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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공 휘 양감 사실(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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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8-04-07 13:11 조회2,2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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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공(文安公) 휘(諱) 양감(良鑑)
공(公)의 휘(諱)는 양감(良鑑)이요 시조공(始祖公) 휘(諱) 흥광 興光)의 6世孫으로 시호(諡號)는 문안공(文安公)이며 부(父)는 수사도 문하시랑평장사(守司徒 門下侍郞平章事) 휘(諱) 정준(廷俊)이요 조(祖)는 좌복야 한림학사 평장사(左僕射 翰林學士 平章事) 시호(諡號) 문정공(文貞公) 휘(諱) 책(策)이며 증조(曾祖)는 삼중대광 좌복야 (三重大匡 左僕射) 휘(諱) 준(峻)이요 고조(高祖)는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사공(司空) 휘(諱) 길(吉)이요. 현조(玄祖)는
각간(角干) 휘(諱) 식(軾)이다.

배위(配位)는 증서해군대부인 최씨(贈西海郡大夫人 崔氏)이니 부(父)는 상서우복야 중추원사(尙書右僕射 中樞院使) 연하(延하)이다.

슬하에 3 子 가 있으니 長은 위위소경(衛尉少卿) 휘 의영(義英)이요, 次는 사정공(思靖公) 휘 약온(若溫. 初名 義文)이며, 次는 충정공(忠貞公) 휘 의원(義元)이다.

공(公)이 1051년(文宗 5)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1070년(文宗 24) 정월에 상서우승 좌간의대부(尙書右丞 左諫議大夫)가 되었으며, 동년 7월에 서북로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가 되고 1071년(文宗 25) 정월에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 知御史臺事)가 되었으며 1073년(文宗 27) 8月에 太僕卿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1274년(문종28)에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의 도표(圖表)를 모사(模寫)하여 돌아왔다.

1075년(文宗 29)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1077년(文宗 31)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1078년(文宗 32)에 송(宋)나라 사신(使臣)이 올 때 호부상서(戶部尙書)의 직분(職分)으로 접반사(接伴使)가 되었으며, 1081년(文宗 35) 정월에 참지정사 판병부사겸 서경유수사(參知政事 判尙書兵部事兼 西京留守使)와 주국(柱國)이 되었고, 동년 3월에 권판중추원사(權判中樞院事)가 되었으며, 1083년(文宗 37)정월에 좌복야(左僕射) (*以上 文宗紀)가 되었고, 동년 12월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진주(陳奏)하였으며, 1086년(宣宗 3)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고, 1087년(宣宗 4)) 3월에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진주(陳奏)하였으며, 5월에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요, 7월에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진주(陳奏)하였고, 12월에 수태위(守太尉 *以上 宣宗紀)가 되었으며 1090년(선종 7) 4월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경필(李景必) 등 31人을 선발하였다(選擧志), 누천(累遷)하여 수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守太保 門下侍中 監修國史)에 이르렀다.

公은 전북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화동서원(華東書院)과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숭현사(崇賢祠)배향 되었는바

고창(高敞) 화동서원(華東書院)은 1957년에 유림儒林)의 공의(公議)로 서원(書院)을 창설(創設)하여 문안공(文安公) 휘(諱) 양감良鑑)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후손 전리판서(典理判書) 휘(諱) 인우( 仁雨), 인우(仁雨)의 아들 함종현령(咸從縣令) 휘(諱) 승길(承吉 號 沙隱)과 승길(承吉)의 아들 군기시정(軍器寺正) 휘(諱) 오행 (五行 號 梅隱) 4위(四位)를 매년(每年) 陰 3월 2일 유림(儒林)과 후손(後孫)들이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며

무안(務安) 숭현사(崇賢祠)는 1987년(정묘)에 창건(創建)하여 문안공(文安公) 휘(諱) 양감(良鑑)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낭장공 (郎將公) 휘(諱) 규(珪), 양간공(良簡公 휘(諱) 연(璉), 문숙공(文肅公) 휘(諱) 주정(周鼎), 문정공(文正公) 휘(諱) (台鉉)을 함께 모셔 매년 3월 회일(晦日=그믐)에 유림과 후손들이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한다

