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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휘 태현 사실(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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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8-04-21 11:16 조회2,1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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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휘 태현(文正公 諱 台鉉 1261-1330)
공의 자는 不器요 號는 快軒이고 만년호는 설암(雪菴)이다.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 광정대부 첨의중찬(匡靖大夫 僉議中贊/*門下侍中의 別稱), 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이었으며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치사(致仕)하였다.
공은 1330년 10월 6일에 향수 70에 졸(卒)하시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부(父)의 휘(諱)는 수(須)요 초휘(初諱)는 지용(之用)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영광군부사(靈光郡副使)로 제주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토벌(討伐)하다 순절(殉節)하니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판예부사(判禮部事), 문하시중(門下侍中)에 루증(累贈)되었으며 조(祖)의 휘(諱)는 경량(鏡亮)이니 조청대부 금오위대장군(朝淸大夫 金吾衛大將軍) 과 조정대부 흥위위대장군(朝靖大夫 興衛尉大將軍)(충숙공묘지)이 증문하평장사(贈門下平章事)이시다.(문숙공묘지, 문정공묘지).증조(曾祖)의 휘(諱)는 광세(光世)이니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이며 상서 좌우복야(尙書左右僕射)(문정공묘지,문숙공묘지)와 조의대부 신호위대장군(朝議大夫 神虎衛大將軍/*충숙공묘지)에 증직(贈職)되었다.

문정공의 어머니는 변한국 대부인 옥구고씨(卞韓國大夫人 沃溝高氏)로 수(壽) 102세였으며 외조부는 조청대부 예빈경(朝請大夫 禮賓卿) 정 이다.
선배(先配)는 김해김씨로 부(父)는 의(儀)이니 神虎衛 中郞將이요. 조(祖)는 연(璉)이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사(守太師),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이다.

계배(繼配)는 개성군대부인(開城郡大夫人) 왕씨(王氏)이니 부(父)는 신호위 낭장(神虎衛郎將) 증추밀원사(贈樞密院使) 정단(丁旦)이요 조(祖)는 예빈경(禮賓卿) 근(覲)이다.

공(公)의 자녀는 4男 2女가 있으니 장남 의랑공(議郞公) 광식(光軾)은 선배(先配) 김해김씨소생(金海金氏所生)이요, 문민공 광철(文敏公 光轍), 문간공 광재(文簡公 光載), 록사공 광로(錄事公 光輅) 3자(子)와 문숙공 안목(文淑公 安牧)과 밀양군 박윤문(密陽君 朴允文)에게 출가한 2女는 계배(繼配)인 왕씨 소생(王氏所生)이다.

공(公)은 1275년(1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이듬해인 1276년(16세)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좌우위참군(左右衛參軍), 직문한서(直文翰署)에 제수되었으며 1288년에 당후관(堂後官)을 거쳐 권지(權知)가 되고 판도총랑(版圖摠郞), 우승지(右丞旨)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1302년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러 성절사(聖節使)로 원(元)나라에 갔을 때 원제(元帝)가 공(公)의 충성(忠誠)을 크게 치하(致賀)하여 정동행중서성 좌우사 낭중(征東行中書省 左右使 郎中)으로 임명하였으며 1306년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로 원나라에 가서 왕 부자간(父子間)을 이간시키려는 도당들의 흉모(凶謀)를 밝히고 돌아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1321년에 첨의평리(評理),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 권정동행성사(權征東行省事)를 역임했으며 13027년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광정대부 첨의중찬(匡靖大夫 僉議中贊)으로 수문관 대재학(修文館 大提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을 겸하고 상호군(上護軍),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가자하여 치사(致仕)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충렬왕 24년(1298) 8월
갑술(甲戌)에 좌부승지(左副承旨) 권영(權永)과 우사의(右司議) 조간(趙簡)과 총랑(摠郞) 김태현(金台鉉)과 전사간(前司諫) 김호(金祜)로 하여금 선법(選法)을 주재(主宰)케 하였다.
-甲戌, 以左副承旨權永·右司議趙簡·摠郞金台鉉·前司諫金祜, 主選法.-

충렬왕 27년(1301) 7월
을묘(乙卯)에 홀지(忽只)의 각 번(番)과 재상의 방고(房庫) 중방(重房)이 날[日]을 번갈아 왕을 위해 향연을 열었다. 시랑 찬성사(侍郞贊成事) 한희유(韓希愈), 찬성사(贊成事) 최유엄(崔有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송화(宋和)·김태현(金台鉉), 밀직 부사(密直副使) 김연수(金延壽), 지신사(知申事) 오기(吳祁), 좌승지(左承旨) 송방영(宋邦英) 등에게 명령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일을 의론하여 아뢰게 하였다
-乙卯, 忽只各番·宰樞·房庫·重房, 輸日享王. 命侍郞?成事韓希愈·?成事崔有知密直司事宋和·金台鉉·密直副使金延壽·知申事吳祁·左承旨宋邦英等, 議利國便民之事, 以聞.-

을축(乙丑)에 밀직 부사(密直副使) 김태현(金台鉉)을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乙丑, 遣密直副使金台鉉, 如元, 賀聖乙丑, 遣密直副使金台鉉, 如元, 賀聖節-
충렬왕 28년(1302) 6월
을해(乙亥)에 첨의참리(僉議參理) 민지(閔漬)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김태현(金台鉉)에게 명령하여 급제(及第) 20인을 모아 하성절표(賀聖節表) 상승상국서(上丞相國書) 축성수불도(祝聖壽佛刀)로써 시험하였던 바 백인수(白仁壽), 복기(卜祺), 권영(權영), 김지(金芝) 등이 이어서 합격하였으므로 모두 문한서령(文翰署令)을 제수(除授)하였다
-乙亥, 命僉議?理閔漬, 知密直司事金台鉉, 聚及第二十人, 試以賀聖節表·上丞相國書·祝聖壽佛?, 白仁壽·卜祺·權영·金芝等, 連中之, 皆授文翰署令.-

충렬왕 29년(1303) 7월
병인(丙寅)에 김태현(金台鉉)이 새로 급제(及第)한 사람을 거느리고 수령궁(壽寧宮)에 나아가 상알(上謁)하거늘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丙寅, 金台鉉, 率新及第, 詣壽寧宮上謁, 賜宴.-

충렬왕 29년(1303) 11월
임신(壬申)에........ 김태현(金台鉉)·김심(金深)으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김연수(金延壽)·김문연(金文衍)으로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삼고....
-壬申,..... 金台鉉·金深, 同知密直司事, 金延壽·金文衍, 爲密直副使......... -

