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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 휘 주정 사실(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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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8-04-16 13:19 조회1,6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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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文肅公) 휘 주정( 諱 周鼎 1228~1290)
공(公)의 초휘(初諱)는 지숙(之叔)이요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선수소용대장군(宣授昭勇大將軍), 관군만호(管軍萬戶), 광정대부 지도첨의부사(匡靖大夫 知都僉議府事),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 동수국사(同修國士), 판삼사사(判三司事), 상장군(上將軍)이었다. 1290년 3월 23일 향수(享壽) 63에 졸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숙공(文肅公)이다.
묘(墓)는 경기도(京畿道) 개성시(開城市) 동문(東門) 밖 중서면(中西面) 덕달곡(德達谷) 곤룡(坤龍) 유좌(酉坐)에 있다.

부(父)의 휘(諱)는 경량(鏡亮)이니 조청대부 금오위대장군(朝淸大夫 金吾衛大將軍) 과 조정대부 흥위위대장군(朝靖大夫 興衛尉大將軍)(충숙공묘지)이며 증문하평장사(贈門下平章事)이시다..(문숙공묘지, 문정공묘지)
조(祖)의 휘(諱)는 광세(光世)이니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이며 상서 좌우복야(尙書左右僕射)(문정공묘지,문숙공묘지)와 조의대부 신호위대장군(朝議大夫 神虎衛大將軍)(충숙공묘지)에 증직(贈職)되었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위(位)이니 삼사사(三司使)(문간공묘지)로 상서령(尙書令)(문숙공묘지)과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長子 景簡公 金元義墓誌)에 추봉되었다.

문숙공의 배위는 세 분이니 선배(先配)는 상질현대부인(尙質縣大夫人) 흥성장씨(興城張氏)로 증군부판서(贈 軍簿判書) 응양상장군 (鷹揚上將軍) 득구(得球)의 여(女)이고 1남 2녀를 두었으니 남(男)은 충숙공(忠肅公) 심(深)이요 장녀(長女)는 여양인(驪陽人) 문하시중(門下侍中) 진석(陳錫)에게 출가하고, 차녀(次女)는 칠원인(漆原人) 전서(典書) 윤길손(尹吉孫)에게 출가하였으며

계배(繼配)는 김해인(金海人) 찬성사(贊成事) 김연(金璉)의 여(女)로 生 1男이니 첨의중찬(僉議中贊=門下侍中 별칭),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유(流)이며
후배(後配)는 합천인(陜川人) 판합문사(判閤門事) 이신손(李信孫)의 여(女)로 무자녀(無子女) 하다.

공(公)께서 음관(蔭官)으로 고종(高宗) 44년(1257년)에 뷰성현위(富城縣尉)로 발탁되어 몽고군의 내침을 막아 공을 세우니 그 뒤 권보병마록사(權補兵馬錄事)에 보임(補任)되었으며 元나라에 가는 서장관(書狀官)을 수행한 뒤 귀환(歸還)하여 시사(時事)를 진주(陣奏)하였다.

1264년(元宗 5년)에 문과시(文科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였고 정사당(政事堂)에 들어가 합문지후(閤門祗侯), 형부낭중(刑部郎中), 국학직강(國學直講)을 연임(連任)하고 국자사업(國子司業),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지제고(知制誥)를 루가(累加)하였다.
1274년 (元宗 15년) 충렬왕(忠烈王)이 즉위(卽位)함에 이부시랑(吏部侍郞), 조청대부(朝請大夫), 태부경(太府卿),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등을 연배(連拜)하였으며 시무책(時務策) 20여조(餘條)를 논술(論述)한 봉서(封書)를 올리니 왕(王)이 가납(嘉納)하여 많은 부분 시행(施行)하였다.

사마시(司馬試)를 주장(主掌)하고 1278년 충렬왕이 元으로 갈 때 종행도감사(從行都監使)를 맡기니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무죄(無罪)함과 다루가치 어문을 철폐하게 하셨으며 돌아와서 우승지(右丞旨)를 제수(除授)하였다. 公이 새로 필도치(必?赤)에 임명되었는바 옛 제도에는 모든 나라 일을 재신과 추신이 회의한 다음 승선(承宣)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여 왕의 지시를 받들어 실시하였는데, 公이 건의하기를, “지금 재신과 추신의 수가 늘어서 정사를 의논하는데 적합하지 않으니, 따로 필도치를 두어 기밀의 정무를 맡겨야 하겠으며, 또 내시들에게 모두 일을 아뢰게 할 수 없으니, 다시 적임자를 택하여 신문색을 삼고, 그 나머지는 폐하소서." 하고, 왕께 풍간하여서 이 법을 만들었다. 갑자기 밀직사(密直司)의 부사(副使)와 문한학사(文翰學士)를 배명(拜命)하였으며 1280년에 다시 왕을 읍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왕은 公이 문무(文武)의 재능(才能)을 겸전(兼全)하였으므로 상장군(上將軍)을 제수(除授)하였으며 또 원에서 公을 소용대장군 좌우부도통 관군만호(昭勇大將軍 左右副都統 官軍萬戶)를 선수(宣授)하고 호두금패(虎頭金牌)와 인신(印信)을 수여(授與)하였다.

1281년에 우군만호(右軍萬戶)로 일본(日本)을 정벌(征伐)할 때 군중(軍中)에 역병(疫病)이 번져 서로 구휼(救恤)할 수 없었는데 公의 노력(努力)으로 사졸(士卒)을 보호하여 많이 구출(救出)되었고 또 태풍으로 인하여 전함(戰艦)이 대파(大破)하고 전복(顚覆)되어 군인과 물자가 대양중(大洋中)에 인몰(湮沒)하고 표류(漂流)하는것을 공(公)이 수습에 나서 구명(救命)된자 또한 400여인 이었으므로 사졸(士卒)들이 더욱 신뢰하여 복종하였다. 귀환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판도사직(版圖司直), 감찰사(監察使), 학사승지(學士承旨)를 배수(拜授) 하였고 1284년에 동남도병마사(東南都兵馬使)로써 출전(出戰)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9년(1283), 公이 응방도감사(鷹坊都監使)가 되었고 충렬왕 (忠烈王) 10년(1284)에 진변만호(鎭邊萬戶)가 되어 일본을 정벌하였다.. 갑자기 지공거(知貢擧)의 공로(功勞)로써 돌아와 입상(入相)하니 지첨의사(知僉議事)가 되고 민간의 고통을 진주(陳奏)하니 王이 가납(嘉納)하여 보문서태학사(寶文署太學士),세자이사(世子貳傅)를 가관(加官)하였고 소중히 여겼다. 이 때 권호(權豪)가 많이 권세(權勢)에 의지하고 있어 백성들이 견딜 수 없으므로 공(公)께서 진주(陳奏)하여 王이 진무(鎭撫)하였다.