<속파한집(續破閑集)>
최자(崔滋)의 속파한집에 이르기를 ‘우리(高麗) 조정에 인문(人文)으로 교화를 이루어 어질고 준건한 사람이 간간히 나타나 풍화(風化)를 도와서 발양하게 하였다. 광종(光宗) 현덕(顯德) 5년에 비로서 과거의 제도를 실시하여 왕융(王融), 조익(趙翼), 서희(徐熙), 김책(金策=文貞公*) 같은 이가 웅재(雄才)였으며 - 중략 -
문종(文宗)시대에는 문물(文物)을 찬란하게 갖추었으니 주도적 인물은 - - - 김양감(金良鑑) 등 이었다.‘ 하였다.
[출전: 동문선(東文選) 84卷]

<사 설재축성회서 (賜 設齋祝聖回書)>
칙서(勅書) 고려국왕 왕휘(文宗)가 김양감등을 시켜 중서성에 이르러 아뢰었던 대상국사, 흥국사, 계성사, 사주의 보조왕사, 항주천축사, 윤주의 금산사등에서 재를 베풀어 성수를 축원한 일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경(文宗)이 황실조정을 향(嚮)해 따르고 불교에 귀의하여 가르침을 숭상하고 본받으려하여 배편으로 공물(貢物)을 바치고 사찰에 나아가 축수(祝壽)드린 일 모두 알고 나니 그대의 충성과 정성스런 노력에 더욱 두터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기에 이 글을 보내어 나의 마음을 마땅히 다 알리고자 합니다. 따뜻한 봄날 경의 평소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글을 보내지만 못다 한 말이 많습니다.<宋 大詔令集 237卷>

勅 權知高麗國王諱 人使金良鑑等至 省所申奏 於大相國寺 興國寺 啓聖寺 泗州普照王寺 杭州天竺寺 設齋祝聖事 具悉 卿嚮順王庭 歸崇像敎 因使航之入貢 卽梵刹以祝延 載惟忠款之勤 彌注眷懷之厚 故慈玆示諭 想宜知悉 春暄卿比平安好 遣書 指不多及.
(宋 大詔令集 237卷. 政事 90. 4裔10. 高麗)

*위 자료는 公이 1073년(문종27)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중국각지의 사찰에서 황제(皇帝)를 위해 축성(祝聖)의 재(齋)를 올린 것을 감사하는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조서(詔書)이다.


<사시 유서 (賜示 諭書)>
칙서 고려국왕 왕휘(文宗)가 김양감 등을 시켜 중서성에 이르러 표문을 올려 의약(醫藥)과 도화공(圖畵工)을 요청한 일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경()이 삼한(高麗)의 땅을 지키면서 중국의 풍속을 본받고자 연이은 글로 주청(奏請)의 뜻을 드러내고 재주있는 인재를 구하려 하기에 관계관을 시켜 더욱 정밀히 가려 뽑게 하였고 특히 간절한 요청에 따라 사사로운 은혜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요청하신 의약과 도화공은 이미 발운사(發運使) 나극(羅極)을 시켜 선발하게 하였고 색장나인(色掌內人)을 보내어 행장(行裝)을 스습하게하여 미리 보내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이 글을 보내어 나의 마음을 마땅히 다 알리고자 합니다.
따뜻한 봄날 경(卿)의 평소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글을 보내지만 못다한 말이 많습니다.(上同)
勅 高麗國王使王徽 人使金良鑑等至 省所上表 乞借醫藥畵塑人事 具室 卿守土三韓 希風中夏 載露連章之奏 欲求衆技之良 已?計臣 卽加精擇 特從勤請 其體恩私 所乞借醫藥畵塑人 已令發運使羅極 選差 逐色人收拾行裝 發遣前去次 故玆示諭 想宜知悉 春暄 卿比平安好 遣書 指不多及. (上?書 同)

