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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 휘 주정에 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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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7-06-20 10:32 조회1,65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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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肅公 諱 周鼎에 관한 기록
-墓誌銘과 史料를 중심으로-

파조이신 문숙공 휘 주정께서는 1228년에 출생하시어 1290년 3월에 졸하셨으니
향년이 63 이셨다

公께서는 고려 高宗 44년(1257년)에 富城縣尉로 발탁되고 그 뒤 權補兵馬錄事에 補任되었으며 元나라에 가는 서장관을 수행한 뒤 歸還하여 時事를 陣奏(진주)하였다.

1264년(元宗 5년)에 文科試에 壯元으로 及第하였고 政事堂에 들어가 閤門祗侯,
刑部郎中, 國學直講을 連任하고 國子司業, 寶文閣待制, 知制誥(考試官)를 累加하였다.

1274년 (元宗 15년) 忠烈王이 卽位함에 吏部侍郞, 朝請大夫, 大府卿, 寶文閣直學士, 右司議大夫, 등을 連拜하였으며 時務策 20餘條를 論述한 封書를 올리니 王이 嘉納하여 많은 부분 施行하였다.

司馬試를 主掌하고 1278년 충렬왕이 元으로 갈 때 從行都監使를 맡기니 中贊 金方慶이 無罪함과 다루가치 어문을 철폐하게 하셨으며 돌아와서 右丞旨를 除授하였다가 갑자기 密直司의 副使와 文翰學士를 拜命하였으며 1280년에 다시 왕을 읍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왕은 公이 文武의 才能을 兼全하였으므로 上將軍을 除授하였으며 또 원에서 昭勇大將軍 官軍萬戶를 宣授하고 虎頭金牌와 印信을 授與하였다.

1281년에 右軍萬戶로 日本을 征伐할 때 軍中에 疫病이 번져 서로 救恤할 수 없었는데 公의 努力으로 士卒을 보호하여 많이 救出되었고 또 태풍으로 인하여 戰艦이 大破하고 顚覆되어 군인과 물자가 大洋中에 湮沒하고 漂流하는것을 公이 수습에 나서 救命된자 또한 400여인이었으므로 士卒들이 더욱 신뢰하여 복종하였다. 귀환하여 匡靖大夫, 版圖司直, 監察使, 學士承旨를 拜授 하였고 1284년에 東南都兵馬使로써 出戰하였는데 갑자기 知貢擧의 功勞로써 돌아와 入相하니 知僉議府事가 되고 민간의 고통을 陳奏하니 王이 嘉納하여 寶文署太學士 世子貳傅를 加官하였고 소중히 여겼다. 이 때 權豪가 많이 權勢에 많이 의지하고 있어 백성들이 견딜 수 없으므로 公께서 陳奏하여 王이 鎭撫하였다.

일찍이 사소한 병을 얻어 1290년 3월23일에 卒하시니 臨終하심에 미리 日時를 아시고 뒷일을 부탁하시는데 顔色이 鮮潔하시었다. 卒하시니 享年이 63세 이시었다.

公은 人品이 莊嚴重厚하시어 보기에 謹嚴하여 접근하기 어려울것 같았으나 그 성품이 柔順하여 평생에 한사람도 때린일이 없었으며 무릇 政事를 13년간 잡으셨으며 또 考試官으로써 두 번 科擧를 管掌하시어 선발하신 인사들이 모두 당세의 俊傑이었고 公의 德은 淸芬하시니 애석하다 이미 이 賢人이 나서 무릇 사람들을 만났는바 그 가운데 장덕현사호 장득구의 딸에게 初娶하여 1남2녀를 낳아 아들은 深이니 지금 左中禁指諭文이 되었으며 장녀는 郎將 陳錫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將軍 尹吉孫에게 출가 하였으며 贊成事 金璉의 딸에게 再娶하여 1남 珂(改 流)를 낳으니 지금 錄事가 되었으며 後娶는 판합문사 李信孫의 딸이다.



