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자료

Re..바른 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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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7-11-12 09:44 조회1,7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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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학강좌에 잇는 글 중 일부를 옮깁니다.


憲康王 第3子 說
이 설은 1592년 임진난 以前에 草澗 權文海(1534-1591)가 編著한 "大東韻府群玉"과
1600년 중반에 松窓 趙從耘(1607-1683)이 編著한 "氏族源流"에는 없었던 說인데
1664년경의 필사본 족첩 "平章洞世乘"에 시조공을 <憲康王 第3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憲康王第三子也出作庶人卜居于光山北佛臺山下及新羅王歸順於王太祖= =
嘉之因以光山爲食邑封于光山府院君"
헌강왕3자로 (왕실에서 나와)凡民이되어 광산북쪽의 불대산 아래에 살곳을
정했는데 이때 신라왕(경순왕)이 귀순하니 (고려)王태조가 기뻐서 광산을
식읍으로 주고 광산부원군을 봉하였다.


族牒에 시조공의 신위를 <헌강와 제3자>라고 기록한 사람은 사서를 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 족첩에 기록한 "광산현제영시서"와 "충숙공 김심묘지명"을 도외시하고
사실에 없는 기록자 개인의 생각을 기록했으니 <삼국사기> 권11 진성왕 9년 10월조와
東史會綱 및 최치원의 納旌節表에 의하면 헌강왕에게는 庶子 嶢(후에 孝恭王)밖에 없었으니
崔致遠문집 제2권 납정절표에 "헌강왕이 887년 7월 5일에 갑자기 세상을 버렸는데
아들 嶢는 낳은지 돐도 안되었다"고 하였으니 헌강왕의 유일자 요(효공왕)는
886년 7월 5일 이후 생임을 알 수 있으며 황대전고공이 서술한 "광산현 제영시서"에서
시조공 휘 흥광의 손자인 3세조 휘 길 때에 신라왕 김부(경순왕)가 왕태조에 귀순(來臣) 했으며
휘 길께서 왕태조를 도와 큰공을 세워 그 상으로 삼중대광을 제수하였고
(개국)공신으로 되었다고 했으며 고려사에 의하면 王室宗姓이 아닌 異姓에게는 封君制가
고려말 충렬왕31년(1305)에 처음 시행되었는데 사서에 어두운 기록자는 고려태조가 시조공에게
"광산부원군"을 封했다고 기록하여 이 기록에 의해 "光山府院君之壇"이라는 단비를
세우기도하였습니다.(훗날 그릇됨을 알고 埋安함)

1747년의 丁卯大譜의 시조공 脚註에
'舊譜諸本云 惑云憲康王第3子而 東史會綱及 崔致遠納旌節表云 憲康有一子嶢' 라 하였고
1782년의 壬寅大譜와 1876년의 丙子大譜에도 '新羅王子를 惑은 憲康王 第3子라 한다'고 하였으며

대제학을 지낸 文獻公(휘 永壽 1829-1889)이 金琦鉉의 묘표를 撰하면서
"- - - 金公諱琦鉉字致獻系出新羅憲康王第三子 - - - " 이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런 그릇된 기록들을 근거로 하여 "동국만성보"와 "증보문헌비고" 및
1931년에 간행된 "조선씨족통보"등에 시조공을 "헌강왕 제3자" 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神武王 第3子 說
이 설은 1957년의 "한성대보"와 1991년의 "광산김씨사" 및 최근에 간행한
"알기쉬운광산김씨약사"의 왕자공 신위검토 과정에서 깊이있게 고찰하는 가운데
신무왕 제삼자 설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신무왕능과 문성왕능,
그리고 英光, 興光, 益光 3兄弟분 묘에서 誌石이 나오거나 이에 버금가는
고증자료가 없으므로 시조공 흥광의 신위는 왕자공으로 하여 후일로 미룬다"고
하였던 것이나

"광산김씨사연구위원회"에서는 신라시대에는 墓誌문화가 없었으므로
시조공의 신위를 앞으로 출현될 지석에 기대한다는 것과 신라당대의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세분왕자 지석에 버금가는 고증자료를 운위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주장으로 여겨

가장 중요한 시조공의 신위를 일천년간 존속한 신라국의 왕자라고 막연하게 추상명사로
기록하는 것은 위원회가 연구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판단, 아래에 설명하는 새로 밝혀진
여러 자료에 의하여 시조왕자공은 신무왕 제3자 라는 사실을 밝혀냈던 것입니다.