<해동역사 (海東繹史)>
1074년에 고려왕이 그의 신하 김양감을 보내어 다녀갔다. 이 때 고려인들이 중국에 왕래하면서 모두 등주(登州= 山東省 蓬萊縣)을 경유해 왔는데 (김양감이) 와서 아뢰기를 “거란과 멀리 하고자하니 길을 바꿔 명주(明州=浙江省 寧波府)를 경유해 예궐(詣闕)할 수 있도록 하여달라” 고 청(請)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郡,縣에서는 고려의 사절을 접대하는 옛 준례(準例)가 없어서 백성들이 자못 괴로워하였다. 이에 조칙을 내려 법식(法式)을 세워 반포하였으며 접대하는데 필히 사사로이 거래할까 염려하여 고려의 사신이 이르는 곳마다 왕래를 금지시켰다. 왕휘(文宗)가 중서성과 추밀원에 선물하는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조칙을 내려 시장에서 교역하여 겸백(?帛)을 사서 보답하게 하였다. 또 표문(表文)을 올려 의약(醫藥)을 구하고 화소공(畵塑工)을 파견하여 고려인들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나증(羅拯)에게 조칙을 내려 고려로 가기를 원하는 자를 모집하도록 하였다.(해동역사 권 12, 세기 12)
熙寧 7年(文宗 28年) 遣其臣金良鑑來往 時高麗人往返 皆自登州 言欲遠契丹 乞改塗由明州詣關 從之 郡縣供頓無舊準 頗擾民 詔立式頒下 費悉官給 又以其不通華言 恐規利者 私與交關 令所至禁止 徽問遺二府甚厚 詔以付市易 務??帛答之 又表求醫藥畵塑之工 以敎國人 詔羅拯募願行者 (海東繹史 卷 12, 世紀 12)
*유서(諭書)에는 나극(羅極)으로, 해동역사에는 나증(羅拯)으로
되어있는바 이는 기록자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공(公)은 1074년(문종 28)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종묘(宗廟)와 태학관(太學館)의 그림을 모사(摹寫)하여 돌아왔는데 이 때 동파 소식(東坡 蘇軾)은 처음 만남임에도 옛 친구와 같이 허심(許心)하여 응상지(凝祥池)에서 전별(餞別)하고 시(詩) 한수룰 공(公)에게 증정(贈呈)하였다.


<유문(遺文)>
세상일이 걱정되니
필경은 어떠한가
부질없이 낙싯대로
창파만 희롱하누나
이제 다시 강남에서
작별을 하게 되니
지는 해에 노젓는
노래 듣기 어려워라
*(東坡 餞別答詩로 보임)
世事悠悠
竟若何
?將漁竹
弄滄波
如今又作
江南別
落日難堪
聽棹歌

병든손이 한적한 절에 오니,
맑은 그늘이 마음껏 시원하네
중을 만나 한마디 말도 없었건만,
바람은 연꽃 향기를 보내오더라
희령갑인(1074년) 어느 날 씀

病客投蕭寺
淸陰滿意諒
逢僧無一語
風送碧荷香
熙寧甲寅 某草
<서찰(書札)> - 아들에게 -
밤사이 집안일을 몰라 궁금하구나
내 오늘 돌아가려 하였더니
이시랑(李侍郞)의 만류로 뜻과 같지 않는 구나
소학사(蘇東坡)와 주고받은 시(詩)가
윗사랑에 있으니 찾아서 보내다오
나머지는 손님이 붐벼서 이만 줄인다.
1076년 5월5일 아비 적음.
*(手札은 外孫인 朴氏家에 있었다 하나 지금은 알 수 없다)
公寄子書曰
不知夜間家中諸?若何
吾今日大擬還歸矣
爲李侍郞所挽未得如意耳
蘇學士唱和詩
在於上廊覓送可也
餘客擾不宜
丙辰 重五日 父 着暑

<소동파 시 (蘇東坡 詩)>
금마에서 오신 손님을 알듯하네,
때로는 벽계방을 꿈꾸었으리
빙설은 세모에 녹아 자자지고,
강위의 안개는 고향을 그리네
말방울소리 한가히 울리고,
서있는 말은 기다리며 주위를 맴돈다
삼한 사신에게 준 ,
새 그림이 낙랑으로 가는 구나
(견 동파후집 3권 차운 장영숙의 응상지 시)