충렬왕 31년(1305) 2월
무인(戊寅)에 ..... 김태현(金台鉉)으로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삼고, 신여계(申汝桂)로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삼았다.
-戊寅, ... 金台鉉, 爲密直司使, 申汝柱, 爲密直副使.-
충렬왕 31년(1305) 7월
기사(己巳)에 권영(權永)으로 도첨의 참리(都僉議參理)를 삼고, 김태현(金台鉉)으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己巳, 以權永, 爲都僉議參理, 金台鉉, 知都僉議司事,-
충렬왕 32년(1306) 8월
기해(己亥)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김태현(金台鉉)을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己亥, 遣知都僉議司事金台鉉, 如元, 賀聖節.-

충렬왕 33년(1307) 3월
신묘(辛卯)에..... 김심(金深)으로 도첨의 참리(都僉議參理)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삼고, 허평(許評)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김연수(金延壽)·김태현(金台鉉)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辛卯..... 金深, 爲都僉議參理判三司事, 許評, 判密直司事, 金延壽·金台鉉, 知密直司事-

충선왕 1년(1309) 4월
신미(辛未)에.....유청신(柳淸臣) 박의(朴義) 김심(金深)으로 찬성사(贊成事)를 삼고 권영(權永) 김이용(金利用)으로 평리(評理)를 삼고 김태현(金台鉉)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삼고...
-辛未... ·朴義·金深, 爲贊成事, 權永·金利用, 爲評理, 金台鉉, 判三司事-

충숙왕 8년(1321) 1월
갑진에 김이용(金利用)으로 수 첨의 정승(守僉議政丞)을 김순(金恂)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오잠(吳潛) 박허중(朴虛中)으로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를, 조련(趙璉) 김태현(金台鉉)으로 평리(評理)를...
-甲辰, 以金利用, 守僉議政丞, 金恂, 判三司事, 吳潛·朴虛中, 僉議?成事, 趙璉·金台鉉, 爲評理-

충숙왕 8년(1321) 10월
경술(庚戌)에 최유명(崔有螟)으로 대령군(大寧君)을 삼고 김태현(金台鉉)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삼고
-庚戌, 以崔有螟, 爲大寧君, 金台鉉, 判三司事-

충혜왕 즉위년(1330) 2월
정미(丁未)에 황제가 규장각(奎章閣)에 거동하여 왕에게 국인(國印)을 주니 왕이 정승(政丞)으로 치사(致仕)한 김태현(金台鉉)에게 명령하여 정동행성사(征東行省事)를 대리하도록 하였다.

충혜왕 즉위년(1330) 4월
임오(壬午) 초하루에 호군(護軍) 조득규(趙得圭)가 원나라에 가서 왕께 사뢰기를,
“상왕(上王)이 권성(權省 권정동행성사(權征東行省事)) 김태현(金台鉉)과 윤석(尹碩), 원충(元忠) 등을 가두고 정방길(鄭方吉)로 행성사(行省事)를 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壬午朔, 護軍趙得圭, 如元, 白王曰, 上王, 囚權省金台鉉, 及尹碩·元忠等, 以鄭方吉, 權行省事.-

