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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장공 휘 규(珪) 사실(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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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8-05-08 11:12 조회1,6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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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장공 휘 규(郎將公 諱 珪)
공(公)의 휘(諱)는 규(珪) 또는 찬(贊)이니 초입사(初入仕) 낭장동정(郎將同正)이요 시어사(侍御使),예부시랑(禮部侍郞), 중산대부, (中散大夫),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을 제수하였으며 보문서학사(寶文署學士)로 치사(致仕)하였다. 부(父)는 증 금자광록대부 예빈경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贈 金紫光祿大夫 禮賓卿 門下侍郞平章事 判兵部事) 휘(諱) 대린(大鱗)이요 조(祖)는 흥위위 별장동정(興威衛 別將同正) 증(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지문하성사 (知門下省事), 이부상서겸 판예부사(吏部尙書兼 判禮部事). 상호군(上護軍) 휘(諱) 광존(光存)이며 증조(曾祖)는 금오위 중랑장동정 행대정(金吾衛中郞將同正 行隊正) 증(贈)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호부상서(戶部尙書), 상장군(上將軍) 휘(諱) 주영(珠永)이요
子는 낭서(郎署) 휘 인원(仁元)이다.

*공께서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과 보문서학사(寶文署學士)를 지내셧으니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여기나 사료에 없어 무안향교지(務安鄕校誌)의 문과급제기록은 생략하였다.

휘 규(珪)는 사료(史料)에 없으나 정묘대보에 공(公)의 관직을 낭장동정(郎將同正)이라 하였은즉 동정직(同正職)은 실직(實職)이 아닌 산직(散職)으로 대개 초년에 음서(蔭敍)로 제수(除授)했던 명예직(名譽職)이다.

용계공(龍溪公) 휘(諱) 지남(止男) 가(家)에 세 분 김찬(金贊), 김연(金璉), 김제(金?)의 초상화(肖像畵)와 화상찬(畵像讚)이 있었다.
“옛적에 한폭으로된 세 사람의 肖像畵가 집에 所藏되어 있었는데 各各 讚이 있으니
1은 중산대부 국학대사성 보문서학사로 치사한 김찬이요
(其一 中散大夫 國學大司成 寶文署學士로 致仕한 金贊)

2 는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를 치사한 김연이며
(其二 匡靖大夫 僉議侍郞 贊成事 判版圖司事로 致仕한 金璉)

3 은 중산대부 판비서성사 보문서학사를 치사한 김제
(其三 中散大夫 判秘書省事 寶文署學士로 致仕한 金?)

위 자료를 근거삼아 1957년 <정유대동보>에 위 세 분을 친형제로 편제하였다.

*세분 金贊, 金璉, 金?의 화상찬 중 앞 두 분의 화상찬은 전해왔으나 김찬의 화상찬은 전하지 않고 있다.

<김찬에 관한 사료>
원종7년 겨울 11월에 추밀원부사 송군비와 시어사 김찬(金贊)에게 명하여 몽고에서 보낸 흑적등과 함께 일본에 가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8권 원종 순효대왕 1(元宗順孝大王一) 병인 7년(1266)>,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1 상>
원종8년 봄 정월에 송군비와 김찬(金贊)이 흑적(黑的)의 무리와 함께 거제 송변포에 이르러 풍도의 험한 것을 두려워하여 돌아왔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14권 세기(世紀) 14 고려(高麗) 3>

원나라 세조가 일본과 우호하고자 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 흑적(黑的)을 국신사(國信使)로 파견하면서, 고려가 일본과 이웃하여 있으므로 길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고려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추밀원 부사 송군비와 예부시랑(禮部侍郞) 김찬(金贊) 등을 보내 길을 인도하게 하였으나, 일본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元史 卷208 外夷列傳>

김통정(金通精)의 조카 김찬(金贊)과 오인절(吳仁節)등 6명을 (濟州의 김통정에게)보내어 귀순하라고 권유 했더니 김통정이 김찬(金贊)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하였다.
<고려사 열전 제45 배중손 조(高麗史>列傳 第43 裵仲孫 條)>

홍다구(洪茶丘)가 표문(表文)을 올려 ‘김통정(金通精)의 무리가 왕경(王京=開京)에 많이 있으니 그들을 불러 (김통정을)오게 할 것이며 불러도 듣지 않으면 공격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니 (元)황제가 그리 하도록 하였다. (홍)다구가 이에 (김)통정의 조카인 낭장(郎將) 김찬(金贊)등 5명을 보내어 (제주에)가서 (김통정을) 효유(曉諭)하였는데 (김)통정 등이 듣지않고 김찬(金贊)만 남기고 그 밖의 사람들은 다 죽였다.
<고려사절요 제19권 원종13년(1272) 8월>
(高麗史節要 第19卷 元宗 順孝大王 8月)