似知金馬客
時夢碧?坊
氷雪消殘臘
煙波寫故鄕
鳴?自容與
立馬久廻翔
乞與三韓使
新圖到樂浪
(見 東坡後集 3卷 次韻 蔣潁叔 凝祥池 詩)


<문성공 안향(유) 시 (文成公 安(珦)裕 詩)>
송학산 아래 있는 공자의 사당은
공께서 갑인년(*1074)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태학관의 도면을 모사하여 돌아와
처음으로 가택 후원에 사당을 짓고
춘추로 제사지내며 추모하던 곳이니
우리나라의 문묘제도(文廟制度)는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公을) 우리나라 성리학의 조사(宗師)라 일컫는다

松嶽山下 孔子影堂
公甲寅使宋
摹畵國子圖而還
始建於家後
以春秋俎豆尊慕之
東國文廟之創自此始
爲東方理學之宗



후세(後世)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유(安裕)가
사당(祠堂)을 배알(拜謁)하고 지은 시(詩)>
곳곳마다 향연(香煙)과 법등(法燈)으로 부처님께 기도요.
퉁소와 피리로 집집마다 치성굿을 하는데
어이하다 몇칸 공자묘(孔子廟)에는
뜨락가득히 봄풀만 우거져 쓸쓸하고나.
<後世 晦軒 安文成公 裕 拜謁 有詩>曰
佛有數間夫子廟
簫管家家盡賽新
惟香燈處處皆祈
滿庭春草寂無人

<동방사문연원록(東方斯文淵源錄) 약초(略抄)>
(원곡 원천석 총단(耘谷 元天錫 總斷), 복애 범세동 편집(伏厓 范世東 編輯)
- 출 화해사전(出 華海師全) -
문안공 김선생의 이름은 양감이요 광주인이다. 운곡 원천석(1330~ ?. 태종의 스승)이 말하기를 ‘기자(箕子)께서 동방으로 오신 후로 홍유후(弘儒候) 설총이 처음 열고 그 뒤에 문헌공 최충이 중흥하여 크게 새로 일으켰고 문안공 김양감 또한 끊어져가는 유학의 계통을 잇도록 인도하여 성현들의 연원을 모신 사당을 수리하고 중국에 들어가 경서와 그 해설서들을 가져와 펴서 우리 동방 후학의 길을 열어준 공이 매우 크며 실천하고 경험한 열매는 마땅히 그 문집에 다 실려 있겠으나 그 문집은 아직 널리 간행하여 펴지 못하였고 또한 설총과 최충이 끼쳐놓은 시문도 대단히 많았겠으나 모두 정중부의 병화에 없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선배들 유문에서 영향을 자세히 얻지 못하였으니 나와 같이 식견이 천박한 사람으로서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정중부가 우리 사문(斯文)에 끼친 해의 혹독함이 어찌도 그리 극심하였던가’ 라고 하였다. 김정(金鼎 光城君)은 복애 범세동(공민왕 때 諫議大夫) 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 내가 이유헌(申得淸)선생님과 나의 선고(英利)에게 들었고 선생과 나의 선고(先考)께서는 간제(簡齋) 신문훤 선생에게 듣고 선생은 운월제 문정 선생에게서 전하여 들으셨다. 그 분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성도(聖道)는 곧 단군이 아들을 조도산(朝塗山)으로 보내면서부터 전하여지기 시작하여 미개함이 바뀌어 크게 밝아지게 되었으나 실은 기자가 터를 열어 도통(道通)을 이어 하(夏)나라의 법을 써서 오륜(五倫)을 밝히고부터 진리를 돈독히 닦아 새운 것이 많았다. 홍유후 설총과 문헌공 최충의 도는 특별히 발췌되어 학문이 뛰어난 이가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 영향은 기자가 남겨놓은 가르침의 영향에서 깨달을 수 있었고 그 도는 경전(經典)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바야흐로 책에 실려 법으로 세워진 바가 크게 정당하였기 때문에 넓혀질 수가 있었다.‘ 고 하였다. 이는 먼저 돌아가신 어진분들이 끼쳐놓은 뜻의 요령과 대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 그것은 김문안선생 양감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서 미묘한 말과 깊은 뜻을 정자(程子)의 문하에서 받았으니 귀로 듣고 직접 배웠다. 그러므로 문안공이 일찍 말씀하되 ’나의 마음이 평소에 지키기를 우리나라 스승이신 설홍유와 최문헌공께서 끼쳐놓은 교훈에서 얻은 것으로 하였는데 이번에 송나라에 들어가 정자의 문하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고 보니 그 해박하면서도 간략하고 미묘하면서도 뜻이 깊었음을 깨달았다‘ 고 하엿다.
金文安先生 名良鑑 光州人 耘谷曰 自箕聖于東 始啓薛弘儒 其後崔文憲中興大創 金文安亦倡係絶 修聖賢淵源之廟 入右中國 輸?經傳旨訣 開我東方後學之功甚大 而踐履之實 宜悉其文其文集 而文集之刊行未爲廣布 亦與弘儒文憲遺韻之廣博 而盡沒於仲夫之火 故先輩不得詳於遺耘韻影響 以余淺薄識見豈能悉耶 仲夫爲斯害之酷何其極歟 金鼎抵范伏厓說曰 噫 吾聞諸師(理猷軒)及先考(名英利) 師及先考聞於簡齋文暄先生 先生文於雲月齋文貞先生 曰我東星道 直自檀君送子朝塗山 得傳發?而大明變夷 則實自箕聖啓基 垂通造詣用夏 修明五常敦守立眞者多 而弘儒文憲之道 特其拔萃問學卓立者不少 然其心得悟 於箕聖之遺風餘韻 其道得廣於經博之東來方 冊載與以大所立之正矣 不越乎遺旨之要領大綱 而金文安則 入使皇宋 微辭奧旨受於程門 耳提面命是* 以文安嘗曰 吾之心悟素守得於東師(弘儒, 文憲)之遺韻 其爲博約微奧 親受於皇宋程門下云*
(見 崔文憲公誕辰千周年紀念 海州崔氏大同譜 文獻集)