충혜왕 즉위년(1330) 10월
계축(癸丑)에 검교 정승(檢校政丞) 김태현(金台鉉)이 죽었다.
-癸丑, 檢校政丞金台鉉, 卒.-

<고려사(高麗史) 지(志) 선장(選場)>
충렬왕(忠烈王)...29년 6월에 밀직사사(密直司事) 김태현(金台鉉)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비서 윤(秘書尹) 김우(金祐)가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고 박리(朴理) 등 33인에게 급제(及第)를 사(賜)하였다..
-忠烈王..二十九年六月, 密直司事金台鉉, 知貢擧, 秘書尹金祐, 同知貢擧, 取進士, 賜朴理等三十三人及第.-
<고려사(高麗史) 지(志) 국자시(國子試) 액수(額數)>
충렬왕(忠烈王) 원년(元年) 4월에 상서 우승(尙書右丞) 이인성(李仁成)이 시(詩)·부(賦)로 김태현(金台鉉) 등 21인과 10운시(詩)로 조전(趙전) 등 49인과 명경(明經) 2인을 취하였다.
-忠烈王元年四月, 尙書右丞李仁成, 取詩賦金台鉉等二十一人·十韻詩趙?等四十九人·明經二人-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김태현(金台鉉)>
김태현(金台鉉)의 자(字)는 불기(不器)요 광주 사람으로 원조(遠祖)는 사공(司空)인 김길(金吉)이니 태조(太祖)를 도와 공(功)이 있었고 부(父)는 김수(金須)이니 담략(膽略)이 과인(過人)하였다. 등제(登第)하여서는 어사(御史)를 거쳐 나가 영광군(靈光郡)을 다스렸으며 장군(將軍) 고여림(高汝霖)을 따라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할 때 먼저 <육지에> 올라 진몰(陣沒)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모(母)는 고씨(高氏)이니 명성(明星)이 회중(懷中)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김태현(金台鉉)을 낳았다. 김태현(金台鉉)이 10세(歲)에 고아(孤兒)가 되매 근학(勤學)하여 숙성(夙成)하였으며 풍의(風儀)가 단아(端雅)하고 미목(眉目)이 그림같았다. 일찍이 동배(同輩)들과 더불어 선진(先進)의 집에서 수업(受業)하는데 선진(先進)이 기특하게 여겨 그를 사랑하고 자주 그를 이끌어들여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집에 새로 과부(寡婦)가 된 딸이 있어 조금 시(詩)를 아는지라 하루는 창틈으로 시(詩)를 던져 이르기를,
“마상(馬上)의 뉘집 백면생(白面生 미남(美男))인지 근래(近來) 석달이나 되도록 이름을 알지 못하였더니 이제와서 비로소 김태현(金台鉉)인줄 알았으니 가는 눈과 긴 눈쌉에 남몰래 정(情)이 들도다.”하니 이로부터 김태현(金台鉉)이 발길을 끊고 가지 아니하였다. 숙부(叔父) 김주정(金周鼎)이 그의 사부(詞賦)를 보고 이상(異常)히 여겨 말하기를,
“우리집을 키울자는 반드시 너이니 우리 형(兄)은 죽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원년(元年)에 나이 15세로 감시(監試)에 장원(壯元)하고 이듬해에 등제(登第)하였으며 뒤에 또 전시(殿試)에 합격(合格)하여 좌우위참군(左右衛參軍) 직문한서(直文翰署)를 제수(除授)하고 좌창별감(左倉別監) 판응방사(判鷹坊事)가 되었는데 인후(印侯) 등이 응방인(鷹坊人)의 봉급을 주지 아니하였다고 구죄(構罪)하여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다. 여러번 옮겨 판도총랑(版圖摠郞)이 되어 권부(權溥)·조간(趙簡)과 더불어 전주(銓注)를 맡았고 우승지(右承旨)에 천배(遷拜)되었다. 밀직부사(密直副使)에 나아가 성절(聖節)을 축하(祝賀)하려고 원(元)에 가는데 상도(上都)에 이르니 마침 제(帝)가 감숙(甘肅)에 행차하여 조(詔)하기를,
“천하(天下)의 진공사(進貢使)는 모두 경사(京師)에 이르러 머물게 하라.” 하거늘 김태현(金台鉉)이 중서성(中書省)에 말하기를,
“하국(下國 고려(高麗))이 대국(大國)을 섬긴 이래로 세시(歲時) 조하(朝賀)에 일찍이 빠짐이 없었는데 경사(京師)에 머물게 하는 것은 제명(帝命)이오 행재(行在)에 치달(致達)케 하는 것은 우리임금의 명(命)이라 내가 차라리 제(帝)에게 죄(罪)를 얻을지언정 감히 우리 임금의 명(命)을 폐(廢)할 수는 없다.” 하매 중서성(中書省)이 이를 허락하는지라 드디어 행재(行在)에 도달하니 제(帝)가 충간(忠懇)을 가상(嘉尙)히 여겨 크게 상뢰(賞賚)를 더하고 어찬(御饌)을 하사(下賜)하여서 총애하였다. 동지사사(同知司事) 문한 승지(文翰承旨) 지공거(知貢擧)에 옮겨 사(士)를 시취(試取)하고 신급제(新及第)를 거느려 상알(上謁)하니 왕이 향연을 하사(下賜)하는데 때에 원사(元使) 이학사(李學士)가 자리에 있다가 왕에 말하기를,
“천하(天下)에 이런 일이 없는데 오직 귀방(貴邦)이 고풍(古風)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장참정(張參政)과 더불어 봉사(奉使)하였을 때 마침 이를 보았고 이제 또 보게 되었으니 감히 배하(拜賀)하지 아니하리오.” 라고 하였다. 원(元)이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우사 낭중(左右司郞中)을 제수(除授)하고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에 승직(陞職)하였는데 때에 간신(奸臣)이 분당(分黨)하여 왕의 부자(父子)를 이간(離間)하므로 정(情)이 서로 통(通)하지 아니하는지라 김태현(金台鉉)이 그 사이를 주선(周旋)하되 한결같이 지공(至公)으로써 하매 사람이 이간(離間)하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의> 인종(仁宗)을 받들어 내란(內亂)을 평정(平靖)함에 미쳐서 본국(本國) 신료(臣僚)로 다른 마음을 품은 자를 모두 죽이거나 유배보냈는데 홀로 김태현(金台鉉)은 머물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복직(復職)하였으며 이어 자의찬성사(咨議贊成事)를 삼았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매 대신(大臣)을 분견(分遣)하여 제도(諸道)의 민호(民戶)를 검사(檢査)하는데 김태현(金台鉉)으로 양광수길도(楊廣水吉道)의 계점사 행 수주 목사(計點使行水州牧使)를 삼아 제도(諸道)로 하여금 첨의사(僉議司)에 보고하여 지시를 받게 하고 매양 회첩(回牒)하기를,
“마땅히 양광수길도(楊廣水吉道)의 한 바에 의(依)하여 이를 행하라.” 고 하였으므로 제도(諸道)가 모두 취(取)하여 본받았다. 상의 찬성사(商議贊成事)로서 예(例)에 의하여 파직(罷職)되매 10년이나 한거(閑居)하였다.
충숙왕(忠肅王) 8년(年)에 기용(起用)되어 첨의 평리(僉議評理)가 되고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蕃)에 귀양가고 충숙왕(忠肅王)이 원(元)에 억류(抑留)되었는데 국중(國中)에 당론(黨論)이 일어나니 수상(首相)은 왕을 종행(從行)하였고 김태현(金台鉉)이 비록 2부(府)의 수상(首相)으로 있었으나 아래 있는 자가 권세(權勢)를 잡아 일이 막힘[杆格]이 많았으되 김태현(金台鉉)의 진정(鎭定)함을 힘입어 마침내 나라를 그르치게 하지 아니하였다.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가 충선왕(忠宣王)을 해(害)할 것을 꾀하고 그 형(兄) 임서(任瑞)는 김지갑(金之甲)의 패면(牌面)을 빼앗거늘 숙비(淑妃)가 군신(群臣)으로 하여금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여 이를 호소(呼訴)하게 하는데 김태현(金台鉉)이 먼저 서명하였으나 백원항(白元恒) 박효수(朴孝修)는 모두 말을 칭탁(稱托)하고 서명하지 아니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다시 정사를 맡으매 경개(更改)함이 많아 김태현(金台鉉)을 파직(罷職)하고자 하다가 조금 뒤에 말하기를,
“이 늙은이는 끝내 타의(他意)가 없었으니 마땅히 버리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나 집정(執政)으로 찬성(贊成)하는 자가 없어 마침내 파면(罷免)되었고 이어 참의 정승(參議政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김태현(金台鉉)의 모(母)는 나이 100세(歲)라 해마다 늠미(름米) 30석(碩)을 하사(下賜)하였고 102세(歲)에 졸(卒)하였다. 뒤에 관제(官制)를 개혁(改革)하였으므로 중찬 치사(中贊致仕)로 개수(改授)하였다. 17년에 충혜왕(忠惠王)이 세자(世子)로서 원(元)에 있는데 왕이 전위(傳位)할 것을 청하매 원(元)이 사신(使臣)을 보내와서 국왕(國王)의 인(印)을 빼앗고 김태현(金台鉉)으로 하여금 행성(行省)의 일을 권행(權行)케 하였는데 사신(使臣)이 돌아가매 재상(宰相)이 충숙왕(忠肅王)의 명령(命令)으로 김태현(金台鉉)을 부르거늘 <그가> 이르매 곧 성인(省印)을 거두었으며 김태현(金台鉉)과 윤석(尹碩)·원충(元忠) 등을 가두고 정방길(鄭方吉)로 성사(省事)를 권행(權行)케 하였다. 이에 김태현(金台鉉)이 가족(家族)을 이끌고 동(東)으로 금강산(金剛山)에 가서 놀았으니 대개 혐의(嫌疑)를 멀게 함이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재상(宰相)이 자의(恣意)로 행성인(行省印)을 거둔 것과 좌우사관(左右司官) 파(罷)한 것을 책(責)하고 역마(驛馬)로 김태현(金台鉉)을 불러 다시 성사(省事)를 서리(暑理)케 하였는데 이해에 졸(卒)하매 문정(文正)이라 시(諡)하니 나이 70이었다. 성품이 염직(廉直)하고 언동(言動)이 예(禮)를 따랐으며 낮에 눕지 아니하고 더워도 윗옷을 벗지 아니하여 사람 대접하기를 온화하게 하고 어머니 섬기기를 효도(孝道)로 하여 자손(子孫)가르치기를 법(法)이 있게 하고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아니하였다. 또한 구원(仇怨)을 삼음이 없었고 3조(朝)를 역사(歷事)하매 진퇴(進退)를 의(義)로써 하였으며 번극(煩劇)함을 처리(處理)하되 재결(裁決)이 정민(精敏)하매 사람들이 그 밝음에 성복(誠服)하였고 역대(歷代)의 전고(典故)를 말하기를 어제 일과 같이하고 매양 나라에 큰 의혹(疑惑)이 있으면 반드시 나아가 물어서 결단(決斷)하였다. 일찍이 손수 동인(東人)의 시문(詩文)을 모아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이름하였다. 아들은 김광식(金光軾)·김광철(金光轍)·김광재(金光載)·김광로(金光輅)인데 김광식(金光軾)은 등제(登第)하여 관(官)이 총부 의랑(摠部議郞)에 이르렀고 김광철(金光澈)은 등제(登第)하고 누관(累官)하여 판밀직(判密直)에 이르고 화평군(化平君)을 봉(封)하였으며 김광로(金光輅)는 등제(登第)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김광철(金光澈)·김광재(金光載)·김광로(金光輅)는 계실(繼室) 왕씨(王氏)의 소생(所生)이다. 왕씨(王氏)는 3자(子)가 등과(登科) 함으로써 해마다 국고미(國?) 20석(碩)을 받았다.
金台鉉, 字不器, 光州人, 遠祖司空吉, 佐太祖有功, 父須, 膽略過人, 登第, 由御史, 出知靈光郡, 從將軍高汝霖, 討三別抄, 先登沒陣, 不還, 母高氏, 夢明星入懷中, 生台鉉, 十歲而孤, 勤學夙成, 風儀端雅, 眉目如晝, 嘗與?輩, 受業先進家, 先進奇愛之, 屢引入餉之, 家有女, 新寡, 稍解詩, 一日, 從窓隙以詩投之曰, 馬上誰家白面生, 邇來三月不知名, 如今始識金台鉉, 細眼長眉暗入情, 台鉉自此絶不往, 叔父金周鼎見其詞賦, 異之曰, 大吾門者, 必汝也, 吾兄爲不亡矣, 忠烈元年, 年十五, 魁監試, 明年, 登第, 後又中殿試, 授左右衛?軍直文翰署, 爲左倉別監判鷹坊事, 印侯等 직以不給鷹坊人俸, 囚巡馬所, 累轉版圖摠郞, 與權溥·趙簡, 典銓注, 遷右承旨, 進密直副使,
賀聖節如元, 至上都, 適帝幸甘肅, 詔, 天下進貢使, 皆至京師而止, 台鉉言於中書省曰, 下國自事大以來, 歲時朝賀, 未嘗有闕, 止於京師, 帝命也, 達於行在, 吾君命也, 吾寧獲罪於帝, 不敢廢吾君命, 省許之, 遂達行在, 帝嘉忠懇, 大加賞賚, 賜御饌以寵之, 遷同知司事文翰承旨知貢擧取士, 率新及第, 上謁, 王賜宴, 時元使李學士在席, 言於王曰, 天下無此事, 唯貴邦不墜古風, 往歲與張?政奉使, 適見之, 今又獲覩, 敢不拜賀, 元授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 陞知僉議司事, 時奸臣分黨, 離閒王父子, 情不相通, 台鉉周旋其閒, 一以至公, 人無閒言, 及忠宣奉仁宗靖內亂, 本國臣僚懷二者, 悉誅竄, 獨留台鉉, 復知密直司事, 尋爲咨議?成事, 忠宣卽位, 分遣大臣, 括諸道民戶, 台鉉爲楊廣水吉道計點使行水州牧使, 諸道報僉議司受指?, 每回牒曰, 當依楊廣水吉道所爲行之故, 諸道皆取法, 以商議?成事, 例罷, 閑居者十年,