그 자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관련자료를 찾아서

(1) 동원 씨족보의 검토
신라계 김씨의 분관세계를 종합적으로 기록한 '계림대보'나, '숭혜전지' '김씨사' '신라 범김 씨사' 및
경주김씨보 등에 등재된 신라김씨 선원세계에 의하면 신무왕계가 정리되어 있는데
신무왕에게 4子가 있었다는데 대하여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위 자료의 김흥광 각주에는 '광산김씨 선계'라는 기록 외에 '흥광 9세손 광존 광주김씨선계'라는
기록이 따로 추가되어 있고 '신라김씨동원분관록'에도 따로 나타나 있음에 주목하게 되거니와
이는 乙亥政變(李資義亂)으로 김약온 김의원 형제분이 光陽貫籍으로 이적되었다가
김광존시대에 와서야 광주관적을 다시 취득하게 됨으로써 이를 따로 구분하여 기록하게 된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위의 기록 외에 계림대보·경주김씨보·영산김씨보 등에
「神武王避金明之亂 往依靑海鎭時( 率妻子而歸時) 留一子則興光」
- - - 때에 아들 한분을 남겨두니 즉 흥광이다.'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기록이 전하여 지고 있음을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神武王 3子 說'이나 '留一子 說' 등은 광산김문에서는
역대 수보과정에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원 타 씨족보에서는 꾸준히 이를
전하여 주고 있는데, 그 始源은 알 수 없으나 1747년에 간행된 정묘대보의 왕자공 각주에서부터
경주김씨족보를 인용하고 있는바 慶州金譜云 神武王子未知何據 今依諸本書 依新羅王子
<정묘대보 王子公脚註> 경주김씨보는 始刊譜가 1685년이라 하였으니 그 이상은 더 소급하여
추적하기 어려우나 추정컨대 삼국사기의 경순왕 즉위 조에 그 세계를 "문성왕의 裔孫"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씨사의 '신라김씨선원세계'와 경주김씨보 등에 문성왕에서
경순왕까지의 세계가 완비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삼국사기의 편찬 과정에서
그 후손인 김부식 등에 의하여 경순왕의 선원계보도는 따로 작성되었을 것이고
이후 경주와 開京 등지에서 그 후손들에 의해 개수되면서 꾸준히 이어져 왔을 것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숭혜전지나 경주김씨족보 등의 기록은 비록 후대에 續修刊行되었다 하더라도
그 근원을 추구하면 그만큼 신빙성을 무시하기 어려운 자료들이라 할 것입니다.


(2) 대동지지의 검토
우선 대동지지의 내용을 검토하기에 앞서 그 사료적 가치를 살펴보면「대동여도」 및「대동지지」는 불과 130여 년 전인 1861년과 1864년에 지리학자 김정호에 의해 완성된 것이지만 이에 앞서 지리서가 편찬된 문헌은 1145년 김부식의「삼국사기 지리지」1454년 정인지 등의「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 1530년 이행 등의 「동국여지승람」 1770년 홍봉한 등의「동국문헌비고 여지고」등이 있는데 모두 관찬사업으로 펴낸 문헌들이었으며 1976년에 대동지지의 간행에 즈음하여 이병도 박사가 쓴 '대동지지 해제'에 의하면 "대동지지는 앞에 열거된 모든 '지리지'를 포함하여 각 주, 현, 읍지 기타 내외서적 등을 광범위하게 섭렵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일찍이 자신(이병도)이 삼한문제를 다룰 때에 삼한 여러 소국의 위치를 비정함에 있어 앞의 문헌에서는 풀지 못하던 옛지명을 대동지지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 사료적 비중을 가늠할 수 있거니와 오늘날 학계에서도 여느 지리서보다도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편술연대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여 그 내용 자체를 경시할 수 만은 없다 할 것입니다.
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平章洞' '王子臺' '王祖臺' '甄萱臺' 등 후삼국시대의 고적이 뚜렷이 표시되어 있고, 大東地志의 光州「山水」項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으니

平章洞 : 「西北 三十里 神武王後孫 居于此 世爲平章 故名」
평장동은 '광주의 서북 삼십리에 있으며, 신무왕 후손이 이곳에 살았는데 대대로 평장사가 됨으로 인하여 얻은 이름이다.'라고 하여 평장동을 아예 신무왕 후손의 세거지로 규정하고 있으며