*살피건대 위 글 마지막 부분 "문안공께서 宋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정자(程子)의 문하에서 친히 배웠다" 고 한 기록은 후세인의 부회(附會)로 보인다. 원천석과 범세동은 문안공 시대로 부터 300년 이상 후세의 사람들인바 문안공은 1025년경에 출생한 분으로 1032년생인 명도 정이(明道 程顥)와 1033년생인 정이천(程伊川) 보다 7. 8년 선배였고 문안공께서 宋나라에 가셨던 1073년 당시 정명도와 정이천은 40대 초반의 관인으로 정명도는 변방의 외직(外職)에 있었으며 정이천은 경직(京職)에 있었으나 스승인 주돈이(朱敦?)가 이 해에 졸(卒)하여 복상중(服喪中)이었다.

문안공께서 1073년 8월 16일 개경(開京)을 떠나 산동성 등주(登州)를 거쳐 개봉부(開封府)에 이른 다음 대상국사(大相國寺), 흥국사(興國寺), 계성사(啓聖寺), 사주보조왕사(泗州普照王寺), 항주천축사(杭州天竺寺), 윤주금산사(潤州金山寺) 등에서 송(宋)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를 위해 축성(祝聖)의 재(齋=불교식 제사)를 올렸으며 12월에 절강성 항주에 이르러 이 때에 항주통판으로 재직중인 소동파(蘇東坡)를 만나 교유하고 다음 해 정월 황도(皇都)로 가서 27일에 황제를 알현하여 의약 및 화소공(畵塑工)의 지원과 송신사(宋臣使)의 항로변경을 주청하여 허락을 받고 바로 귀국하였으니 <이 때에 程門에서 수업 하였다>함은 사리에 맞지 않는 설이다. 다만 천하를 周遊하면서 性理의 學風을 體得하고 經傳(경전)과 그 해설서를 求得하여 귀국하신 것으로 여긴다.