일찍이 사소한 병을 얻어 1290년 3월23일에 卒하시니 임종(臨終)하심에 미리 일시(日時)를 아시고 뒷 일을 부탁하시는데 안색(顔色)이 선결(鮮潔)하시었다.

묘지명(墓誌銘)에 이르기를 ‘公은 인품(人品)이 장엄중후(莊嚴重厚)하시어 보기에 근엄(謹嚴)하여 접근하기 어려울것 같았으나 그 성품이 유순(柔順)하여 평생에 한사람도 구타한 일이 없었으며 무릇 정사(政事)를 13년간 잡으셨으며 또 고시관(考試官)으로써 두 번 과거(科擧)를 관장(管掌)하시어 선발하신 인사들이 모두 당세의 준걸(俊傑)이었고 公의 덕(德)은 청분(淸芬)하시니 애석하다 이미 이 현인(賢人)이 나서 무릇 사람들을 만났는바 그 가운데 장덕현 사호(章德縣 司戶) 張得求의 딸에게 초취(初娶)하여 1남 2녀를 낳아 아들은 심(深)이니 지금 좌중금지유문(左中禁指諭文)이 되었으며 장녀는 낭장(郎將) 진석(陳錫)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장군(將軍) 윤길손(尹吉孫)에게 출가하였고 다시 (김해인)찬성사(贊成事)김연(金璉)의 딸에게 재취(再娶)하여 1남 가(珂, *改 流)를 낳으니 지금 錄事가 되었으며 후취(後娶)는 판합문사(判閤門事) 이신손(李信孫)의 딸이다.’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원종 5년(1264) 5월
무술(戊戌)에 김주정(金周鼎) 등에게 급제(及第)를 하사(下賜)하였다....
-戊戌, 賜金周鼎等及第.-

충렬왕 4년(1278) 7월
정미(丁未)에 김주정(金周鼎)과 장순룡(張舜龍)을 서해도(西海道)에, 조인규(趙仁規)와 인후(印侯)를 경상도(慶尙道)에, 낭장(郞將) 김천고(金天固)를 전라도(全羅道)에 보내 인물을 분간토록 하면서 명령하기를,“만일 여러 군대가 사람들을 데리고 가거든 부모가 허락하여 처실(妻室)이 된 자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다 내주지 말라.”고 하였다.
-丁未, 遣金周鼎·張舜龍于西海道, 趙仁規·印侯于慶尙道, 郞將金天固于全羅道, 分揀人物, 命曰, 若諸軍挾帶人物, 除父母許嫁妻室外, 餘皆勿與-

충렬왕 4년(1278) 10월
경신(庚申)에 찬성사(贊成事)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유경(柳璥)이 사직(辭職)하거늘 첨의 중찬(僉議中贊)의 관직을 더 주어 그대로 치사(致仕)케 하고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으로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박항(朴恒)으로 참문학사(參文學事)를, 설공검(薛公儉)으로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삼고 송분(宋분)을 밀직사(密直司) 지신사(知申事)로, 박구(朴球)를 우승지(右承旨)로, 김주정(金周鼎)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삼았다.
-庚申, 贊成事判典理司事柳璥, 辭職, 加僉議中贊, 仍令致仕, 以中贊金方慶, 判典理司事, 朴恒, 參文學事, 薛公儉, 爲密直副使, 宋분, 爲密直司知申事, 朴球, 爲右承旨, 金周鼎, 爲左副承旨.-

충렬왕 4년(1278) 12월
신묘(辛卯)에 가벼운 죄를 범한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왕이 원나라에 가는데 참문학사(參文學事) 박항(朴恒)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자번(洪子藩)과 우부승지(右副承旨) 김주정(金周鼎) 등이 수행하였다
-辛卯, 放輕繫, 王, 如元, 參文學事朴恒·知密直司洪子藩·右副承旨金周鼎等, 從行.-

충렬왕 5년(1279) 3월
정사(丁巳)에 대방공(帶方公) 왕징(王徵)을 보내어 독로화(禿魯花 질자(質子))를 거느리고 원(元)에 가는데 김방경(金方慶)이 아들 김흔(金昕)과 원부(元傅)의 아들 원정(元貞)과 박항(朴恒)의 아들 박원굉(朴元?)과 허공(許珙)의 아들 허평(許評)과 홍자번(洪子藩)의 아들 홍순(洪順)과 한강(韓康)의 아들 한사기(韓射奇)와 설공검(薛公儉)의 아들 설지충(薛之?)과 이존비(李尊庇)의 아들 이우(李瑀)와 김주정(金周鼎)의 아들 김심(金深) 등 양반 자제[衣冠子弟] 무릇 25인에게 모두 3등(等)을 뛰어[超] 올려 관직을 주어 보내었다.
-丁巳, 遣帶方徵, 率禿魯花, 如元, 金方慶子?·元傅子貞·朴恒子元?·許珙子評·洪子藩子順·韓康子射奇·薛公儉子之?·李尊庇子瑀·金周鼎子深等衣冠子弟, 凡二十五人, 皆超三等授職, 送之.-

충렬왕 6년(1280) 7월
병인(丙寅)에 밀직 부사(密直副使) 김주정(金周鼎)을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丙寅, 遣密直副使金周鼎, 如元, 賀聖節.-

충렬왕 6년(1280) 11월
기유(己酉)에 우승지(右承旨) 조인규(趙仁規), 대장군(大將軍) 인후(印侯)를 원나라에 보내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으로 두령(頭領)을 삼아 외교(外交)를 맡게 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使) 박구(朴球)·김주정(金周鼎) 등으로 만호(萬戶)에 기용(起用)하여 먼저 일본에 가게 하소서. 내가 조정(朝廷)에 들어갔을 때 만호 패면(萬戶牌面)을 하사해 주시기를 요청했으나 아직 회답을 받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잘 보고하여 박구(朴球)·김주정(金周鼎) 등에게도 호두패(虎頭牌)를 하사하여......
-己酉, 遣右承旨趙仁規·大將軍印侯, 如元, 上中書省書.....
交中贊金方慶, 爲頭領管外, 交密直副使朴球·金周鼎等, 就立萬戶, 前赴日本, 予往詣朝廷時分, 乞賜萬戶牌面, 未蒙明降, 伏望善奏, 朴球·金周鼎等, 亦賜虎頭牌-