王子臺 : 「西南 四十五里 新羅王子留陳之所 有築城臺址
○按 新羅神武王 微時避禍往依 淸海鎭大使張保皐 與武州都督金陽
合謀起兵 誅亂反正 此卽 神武王留陳之處」
왕자대는 '광주의 서남 사십오리에 있으며, 신라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성대를 쌓았던 터가 있다. ○살피건대, 신라의 신무왕이 미력한 때 화를 피하여 청해진대사 장보고에게로 가서 의탁하고 무주도독 김양과 더불어 함께 기병을 모의하여 환란을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誅亂反正)하니 여기가 곧 신무왕이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라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대동여지도를 보면 왕자대가 있는 곳은 古邑城이 있던곳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漕運의 舟橋(배다리)지역 이었습니다.
(신무왕은 왕자가 아닌데 왕자대라 함은 다음에 설명함)

甄萱臺 : 「北十五里 甄萱較兵之地」
甄萱臺는 '광주의 북쪽 십오리에 있으며 甄萱이 군사를 겨루던 곳이다.'하여
甄萱의 군대가 전투력을 배양하기 위한 훈련장이 있었던 곳이다 하였으며

王祖臺 : 「西三十里 高麗太祖 留陳之所」
왕조대는 '광주의 서쪽 삼십리로 고려태조가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하였으니 태봉왕 궁예가 왕건을 보내어 錦城(나주) 등 10餘 郡을 공취하였을 때의 왕건의 진지로 여겨집니다.

이상과 같이 大東地志는 후삼국시대를 전후한 시기의 고적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3) 향읍지의 검토
지방 향읍지의 연혁은 중앙정부의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이 각지방의 사정을 상세히 수록치 못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며, 대체로 관찬읍지는 도 단위로 편찬된데 반해 사찬읍지는 목·부·군·현 등의 지역단위로 그 지역 거주의 사람과 또는 그 지역 수령이 스스로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는데 전라도 읍지는 56개 읍에서 간행된 읍지로서 그 중 사찬지는 불과 18건이고 나머지는 모두 관찬지인데

광주읍지는 숙종 25년(1699)에 편찬한 읍지를 개수하여 1792년경에 편찬된 광주목지 및 1871년과 1879년에 개수된 호남읍지 또 1895년에 종합편찬된 호남읍지 그리고 1899년의 광주읍지의 4종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1871년에 편찬된 호남읍지의 광주편의 '고적' 항에 의하면,

王子臺 :「在 州西四十里 三國時 王子留陳之所 尙有築城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0리에 있으며,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아직도 성대를 쌓아둔 터가 있다.'하였고,

平章洞 : 「在 州北四十里 新羅王子金興光 知國將亂出爲庶人 卜居于此 子孫有八代平章事 因以爲號 有遺墟碑金鎭商撰陰記」
평장동은 '광주의 북쪽 40리에 있으며, 신라왕자 김흥광이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지하고 나와서 서인이 되어 이곳에 터를 잡고 사셨는데 자손에서 8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 동호를 삼았으며, 유허지에 비가 있으니 김진상이 음기를 지었다.'하였으며,

王祖臺·甄萱臺 등도 기록되어 있는데 앞의 '대동지지'의 내용과 같았으며

또 1899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광주읍지'는 숙종 25년과 정조·순조 연간에 편찬되었던 舊志(광주목지)에 의거 改修되었다 하는데 여기에도

王子臺 :「在 州西四十里 三國時 王子 留陳之所 尙有築城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사십리에 있으며,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아직도 성대를 쌓았던 터가 있다.'하였고,

平章洞 :"在 州北四十里 新羅王子金興光 知國將亂出爲庶人 卜居于此 子孫有 八代平章事因以爲號洞 有安心寺 引月庵 棗溪亭 觀德亭 講禮軒 冠帶亭 今皆廢遺趾尙在"
평장동은 '광주의 북쪽 40리에 있으며, 신라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예지하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사셨다. 자손에서 팔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서 얻은 동호이다. 안심사 인월암 조계정 관덕정 강례헌 관대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허가 되어 그 유지만 남아있다.'하였고, 역시 왕조대·견훤대 등도 기록되어 있으며

與地圖書는 영조조의 후반기에 여지승람(최초본 : 1481, 증수본 : 1530)의 증보 편찬을 목적으로 전국의 각 관읍에서 편집하여 상송한 읍지를 종합 편성(결책)한 것으로, 여지승람의 권략을 개수 보완키 위한 것이었으며, 특히 각 관읍에서 상송한 원본인 채로 현재에 전하는 유일본인 점에서도 귀중한 문헌인데. 이 여지도서의 편성시기를 가늠하여 보면,