병인년 원종 7년(1266)
동11월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 등을 몽고 사신 흑적(黑的)과 더불어 일본에 보내었다.
처음에 본국(고려를 가리킴)의 반인(叛人) 조이(趙彛)가 몽주에게 고하기를, “일본은 본국과 이웃이며, 제도ㆍ정치가 칭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하니, 몽주가 드디어 먼 데까지 복종시킬 생각이 나서, 흑적ㆍ은홍(殷弘) 등을 보내어 조서내리기를,“이제 일본과 국교를 통하려 하니, 경은 사신을 인도해서 그들의 마음을 열고 깨우치게 하라. 바람과 파도가 험하여 일찍이 통호(通好)하지 않았다고 핑계하지 말라.”하였다.
조정에서 할 수 없이 군비와 시어사(侍御史) 김찬(金贊)을 흑적 등과 같이 보내었다.
東史綱目 第11上 元宗 7年


지원 4년 (1267) 흑적례(黑的禮)가 돌아와서 고려 사자 송군비(宋君斐)ㆍ김찬(金贊)이 주선을 잘못하여서 일본까지 못 갔다고 아뢰매, 홀필렬(忽必烈)이 고려왕을 꾸짖었다‘
宋史 전 蒙古列傳 (靑莊館全書 제23권 편서잡고 3)


○ 12월에 왕식이 고려의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를 파견하여 예부 시랑(禮部侍郞) 김찬(金贊) 등과 함께 가서 조사(詔使) 흑적과 은홍 등을 인도하여 일본에 가게 하였는데, 일본까지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世紀 14 高麗 3


“至元 9년(1272)에 정온을 회원대장군 우위부도지휘사(懷遠大將軍右衛副都指揮使)로 삼은 다음 조서를 내려서 몽고, 한인, 여진, 고려의 여러 절부군(節部軍) 1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 탐라를 정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하였다.
○ 4월에 경략사 흔도가 홍다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다. 탐라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김통정(金通精)을 사로잡은 다음, 조서를 받들어서 처형하였다.
元史 154권 鄭溫列傳



칠언배율(七言排律)
동녀시(童女詩) 김찬(金贊)

사해가 모두 따라서 한 집이 되니 / 四海遑遑枕一家
칙명으로 동토에서 궁녀를 바치라 한다 / 勅令東土進宮娥
워낙 규중에 은밀히 감추었던 몸이라 / 閨居恐未藏身密
더구나 관에서 선발할 제 여러 눈 어이 거칠꼬 / 官選那堪閱眼多
시름겨운 두 눈썹은 내리깐 채 푸르고 / 薄掃愁眉兩斂翠
억지로 쳐든 얼굴 부끄러워 홍당무 / 强擡羞面十分?
울며 나무를 하직하는 어리디 어린 꾀꼬리요 / 稚鶯欲?辭深樹
날아서 깃 떠나는 젖먹이 제비 새끼들 / 乳燕將飛失舊?
낭원(곤륜산(崑崙山)에 있는 신선의 화원)에
옮긴 꽃은 금시 활짝 핀다지 / ?苑移花開頃刻
월궁에 심은 계수는 무럭무럭 자라리 / 廣寒添桂養婆娑
가죽 수레에 실려서 천천히들 가거라 / 行須緩緩氈車載
준마들은 떠나려고 총총히 날뛰누나 / 欲發悤悤寶馬?
부모 나라 멀어지니 혼이 끊어지누나 / 父母國遙魂正斷
제왕성이 가까와도 눈물 그냥 흐르리 / 帝王城近淚猶?
붉은 사를 팔에 맨 두 은총 오롯하겠고 / 絳紗繫後專恩寵
동관을 주시거든 노래를 읊어야지 / ?管貽來合詠歌
아들 낳아 기러기 중천에 솟 듯하고 / 生子若敎鴻擧絶
후비도 되어 봉황의 울음에 화합하리 / 作妃當協鳳鳴和
하물며 지금은 황녀께서 하가 하니 / ?今下嫁周姬在
피차에 황손들이라 남이 아니리 / 彼此皇孫正匪他
*동녀시(童女詩) : 당시에 원 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명령하여 양가(良家)집 딸을 뽑아 데려갔으니, 대개 옛날 종주국(宗主國)ㆍ번국(藩國) 시공녀(侍貢女)를 취(取)한 것이다.
*붉은 …… 오롯하겠고 : 진 무제(晉武帝)가 아름다운 처녀를 선택하여 붉은 비단으로 팔을 매어 표를 해서 곧 궁중으로 데려 왔다.
*아들 …… 듯하고 : 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척부인(戚夫人)의 아들을 사랑하여 태자를 바꾸려 하였다가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와서 태자를 보호하는 것을 보고 척부인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태자에게 우익(羽翼)이 생겼으니 움직이기 어렵다.” 하고 노래를 부르기를, “기러기가 높이 날았으니 그물을 칠 수 없네.” 하였다. 여기서는 우리 나라 처녀들이 원나라에 가서 아들을 낳아 태자가 되게 하라는 뜻이다.
*후비도 …… 화합하리 : 춘추(春秋)시대 때에 진경중(陳敬仲)이 제(齊) 나라에 망명하여 갔는데 의중(懿仲)이 그에게 딸을 주려고 점을 쳤더니 점괘에, “숫봉 암봉이 날아 화합하게 울음운다. 팔대(八代)를 지나면 더할 수 없이 높겠구나.” 하더니 과연 그 뒤에 그 자손이 제(齊) 나라 임금이 되었다.
(출전 : 동문선 제18권)