<가락국태조대왕납능비문 찬자(駕洛國太祖大王納陵碑銘 撰者)>
납능비명의 찬자는 일연국사(一然國師)가 고려충렬왕 7년(1281) <삼국유사>의 <가럭국기(駕洛國記)>에 '文廟朝 大康年間 金官知州事 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라 하였은 즉
'(고려)문종조 대강년간(遼나라 道宗(1075-1084) 年號)에 금관(김해) 지주사(부사)인 文人이 찬 한것을 여기에 초략하여 싣는다' 하였으며 그 후 조선조 성종12년(1481)에 편수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납능비명찬자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내용대로 '고려 문종 때 지주사가 납능비명을 찬하였다' 하였고 문정공 허목(文正公 許穆 1595-1682)이 찬(撰)한 <수로왕납능비음기(首露王納陵碑陰記)>와 (조선)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허적(許積 1610-1680)이 경상도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찬한 <가락태조왕능비음기(駕洛太祖王陵碑陰記)>에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인용한 것 외에 납능비명 찬자에 대한 새로운 기록은 없었으나 <삼국유사>간행의 600년 후인 1884년(고종21)에 허부(許傅)가 찬(撰)한 <김해숭선전신도비문(金海崇先殿神道碑文)>에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있는 납능비명 기록에 아래 내용을 추가하였다.
‘고려문종(1046-1083)때에 수로왕이 등극하던 임인년(壬寅年)을 당하여 지금주사(김해부사) 김양일에게 특명하여 능원을 수축하고 봉사하는 일을 완비하도록 하였으니 사적은 (김)양일이 찬한 비문에 실려있다 비문은 지금에 전해지나 비석은 비에 마멸되었으니 개탄할 일이로다.’
‘.高麗文宗當 首露王御極之舊甲 壬寅特命 知金州事金良鎰 修陵園備因祀 事具載良鎰 所撰碑文 文則尙存 碑則磨汭 可慨也’

허부가 찬한 <김해숭선전신도비문(金海崇善殿神道碑文)>에 기록된 납능비명 찬자(納陵碑銘 撰者)의 이름은 현장 확인 결과 김양일(金良鎰)이 명백하였다. 김해김씨<용산보(龍山譜)>와 김해인 김태희 저(金泰希 敎授著) <가락의 역사와 왕손(駕洛의 歷史와 王孫)>(1993년 진영문화사刊 全9권) 제1권 p206에도 김양일(金良鎰)로 기록되어 있다. 납능비명 찬자 김양일(金良鎰)을 김양감(金良鑑)으로 오기(誤記)한 단초는 김수로왕능 경내에 소재한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에서 홍보용으로 발행한 이종기저(李鍾琦 著)<가락국의 영광(駕洛國의 榮光)>(1987년간 總. 133면) p68에서 비롯되었으니 이 책에 ’원본 <가락국기>도 후손 김양감(金良鑑)이 편찬했음‘이라고 오기했으며 같은책 p110 에 ’나(著者)는 원본<가락국기(駕洛國記)>의 찬자 김양감(撰者 金良鑑)은 수로왕(首露王)의 직손(直孫)일 것이라고 추정(推定)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저자 이종기가 허부(許傅)의 <김해숭선전신도비문(金海崇先殿神道碑文)>을 판독(判讀)할 때 김양일(金良鎰)을 김양감(金良鑑)으로 오판(誤判)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알지 못한 광산김문(光山金門)에서는 여러 파보(派譜)와 1991년 간행한 <광산김씨사>1권에 문안공 휘 양감 선조께서 <가락국태조대왕납능비명(駕洛國太祖大王納陵碑銘)>을 찬(撰)하였다고 주장하며 全文을 등재하는 망단(妄斷)을 하였다.

參考文獻
高麗史, 高麗史節要, 金元義墓誌銘, 金義元墓誌銘, 李정墓誌銘,
吳元卿墓誌銘. 駕洛國太祖大王納陵碑銘, 三國遺事, 海東繹史,
東文選, 光山縣題詠詩序, 光山金氏譜, 海州崔氏大同譜文獻集,
東坡後集, 宋史 大詔令集, 務安鄕校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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