㉠영조 33년(1757)에 각도 읍지의 상송을 명하였고, ㉡여기에는 각읍지의 호구·전결·부세관계의 장적은 거의 「기묘(1759) 장적」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편성일자가 명기된 권2 가평읍지 말미에 「건융이십오년(1769) 십월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전국에서 일제히 편집 상송된 것으로, 앞에서 살핀 대동지지 (1864)와 호남읍지(1871)보다 100여 년이 앞서있으며, 또 이 여지도서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최석우 신부)가 소장하고 있던 전55권으로 결책된 전질 중에 일부 누락된 읍지를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향읍지에서 같은 시기의 것을 보완하여 1973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영인본으로 간행한 것인데 이 '여지도서'의 광주목 '고적'조에 의하면,

王子臺 :「在州西四十五里 大江上 俗傳 三國時王子留陳地所 尙有 築城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5리 대강 위에 있으며, 속설에 삼국 때 왕자가 유진하던 곳으로 전하며, 아직도 축성하였던 기지가 있다.'하였고,

平章洞 :「在州北四十里 新羅王子金興光 來居于此 子孫有九代平章 仍以爲號」
평장동은 '광주의 북쪽 40리에 있으며, 신라왕자 김흥광이 이곳에 와서 사셨는데, 자손에서 9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 동호가 되었다.'하였으며, 그리고 王祖臺·甄萱臺 등도 기록되어 있으며

또 여지도서와 호남읍지의 光州牧 '山川'條에는

南平川 :「在州西四十五里 自和順綾州發源 歷南平 至王子臺下 與極樂合」<여지도서>
南平川 : 「在州西四十五里 自和順綾州發源 歷於南平 至王子臺下 合極樂」<호남읍지>
남평천은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화순과 능주에서 발원하여 남평을 지나 왕자대 밑에 이르러 극락강과 합류한다.'라고 하여 왕자대의 위치를 영산강(극락강 또는 칠천이라고도 함)과 남평천(지석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위쪽 大江 上에 있음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습니다.

(4) 增補文獻備考의 記錄
'증보문헌비고'는 우리나라 상고 때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문물 제도를 분류정리한 책으로 처음 1770년(영조 46년)에 洪鳳漢 등이 왕명에 의해 13考로 분류하여 100권으로 편찬하고 《東國文獻備考》라 하니 이것이 제1차 편찬이며, 1782년(정조 6년)에 정조 임금이 李萬運 등에게 보완을 명하여 9년의 세월을 걸려 13考 중의 오류를 고치고 빠진 것을 보완하였으며 새로 7考를 추가하여 146권으로 편성하고 《增補 東國文獻備考》라 하니 이것이 제2차 편찬이었으며 100여 년이 지난 고종 光武年間에 제3차 보편을 하게 되었는데 1903년 撰集廳을 설치하고 朴容大 등 30여인의 문사에게 보수를 명하여 5년에 걸쳐 '增補 東國文獻備考'의 20考를 16考로 조정하여 250권으로 편성하고 1908년에 간행하니 이를 《增補文獻備考》라 하는데 여기에도,

王子臺 :「在西四十五里 俗傳 三國時 王子留陳地所」(『增補文獻備考』卷22, 與地考, 山川條, 光州 項)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속설에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이라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왕조대·견훤대 등은 기록되지 않았음에도 왕자대만이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 설명한바와 같이 왕자대는 대동지지와 향지인 호남읍지, 광주읍지, 여지도서, 그리고 문헌비고 등에 모두 실려 있고 대동여지도에도 그 위치를 뚜렷이 표시하고 있는데 이 遺址는 필시 신라왕자 김흥광과 관련이 있음이 확실하니 여러자료에서 '新羅王子 留陳地所'라 하였고, 안설에서는 '神武王留陳之處'라 하였으며, 사료에서는 '三國時王子留陳地所'라 하여 그 기록들에 약간 차이가 있는 바 '신무왕의 유진지처'라면, 신무왕은 왕자가 아니었으니 '왕자대'라는 호칭과는 맞지 않으며, 후삼국 때 왕자가 머물던 곳이라면 김흥광이 머물던 곳임이 틀림없고 '왕자대'라는 호칭도 이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 맞으니 이곳은 앞서 김우징(후에 신무왕)의 군대가 838년 12월에 金敏周의 군대를 격파한 철야현(남평)과 가까운 곳으로 金祐徵과 禮徵, 良順 등은 여기에 留陳하여 838년 12월부터 윤달을 포함하여 다음해 4월에 즉위하기 까지 머물렀던 곳이니 이는 위에든 사료에서
"왕자대는 신무왕이 장보고, 김양과 더불어 거사를 꾀하여 환란을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誅亂反正)하니 여기가 곧 신무왕이 유진하던 곳이다"라고 하였습니다.