고려사절요 제18권
원종 순효대왕 1(元宗順孝大王一) 갑자 5년(1264),

○ 김주정(金周鼎) 등 25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고려사절요 제19권
충렬왕 (忠烈王) 병자 2년(1276),
○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김주정(金周鼎)이 상서하여 안렴사ㆍ수령들의 근면하고 태만함과, 공부(貢賦)의 경중(輕重)이 일정치 않은 것과 향리로 세력에 붙어서 부역을 피하는 일들을 논하며, 조사 처리하기를 청하여 왕이 채택하였는데, 좌우의 저지로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6월 김주정(金周鼎)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로 삼았다.
주정이 글을 올려 안렴사(按廉使)와 수령들의 근무상황, 공납과 과세가 균등하지 못한 것, 지방 아전들이 세력 있는 사람에게 붙어서 부역을 기피하는 것 등의 사정을 논평하고, 이를 철저히 규명할 것을 건의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측근자들의 반대로 마침내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동사강목 제12상 병자 고려 충렬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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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0권
충렬왕 (忠烈王) 무인 4년(1278),
왕이 김주정(金周鼎)ㆍ장순룡(張舜龍)을 서해도에, 조인규(趙仁規)ㆍ인후(印侯)를 경상도에, 김천고(金天固)를 전라도에 보내어 이르기를, “모든 군사가 돌아갈 때에, 부모가 허락하여 출가한 부인 외에는 모두 함께 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 천고를 위촉하여 내시(內侍)로 삼으니, 통역원으로서 내시가 된 것은 천고에서 시작되었다.

왕이 원 나라에 입조할 때에, 김주정(金周鼎)ㆍ박구(朴球)ㆍ염승익(廉承益)이 여러 번 그(이분희, 이습)의 단점을 말하고 중랑장 최심(崔深)이 이를 증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주정 등이 내관들의 말을 듣고 왕에게 풍간(諷諫)하니, 왕이 방경을 불러 은밀히 의논하고 드디어 두 사람을 귀양보냈던 것이다.

○ 새로 필도치(必?赤)를 두어 박항ㆍ김주정ㆍ염승익ㆍ이지저(李之?) 등을 이에 임명하고, 또 내관 정승오(鄭承伍) 등 5명을 신문색(申聞色)으로 삼았다. 옛 제도에는 모든 나라 일을 재신과 추신이 회의한 다음 승선(承宣)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여 왕의 지시를 받들어 실시하였는데, 주정이 건의하기를, “지금 재신과 추신의 수가 늘어서 정사를 의논하는 데 적합하지 않으니, 따로 필도치를 두어 기밀의 정무를 맡겨야 하겠으며, 또 내시들에게 모두 일을 아뢰게 할 수 없으니, 다시 적임자를 택하여 신문색을 삼고, 그 나머지는 폐하소서." 하고, 승익과 지저를 시켜 왕께 풍간하여서 이 법을 만든 것이다. 이로부터 항 등이 항상 궁중에 모여서 기밀의 정무를 처결하니, 당시에 이것을 '별청재추(別廳宰樞)'라 하였는데, 조종조의 옛 제도가 아니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불평하였다.

김주정이 생각하기를 "해는 옛날에 내시가 되었으니 전청에 대하여 반드시 출납을 억제하여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자정과 득규가 내료의 우두머리가 되면 여러 내시들의 구전하는 폐해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왕께 청하여 시행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구전이 더욱 늘고 전청이 더욱 많아져서, 내료들이 다투어 관례를 들어 청구하니, 각 관청의 별좌(別坐)가 이를 금하지 못하였다.


동사강목 제12상 무인년 충렬왕 4년
추7월 원에서 달로화적(達魯花赤)과 왕경 유진군(王京留鎭軍)ㆍ합포 진수군(合浦鎭戍軍)ㆍ서해 둔전군(西海屯田軍) 등을 철수하였다.
왕이 올 때에 김주정(金周鼎)을 행종도감사(行從都監使)로 삼았다. 주정은 본국의 달로화적, 왕경 유수군, 합포 진수군, 황주(黃州)ㆍ봉주(鳳州)ㆍ염주(鹽州)ㆍ백주(白州)의 둔전군은 그들에 대한 경비 조달이 과중하여 백성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과 김방경은 나라에 큰 공로가 있는데도 무고에 의하여 멀리 유배되었다는 것을 황제에게 아뢰었고, 왕도 원나라에 들어가서 하나하나 말하였다.

○ 김주정(金周鼎) 등을 여러 도(道)에 나누어 파견하여 〈원군(元軍) 철수에 따른〉 인물(人物) 문제를 심사하게 하였다.