충렬왕 6년(1280) 12월
계유(癸酉)에 허공(許珙)으로 참문학사(參文學事) 세자보(世子保)를, 홍자번(洪子藩)으로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세자 이사(世子貳師)를, 한강(韓康)으로 좌상시(左常侍)를 삼고 송분(宋분)·이존비(李尊庇)로 모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세자 원빈(世子元賓)을, 박구(朴球)·김주정(金周鼎)으로 모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김백균(金伯均)으로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채인평(蔡仁平)으로 삼사사(三司使)를, 주열(朱悅)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삼았다.
-癸酉, 以許珙, 參文學事世子保, 洪子藩, 知僉議府事世子貳師, 韓康, 爲左常侍, 宋분·李尊庇, ?知密直司事世子元賓, 朴球·金周鼎, ?知密直司事世子元賓, 朴球·金周鼎, ?同知密直司事, 金伯均, 爲密直副使, 蔡仁平, 爲三司使, 朱悅, 爲版圖判書.-

신묘(辛卯)에 .....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박구(朴球)·김주정(金周鼎)을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좌우부도통(左右副都統)을 삼아 모두 호두(虎頭), 금패(金牌)와 인신(印信)을 하사하고....
-(辛卯)...知密直司事朴球·金周鼎, 爲昭勇大將軍左右副都統, 橙賜虎頭金牌·印信-

충렬왕 7년(1281) 3월
임자(壬子)에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과 만호(萬戶)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合浦)로 향하였다.
-壬子, 元帥金方慶·萬戶朴球·金周鼎, 帥師向合浦.-

충렬왕 7년(1281) 5월
무술(戊戌)에 흔도(?都), 홍다구(洪茶丘) 및 김방경(金方慶),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이 함대와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을 치러 갔다.
-戊戌, ?都·茶丘, 及金方慶·朴球·金周鼎等, 以舟師, 征日本.-

충렬왕 9년(1283) 4월
을유(乙酉)에 판밀직(判密直) 김주정(金周鼎)에게 명령하여 연등도감(燃燈都監)에서 열군(閱軍)하였다.
-乙酉, 命判密直金周鼎, 閱軍於燃燈都監.-

충렬왕 9년(1283) 7월
무오(戊午)에 응방도감(鷹坊都監)을 두어 김주정(金周鼎)으로 사(使)로, 원경(元卿)과 박의(朴義)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戊午, 置鷹坊都監, 以金周鼎, 爲使, 元卿·朴儀, 爲副使.-

충렬왕 10년(1284) 5월
경술(庚戌)에 판밀직(判密直) 김주정(金周鼎)으로 진변 만호(鎭邊萬戶)를 삼았다
-庚戌, 以判密直金周鼎, 爲鎭邊萬戶.-

충렬왕 10년(1284) 9월
기해(己亥)에 김주정(金周鼎)으로 문한 학사(文翰學士) 승지(承旨)를, 이존비(李尊庇)로 감찰대부(監察大夫)를, 공유(孔愉)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정가신(鄭可臣)으로 밀직 학사(密直學士), 최수황(崔守璜)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삼았으며 염수정(廉守貞)은 총신(寵臣) 승익(承益)의 형(兄)이므로 갑자기 소 부윤(小府尹) 지제고(知制誥)가 되었다.
-己亥, 以金周鼎, 爲文翰學士承旨, 李尊庇, 爲監察大夫, 孔愉, 爲典法判書, 鄭可臣, 爲密直學士, 崔守璜, 爲右副承旨, 廉守貞, 以寵臣承益之兄, 驟得少府尹知制誥.-

충렬왕 10년(1284) 12월
무진(戊辰)에 홍자번(洪子藩)으로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를 김주정(金周鼎)으로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삼았다
-戊辰, 以洪子藩, 僉議?成事, 金周鼎, 知都僉議事.-

충렬왕 11년(1285) 10월
을묘(乙卯)에 김주정(金周鼎)으로 충청 전라 경상도 계점 도지휘사(忠淸全羅慶尙道計點都指揮使)를 삼고 계점사(計點使) 및 별감(別監)을 각 도(道)로 나누어 보내었다.
-乙卯, 以金周鼎, 爲忠淸·全羅·慶尙道計點都指揮使, 分遣計點使, 及別監于諸道.-

충렬왕 13년(1287) 6월
갑자(甲子)에 정가신(鄭可臣)을 경상(慶尙)에, 채모(蔡謨)를 전라(全羅)에, 안전(安?)을 충청도(忠淸道)에 보내 모두 안무사(安撫使)를 삼고 김주정(金周鼎)을 폄(貶)하여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삼았다.
甲子, 遣鄭可臣于慶尙, 蔡謨于全羅, 안전(安?)을 충청도(忠淸道)에 보내 모두 안무사(安撫使)를 삼고 김주정(金周鼎)을 폄(貶)하여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삼았다.
-甲子, 遣鄭可臣于慶尙, 蔡謨于全羅, 安?于忠淸道, 皆爲安撫使, 貶金周鼎, 爲淸州牧使.-

기사(己巳)에 열병(閱兵)을 마치고 친히 독기(纛旗)를 궁문(宮門)에서 제사하고 김주정(金周鼎)의 호두패(虎頭牌)로써 박지량(朴之亮)에게 하사하여 좌익 만호(左翼萬戶)를 삼고 박구(朴球)의 호두패(虎頭牌)로서 나유(羅裕)에게 하사하여 중익 부만호(中翼副萬戶)를 삼았다
-己巳, 閱兵訖, 親祭纛于宮門, 以金周鼎虎頭牌, 賜朴之亮, 爲左翼萬戶, 以朴球虎頭牌, 賜羅裕, 爲中翼副萬戶-

충렬왕 16년(1290) 3월
병인(丙寅)에 전임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김주정(金周鼎)이 죽었다
-丙寅, 前知僉議府事金周鼎, 卒.-

<고려사(高麗史) 지(志) 선장(選場)>
[원종(元宗)].....5년 4월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윤개(崔允愷)가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우승선(右承宣) 박륜(朴倫)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고 김주정(金周鼎) 등 25인에게 급제(及第)를 사(賜)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지(志)>
국자시(國子試) 액수(額數)
충렬왕(忠烈王)... 3년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주정(金周鼎)이 시(詩)·부(賦)로 정공단(鄭公旦) 등 31인과 10운시(詩)로 정구(鄭龜) 등 39인과 명경(明經) 3인을 취하였다.
-忠烈王 三年, 左諫議大夫金周鼎, 取詩賦鄭公旦等三十一人·十韻詩鄭龜等三十九人·明經三人-