2. 왕자공의 행적추구

앞에서 살핀바와 같이 이제까지 검토된 여러 자료 즉
a, 사서에 나타나는 신무왕의 反正 수행과정,
b, 대동지지, 향읍지, 문헌비고 등에 기록된 왕자대의 내력과 평장동의 유래,
c, 동원 타 씨족보에 기록된 신무왕의 자손 록과, 제3자 김흥광의 기록,
d, 김우징의 청해진 피난 때 率妻子 설과, 돌아올 때의 留一子 興光 설 등은

왕자공의 신위가 가리어짐으로 해서 광산김문에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흥광이 신무왕자임을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역력히 그 자료들은 이를 제시하여 주고 있는 것이며 다만 이러한 자료들이 조선조 후기에 간행되었음을 들어 부정적으로 보는 일가들도 있으나 고문서라 할지라도 신라시대에 작성된 일차적인 사료가 아닌 바에야 비록 고려조 후기나 조선조 전기에 편술된 고서라 할지라도 어쨌든 재차 삼차 개수되었을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며 근대에 간행된 문헌이라 할지라도 고대에 관한 기록들은 그 앞의 고문헌이 오랜 세월에 좀 벌레의 두식(竇蝕) 등으로 훼손이 심하여지면 누차에 거쳐 개수 편찬하면서 보존 유지되어져 왔을 것이나, 다만 수차의 개수과정에서 자획의 증손 오식 등 오류도 있을 수 있고 특히 가문에 관한 기록들은 아전인수 식의 첨삭도 배제할 수는 없다하겠으나 앞에 제시된 光山金門과는 상관없는 地志 鄕邑誌 또는 他 家門의 기록으로 傳來되었다는 사실에 그 意義와 客觀性을 부여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살핀 자료에 따라 왕자공의 행적을 추구하여 보면 시조 왕자공이 은거의 길을 택하게 되니 필경은 무주도독으로 하여금 왕자 흥광이 원하는 곳에서 편히 살 수있도록 뒷받침하라는 어명이 있었을 것이며, 왕자공이 서일동을 은거지로 택하매 왕실에서는 서일동을 택거지(賜牌基地)로 하사하고 왕자대 일대를 祿邑(혹은 食邑) 또는 別庄으로 김흥광에게 賜給하였을 것이며, 도독부에서는 생활여건을 제공하여 주게 되었을 것이니 이는 문성왕의 뜻이기도 하지만, 그 어머니인 定宗太后의 성화가 더욱 크게 작용하였을 것인즉 평장동유허서에
a「…平章一洞寸土尺地 莫非吾先祖 世傳之器物也…」
b「…花巖之南 武珍之西 小溪之東 有小樓三間 吾先祖講禮之所也 其上有冠帶亭 乃先祖出 入休息之處也…」
즉 a의 "평장동 한 마을은 한낱 비좁은 땅 한 톨이라 할지라도 우리 선조께서 기량을 닦으시든 '세전지물'이 아닌 것이 없다."한 것은 서일동이 '사패지지'임을 시사하여주고 있거니와 또한 b의 "화암(평장동 소재)의 남쪽이요, 무진(광주)의 서쪽, 작은 계곡(시내) 동녘에 삼간 누각이 있으니 우리 선조께서 예학을 강론하든 곳이요, 그 위 관대정은 출입할 때 쉬든 곳이다." 한 것은 아마도 왕자대와는 멀지 않은 거리에 소재한 듯하니 왕자대 일대가 왕자공의 庄田으로 관리되고 있었음을 추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왕자공이 은거의 길을 택한 때를 <遺墟序>의 "引月庵 卽幼少崇文之所也"의 구절로 미루어 보아 청소년기로 추정할 수 있는 바 은거한다하여 단신이 아니라 그 식솔이 청해진 체류 때부터 왕자공을 호위하고 추종하는 추종과 별부 그리고 집사 등 일행이 최소 수십인에 이르는 집합체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왕자공께서 은거하였다하여 왕실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숨어사신 것이 아니고 다만 지방의 산촌에 출거하여 정치 문제에 초연하고 시사에 관여하지 않을 뿐으로 문성왕 17년(855)에 세워진 문성왕의 無垢淨塔願記에 의하면 언제부터인지 확인되지 않으나, 문성왕의 종숙되는 金繼宗을 武州都督府의 長史로 임명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이때 (855년)에 또 문성왕의 측근인 金立之를 秋城(潭陽)郡 太守로 임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필시 왕자공이 서일동에 은거하고 있음으로 해서 이를 측면에서 뒷받침하여 주기 위한 조치였다고 여겼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왕자대는 삼국 때 왕자가 유진하든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 