이때 원나라에서 와서 주둔했던 군대가 모두 철수하게 되었는데, 왕이 그들이 양민을 강제로 끌고 갈까 염려하여 황제에게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곧 김주정ㆍ장순룡(張舜龍)을 서해도(西海道)에, 조인규(趙仁規)ㆍ인후(印侯)를 전라도에 파견하여 명을 내리기를,
“제군(諸軍)이 귀환하는 데 있어서 부모의 허락을 받고 출가하여 정식으로 아내가 된 자 이외는 일체 함께 데리고 가지 못한다.” 하였다.

동 12월 다시 김방경을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임명하고, 홍다구의 당파를 차등을 두어 귀양보냈다. 당초에 이분희(李汾禧) 형제가 전왕 때부터 오랫동안 사랑받는 신하로 궁중에서 권세를 부렸었는데, 김방경이 문초를 당할 때에 분희는 몰래 다구와 왕래하였고 이습(李?)도 ‘방경을 다구에게 맡기라.’고 왕에게 권하였다. 이때에 김주정(金周鼎)이 내관 박구(朴球)ㆍ염승익(廉承益)을 통하여 왕에게 비밀리에 방경을 불러서 상의하게 하도록 말하여 이날 밤으로 분희를 백령도(白翎島)에, 습을 조홀도(祖忽島) (지금 안산군(安山郡) 서쪽 15리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남양(南陽)에 속하였다) 에 유배하고 그들의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얼마 후에 사람을보내어 모두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이때에 다구의 당인 손세정(孫世貞)ㆍ장기(張起)ㆍ지득룡(池得龍)ㆍ유종(柳宗) 등 16인의 죄를 심사하여 모두 섬에 유배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0권
충렬왕 (忠烈王) 경진 6년(1280),

○ 밀직부사 김주정(金周鼎)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왕이 원나라 황제에게 이르기를) 소방의 군사와 백성들은 과거에 진도ㆍ탐라ㆍ일본을 치는 싸움에서 여러 번 전공(戰功)이 있었으나 아직도 조정의 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지난번의 공을 추가로 등록하여 김방경을 원수부 구당(勾當)에 참여하게 하며, 박지량(朴之亮) 등 10명을 총관(摠管)으로, 조변(趙?) 등 10명을 천호(千戶)로, 김천록(金天祿) 등 20명을 총파(摠把)로 임명하고, 또 박구(朴球)와 김주정(金周鼎)에게 호두패(虎頭牌)를 하사하여 앞으로의 충성을 권장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 원 나라에서 장헌(張獻)을 보내어 비단 2만 필을 가지고 와서 쌀을 사서 군량에 충당하게 하였다.
○ 김방경이 다시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간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김방경이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12월에 허공(許珙)을 참문학사(?文學事)로, 홍자번(洪子藩)을 지첨의부사로, 송분(宋?)ㆍ이존비(李尊庇)를 지밀직사사로, 박구ㆍ김주정을 동지밀직사사로, 김백균(金伯均)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조인규와 인후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중서좌승상 행중서성사(開府儀同三司中書左丞相行中書省事)로 삼고 인장을 하사하였다. 또 김방경을 관령 고려군 도원수(管領高麗軍都元帥)로, 박구ㆍ김주정을 소용대장군 좌우부도통(昭勇大將軍左右副都統)으로 삼고 모두 호두금패인(虎頭金牌印)을 하사하였으며, 조인규를 선무장군 왕경단사관 겸 탈탈화손(宣武將軍王京斷事官兼脫脫禾孫)으로 삼고 금패인을 하사하였고, 박지량 등 10명을 무덕강군 관군천호(武德將軍管軍千戶)로 삼고, 금패인을 하사하였으며, 조변 등 10명을 소신교위 관군총파(昭信校尉管軍摠把)로 삼고 은패인을 하사하였고, 김중성(金仲成) 등 20명을 충현교위관군총파(忠顯校尉管軍摠把)로 삼았다.


