市西요 本은 광산이니 己卯明賢 軾의 4세손이요 護軍 富成의 子로 효행과 문학이 著世하였으며 乙巳에 司馬에 中하였으며 參奉 禁府都事 察訪 등직을 제수하였으나 不就하였다. 甲子适亂에 羅海鳳으로 더불어 義旅를 募聚하여 赴難하려 하였다가 亂이 평정되여 중지하였고 丙子에 동향인 梁曼容 諸公으로 더불어 倡義하여 勤王하였다가 病이 發하매 子 時길<日吉로 하여금 兵을 代領하여 赴難케 하였다. 後에 遺逸로써 조정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溪澗에 祠宇를 건립하였고 丈巖 鄭澔가 행장을 撰하였으며 遺集이 전해온다.(羅州)

金時길<日吉 : 시중공후 밀직사사공후(주부공파-소암공파계)시서공파
字는 吉甫요 號는 廳뢰요 본은 광산이니 市西 璇의 子로 인조 甲子에 進士에 中하였다.丙子에 親命에 의하여 李興발 梁曼容 諸公으로 더불어 義旅를 인솔하고 청주에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주에 들여 眞殿에 致祭하고 돌아왔다.후에 우암 송시열의 薦 으로 德山 南平 졸<人卒을 역임하였는데 治政에 公正無私하니 주민들이 청백비를 세웠다.公의 遺集이 세상에 전한다.(羅州)

金宗道 : 시중공후 밀직시사공후(주부공파-소암공파계)금서공파
字는 重伯이요 號는 竹村이요 본은 광산이니 문숙공 周鼎의 後로 丙子에 弟 宗智로 더불어 倡義하여 청주에 이르렀다가 城下之盟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咸平)
 

[英祖戊申義蹟]

金聖濟
字는 仁仲이요 號는 雲田이니 丙子斥和 東準의 玄孫이요 丁卯倡義 聲夏의 曾孫으로 孝友와 文學이 세상의 推重한바 되였다.戊申에 親喪을 當하여 守制中 縣賊이 三川에서 來陣하여 人民이 潰散함을 보고 諸族과 鄕里壯丁을 모아 擧義를 도모하다가 이윽고 적이 間道로 쫓아 도망을 하자 공은 家동<人童으로 하여금 적의 뒤를 쫓아 偵探케 하는 한편 이때 적을 추격하다가 방향을 잃고 있는 관군을 지휘하여 高山에서 縣賊의 妻노를 체포하였다(全州)

金致久
字는 汝大요 본은 광산이니 충숙공 深의 後요 察訪 彦龍의 증손으로 器局이 雄偉하였으며 숙종
己亥에 무과에 등제하여 都事를 역임하였다.戊申에 本郡守城將으로서 軍紀를 嚴하게 하여 적을 방비하였다.(靈光)

金汝聲
字는 奇雅요 본은 광산이니 문숙공 周鼎의 後요 進士 戒성<金星의 현손으로 氣節이 慷慨하였다.戊申에 비단에다 " 同心赴義" 라는 네글자를 써서 義旅 100여인을 募聚하여 獒樹驛에 이르렀다가 亂이 평정되었음을 듣고 돌아왔다.그 후 上護軍을 역임하였고 判書 鄭枋이 行狀을 撰하였다.
(昌平)

金尙華
字는 相集이요 본은 광산이니 甲子樹勳 春景의 5세손이요 主簿 起澄의 子로 려力이 過人하고 智略이 있었다. 戊申에 元帥 吳命恒을 쫓아 素沙의 戰에서 선봉으로 많은 斬獲의 공을 세워 揚武原從功勳에 錄되였다.(茂長)

金鎭秀
字는 英汝요 본은 광산이니 勇略과 騎射가 超倫하여 戊午에 무과에 등제하였다.丙寅에 公은 別포軍을 모집하여 府使 吳達善을 往見하고 奮義赴戰할 것을 청하였던바 吳公이 참다운 義士라 칭하고 公을 節度使 柳燮에게 狀聞하매 公은 다시 柳公에게 南道別砲를 인솔하고 赴難할 것을 청하였으나 柳公이 이르기를 "지금 時事가 紛紛하여 민심이 동요될까 염려되니 청컨대 單騎로 상경하라"함으로 공은 하는 수 없이 홀로 서울에 이르렀다가 적이 이미 물러갔음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兵曹에 나아가 報하고 마침내 憂憤으로 病이 발하여 卒하니 高宗께서 公의 忠을 가상히 여겨 忠武衛司果兼 部長을 贈하였다.(長興)


[抗日義蹟]