대동지지에서 왕자대는 '신무왕의 유진지처'라 하였으니 이 기록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이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김우징이 838년 12월서부터 다음해 4월에 즉위하기까지 윤달을 포함하여 5개월 이상을 여기에 유진했다가 경주로 떠날 때 그의 제3자 흥광을 청해진에 남겨두게 되니 그 '유진지처'(뒤에 왕자대로 개칭된 곳)의 관리는 왕자공이 맡게 되었을 것이고, 장보고가 피살되고 난 뒤 왕자공이 청해진에서 이 곳으로 임시 옮겨 있으면서 서일동에 터를 잡을 때까지 한 때 머물렀던 곳으로 여겨지며 이후는 서일동 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나, 이곳 '신무왕의 유진지처'는 전술한 바 신라 왕실로부터 김흥광에게 사급되었던 곳으로 이로부터 50여년이 지난 892년을 전후하여 견훤이 무주를 襲取하여 신라를 배반하고 후백제를 자칭하게 되니 왕자공은 신라왕실의 왕자의 신분으로써 신라를 배신한 叛賊 견훤과는 근본적으로 타협이 될 수 없는 처지였기에 부득이 西一洞을 떠나 다시 이곳(신무왕의 留陣之處)으로 移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며, 왕자공의 나이로 미루어 이곳에서 여생을 마친 것으로 보아지니 이러한 연유로 해서 후인들이 이곳을 三國時 王子가 留陣한 곳이기 때문에 왕자대라고 호칭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아 연구위원들이 두차례 답사를 했지만 궂은 일기와 시간이 없어 왕자대를 찾지 못하고 광주에서 만나 함께갔던 일가들(대종중 임원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보겠다고하여 관련자료들을 주고왔으나 그에 관하여는 아직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고려사 열전 이자겸전에 의하면 6세조 휘 정준의 따님 즉 이자겸의 어머니를 通義國大夫人으로 봉작한 기록이 보이는데 通義는 나주의 古號인 점으로 보아 왕자공이 나주에 있는 왕자대에 살았던 연유에 의한 봉작명이 아닌가 추상하였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자대가 있는 지역을 포함하여 나주지역은 후삼국시에 왕건을 매개로 하여 후고구려인 태봉에 귀부했으니 여기에서 나주지역이라함은 나주, 영암, 영광, 함평, 무안, 진도, 완도, 해남, 강진, 장흥 등 전남의 서남해안 지역과 전북의 고창지역을 포함합니다.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에서는 중국측 史書인 "冊府元龜" 卷 972. 外臣部 17, 朝貢 5의 기록에서 3세조 휘 길 선조께서 934년 8월에 고려국의 조공사가 되어 조공선을 이끌고 후당에 가셨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이 때 휘 길 선조께서 이미 宰臣의 지위에 이렀음을 알 수 있으니(史料에 의하면 그 무렵에 주로 廣評省 侍郞이 使臣으로 감) 휘 吉 선조께서는 50세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고되므로 885년경 생으로 추고되며 (통상30년을 1세로 봄) 1세 30년을 적용하면 2세조 휘 軾은 855년경 생이요 시조 왕자공은 825년경 생으로 여겨지고 또 839년 7월 23일에 신무왕이 몽하니 문성왕이 19세로 즉위하였다 했으니 문성왕은 821년 생 이므로 형제의 연령차를 2년으로 하여 생각하면 신무왕의 3자는 825경 생으로 추고되니 이 로 미루어 보아도 광김 시조이신 왕자공은 신무왕 제3자가 분명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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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맨] 신라 49대 헌강왕은 아드님이 없음... (2007-11-04 18:45)
그래서 후사가 없기에 다음 왕은 신라 48대 경문왕의 둘째 아드님이신 황이라는 분이 이어 받으시니

이 분이 50대 정강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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