동사강목 제12상 경진년 충렬왕 6년
12월 그리하여 왕을 개부의동삼사 중서좌승상 행중서성사(開府儀同三司中書左丞相行中書省事)에 책봉하여 인(印)을 주고, 김방경을 관령고려군도원수(管領高麗軍都元帥)에, 박구(朴球)와 김주정(金周鼎)을 대장군 좌우부도통(左右副都統)에 임명하여 모두 호두금패인(虎頭金牌印)을 주고, 조인규(趙仁規)를 왕경단사관 겸탈탈화손(王京斷事官兼脫脫禾孫)-탈탈화손은 달로화적과 같다-으로 삼아 금패인(金牌印)을 주고, 박지량(朴之亮)ㆍ조변(趙?)ㆍ김중성(金仲成) 등 40명에게는 모두 장군ㆍ천호(千戶)ㆍ교위(校慰)의 호를 주고 금패 또는 은패를 내리고 모두 선명부신(宣命符信 임금이 내려준 부절(符節))을 받아서 흔도가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0권
충렬왕 (忠烈王) 계미 9년(1283),
○ 가을 7월에 응방도감(鷹坊都監)을 설치하고, 김주정(金周鼎)을 사(使)로, 원경(元卿)ㆍ박의(朴義)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동사강목 제12하 계미년 충렬왕 9년
추 7월 응방도감(鷹坊都監)을 설치하고 김주정(金周鼎)ㆍ박의(朴義)를 사(使)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20권
충렬왕 (忠烈王) 갑신 10년(1284),
○ 5월에 판밀직(判密直) 김주정(金周鼎)을 진변만호(鎭邊萬戶)로 삼았다.
○ 홍자번(洪子藩)을 도첨의찬성사로, 김주정(金周鼎)을 지도첨의사로 삼았다.


동사강목 제12하 갑신년 충렬왕 10년
12월 홍자번(洪子藩)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김주정(金周鼎)을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21권
충렬왕 (忠烈王) 정해 13년(1289),
○ 여러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얼근하게 되었을 때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김주정(金周鼎)이 술잔을 올리고 물러나려 하니, 공주가 주정을 불러 말하기를, “경의 아들 심(深)이 아내를 구박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게 하였다니, 아비로서 능히 아들을 징계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주정이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호랑이도 새끼는 잡아먹지 않습니다." 하여, 공주가 못마땅하게 여겼다. 주정이 물러나와 턱을 괴고 졸았더니, 공주가 사람을 시켜 책하기를, “경은 취한 것인가, 자는 것인가?" 하니, 주정이 말하기를, “신은 졸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공주가 크게 노하여 즉시 명해서 잡아 끌어내게 하고, 다음날 그 관직을 파면시켰다.

○ 군사의 검열을 마치고 친히 궁문에서 독제(纛祭)를 지내며, 김주정(金周鼎)의 호두패(虎頭牌)를 박지량(朴之亮)에게 주어 좌익만호(左翼萬戶)로 삼고, 박구(朴球)의 호두패를 나유에게 주어 중익부만호(中翼副萬戶)로 삼았다


동사강목 제12하 정해년 충렬왕 13년
6월 지첨의사(知僉議事) 김주정(金周鼎)을 좌천시켜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삼았다.
앞서 주정이 연회에 모셨는데, 말을 하다가 공주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다. 공주는 크게 노하여 그 자리에서 끌어내고 그 관직을 파면했었는데, 이때에 좌천시키고 호두패(虎頭牌)를 빼앗았다.


고려사절요 제21권
충렬왕 (忠烈王) 무자 14년(1288),

봄 정월 ○ 장군 장순룡(張舜龍)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만호(萬戶)ㆍ천호(千戶)ㆍ백호(百戶)에게 금은패(金銀牌)와 쌍주금패(雙珠金牌)를 내렸는데, 넷으로 나누어 박지량(朴之亮)ㆍ나유(羅裕)ㆍ한희유(韓希愈)ㆍ장순룡(張舜龍)에게 주고, 은패(銀牌)는 백호 이하의 군사에게 나누어 주며, 다시 김주정(金周鼎)에게 금패를 내렸다.

고려사절요 제21권
충렬왕 (忠烈王) 경인 16년(1290),
○ 전 지첨의부사(前知僉議府事) 김주정(金周鼎)이 졸하였다. 주정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침착하고 관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경솔하게 아무나 사귀지 않았다. 과거에 부성위(富城尉)에 뽑혀 갔는데, 이때 북방의 적병이 대거 침입하여 나라가 소요하였으나, 주정은 적을 방비하고 백성을 위무하여 위엄과 은혜가 모두 드러났으니, 한 지방이 그를 칭송하였다.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왕경의 유수군(留戍軍), 합포(合浦)의 진수군(鎭守軍), 둔전군 등을 파한 것이라든지, 김방경(金方慶)의 사면을 청한 것은 모두가 주정의 계책이어서 왕이 더욱 중하게 여겼다. 동정 때에 태풍으로 배가 뒤집혀 관군이 많이 빠져 죽었는데, 주정이 계책을 써서 빠진 자들을 건져 내어, 구제된 자가 매우 많았다.