金容玉
字는 大振이요 號는 白隱이요 본은 광산이니 忠毅公 得男의 後로 文藝가  夙成하고 志慨가 倜당하였다.甲申政變후 공은 매양 太息憤慨하여 이르기를 "국가가 將亡하니 臣民이 依託할 곳이 없도다. 하고 交游를 끊고 杜門不出하더니 庚戌에 마침내 合邦이 되자 형 容直으로 더불어 통곡하고 裵陽山中으로 더불어 彷徨痛哭하면서 이르기를 "이날이 무슨 날이며 이날이 무슨 날인고 裵陽의 산속에 魂을 可히 길들이고 정의의 샘속에 뼈를 가히 묻을지다." 하고 형제와 함께 물로 投身殉節하였다. (務安)

金在圭
號는 島松이요 본은 광산이니 天資가 超邁하고 志氣가 慷慨하여 항상 國치를 씻고저하는 뜻을 품고 있더니 庚戌合邦 후로는 産業을 不顧하고 吳學根 安昌浩 白貞基 등을 쫓아 상해 임시정부와 상호 연락하여 兄 在勉 在龍 弟 在善 在吉로 더불어 家財를 기울여 군자금을 密送하다가 왜적에게 여러번 詰問을당하였으나 公은 끝까지 기밀을 保持하였다.(井邑)

金鍊洙
字는 仁智요 號는 養正齋요 본은 광산이니 監司 文發의 後요 嘉善 永根의 子로 容儀가 端粹하고 語言이 簡重하였으며 일찍 藏巖  高公을 師事하여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丙午에 鹿川 高光洵으로 더불어 擧義할새 公은 衰麻在身으로 다만 戎謨를 贊劃하고 兵糧機械를 募聚하여 軍需를 공급하다가 기밀이 漏洩되어 倭兵이 公의 家庭을 수색하여 高公과의 往復書類를 압수하고 誘說와 酷刑으로 배후의 자백을 추궁하였으나 公은 끝까지 抗議不屈하고 庚戌에 合邦이 되자 食飮을 撤廢하고 自決하려 하였다가 병든 노모로 인하여 차마 하지 못하였다.(光州)

金晟澤
字는 敬允이요 號는 광산이니 咸陽公 瑁의 後요 鍾益의 子로 賊性이 聰慧하고 智勇이 過人하였다.丁未에 義士 宋南燮으로 더불어 杏史 梁會一을 往見하고 討倭의 계책을 상의하였던바 梁公이 크게 기뻐하며 이르기를 海邑列鎭은 賊의 上陸에 가장 편리한 곳이니 속히 방어의 대책을 도모해야 하오" 함으로 公 은 곧 鄕里에 돌아와 격문을 發하고 義旅 수백인을 募聚하여 己酉 4월에 社倉毫谷 접전에 또한 많은 적을 사살한 후 적을 突山으로 추격하였다가 被逮되였는데 적이 칼을 빼어 들고 公의 등을 치며 威脅을 하매 公은 큰소리로 꾸짖기를 "너희들이 비록 나의 등을 치나 무릎은 굽힐 수가 없을것이다"하고 凝立 不動하니 倭賊이 서로 嗟嘆하기를 참다운 義士라 하였다.그 후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庚戌에 合邦의 소식을 듣고 痛哭入山하였다가 마침내 憂憤으로 成疾하여 卒하였다.(寶城)

金箕璟
字는 子星이요 號는 愼獻齋요 本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요 載彬의 子로 志節이 慷慨하였다.庚戌에 왜적이 국토를 合呑하자 공은 이르기를 "國讐를 갚지 못하였으니 적과 어찌 한 하늘 아래 살 수 있으리요" 하고 白笠과 白帶를 하고 杜門絶交하다가 마침내 憂憤으로 成疾하여 死하였다.(綾州)

金翼洙
字는 大有요 號는 晩悟堂이요 본은 광산이니 風儀가 俊偉하고 언행이 篤實하였으며 哲宗朝에 무과에 등제하여 訓鍊判官兼 添上宣傳官 右捕將 同副承旨등을 역임하였다.임오군란이 일어난 후로 棄官歸鄕하여 은거중 高宗이 昇遐했다는 소식을 듣고 思君臺를 구축하고 朔望으로 瞻拜하다가 3년상의 마지막날에 痛哭節死하였다.(長興)

金倫洙
字는 明甫요 號는 南皐요 본은 광산이니 문정공 台鉉의 後로 氣節이 倜당하였다.乙巳에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공은 私財로써 무기를 구입하고 軍糧을 마련하여 同鄕人 高殷柱 高光一로 더불어 擧義를 도모하고 전라 충청 兩道 倡義所와 연락하여 武器 軍資등을 공급하다가 洪州와 구례 燕谷寺에서 의병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解兵 亡命하였다.(光州)