忠肅八年, 起爲僉議評理, 尋判三司事, 忠宣竄吐蕃, 忠肅被留于元, 國中黨論起, 首相從王, 台鉉雖首居二府, 在下者秉權, 事多杆格, 然賴台鉉鎭定終不至誤國, 伯顔禿古思, 謀危忠宣, 其兄任瑞奪金之甲牌面, 淑妃令群臣, 上書中書省訴之, 台鉉先署名, 白元恒·朴孝修, 皆托辭不署, 忠肅復?政, 多所更改, 欲罷台鉉, 旣而曰, 此老, 終始無他, 不宜去, 執政無?之者, 卒罷, 尋以僉議政丞致仕, 台鉉母, 年百歲, 歲賜름三十碩, 及百二歲而卒, 後革官制, 改中?致仕, 十七年, 忠惠以世子在元, 王請傳位, 元遣使來取國王印, 令台鉉權行省事, 使者還, 宰相以忠肅命, 召台鉉, 至則收省印, 囚台鉉及尹碩·元忠等, 以鄭方吉, 權行省事, 於是, 台鉉?家, 東遊金剛山, 盖遠嫌也, 忠惠遣使, 責宰相擅收省印, 罷左右司官, 馹召台鉉, 復署省事, 是年, 卒, 諡文正, 年七十, 性廉直, 言動循禮, 晝不臥, 暑不袒, 待人以和, 事母孝, 敎子孫有方, 不妄交人, 亦無爲仇怨者, 歷事三朝, 進退以義, 處煩劇, 裁決精敏, 人服其明, 言歷代典故, 如昨日事, 每國有大疑, 必就咨決, 嘗手集東人詩文, 號東國文鑑, 子光軾·光轍·光載·光輅, 光軾, 登第, 官至摠部議郞, 光轍, 登第, 官累判密直, 封化平君, 光輅, 登第而夭, 光轍·光載·光輅, 繼室王氏出也, 王氏, 以三子登科, 食國?歲二十碩.
<문정공 휘 태현 묘지명(文正公 諱 台鉉墓誌銘>
공의 이름은 태현(台鉉)이고, 자는 불기(不器)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본래 광산(光山)의 망족(望族)으로, 개국 초기부터 벼슬하여 대대로 끊이지 아니하였다. 증조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광세(光世)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고, 조부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경량(鏡亮)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감찰어사(監察御史) 수(須)는 여러 차례 추증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시중은 일찍이 충헌왕(忠憲王, 高宗) 을묘년(고종 42, 1255 )에 진사제(進士第)에 급제하였는데, 성품과 용모가 훌륭하고 아름다웠으며 담력과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종사하면서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지원(至元) 기사년(원종 10, 1269)에 어사(御史)를 거쳐 지영광군주사(知靈光郡州事)로 나갔다. 이듬해에 삼별초(三別抄)가 난을 일으켜 강도(江都,=江華)의 인물을 약탈하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며 먼저 탐라(耽羅)를 점거하려 하였으므로, 본국에서 장군 고여림(高汝霖)을 파견하여 쫓아가 토벌하도록 하고, 또 전라도 선정관(全羅道 選正官)에게 문서를 내려보내 사람들이 평소 믿고 따를 수 있는 자가 군사를 이끌고 함께 나가라고 하였다. 시중이 그 선발에 뽑히자 집에서 숙식을 하지 않고 드디어 초군(抄軍)과 함께 급하게 가서 고여림과 탐라에서 만났다. 적들이 아직 진도(珍島)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탐라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밤낮으로 성벽을 쌓고 병기를 수리하며 내습로를 끊어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키는 사람들이 겁을 내어 움추리고 힘을 다하지 아니하니 적이 다른 길을 거쳐 이르렀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다. 시중이 평소와 같이 대의(大義)로써 사졸을 격려하니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여 용기를 백 배나 더하여 용감하게 소리치며 다투어 달려나가 적의 선봉을 거의 다 죽였다. 그러나 토착지방민[土人]들이 적을 도와주게 되니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고 장군과 함께 진중에서 전사하고 돌아오지 못하게 되어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
공은 10세에 부친을 잃었다. 대부인(大夫人)은 작고한 예빈경(禮賓卿) 고정(高挺)공의 딸로 영광에서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법도에 맞게 가르치니, 공도 생각을 고쳐서 독서에 힘썼다. 14세가 되자 숙부이자 작고한 재상인 문숙공(文肅公, 金周鼎)을 따라가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는데, 문숙공이 그가 지은 사부(詞賦)가 뛰어난 것을 보고 “우리 가문을 크게 떨칠 사람은 너로구나. 우리 형님은 돌아가시지 않았도다” 라고 하였다. 1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한 번에 으뜸으로 합격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또 예부시(禮部試)에 나가 진사에 급제하였다. 정축년(충렬왕 3, 1277)에 녹원사(錄苑事)가 되었다가 뒤에 강음목감직(江陰牧監直)이 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가 되었다. 경진년(충렬왕 6, 1280 ) 여름에 전시(殿試)에 급제하여 좌우위참군 겸 직문한서(左右衛?軍 兼 直文翰署)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7년 동안 모두 세 차례 관직이 바뀌면서 7품에 이르렀다. 모두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났다.

