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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인물소개 - 휘선, 시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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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창운 작성일10-05-15 23:39 조회1,3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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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운] 인물소개 - 휘선, 시서공 (2006-12-19 10:26)
忠孝의 龜鑑 學者 시서(市西)김선(金璇)선생

提供者 : 15세後孫 昌運
<본 원고는 2004년 나주시지 발간 발간위원에게 보낸 시서공행적을 올리는 기초자료 원고임을 밝힘>

公의 諱는 璇, 자는 而獻 호가 市西居士 또는 之而子, 本貫은 光山이다. 高麗의 巨族으로 平章事가 8代에 이어졌으며 先生은 조선시대(1568 - 1642) 선조1년 - 인조 20년의 학자. 자는 이헌(而獻)이고, 호는市西, 公의 8대조 덕용은 벼슬이 大司憲에 이르러 羅州 교동으로 移住하여 德을 베풀고 學文과 禮를 중히 여기었다. 이로부터 나주를 根據로 名文家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先生의 아버지는 부성으로 부호군을 지냈으며, 여흥 민씨를 부인으로 맞아 公을 두었으니 두 세살 때 이미 成人과 같았다고 한다. 9세 때 어머니 喪을 당하였는데 葬禮를 치름에 儀禮의 따름이 한 치의 빈틈이 없었으며 3년 喪을 치른 뒤 平常時와 같이 食事를 하니 鄕里의 모든 사림이 歎服하였다. 學文과 經典에 精進하여 司馬試에 合格하여 出仕하기 직전 얼마 후에 조광조 등 다섯 賢人 김굉필, 이언적, 이황, 조광조, 정여창 등의 文廟 配享에 관한 上疏文과 五賢 書院의 賜額을 請하는 上疏文을 直接 作成하여 湖南과 羅州 선비들의 代表로 推戴되었으며 그 文章이 公明正大하고 事理에 어긋남이 없었다.

宣祖가 昇遐하고 光海君이 保衛를 이어 暴政이 심하고 이이첨 등 奸臣들의 弄奸이 極에 달하자 홀연히 湖南 儒生들과 上疏하여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 文章은 하늘에 닿고 땅에 서리며 못을 베고 쇠를 자르니 큰 江上과 큰 義理가 天地의 사이에서 없어지지 않으며 또한 胸한 무리의 마음을 깨뜨르기 충분하였기 때문으로 歷史에 길이 남을 만하다.
같은 시대의 학문을 같이 했던 계곡 장유, 석천 임억령, 석촌 임서, 장주 윤휘, 관해 임해와 족조 가암공 등의 當代의 學者, 선비, 官職에 出仕하였던 名流들과 莫逆之交 였으나 벼슬에 貪慾하지 않고?차라리 草家 아래서 머리를 천장에 치는 것이 나으리. 아내 바라보고 아들의 손을 잡고 豊年을 祈願하네? ?적공의 문에 편액이 걸린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소! 차라리 세상을 버리고 나무하고 물고기 잡는 것으로 늙으리라.?하고 읊었다. 문득 興趣가 發하면 鶴衣를 입고, 竹官을 쓰고 超然하게 隱君子나 선비들과 함께 風流를 읊으면서 날 저무는 줄 몰랐다.
수백수의 詩와 文章, 大義에 흐트러짐이 없는 上疏文 등과 書簡文, 名士들과의 對話錄 등을 묶어 「市西遺稿」를 남겼으니 지금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읽혀지면서 지금을 사는 後學들에게 龜鑑이 되고있다.

仁祖反正 以後 公은 벼슬길이 열려 임금으로부터 수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안했고 ?헛된 명예가 지나치게 높으면 위로는 하늘을 속이고 아래로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辭讓하였다. 선생의 절절하고 곧은 志操가 感銘 깊어 임금이 명하여 쌀, 콩, 고기를 하사하니 그 待遇가 남달랐다.