고려사(高麗史) 지(志)
액정국(掖庭局)
충렬왕(忠烈王) 4년에 김주정(金周鼎)이 건의(建議)하기를,
“내료(內寮)로써 모두 하여금 계사(啓事)케 함은 불가(不可)하오니 사람을 선택하여 신문색(申聞色)을 삼으소서.”라고 하였다.【내료(內寮)로 전명(傳命)하는 자를 사장(辭掌)이라 칭하고 문약자(門0者)를 금직(金直)이라고 칭하였는데 어느 대에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忠烈王四年, 金周鼎, 建議, 以內寮, 不可皆令啓事, 擇人, 爲申聞色,【內寮傳命者, 稱辭掌, 門0者, 稱金直, 不知始於何代-】

고려사(高麗史) 지(志) 오군(五軍) ②
충렬왕(忠烈王) 9년 4월에 판밀직(判密直) 김주정(金周鼎)에게 명(命)하여 연등도감(燃燈都監)에서 군대(軍隊)를 사열(査閱)케 하였다.
-忠烈王.... 九年..四月, 命判密直金周鼎, 閱軍於燃燈都監.-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김주정(金周鼎)>
김주정(金周鼎)은 광주(光州) 사람이니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침착하고 말이 적었으며,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음(蔭)으로 부성 위(富城尉)에 보임(補任)되니 때에 몽병(蒙兵)이 크게 옴으로 국가가 놀래 소란하였다. 김주정(金周鼎)의 조치(措置)가 마땅하여 위엄과 은혜가 함께 나타나니 그 지방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순문사(巡問使) 한취(韓就)가 이를 천거하여 권지 도병마 녹사(權知都兵馬錄事)가 되었다.

원종(元宗) 5년 괴과(魁科=장원급제)에 뽑혀 해양부 녹사(海洋府錄事)에 보(補)하고 전첨(典籤=官名))을 더하니 해양공(海洋公) 김준(金俊)이 그 재간을 중히 여겨 내시(內侍)에 소속시키니 정방(政房)에 들어가서 누천(累遷)하여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원년에 대부경 좌사의대부(大府卿左司議大夫)를 제배(除拜)하였다. 이듬해 상서(上書)하여 염사(廉使)와 수령(守令)의 근태(勤怠)와 공부(貢賦)의 경중(輕重)과 향리(鄕吏)의 세(勢)에 아부하고 이역(吏役)을 도피하는 등 일을 구리(究理)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를 청납(聽納)하였으나 좌우(左右)의 저지하는 바가 되어 마침내 행치 못하였다. <충렬왕> 4년에 왕이 원(元)에 갈 때 김주정이 행종도감사(行從都監使)가 되어 건백(建白)하기를,
“본국(本國) 달로화적(達魯花赤) 왕경 유수군(王京留守軍) 합포진 수군(合浦鎭守軍) 황주(黃州), 봉주(鳳州), 염주(鹽州), 백주(白州) 4주(州) 둔전군(屯田軍)에 공억(供億 지공(支供))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이 명(命)을 견디지 못하고 또 김방경(金方慶)이 조정에 대공(大功)이 있었으나 무고를 입어 멀리 유배되었으니 청컨대 제(帝)에게 주(奏)하소서.”
하니 왕이 입조(入朝)하여 제(帝)에게 아뢰니 제(帝)가 다 허락하는지라, 왕이 더욱 중히 여겨 환국(還國)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제수하였다. 구제(舊制)에는 무릇 국가일은 재추(宰樞)가 회의(會議)하고 승선(承宣)은 품지(稟旨)하여서 행하는지라 김주정이 말하기를,
“지금 재추(宰樞)가 너무 많아서 정사를 의론함에 주장이 없으니 마땅히 따로 필도지(必도赤)를 두어 기무(機務)를 맡기고 또 내료(內僚)는 가히 다 계사(啓事)하게 하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사람을 택하여 신문색(申聞色)을 삼고 그 나머지는 파하소서.”
하고 염승익(廉承益), 이지저(李之저)로 하여금 왕을 풍간(諷諫)하여 드디어 필도지(必도赤) 신문색(申聞色)을 두었다. 김주정 및 참문학사(參文學事) 박항(朴恒), 밀직 부사(密直副使) 설공검(薛公儉), 좌승지(左承旨) 이존비(李尊庇), 판예빈사(判禮賓事) 염승익(廉承益), 대장군(大將軍) 인공수(印公秀), 조인규(趙仁規), 비서 윤(秘書尹) 정흥(鄭興), 내시 장군(內侍將軍) 이지저(李之저), 보문서대제(寶文署待制) 곽예(郭預), 대부 소윤(大府少尹) 안전(安전), 천우위 녹사(天牛衛錄事) 이자분(李子芬), 첨사부 녹사(詹事府錄事) 윤문옥(尹文玉), 대상부 녹사(大常府錄事) 정현계(鄭玄繼)로 필도지(必도赤)를 삼고 내료 낭장(內僚郞將) 정승오(鄭承伍), 김의광(金義光), 강석(姜碩), 이서(李恕), 하예(河汭)로 신문색(申聞色)을 삼아 항상 금중(禁中)에 모아 기무(機務)를 참결(參決)케 하니 때에 이름을 별청재추(別廳宰樞)라 하니 조종(祖宗)의 구제(舊制)가 아니므로 사람들이 많이 비난하였다. 이 때에 대부(大府)가 내료(內僚)의 구전(口傳)과 내시원(內侍院)의 전청(傳請)으로 재용(財用)이 고갈하여 한 주부(注簿)가 사사로이 대차하여 오히려 능히 지변치 못하여 머리를 깍고 중이 되는 자가 있거늘, 김주정이 생각하기를,
“지후(祗侯) 윤해(尹諧)가 옛날 내시(內侍)가 되었으니 반드시 능히 전청(傳請)을 준절히 할 것이요 또 대장군(大將軍) 김자정(金子廷), 장군 차득규(車得珪)는 내료(內僚)의 수령(首領)이니 가히 못 내수(內?)들의 구전(口傳)의 폐(弊)를 억제할 것이라.”
하여 왕께 청하여 별감(別監)과 감찰(監察)을 삼아 별감(別監)이 대부(大府)의 세입(歲入)을 잡고(雜考 고안(考案))하여 써 그 비용(費用)을 감(減)하였으나 뒤에 구전(口傳)이 더욱 많고 전청(傳請)도 더욱 번잡하여 내료(內僚)는 다투어 예(例)를 끌어 각 사(司)의 별좌(別坐)되기를 구하니 능히 금하지 못하였다.

