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德王과 始祖公의 同一諱에 대한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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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6-12-14 21:16 조회1,78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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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德王과 始祖公의 同一諱에 대한 考察
삼국사기 권8의 성덕왕 즉위條에
"聖德王立 諱 興光 本名 隆基 與玄宗 諱同 先天中 改焉"
- 성덕왕이 즉위하였다. 휘는 흥광이니 본래 이름은 융기인데 당 현종과
휘가 같음으로 먼저는 천중으로 했다가 (다시) 고쳤다.- 하였고 또
"大唐 遣使 盧元敏 勅 改王名"(성덕왕 11년(712) 3월조) 즉 -당에서 사신 노원민을
(신라에)파견하여 (성덕)왕의 이름을 바꾸라는 조서를 갖어왔다- 하였으나
三國史記는 성덕왕 改諱 432년후인 고려 仁宗23년(1145) 12월에 김부식(金富軾)등이
所撰한 것으로 고려때 간행본은 이미 없어지고 조선조때에 와서 태조 2-3년(1393-1384)에 진의귀(陳義貴), 김거두(金居斗)가 간행하고 중종7년(1512)에 이계복(李繼福)이 重刊
하였으며 이후 木版 또는 활자로 수차 간행되었고 옥산서원(玉山書院)소장본을 影印한
일본 동경대학 간행본및 光문會 간행본, 조선사학회 간행본등이 일제때 나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當代의 중국사서인 唐書에 성덕왕의 휘를 "至誠"이라 기록한 것으로 보아 712년 8월에
당 태자 "隆基"가 帝位를 이어받게 되니 그 이듬해인 713년 3월에 唐에서 사신 노원민을
신라에 보내 성덕왕의 휘 "隆基"를 改諱 하도록 하니 처음에 "天中으로 개휘 하였다가 "興光"으로 다시 개휘 한 후 다시 "至誠"으로 개휘하였던 것이다.
김부식등이 삼국사기를 찬할때 古記, 遺籍, 혹은 중국의 諸史에서 뽑아 편찬간행 했다고 했는데 唐書에 있는 "至誠"이라는 성덕왕의 세번째 改諱는 보지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당 현종이 712년 8월에 제위에 올랐는데 삼국사기에는 712년 3월에 사신를 보내와
避 帝諱하도록 했다 하였으니 삼국사기 기록은 오류이다.따라서 시조공의 휘 흥광은
성덕왕이 두번째 改諱한 휘이며 성덕왕은 세번째로 다시 개휘하여 "지성"이라 했음이
중국측 사서에서 확인된다. 법흥왕系인 성덕왕의 두번째 휘 흥광을 150여년 후에
元聖王系인 시조공이 습휘(襲諱)하였던 것이니 이와같은 습휘의 전통은 고려조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明宗의 初諱 昕을 忠穆王이 襲諱하여 휘를 昕으로 하기도 하였다.
("文肅公 初諱와 光節公의 同一諱에 對한 小考" 참조
삼국사기 권8의 성덕왕 즉위條에
"聖德王立 諱 興光 本名 隆基 與玄宗 諱同 先天中 改焉"
- 성덕왕이 즉위하였다. 휘는 흥광이니 본래 이름은 융기인데 당 현종과
휘가 같음으로 먼저는 천중으로 했다가 (다시) 고쳤다.- 하였고 또
"大唐 遣使 盧元敏 勅 改王名"(성덕왕 11년(712) 3월조) 즉 -당에서 사신 노원민을
(신라에)파견하여 (성덕)왕의 이름을 바꾸라는 조서를 갖어왔다- 하였으나
三國史記는 성덕왕 改諱 432년후인 고려 仁宗23년(1145) 12월에 김부식(金富軾)등이
所撰한 것으로 고려때 간행본은 이미 없어지고 조선조때에 와서 태조 2-3년(1393-1384)에 진의귀(陳義貴), 김거두(金居斗)가 간행하고 중종7년(1512)에 이계복(李繼福)이 重刊
하였으며 이후 木版 또는 활자로 수차 간행되었고 옥산서원(玉山書院)소장본을 影印한
일본 동경대학 간행본및 光문會 간행본, 조선사학회 간행본등이 일제때 나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當代의 중국사서인 唐書에 성덕왕의 휘를 "至誠"이라 기록한 것으로 보아 712년 8월에
당 태자 "隆基"가 帝位를 이어받게 되니 그 이듬해인 713년 3월에 唐에서 사신 노원민을
신라에 보내 성덕왕의 휘 "隆基"를 改諱 하도록 하니 처음에 "天中으로 개휘 하였다가 "興光"으로 다시 개휘 한 후 다시 "至誠"으로 개휘하였던 것이다.
김부식등이 삼국사기를 찬할때 古記, 遺籍, 혹은 중국의 諸史에서 뽑아 편찬간행 했다고 했는데 唐書에 있는 "至誠"이라는 성덕왕의 세번째 改諱는 보지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당 현종이 712년 8월에 제위에 올랐는데 삼국사기에는 712년 3월에 사신를 보내와
避 帝諱하도록 했다 하였으니 삼국사기 기록은 오류이다.따라서 시조공의 휘 흥광은
성덕왕이 두번째 改諱한 휘이며 성덕왕은 세번째로 다시 개휘하여 "지성"이라 했음이
중국측 사서에서 확인된다. 법흥왕系인 성덕왕의 두번째 휘 흥광을 150여년 후에
元聖王系인 시조공이 습휘(襲諱)하였던 것이니 이와같은 습휘의 전통은 고려조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明宗의 初諱 昕을 忠穆王이 襲諱하여 휘를 昕으로 하기도 하였다.
("文肅公 初諱와 光節公의 同一諱에 對한 小考"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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