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밀직당후관(密直堂後官)을 거쳐 권지통례문지후(權知通禮門祗候)가 되었다. 얼마 뒤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에 제수되고,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은비(銀緋)를 입고 감찰시사(監察侍史)로 옮겼다가 금자(金紫)를 하사받았다. 기거랑(起居郞)으로 바뀌었다가 기거주(起居注)를 거쳐 첨의사인(僉議舍人)에 제수되었으며,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바뀌면서 조현대부(朝顯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대덕(大德) 무술년(충렬왕 24, 1298) 봄에 덕릉(德陵, 忠宣王)이 내선[內讓]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자 공의 잘못을 면해 주었다. 가을에 덕릉이 (원의) 조정에 들어가고 충렬왕(忠烈王)이 복위하자 판도총랑(版圖摠郞)에 기용되고, 전중윤(殿中尹)으로 옮겼다가 여러 차례 옮겨 밀직우승지 판사재사 문한시독 사관수찬 지제고 지군부감찰사(密直右承旨 判司宰事 文翰侍讀 史館修撰 知制誥 知軍簿監察司)가 되었으며, 조봉·중열(朝奉·中列) 2대부(大夫)가 더해졌다.

경자년(충렬왕 26, 1300)에 봉익대부 밀직부사 겸 감찰대부(奉翊大夫 密直副使 兼 監察大夫)에 제수되고, 신축년(충렬왕 27, 1301 )에 왕명을 받들어 천수성절(天壽聖節)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상도(上都)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성종(成宗)이 삭방유수(朔方留守)로 친행(親行) 중에 있었으므로, 성(省)에서 각국 사신들에게 군사일에 관한 긴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상도에) 머물러 있으라고 조칙을 내렸다. 공이 성에 나가 “우리 나라가 귀국을 섬긴 이래 해마다 보내는 축하사절을 일찍이 빠뜨린 일이 없는데, 이제 여기에 머물러서 나아가지 못하게 하니 참으로 매우 황공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상도를 떠나 북으로 가기를 허락받았다. 1년 동안 한 역[站] 한 역을 지나면서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여 성절(聖節)을 맞이하였다. 조복(朝服)을 갖추어 하례를 올렸는데 의식이 궁궐의 연회에서 행하는 것과 같으니, (황제가) 멀리서 왔다고 하여 특별히 어식(御食)을 내려주면서 총애하였다. 당시 황제가 친히 적을 정벌하여 물리쳤는데, 공이 먼저 황제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경하하였다.

동지지사사(同知知司事)에 오르면서 문한승지(文翰承旨)직을 겸대하고, 또 원에서 황제의 명[宣命]으로 승무랑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承務郞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다.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옮기면서 대보문(大寶文)을 겸하였고,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바뀌었다.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첨의부(僉議府)에 들어가 지사사(知司事)가 되고, 병오년(충렬왕 32, 1306 )에 또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러 원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 때 충렬왕이 상도에 있으면서 신하를 만나고 있었는데, 무술년(충렬왕 24, 1298)에 복위한 때로부터 나라 사람들이 파당을 나누어 부자의 정을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공이 그 사이에서 중재를 하였는데,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 봄에 덕릉이 인종(仁宗)을 거들어 내부의 난을 평정하니 공(功)이 천하에 높았으므로, 본국의 신하로서 임금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자는 모두 떠나갔다. 위로는 이부(二府, 僉議府와 密直司)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리에 이르기까지 혹은 죽이기도 하고 혹은 유배보내기도 하면서 모두 바꾸었으나, 홀로 공만을 유임시켜 다시 지밀직사(知密直司)로 삼았는데, 여름에 밀직이 혁파되자 자의찬성사(咨議贊成事)가 되었다.

지대(至大) 무신년(충렬왕 34, 1308)에 충렬왕이 승하하고 덕릉이 즉위하자 대신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을 생활을 살피고 호적을 정리하려 할 때에, 공을 양광수길도 계점사 행수주목사(楊廣水吉道 計點使 行水州牧使)로 삼았다. 각도에서 첨의사(僉議司)에 글을 올려 적용할 법규를 요청하였으나 첨의사에서는 정해진 것이 없었으므로 회송문서에다 매번 마땅히 양광수길도의 1도에서 정한 예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모두 관리를 보내어 그 법을 배워 갔다.