낭장(郞將) 최종언(崔宗彦)이 공주(公主)의 유모에게 부탁하여 견룡 행수(牽龍行首)가 되거늘 김주정이 낭장(郞將) 김희(金禧)로서 대체(代替)하고 김희(金禧)의 형 김의(金儀) 및 조순(曺淳)이 역시 낭장(郞將)으로서 행수(行首)가 되니 다 김주정의 인아(姻亞=인척)이므로 때에 일문(一門)의 3행수(行首)라 이름 하였다. 김주정이 내료(內僚)에 인하여 청하게 되니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또 응방도감사(鷹坊都監使)가 되어 응(鷹)과 견(犬)으로서 왕의 측근이 되어 자못 권세를 펴니 사람에게 말하기를,
“왕명이 있으니 부득이 하다.”고 하였다.

원(元)이 장차 일본을 치려할 때 왕이 김주정에게 장략(將略)이 있으므로 만호(萬戶)를 제배(除拜)하고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여 호두패(虎頭牌)를 사(賜)할 것을 청하니 이에 소용 대장군(昭勇大將軍) 우부도통(右副都統)을 제수하고 호두 금패(虎頭金牌) 및 인(印)을 사(賜)하였다. 이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일본을 침에 미쳐서 대명포(大明浦)에 이르니 문득 대풍(大風)이 배를 전복하여 관군이 많이 익사하는지라 김주정이 꾀로써 구해 살린 자가 매우 많았다. <충렬왕(忠烈王)> 10년에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가 되었다. 왕이 일찍이 군신(群臣)을 향연할 때 김주정이 수(壽)를 축원하고 물러가거늘, 공주(公主)가 불러 말하기를,
“경의 아들 김심(金深)이 처(妻)를 구박하여 액사(縊死)하게 하였는데 부(父)로서 능히 아들을 징계하지 않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범도 또한 그 자식을 먹지 않는다고 하나이다.”
고 하니 공주(公主)가 좋아하지 않는지라, 김주정이 물러가서 턱을 고이고 조니 공주(公主)가 사람을 시켜 책(責)하거늘
“경이 술에 취하였느냐? 잠을 자느냐?”하니,
“신은 졸지 않습니다.”
하거늘 공주(公主)가 대노(大怒)하여 명하여 끌어내게 하고 다음날에 파직(罷職)하였다가 갑자기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내치고 호두패(虎頭牌)를 빼앗아 박지량(朴之亮)에게 사(賜)하더니 얼마 후에 소환(召還)하여 다시 패(牌)를 사(賜)하였다. <충렬왕> 16년에 죽으니 문숙(文肅)이라 시(諡)하였다. 아들은 심(深)이다.

-金周鼎, 光州人, 少好學, 沈厚寡言, 不妄交游, 以蔭, 調富城尉, 時蒙兵大至, 國家驚擾, 周鼎, 措置得宜, 威惠병著, 一方稱之, 巡問使韓就, 薦之, 權知都兵馬錄事, 元宗五年, 擢魁科, 補海陽府錄事, 加典籤, 海陽公金俊, 器重之, 屬內侍, 入政房, 累遷至吏部侍郞,
忠烈元年, 拜大府卿左司議大夫, 明年, 上書, 請究理廉使·守令勤怠, 貢賦輕重, 鄕吏附勢逃役等事, 王納之, 爲左右所沮事, 竟不行, 四年, 王如元, 周鼎爲行從都監使, 建白, 本國達魯花赤·王京留守軍·合浦鎭守軍·黃·鳳·鹽·白四州屯田軍, 供億繁重, 民不堪命, 且金方慶, 有大功於朝, 被誣遠流, 請奏于帝, 王入朝奏帝, 皆允, 王益重之,
還國, 授左副承旨, 舊制, 凡國家事, 宰樞會議, 承宣稟旨而行, 周鼎言, 今宰樞甚多, 謀政無主, 宜別置必도赤, 委以機務, 又內僚不可皆令啓事, 請擇人爲申聞色, 罷其餘, 令廉承益·李之저, 諷王, 遂置必?赤, 申聞色, 周鼎及參文學事朴恒·密直副使薛公儉·左承旨李尊庇·判禮賓事廉承益·大將軍印公秀·趙仁規·秘書尹鄭興·內侍將軍李之저·寶文署待制郭預·大府少尹安전·千牛衛錄事李子芬·詹事府錄事尹文玉·太常府錄事鄭玄繼, 爲必도赤, 內僚郞將鄭承伍·金義光·姜碩·李恕·河汭, 爲申聞色, 常會禁中, 參決機務, 時號別廳宰樞, 以非祖宗舊制, 人多譏議, 時大府, 以內僚口傳及內侍院傳請, 必能?節傳請, 且大將軍金子廷·將軍車得珪, 內僚之首, 可抑群竪口傳之弊, 請王爲別監與監察, 別監雜考大府歲入, 以?其費, 後口傳愈多, 傳請愈繁, 內僚爭援例, 求爲各司別坐, 莫之能禁,
郞將崔宗彦, 賴公主乳?, 爲牽龍行首, 周鼎, 以郞將金禧, 代之, 禧兄儀及曹淳, 亦以郞將, 爲行首, 皆周鼎姻亞, 時號一門三行首, 周鼎嘗以女嫁大將軍尹秀子, 秀適遭舅服, 周鼎請王公除承旨, 趙仁規謂非禮不奏, 周鼎因內僚得請, 人非之, 又爲鷹坊都監使, 以鷹犬媚王, 頗張權勢, 語人曰, 有王命, 不獲已耳, 元將征日本, 王以周鼎有將略, 拜萬戶, 上書中書省, 請賜虎頭牌, 乃授昭勇大將軍右副都統, 賜虎頭金牌及印, 尋同知密直司事, 及征日本, 至大明浦, 忽大風覆舟, 官軍多溺死, 周鼎, 以計拯活甚衆, 十年, 知都僉議事, 王嘗宴群臣, 周鼎上壽, 退, 公主呼謂曰, 卿子深, 逼妻縊死, 父不能懲子耶, 對曰, 虎且不食其子, 公主不悅, 周鼎退, 支?睡, 公主使人責曰, 卿醉耶睡耶, 曰, 臣無睡, 公主大怒, 命曳出, 明日罷職, 俄貶淸州牧使, 奪虎頭牌, 賜朴之亮, 未幾, 召還, 復賜牌, 十六年, 卒, 諡文肅, 一子深.-

* 살피건대 고려사 김주정 전 마지막 부분
' - - - 十六年, 卒, 諡文肅, 一子深' (한 아들은 심이다) 하였으나 1290년에 찬제된 "文肅公 金周鼎 墓誌銘"에 2男 2女로 기록되어 있고 아들은 深과 珂(改諱 流)라 하였으므로 위 고려사 열전은 바르지 못하다.