동사강목 제12하 경인년 충렬왕 16년
3월 ○ 김주정(金周鼎)이 졸하였다.
주정은 침착하고 무게가 있으며 말이 적고 아무하고나 함부로 사귀지 아니하고 국량과 재능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
충청도(忠淸道) 청주목(淸州牧)
【명환】 고려 이세화(李世華) 간의대부(諫議大夫 문하부(門下府)의 벼슬)로서 이곳에 나와 지켰는데 한가로이 지켰으나 몽고병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김진(金鎭) 목의 부사(副使)가 되었다. 유신(柳伸) 기거사인(起居舍人 문하부의 벼슬)을 거쳐 외직으로 목사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김주정(金周鼎) 목사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忠淸道) 서산군(瑞山郡)
【명환】 신라 최치원(崔致遠) 진성왕(眞聖王) 때에 태수(太守)가 되어 왕이 불러 당 나라에 가는 하정사(賀正使)로 삼았으나, 도적들이 한창 출몰하고 길이 막혀 가지 않았다. 고려 김주정(金周鼎) 음관(蔭官)으로 등용되었다. 당시 몽고 군사가 많이 침범해 왔었는데 조치를 적당히 하여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나타나 온 고을에서 그를 칭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
【사묘】무등산 신사(無等山神祠)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신라 때는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고려 때는 국제(國祭)를 올렸다. 성황신(城隍神)인 동정원수(東征元帥) 김주정(金周鼎)에게 관청에서 제사를 지낼 때 차례로 신명(神名)을 불러 신의 기이함을 징험했다. 그런데 이 광주의 성황신이 큰기[纛旗]의 방울을 울린 것이 세 번이었기 때문에 조정에 보고하여 작위를 봉했다. 본조에 와서도 춘추로 본읍에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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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쌍계정 [羅州雙溪亭]과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
 
1973년 4월 21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쌍계정은 고려 충렬왕 6년(1280)에 문정공(文靖公) 정가신(鄭可臣, ?~1298)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금성산에서 내려온 계곡이 양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쌍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태어나 금안동에서 자랐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밀직학사, 정당문학 등을 지냈는데 문장에 능하고 청렴결백하였다. 당시 쌍계정은 정가신과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1228~1290),문현공(文顯公)윤보(尹珤 1252~1329)등이 모여 학문과 인격을 닦던 곳이어서 삼현당(三賢堂)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조선 세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 정서(鄭鋤), 신숙주(申叔舟), 신말주(申末舟), 죽오당(竹梧當), 김건(金鍵), 홍천경(洪千璟) 등 당시 대표적인 학자들의 학문 연구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쌍계정은 규약을 정하여 미풍양속을 지키도록 행하는 계회(契會)와 시회(詩會)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금안동은 원래 정가신이 이 고을에 들어오면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한다. 금안동은 12개 동네로 구성된 호남의 대표적 양반 마을이었다. 금안동은 쌍계정을 중심으로 한 대동계가 지금도 시행되고 있으며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있어 공동체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도 정가신의 후손 나주정씨(羅州鄭氏), 정서의 후손 하동정씨(河東鄭氏), 김건의 후손 서흥김씨(瑞興金氏), 홍천경의 후손 풍산홍씨(豊山洪氏) 등 4개 성씨가 대동계를 하고 있다. 근래에는 이 사성문중(四姓門中)에서 쌍계정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1957년에는 이들이 뜻을 합하여 ‘사성강당(四姓講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오늘날도 여름이면 서당을 열고 음력 4월 20일에는 계원들이 모여 선행한 사람을 가려서 상을 준다.

건물 형식은 방이 없는 대청형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1단의 낮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웠으며 포작(包作)이나 주두(柱頭) 없이 보와 장혀 도리로 짜맞추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사방이 터져 있는데 주변에 노거수가 우거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건물이 처음 지어진 때는 1280년이나, 이후 중수하여 처음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건물 안에는 한석봉이 쓴 쌍계정 현판 2개와 쌍계정 중수기, 정가신, 정서, 홍천경이 지은 시가 걸려 있다. 이 쌍계정의 대들보 위에는 창고가 있는데 금안동의 향약이라고 할 수 있는 필사본 서책들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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