金在龍
號는 進破요 본은 광산이니 문숙공 周鼎의 後요 箕柱의 子로 단기 4261년 6월 光州學生盟休事件에 連坐檢擧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았고 동년 9월 치안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1년을 언도 받았으며 단기4262년 11월 3일에 일어났던 광주학생사건으로 재 검거되어 단기4264년 6월에 대구 覆審法院에서 징역3년을 선고 받었다. 공은 또한 단기 4265년 11월에 일본의 羈絆을 벗어나 독립전남농민회를 비밀히 조직하여 細農民 救濟事業을 강행했다는 혐의로 징역5년을 선고 받고 복역중 옥중에서 마침내 殉節하였다.(谷城)

編纂會 特別會員錄中 光山人

金善五(字는 元一  號는 心松 直長公 混 后 寶城郡)
金容縣(時獻后 光州市)
金永萬(字는 聖泰 號는 月坡 文肅公 周鼎 后  光州市)
金永善(號는 市隱 參奉 蘭 后 高敞郡)
金起淳(監司 文發 后 光山郡)
金伯鉉(號는 省齋 菊齋 聲振 后 高敞郡)
金容汶(字는 鳳先 號는 誠堂 光州市)
金興柱(文肅公 周鼎 后 光山郡)
金鎭 ?(字는 大滿 號는 石隱 光山郡)
金弘淳(光山郡)
金容恩(光山郡)
金允中(號는 春院 監司 文發 后 光山郡)
金容璇(字는 衛叔 號는 歲寒 監司 文發 后 光山郡)
金瑛昌(字는 昶日 號는吉隱 梅竹堂 景男 后 羅州郡)
金永泰(字는 亨文 號는 墨齋 璇 后 羅州郡))
金永模(字는 士凡 時길<日吉 后 羅州郡)
金瑛春(字는 德龍 成俊 后 羅州郡)
金炳敎(字는 正觀 號는 慕庵 宣武功臣 禧周 后 靈光郡)
金容連(字는 三龍 萬同 后 高興郡)
金達泰(字는 達三 號는 溪翁 振發 后  高興郡)
金吉洙(主簿 西秀 后 寶城郡)
金在根( 寶城郡)
金容集(字는 先化 號는 誠齋 直長 混 后 寶城郡)
金容彬(字는 奎三 號는 忍齋 直長 混 后 寶城郡)
金得中(字는 執中 號는 定齋 直長 混 后 寶城郡)
金田中(字는 啓一 號는 湖松 直長 混 后 寶城郡)
金洛中(字는 子精 號는 蒼庵 直長 混 后 寶城郡)
金燦重(字는 仲浩 號는 柳南 直長 混 后 寶城郡)
金南中(字는 子中 號는 石泉 直長 混 后 寶城郡)
金珷中(字는 聖圭 號는 東溪 直長 混 后 寶城郡)
金東善(字는 南一 號는 宜堂 直長 混 后 寶城郡)
金善台(字는 子三 號는 德山 直長 混 后 寶城郡)
金擧中(字는 子致 號는 寬亭 直長 混 后 寶城郡)
金錤祖(字는 鍾大 號는 鵬庵 直長 混 后 寶城郡)
金鴻淳(字는 觀道 號는 希齋 直長 混 后 寶城郡)
金相悅(字는 相烈 號는 後山 義齋 晟澤 子 寶城郡)
金昌洙(號는 石湖 癡齋 永燁 后 長興郡)
金萬中(長興郡))
金善五(翼洙 后 長興郡)
金順基(宗智 后 和順郡)
金善永(務安郡)
金性柱(務安郡)
金洪中(字는 守成 號는 晦山 務安郡)
金仁容(字는 容凡 號는 淵汀 彦忠 后 咸平郡)
金在翊(字는 益和 號는 小峰 錦隱 壽淵 后 咸平郡)
金鼎鍊(字는 甲童 號는 晩悟 곤 后 長城郡)
金永甲(在圭 孫 井邑郡)
金南鉉(號는 謙齋 華俊 后 扶安郡)
金在煥(字는 光淑 號는 莘庵 晩翁 麒壽 后 高敞郡)
金永培(號는 靑坡 原從功臣 景 后 高敞郡)
 
출처 : 湖南節義錄(단기4297년 전남광주향교내 편집인 李玟洙 張桓銖)

댓글목록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전남광주향교에서 간행한 <호남절의록>에

1799년에 간행한 <호남절의록>에 없던 분들이 들어있는 사실은

정조때 간행한 내용에 <읍지>와 <향교지>등에서

발굴한 자료를 추가했기 때문으로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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