<문숙공 휘 주정묘지명(文肅公 諱 周鼎墓誌銘)>
생명이 있는 ▨ 것들 중에서 일찍이 오직 한 가지 면에서는 뛰어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준마에는 난(鸞)새와 봉(鳳)새의 날개가 빠져 있고, 깃털이 아름다운 새에는 준마의 발굽이 없으니, 날개 달린 용[應龍]과 같은 경우는 드물다. 선비 역시 ▨와 같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장차 ▨이 되는 것은 옛부터 어려운 일이다. 황전(黃錢)과 청전(靑錢)을 함께 가져 능히 둘 다 아름답게 하는 일은 드문데, 그것을 겸하여 지닌 자는 오직 우리 나라를 통털어 한 사람뿐이다.
공의 이름은 주정(周鼎)이고, 자는 ▨이며, 해양군(海陽郡) 사람이다. 증조 위(位)는 상서령(尙書令)에 추봉되고, 조부 광세(光世)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봉되었으며, 아버지 경량(鏡亮)은 조청대부 금오위대장군(朝請大夫 金吾衛大將軍)을 지냈다. 공은 젊은 나이[弱冠]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지(葬地)를 찾아 ▨제(兄弟?)들과 함께 갔는데, 공이 홀로 묘 안에서 복령(茯笭) 버섯을 얻으니 이를 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그 뒤 오랫동안 고향에서 힘써 공부하였는데, 글씨를 잘 쓰며 ▨문(文)에 ▨ 뛰어났다.
정사년(고종 44, 1257 )에 부성현위(富城縣尉)가 되었다. ▨순문후(巡門侯) 한취(韓就)가 공이 고을을 다스린 치적을 으뜸으로 평가하여 천거하였으므로 권도병마녹사(權都兵馬錄事)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북조(北朝 : 元)에 행리서장관(行李書狀官)으로 다녀와 업무를 보고하니, 당시의 집정(執政)인 해양공(海陽公 : 金俊)이 그릇으로 여겼다. 지원(至元) 원년 갑자년(원종 5, 1264 )에 과거[春場]에 응시하여 1등으로 뽑혔다. 여러 번 옮겨 해양부전첨(海陽府典籤)이 되었다가 드디어 내시(內侍)에 적(籍)을 두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정사당(政事堂)에 들어갔다. 잇달아 합문지후 형부낭중 국학직강(閤門祗候 刑部郎中 國學直講)에 임명되고, 국자사업 보문대제 지제고(國子司業 寶文待制 知制誥)로 승진하였다.
갑술년(원종 15, 1274 )에 ▨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즉위하자 곧 이부시랑 조정대부 대부경 보문각직학사 우사의대부(吏部侍郞 朝靖大夫 大府卿 寶文閣直學士 右司議大夫)에 임명되었다. 시무(時務)를 논하여 20여 조를 봉(封)하여 올리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여러 가지를 시행하였다. ▨사(▨司)를 거쳐 사마시(司馬試)를 주관하였다. 무인년(충렬왕 4, 1278 )에 임금을 호종하여 북조(北朝, 元)로 갔는데 임금이 심복으로 여겼다. 중찬(中贊 : 金方慶)의 죄가 없음을 밝히고, ▨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아문(衙門)을 파하여 원래대로 환원하도록 하였다. 돌아와 중대부 우승지(中大夫 右承旨)에 임명되고, 잠시 뒤 밀직사부사 문한학사(密直司副使 文翰學士)가 되었다. 경진년(충렬왕 6, 1280)에 다시 호종하여 돌아오자 임금이 문무의 재능을 갖추었다고 하여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하였다. 또한 상국(上國 : 元)의 선▨ 소용대장군 관군만호(宣授 昭勇大將軍 管軍萬戶)가 되면서 이에 금호부(金虎符)와 인신(印信)을 받았다.
신사년(충렬왕 7, 1281 )에 우익만호(右翼萬戶)로서 ▨(倭를?) 정벌할 때 군사들이 질병에 많이 걸려 ▨ 능히 서로 구휼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군(▨軍)으로 공의 힘으로 ▨졸(軍卒?)을 ▨ 보호하고, 온전하게 ▨ 도와준 것이 많았다. 또한 태풍으로 인하여 선박이 크게 부서져 사람과 물자들이 ▨ 바다에 빠져 떠다니자 ▨ 공이 ▨ 보고 ▨ 건져 실었는데, 목숨을 건진 사람이 또한 400여 명이나 되었다. 군사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따랐다. 돌아와 광정대부 판밀직사사 ▨감찰 ▨학사승지 겸 ▨장(匡靖大夫 判密直司事 ▨監察▨學士承旨 兼 ▨將)에 임명되었다. 갑신년(충렬왕 10, 1284 )에 동남도 병마사(東南道 兵馬使)로서 ▨포(合浦?)로 출진(出鎭)하였다. 곧 지공거(知貢擧)로 공을 세우고 상▨(相府?)에 들어가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가 되었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뒤에 불려와 ▨존(▨尊)을 뵙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리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고 보문서태학사 세자이부(寶文署太學士 世子貳傅)를 더하여 주었다.
당시 ▨호(▨豪)들이 권세를 믿고 ▨하니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였다. 임금이 ▨ 바로잡고자 하여 ▨ 다스리도록 하였다. 강관(絳灌)의 무리들이 더욱 해를 끼쳤으나, 능히 ▨ 훌륭하게 이루어내었다. 공이 마침 궁궐의 연회에서 술에 취하여 ▨ 못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죄를 받아 ▨상▨<相府에서 내쫓기고?> 이어 청주목사(淸州牧使)로 폄출되었으나, 반 년도 되지 않아 ▨(복직되었다?).
3월에 처음 작은 병이 들었는데, 낫지 않아 경인년(충렬왕 16, 1290) 3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면서 미리 ▨일시(日時)와 ▨ 뒷일을 부탁하였다. ▨ 정신이 또렷하고 태연하고 ▨ 편안하게 돌아가시니, 얼굴빛이 맑고 깨끗하였다. 향년 63세이다.
공은 사람됨이 장중하고 바라보면 근엄하여 마치 두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 성품은 ▨하여 평생 한 사람도 채찍질한 적이 없었다. ▨사(▨事)에 밝고 ▨학(▨學)에 힘쓰며, 무릇 정사를 맡은 것이 13년이다. 두 차례 문형(文衡)을 잡아 발탁한 인재가 모두 당시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금▨(金▨)를 차지 않았으나 넉넉하게 지낸 것이 또한 7년이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금(十金?)의 재산이 없었으니, 공의 덕이야말로 맑다고 할 것이다.
아, 생전에 바로 현인이었으니 보통 사람들이 ▨(千?)에 한 번 만날 수 ▨ 있는 것으로 ▨ 더욱 ▨ 도움이 되었다. ▨보(宰輔)에 올랐으나 ▨ 생전에 그 복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만물이 ▨ 어찌 ▨ 알지 못하는가. ▨ 세상의 ▨ 백성과 ▨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현인으로 남게 되었다.
장덕현 사호(章德縣 司戶) 장득구(張得球)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심(深)은 지금 좌중금지유문(左中禁指諭文)이고, 장녀는 낭장(郎將) 진▨단(陳▨?)에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장군(將軍) 윤▨손(尹▨孫)에게 시집갔다. ▨ 찬성사(贊成事) 김련(金璉)의 딸과 결혼하여 1남을 낳으니, 가(珂)인데 지금 ▨녹사(錄事)이다. 뒤에 판합문사(判閤門事) 이신손(李信孫)의 딸과 결혼하였다.
▨ 장례를 치르면서 아들이 ▨ 행장을 갖추어 묘지명을 ▨(청하니), 대개 내가 일찍이 공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 훌륭한 전기를 보니 뛰어남이 ▨ 공과 같다.
명(銘)하여 이른다.
아, 우리 공이여, ▨ 장원으로 급제하여 ▨
▨ 나라의 문무의 재능을 ▨ 가졌으며
조정에 들어와 신률(神律)로 다스렸으며
과거[棘圍]를 주관하여 연(蓮)꽃 같은 많은 인재들을 뽑았도다.
일신(一身)이 ▨하였으니 그 덕에 힘입을 것이며
옥(玉)에는 본디 더러움이 없으나 소인(小人)들이 <결락>.
  지원(至元) 27년 경인년(충렬왕 16, 1290)에 짓다.