기유년(충선왕 1, 1309) 여름에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어 2년 간 재임하다가, 삼사(三司)가 혁파되자 대광 상의찬성사(大匡 商議贊成事)가 되었다. 신해년(충선왕 3, 1311)에 또 상의(商議)의 관직을 없애니 관례에 따라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벼슬 없이 한가하게 지낸 것이 10년이었다. 신유년(충숙왕 8, 1321)에 기용되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가 곧 판삼사가 되고, 관계(官階)는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다.

연우(延祐) 말에 덕릉이 토번(吐蕃)으로 가게되는 일이 벌어지고, 지치(至治) 초에 상왕(上王)이 원에 들어와 머물게 되자 나라에서는 파당의 논의가 일어났다. 당시 총재(?宰)는 임금을 수행하여 갔으므로 공이 이부(二府)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아래에 있는 관리들이 오히려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채 서로 마음을 합하지 않았으므로, 일이 있을 때마다 모두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나라가 잘못되지 아니한 것은 오직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4)에 상왕이 다시 복위하게 되자 여러 가지가 다시 바뀌게 되면서 공을 파면시키고자 하였다. 임금은 “이 노인은 시종일관하여 다른 뜻이 없는 분이니, 내쫓는 것은 옳지 않소” 라고 하였으나, 권력을 잡은 자로 어리석게 찬동하는 자가 있어서 마침내 파직되었다. 이듬해에 임금이 귀국하자, 삼중대광첨의정승(三重大匡 僉議政丞)으로 벼슬을 물러나 은퇴하였다.

이 해에 대부인의 나이가 100세였으므로 해마다 30석(碩)의 곡식을 하사받았다. 정묘년(충숙왕 14, 1327)에 관호를 다시 바꾸었으므로 삼중대광 첨의중찬 수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三重大匡 僉議中贊 修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判典理司事)가 되어 그대로 은퇴하였다. 이 때에 대부인이 작고하니 나이가 102세로서, 특별히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충숙왕 17, 1330) 봄에 국왕<충혜왕>이 지위를 이으라는 명을 받게 되니, (원의) 조정에서 객성(客省)에 70명의 날랜 군사[堅]를 보내어 금인(金印)을 가져오게 하면서 공을 권행성사(權行省事)로 임명하였다. 공이 거듭하여 그 명을 받지 않자 또 서사(署事, 署行省事)로 기용하였다. 조정의 사신이 2월 2일에 돌아가고 29일이 되자 당시 재상들이 순군(巡軍)에 모여 앉아 전 임금의 명령이라 하여 공을 소환하였다. 공이 도착하자 승상의 관인(官印)을 몰수하고 성부(省府)에서 공을 축출하였다. 명에 따라 귀가하여 몇 달을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보내다가, 4월에 식구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였는데, 대개 의혹을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5월에 임금의 사신이 상도(上都)로부터 와서 당시의 재상이 마음대로 승상인(丞相印)을 빼앗은 것을 질책하면서, 좌우의 담당 관리를 파직하고 모든 월봉(月俸)을 정지시켰다. 임금의 명을 받은 관리 한 명을 파견하여 산에 다달아 명을 전하니 공은 역마(驛馬)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다시 서성사(署省事)가 되었으나, 즐겨 한 일은 아니었다. 7월에 병환의 기운이 있어 약으로 다스렸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10월 6일 계축일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이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공평하였으며 생김새가 뛰어나고 단정하였다. 말과 행동거지가 예법을 따랐으므로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히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으나, 한 번 접해보면 목소리와 기색이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대부인을 섬기며 효도를 다하였고, 부인을 대하면서도 예의를 지켰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도 방정함이 있었고, 친척과도 매우 화목하여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화합하였다. 사람들과 더불어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고 또한 원한을 가진 사람도 없었으며, 이부(二府)에 재직할 때나 파직되어 한가로이 있을 때나 손님이 오고가는 것에는 더함이나 줄어듬이 없었다. 평소에 일이 없을 때에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낮에 눕는 일이 없었고 더워도 웃옷을 벗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발[簾]을 드리운 곳에 있을 때라도 옷깃을 여미고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엄정하고 공손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내시(內侍)에 들어가서 감창시(監倉寺)의 명을 받았을 때, 번잡한 일을 현명하게 처리하니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대간(臺諫)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말한 것이 모두 원대한 계책이 되었으며, 충청·경상(忠淸·慶尙) 2도(道)의 안찰사(按察使)와 동계 안집사(東界 安集使)로 나갔을 때에는 감옥의 일과 소송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이익은 늘리고 손해는 줄이는 일을 즐겨하였으니, 당시에 이미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구제하리라 기대되었다.
세 임금<忠烈·忠宣·忠肅>을 두루 섬기면서 행동을 예의바르게 하였으며 일찍이 실낱만큼의 실언(失言)도 없었다. 역대(歷代)의 전고(典故)를 마치 어제 일처럼 환하게 알고 있어서, 매 번 나라에서 크게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공을) 찾아가서 바로 잡고는 하였다. 저술은 문장[詞]의 가르침이 체(體)를 이루고 있었으며, 시(詩)는 맑으면서도 고와서 가히 애송할 만하였다. 또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을 손수 모아서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하였으니, 정수를 모아 배열한 것이라 할 만하다. 스스로 호를 지어 쾌헌(快軒)이라 하였으며 만년에는 또 설암(雪庵)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이천(李?)등 70 명을 얻고, 예부시[禮?]를 주관하여서는 박리(朴理) 등 30여 명을 얻으니, 당시의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그 중에 들어 있다.
공은 좌우위낭장(左右衛郎將) 김의(金儀)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뜨자, 다시 신호위낭장(神虎衛郞將) 왕단(王旦)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개성군대부인(開城郡大夫人)으로 봉해졌다. 어질게 능히 가정을 다스려서, 있고 없음으로 공을 혼란스럽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아들 3인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서 나라에서 해마다 20석(石)의 곡식을 받았다. 공은 아들이 4명이고 딸이 2명인데, 첫 부인이 1남을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후부인이 낳았다. 광식(光軾)은 갑오년(충렬왕 20, 1294 )의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총부의랑(摠部議郞)에 이르렀으나 먼저 사망하여 자식이 없다. 광철(光轍)은 을사년(충렬왕 31, 1305 )의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 군부총랑 진현직제학(軍簿摠郞 進賢直提學)이며, 광재(光載)는 계축년(충선왕 5, 1313 )의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광로(光輅)는 정사년(충숙왕 4, 1317 )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결혼하기 전에 일찍 사망하여 관직은 가안부녹사(嘉安府錄事)에 그쳤다. 장녀는 전교령 예문직제학(典校令 藝文直提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가서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으로 봉해졌고, 차녀는 예문공봉(藝文供奉)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2명이 있는데 하나는 아무개로 별장(別將)이며, 다음은 아직 이름이 없다.
국왕이 어릴 때부터 (공의) 명성을 들었는데 즉위한 처음에 성(省)의 권임(權任)을 맡긴 것은 대개 다시 재상으로 삼아 국공(國公)이 되게 할 뜻이 있어서였다. 공이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부의를 후하게 내리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추증하면서, 다시 담당 관청에게 비용을 쓰라고 명하였다. 11월 8일 갑신일에 덕수현(德水縣) 동쪽 풀이 많은 언덕[多草之原]에 장사지내면서, 두 아들이 공이 남긴 명(命)이라 하여 문인(門人) 최(崔) 아무개에게 묘지의 명(銘)을 부탁하였다. 아무개가 공을 섬긴 지 거의 30년이나 되는데 항상 송구스럽게도 보살핌을 비할 바 없이 받아 왔다. 드리워진 덕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글을 짓는 일은 마땅히 능한 사람에게 미루어야 할 것이나, 공이 명하였으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백 번 절하고 울면서 명(銘)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아, 문정공이여, 실로 나라의 원로이신데
이제 홀연히 가시니 어디에다 물어보아야 합니까.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졌고, 어질고 맑은 분께서 가시니
그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공자(孔子)[宣尼]를 잃은 느낌입니다.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짓고, 자금어대(紫金魚袋) 김원준(金元俊)이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 下 (2001)〕