丙子年에 임금이 隱君子를 찾을 때도 고을 사람이 薦擧하여 牧使가 學術에 깊이 두고 고요함을 지키며 자신을 닦는다고 하니 道內 고을 사람이 異義를 提起 하는 사람이 없다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咸平李公 磻溪 後孫의 碑文에서 引用하면 충에 대한 市西의 一面을 짐작할 수 있다.
호란을 맞아 임금의 御駕가 城을 나선다는 消息을 듣고 ?임금이 慾을 당하면 臣下는 죽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咸平 李公 葺(즙) 磻溪 등과 倡義하여 淸州까지 갔으나 뜻을 이무지 못함을 恨歎하였고, 이미 講和條約이 맺어져 世子와 大君이 人質로 간다는 消息을 듣고 북쪽을 바라보면서 痛哭을 하면서 차라리 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 때에 슬프게 歎息하면서 時代를 아파한 作品이 수십여 편 있는데 忠誠으로 忿怒하는 마음이 구절구절마다 깃들여 있다. 이후로 詩와 學文에 精進하고 後學과 子弟들을 가르친 「오락정」에 隱居하였다. 또 일찍이 古今사람들의 이야기와 자취를 蒐集하여 책을 만들어 「草堂 閑覽」이라 이름 붙이니 故人과 親舊가 되려는 뜻을 깃들인 것이다.

「市西遺稿」에서 拔萃한 詩 한 수가 先生의 懇切한 나라 사랑의 忠을 엿보게 한 시 한 수는 선생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병자호란 후 두 왕자가 인질로 끌려감을 비통하여 마지않는 선생의 마음을 읊은 한 구절>

군주 욕을 본지 3개월이 넘었는데
결국 무엇을 이루었는가?
동궁의 두 왕자가
서쪽 길로 함께 떠나는 구나
나라를 연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화 내림이 지금에 왔구나
늘 우리 성상은 마음에 그려 올리며
곧 스스로 삶을 버리고 싶네

市西 影幀이 지금까지 保存되어 전남문화제 자료 제145호로 指定되어 오게 된 事由는 孝에 대한 理解를 높일 수 있다. 公의 둘째 아드님이 지금의 영암군 덕진면 금강리에서 살게 되면서 매일 나주까지 問安 人事를 오게 되므로 그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影幀을 그려 주면서 影幀을 公이라 여기고 問安 人事를 하게 하였다는 行績는 代代로 傳해오고 있다.
羅州에서 우뚝 솟아 全國에 學問, 詩, 忠?孝로 그 이름을 널리 떨친 先生은 1642년 임오년 2월 16일에 오락정에서 生을 마감하니 享年 75세였다. 돌아가신 뒤 谿磵祠 모시니 계곡 장유, 나응서 등과 같이 配享 되었다. 墓所는 안창동 용두 해향지원에 모셔져 後孫들과 後學들의 至極함으로 그 精神을 面面이 이어오고 있으며 영암군 덕진면 금강리에서는 影幀을 모시고 影堂에서 祭祀를 모시고 있다.(완)

- 後 記 -
「市西遺稿」의 不實한 原本을 두 차례에 걸쳐 刊行하여 配付하였으나 어려운 漢文인지라 그 내용을 모르고 있는 後學들이 많았으나 2003년 나주시에서 시장님과 나주시 의회 의원, 관계 공무원, 동국대학교 김종섭 교수의 努力과 뜻있는 분들의 관심으로 先生의 漢文「市西 遺稿」를 한글로 飜譯하여 책을 發刊하니 羅州 市民과 全國의 光金門中後孫과 後學들이 先生의 詩와 學問, 忠,孝에 대한 精神을 오늘에 살려 接近하는 契機가 되리라 여기고, 책이 나오기 까지 많은 勞苦를 아끼지 않으신 여러 關係者님에게 深深한 感謝함을 드린다.

未熟한 글월로 市西의 行績에 累가 되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으로 글월을 올리오니 바로잡을 글귀가 있으면 여러 一家 분들의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e-mail : ki97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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