-生▨類未嘗專美於一物故??乏鸞鳳之翼彩羽無駿逸之蹄其如應龍者鮮矣士亦」
如▨龍頭將▨古難?黃錢靑錢鮮能雙美其兼得而有之者惟我上國下人而已公諱」
周鼎字▨海陽郡人也曾祖諱位皇追封尙書令祖諱光世皇追封尙書右僕射考諱鏡」
亮皇朝請大夫金吾衛大將軍公弱冠喪父於卜葬地▨弟偕往公獨於墓中得茯?見」
者異之厥後久閒桑梓力學工書▨文▨藝丁巳調富城縣尉▨巡問侯韓就以公政里」
爲最而擧之權補都兵馬錄事俄以北朝行李書狀官使還陳事時之執政海陽公器之」
至元元年甲子擧春場擢爲第一累遷海陽府典籤遂籍內侍因▨入政事堂連拜閤門」
祗候刑部郞中國學直講累加國子司業寶文待制知制誥甲戌▨今上卽祚驟拜吏部」
侍郞朝靖大夫大府卿寶文閣直學士右司議大夫論時務二十餘條上封事上嘉之多」
所施行歷▨使典司馬試戊寅扈駕朝北上委以腹心明中贊之非罪▨罷達魯花赤之」
衙門回還種▨還除中大夫右承旨俄拜密直司副使文翰學士庚辰復扈駕還上以有」
文虎之才除上將軍又上國宣▨昭勇大將軍管軍萬戶仍授金虎符?印信辛已以右」
翼萬戶征▨軍中多疾▨不能相恤公▨軍以公力▨卒▨保護多護全▨又因大風船」
艦大敗人物湮流於▨洋者▨公▨見▨而載出所全活亦四百餘人士卒由是益附還」
拜匡靖大夫判密直司▨監察▨學士承▨兼▨將甲申以東南道兵馬使出鎭▨浦俄」
以知貢擧功還入相▨知僉議府事餘▨故後因召見▨奠陳民間疾苦上嘉納之加寶」
文署太學士世子貳傅時之所重▨豪多依勢而▨民不堪上▨正持▨事而鎭之絳灌」
之徒曾害其能▨錦已成公適於內宴被酒不▨因罪之▨相▨仍貶爲淸州牧使未半」
▨三月始得微恙積至▨庚寅三月二十三日卒臨終預▨日時▨囑後▨英自若▨修」
然而化顔色鮮潔享年六十三公爲人莊重望之儼然如可畏然其性▨生平未嘗鞭一」
人明▨事飭以▨學凡執政事肇者十三年再秉文衡所得皆當世俊不佩金▨沛者又」
且七年屬▨之日▨無▨金之産公之德淸矣惜乎旣生是賢凡人之所遭▨一者北▨」
若▨益基▨登▨輔則▨生之不蒙其福哉物▨豈不知▨世▨民▨人爲久留賢而▨」
娶其▨以章德縣司戶張得球之女爲娶生一男二女男曰深今爲左中禁指諭文女長」
適郞▨陳▨?▨適將軍尹▨孫▨娶贊成事金璉之女生一男曰珂今爲▨錄事後娶」
判閤門事李信孫▨葬也子▨具狀▨爲銘盖以予嘗爲公所厚得公之▨故▨見奇傳」
卓▨如公矣▨銘之曰?歟我公▨龍頭▨國文虎之▨之則入在廟堂神律衆蓮墓棘」
圍一身▨賴其德玉本無■蒼蠅▨」-
    至元二十七年庚寅誌」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 필자가 오탈자(誤脫字) 일부를 보정(補正)하였다.

*문숙공묘지명은 1749년(英祖25)에 안동권씨 문중에서 묘사 중(墓事中)에 득지(得誌)하였다.

<동문선(東文選) 중 곽예(郭預)의 글>
상진변 김상공 주정(上鎭邊 金相公 周鼎)
-(東)邊(日本)을 진압(鎭壓)한 김주정(金周鼎)
상공(相公)에게 올리다- / 곽예(郭預)

국정(國政0을 맡아서 좌상(左相)이 되고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덩변(東邊)을 진압(鎭壓)하네
막하(幕下)에 들어온 이 문사(文士)가 많고
영(營)을 잇달아 옹위(擁衛)한 무장 용사(武將 勇士)들
다락에서 울리는 북소리 새벽기운(氣運) 웅장(雄壯)하고
성(城)에서 부는 피리 애절(哀切)한 밤중
황석공(黃石公*)을 찾아서 계책(計策)을 묻네
붉은 장막* 내리고 시서(詩書)를 토론(討論)
겸창막부(鎌倉幕府)에서 보배로운 공물(貢物) 바치게 하고
옥대(玉塞)에는 깃발을 거두어 치웠네
의장(儀仗)이 조용하니 수리와 매가 부르짖고
밭이랑엔 준마(駿馬)가 뜨음하게 매어있네
군정(軍情)이 든든하여 믿을만하고
지면(地面)오(은) 깨끗하여 흠 할 곳 없네
吳나라 평정하는 배 고치지 마소
峴山에 올랐던 記念碑*를 물에 넣으소
가을 뒤엔 거울도 높이 걸어야하고
달 가운데 계수(桂樹) 가지 나누기가 임박(臨迫)했네
장상(將相0으로 종백(宗伯*)을 겸(兼)하온 몸이
여가(餘暇) 없도록 하늘이 시키시네.