公諱 字不器 金氏 本光之望族 白國初已入仕 代不絶人 大王父神虎衛中郎將諱光世 贈尙書左僕射 王父金吾衛大將軍諱鏡亮 贈門下平章事 父監察御史諱須 累增門下侍中 侍中嘗於 忠憲王乙卯登進士科 質貌偉麗 膽?過人 從事中外 以廉能稱 已巳由御史 出知靈光郡 明年三別抄叛 掠江都人物 舟而南下 志有先據耽羅 本國遣 將軍高汝霖追討 又牒下全羅道 選正官 雅爲人所信服者 領軍偕赴 侍中當其選 不宿于家行抄軍 函會汝霖于耽羅 則賊猶保珍島未至 於是晝夜築堡珍理械 謀斷來道 使無得入 而守土者首鼠不爲助 賊由他道至不覺侍中素以大義勵士卒 人多感激 有百其勇 奮呼爭登 殺賊先鋒殆盡 然而士人資賊 衆寡不? 竟與高將軍歿陣不還 人寃之至今 公年十歲而孤 大夫人 故禮賓卿高公諱挺之女也 自靈光?孤以歸 敎之有法度能折節讀書 甫十四 從叔父故文肅公學擧業 文肅公見其詞賦 奇之曰大吾門者汝乎 吾兄爲不亡矣 十五 一擧司馬試果中魁 明年又赴禮?第進士 丁丑錄除江陰牧監 俄錄詹事府 庚辰夏中殿試 除左右衛參軍兼直文翰署 自此七年凡三更 官至七品 戊子由密直堂後官 權知通禮門祇候 尋除右正言知制誥 歷右司諫 服銀緋 遷監察侍史 賜金紫 改起居郎 由起居注 拜僉議舍人 改典法摠郎 陞朝顯大夫 大德戊戍春德陵改受內讓嗣王位 以公過免 秋德陵侍闕庭 忠烈王復位 起爲版圖摠郎 轉殿中尹 累遷至密直右承旨 判司宰寺 文翰侍讀 史館修撰 知制誥 知軍簿監察司 加朝奉中列二大夫 庚子拜奉翊大夫 密直副使兼監察大夫 辛丑奉王命 入賀天壽聖節 行至上都 適成宗幸朔方 留守省奉勅 諸路使臣 除軍情關緊 一切停住 公詣省言 下國自事大以來朝賀聖節未嘗有闕 今留不進實深恐懼 遂得許北行 去上都過一十一站 達行在 値聖節 具袍笏拜賀如儀 起宴帳殿 上以遠至 特賜御食以寵之 時車駕親征?敵 公先奉喜音而回 所至皆慶 遷同知知司事帶文翰承旨 又欽受 宣命授承務郎 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 遷密直司使帶大寶文 轉匡靖大夫 乙巳入僉議爲知司事 丙午 又入賀天壽節而回是時忠烈朝覲箏 自戊戍復位之後 國人分曹 至使父子之情 有所不通公周旋其間 一以公正 人無異言及丁末春 德陵奉仁宗掃淸內難 功高天下 而本國之臣 有懷貳于王者 皆去之上自二府 下逮庶僚 或誅或流 釐革且盡 獨留公復知密直司 夏罷密直 爲咨議成事 至大戊申 忠烈上昇 德陵節位 分遣大臣諸道 計點民居 欲成戶籍 以公爲楊廣水吉道計點使 行水州牧使 諸道牒報 僉議司承受條? 僉議無所定擬回文每曰 當依楊廣水吉 一道定體施行 故皆遣僚佐來取法焉 已酉夏命判三司事 居二年罷三司 爲大匡商議成事 辛亥又刪商議官 隨例罷 自是閑居者十年 辛酉起爲僉議評理 復判三司 階重大匡 延祐末 德陵有吐蕃之行 至治初 上王入朝見留 國中黨論起 時?宰 從于王所而公首居二府 在下者反執國權 不與一心 故事皆皆杆格 然終不至誤國者 由有公也 泰定甲子 上王得復政 多所更改 而欲罷公 王曰 此老終始無他 不宜去 執政罔有者 卒見罷明年 王歸國 以僉議政丞致仕 是年 大夫人年百歲 賜?歲三十碩 丁卯更革官號 就以三重大匡僉議中贊 修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判典理司事致仕及 是太夫人卒年百二歲 特贈卞韓國大夫人 至順庚午春 國王受嗣封之命 朝廷 遣客省使七十堅 來取金印 而命公權行省事 公重違其命 且起署事 朝使以二月二日而回 至二十九日 時宰會坐巡軍所 以前王命召公至則收丞相印 于省府出令 聽命旼家 數月別無行遣 四月 ?家東游金剛山 蓋避嫌也 五月 王使至自都 責時宰以擅收丞相印事 而罷其左右司官 皆停月俸 遣宣使一人到山傳命 公乘驛還京署省事 非其好也 七月氣疾作 藥治不效 至十月六日癸丑卒于家 享年七十 公性資廉平 儀表秀整 言語擧止 動循禮法 人望之若不可犯 及乎一接聲氣 又溫然而和 莫知其有也 其事大夫人孝 待夫人以禮 敎養子孫有方 親?克睦 不言而和 與人無妄交 亦無與爲仇怨者 其居二府 至罷閑居 賓客往來 不爲之增減也 平生無事必夙興夜寐 晝不偃臥 暑不袒裸 雖處簾閣 整襟危坐 肅肅如也 方其年少入內侍 奉命監倉寺 務繁愈辦 老事者以爲不可及 至參政臺諫所陳 皆遠謀 其出於忠淸慶尙二道 安集東界 獄訟歸于平 具除利害 若嗜欲然 當時已以 經濟期之 歷事三王 進退由禮 未嘗有絲毫之失 言歷代典故 班班如昨日事 每國有大疑 就訪而是正焉 其所著述詞敎得禮 詩淸艶可愛 又手集東人之文 號東國文鑑 以擬配選粹 自號快軒? 晩年又號雪庵 嘗主成均試得李??等七十人 闢禮? 得朴理等三十餘人 一時聞士多入選中 公娶右左衛郎將 金儀之女 早逝 又娶神虎衛郎將 王旦之女 封開城郡大夫人 賢而能家 不以有無?于公 以三子皆登科 食國?歲二十石 公子男四人女二人 先夫人生一男 餘皆後夫人生也 光軾登甲午科 官至摠部議郎 先卒無子 光轍登乙巳科 今爲軍簿摠郎 進賢直提學 光載登癸丑科 今爲都官正郎 光輅登丁巳科 末娶而夭 官止嘉安府錄事女適典校今 藝文直提學安牧 封海陽郡夫人 次適藝文供奉朴允文 孫男二人 曰某 職爲別將 次未名 國王自幼素聞重名在 初受封 卽以省權任之 蓋有相意及就國 公已病 聞其卒 爲之不? 弔賻加厚 贈謚曰文正 更命有司用 十月八日甲申 葬于德水縣 東多草之原 二孤以遺命屬門人 崔某銘其墓 某事公近三十年 常懼無似有負知待 至如?德垂之不朽 宜讓能者 然公之治命 不可辭也 謹百拜泣而銘之 銘曰
嗚呼文正 實國元龜 今而忽喪 于何質疑 山頹梁毁 哲人其萎 匪獨賜也 有感宣尼〔출전 : 崔瀣『拙藁千百』 권1〕
*미판독자 일부 필자보완
* 살피건대 묘지명 모두(冒頭)에 문정공의 휘자를 기록치 않고 공백(空白)으로 남겨둔 뜻은 찬자(撰者) 최해(崔瀣)가 스승의 휘자를 피하기 위해 최예피휘법(最禮避諱法)인 공백법(空白法)을 택한 때문이다.
*문정공묘지명은 왕씨부인묘지명과 함께 1747년(英祖23) 3월에 후손 득서(得瑞)씨에 의해 굴득(掘得)되었다.
<문정공 著 동국문감(東國文鑑)>
서거정(徐居正)이 1487년에 간행한 <필원잡기(筆苑雜記)> 一卷에 동국문감에 대한 구절이 있으니 당시에는 동국문감(東國文鑑)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 세상에 전하기를, “김부식(金富軾)이 정지상(鄭知常)의 재능(才能)을 질투하여 살해하였다.” 하나, 지금 《고려사》를 상고해 보니, 정지상이 묘청(妙淸)의 술책에 빠져서 그 우익(羽翼)이 다 제거되어 스스로 온전하기는 실로 어려웠으므로, 김부식이 사사로이 용서할 바도 아니었다. 또 본전(本傳) 및 여러 책에 한 마디도 억울하게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바가 이와 같음은 무슨 까닭인가. 근래에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을 상고해 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金과 鄭이 문자(文字) 사이에 감정이 쌓여 있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당시에 이미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世傳。金富軾妬才忌能。害鄭知常。今考麗史。知常墮妙淸術中。羽翼悉去而。自全實難。非富軾所得私貸。且本傳及諸書。無一語及枉害。而世之所傳如是何耶。近考金台鉉東國文鑑註曰。金鄭於文字間積不平。然則當時已有是言矣。