註:
*黃石公- 秦代의 兵法家. 黃石公이 素書六편의 책을 劉邦의
功臣인 張良에게 주었다고 하며 黃石公의 三略을
曹操가 所有 하였다 고함. 中國 奇門의 重興祖임.

*붉은 장막-後漢의 名儒 馬融이 늘 높은 마루에 앉아 붉은
縫紗帳을 내리고 生徒들을 敎授했다는 데서
引用했는데 여기서는 글을 가르치는 帳幕뒤에
軍士가 늘어섰다는 뜻.

*峴山 記念碑-晉나라 杜預가 後世에 이름을 남기기를 좋아하여 碑石들을 만들어서 功績을 새겨 하나는 峴山위에
세우고 하나는 萬山 아래 못(池)물 속에 넣으면서
<後에 山이 못이 되고 못이 山이 될는지 모르므로 碑石을 이렇게 둘을 準備 하였다> 한데서 引用.

*宗伯 -禮部侍郞을 말함인데 여기서는 考試官을 뜻함
(文肅公은知貢擧였음).

* 곽예 (郭預 1232-1286)
문숙공(文肅公)과 동시대인(同時代人)으로 고종(高宗042년(1255)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壯元 及第)하여 원종(元宗0 4년(1263)에 왕명(王命)을 받고 일본(日本)에 건너가 왜구(倭寇)들의 고려 침범(高麗 侵犯)의 즉각 중지(中止)와 잡혀간 고려(高麗)사람들의 송환(送還)을 요구(要求)하고 충분한 배상(賠償)을 받아 내었던 사람이다. 그가 문숙공(文肅公)에 관(關)하여 지은 글이 동문선(東文選) 11권에 있으니 그 글 내용에 의하면 문숙공께서 1284년에 일본을 정벌(征伐)하였고 겸창막부(鎌倉幕府)에서 보배로운 공물(貢物)을 바치게 하였다.

<무등산 신사(無等山 神祠)>
무등산 신사(無等山 神祠)는 고려조 때 나라에서 제사(祭祀)를 지냈는데 동정원수 김주정(東征元帥 金周鼎)을 송황신(城隍神)으로 모셔 제사(祭祀)지낸 곳으로 본조(本朝 朝鮮)에서는 본읍(本邑)에 명령(命令)하여 춘추(春秋)로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였다.
성황신(城隍神)의 유래(由來)는 <주례(周禮)>의 납제팔신(臘祭八神)에서 유래(由來)한 것으로 성황신(城隍神)의 최초의 기능은 성(城)의 안전(安全)을 지켜주는 것이었으나 후(後)에 사람들은 그 지역(地域)의 가뭄과 홍수, 흉년과 풍년을 관장(管掌)할뿐 아니라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주관(主管)하며 나아가 저승의 일도 모두 그가 관장할 수 있다고 여겨 성황신(城隍神)은 오광상제(玉皇上帝)로부터 인간세계(人間世界)에 내려가 전궈(全權)을 위임(委任) 받은자(者)로 여겼던 것이다.
도교(道敎)에서는 흉악(凶惡)한 것을 물리치고 국가(國家의) 안전(安全)을 보우(保佑)하는 신(神)이며 한 지방(地方)의 망령(亡靈)들을 관할(管轄)한다고 하였으며 원대(元代)에 이르러 성황신을 나라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여겨 나라에서 제사(祭祀)하였으니 고려(高麗)에서는 문종(文宗)(1047-1082)때 부터 성읍(城邑)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여겨 수령(首領)이 직접 행제(行祭)하는 국행관제(國行官制)로 하여 이미 이승사람이된 영웅(英雄)과 청렴(淸廉)한 관리(官吏)를 그 지방의 성황신(城隍神)으로 받들어 그들의 영혼(靈魂)이 생전(生前)처럼 백성(百姓)들을 보호(保護)해 주고 정의(正義)를 구현(俱現)하여 선량(善良)한 백성(百姓)을 편(便)하게 해 주기를 기원(祈願)하는 제(祭)를 올렸던 것이다.

성황사제도(城隍祠制度)는 고려시대(高麗時代)에 크게 성행(盛行)하여 초제(醮祭=道敎祭祀)도 함께 성행(盛行),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제초행사(齊醮行事)가 크게 행(行)하여 졌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等)의 상소(上疏)로 도교행사(道敎行事)를 관장(管掌)하던 소격서(昭格署)가 혁파(革罷)된 후 차츰 시들해져 임진난(壬辰亂) 이후에는 초제(醮祭)를 올리는 의식(儀式)이 없어지게 되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문숙공(文肅公)께서는 사후(死後) 200여년(餘年) 동안 무등산사묘(無等山祠廟))에서 국제(國祭)와 읍제(邑祭)로 제향(祭享)을 받으셨다.

<나주 쌍계정(羅州雙溪亭)과 문숙공 휘 주정(文肅公 諱 周鼎)>
(쌍계정은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
쌍계정은 1973년 4월 21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이 누정은 충렬왕 6년(1280)에 정가신(鄭可臣)이 건립하였다는데 금성산(錦城山)에서 내려온 계곡이 양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쌍계정(雙溪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태어나 금안동에서 자랐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밀직학사, 정당문학 등을 지냈는데 문장에 능하고 청렴결백하였다. 당시 쌍계정은 정가신과 문숙공 김주정(文肅公 金周鼎 1228~1290), 문정공(文靖公) 정가신(鄭可臣, ?~1298), 문현공 윤보(文顯公 尹珤 1252~1329) 등이 모여 학문과 인격을 닦던 곳이어서 삼현당(三賢堂)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조선 세조 때 부터 선조 때까지 정서(鄭鋤), 신숙주(申叔舟), 신말주(申末舟), 죽오당(竹梧當), 김건(金鍵), 홍천경(洪千璟) 등 당시 대표적인 학자들의 학문 연구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쌍계정은 규약을 정하여 미풍양속을 지키도록 행하는 계회(契會)와 시회(詩會)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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