<휘 태현(諱 台鉉)의 직호(職號)>
문하시중(門下侍中)은 고려시대 문하성(門下省)의 종1품 관직으로 나라의 모든 정치를 총괄하는 직책인바.

982년(성종 1) 내의성(內議省)을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개편하면서 내사령(內史令)과 함께 처음으로 두었다가.
1061년(문종 15) 관제개편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이름을 바꾸고,
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 과 상서성(尙書省)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고침에 따라 문하시랑 대신 좌첨의중찬(左僉議中贊) ·우첨의중찬(右僉議中贊)으로 나누어 각 1 명씩을 두었으며
1298년(충렬왕 24년) 잠간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한 적이 있으나 곧 같은 해 중찬으로 복구하였고
1308년 첨의부가 도첨의부(都僉議府)가 됨으로써 정승(政丞)이라불렀으며
1356년(공민왕 5) 원(元)나라의 연호를 폐지하면서 모든 관제를 복구함에 따라 문하시중으로 되었다가.
1362년 중서문하성이 도첨의부로 바뀌자 다시 첨의좌정승 ·첨의우정승으로 분리되었으며.
1369년 도첨의부를 문하부로 고치자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이 라 칭하였고,
1388년(창왕 1년) 때는 시중(侍中) ·수시중(守侍中)이라 칭하였다.

문하시중에 대한 변천표
內議令(내의령)[고려초]->
門下侍中(문하시중)[995년/成宗 14년]->
門下侍郞(문하시랑)[1061년/文宗 15년]->
左/右 僉議中贊(좌/우 첨의중찬)[1275년/忠烈王 1년]->
都僉議侍中(도첨의시중)[1298년/忠烈王 24년]->
都僉議中贊(도첨의중찬)[1298년/忠烈王 24년]->
政丞(정승)[1308년/忠烈王 34년]->
僉議中贊(첨의중찬)1330년/忠肅王 17년]->
門下侍中/守門下侍中(문하시중/수문하시중[1356년/恭愍王 5년]->
僉議 左/右 政丞(첨의 좌/우 정승)[1362년/恭愍王 11년]->
門下 左/右 侍中->(문하 좌/우 시중)[1369년/恭愍王 18년]->
門下侍中/守門下侍中(문하시중/수문하시중)[1388년/昌王 1년]

휘 태현은 1261년에 출생하셨던 분으로 재임 때(70세 致仕以前)에는 문하시중이라 칭하지 않고 첨의중찬이라 하였다.

* 살피건대 고려사열전 및 묘지명에 휘 태현의 직호는 <첨의정승(僉議政丞)>, 혹은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기록되어 있지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휘 태현(諱 台鉉)의 직호는 위 변천표에 의거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바르게 기록해야 한다.

*휘 유(諱 流)의 직호 역시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 칭하면 바르지 않으니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바르게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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