칠언배율(七言排律)
차운(次韻) 김찬(金贊)

종실과 양가를 모조리 찾아보아 / 閱窮宗室與良家
이 아리따운 열 애기를 얻었네 / 得此玲瓏二五娥
새외로 호송하여 가는 사자들 몇 사람 / 塞外護行歸客幾
궁중에 들어갈 제 시녀들도 많으리 / 禁中扶入侍兒多
물으심에 대답하기 말씨 아직 서툴고 / 欲應降問聲猶澁
옆에서들 보는데 얼굴 아니 붉을까 / 却愧傍觀色尙?
주문에서 구슬 기저귀에 자란 몸 / 養自朱門珠絡褓
자란을 깨고 나와 비단 둥우리에 살던 새 / 生從紫卵錦爲?
엄마 젖을 갓 떠난 조그만 붉은 입술 / ?離母乳丹唇小
궁장 아직 못 배워 나풀나풀 푸른 머리 / 未學宮粧綠髮娑
새 사랑을 금옥에서 혼자 차지하련만 / 新寵必專金屋貯
어린 몸이 수안에서 얼마나 고달플까 / 弱齡應困繡鞍?
사막으로 말이 달려 먼지 일어 뽀얀데 / 蹄飜沙漠飛塵暗
부모 생각에 애가 끊겨 눈물 줄줄 흐르리 / 腸斷庭?泣涕?
길가의 장승도 갈 길 재촉을 슬퍼하네 / 里?堪嗟催去意
송별연의 이별가를 차마 어찌 들을까 / 祖筵那忍聽離歌
번방에서 공물 바침 경지로서 좋은 일 / 海邦修貢瓊枝好
천궐에 은혜 입어 옥로 푸짐하리니 / 天闕承恩玉露和
이 보아 시인들 보답할 것을 똑똑히 기억하소 / 爲報時人須記取
우리들 태평 면식이 다른 덕택 아니로세 / 大平眠食不由他


*금옥(金屋) : 한 무제(漢武帝)가 어릴 적에 자기의 고종매(姑從妹)되는 진아교(陳阿嬌)와 함께 놀면서 매우 친애하였다. 고모가 묻기를, “아교를 배필로 삼으면 어떻겠는가.” 하니 무제가, “정말 아교와 배필이 된다면 금옥(金屋)에 감추어 두리라.” 하였다. 과연 진아교는 후일에 진황후(陳皇后)가 되었다.
*경지(瓊枝) : 귀족과 양가(良家)집 처녀를 구슬나무 가지에 비하였다.
(출전 : 동문선 제18권)


휘 찬(贊)께서 위 시를 지으신 시대는 고려가 元나라의 압제하에 있을 때로 이해의 편의상 전의부령(典儀副令) 이곡(李穀)이 원 나라에 가 있을 때 어사대(御史臺)에 진주(進奏)한 내용을 전재한다.

/ “우리나라에서 처녀를 구하는 것을 중지하여 줄 것을 청하고는, 그를 위해 대신 글월을 올리기를, “옛날 우리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천하를 다스릴 적에 인심을 얻기에 노력하셨으며, 특히 풍속이 다른 외국에 대해서는 지방의 풍습에 따라서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천하의 모든 백성이 기뻐하여 북치고 춤추며, 여러 차례의 통역을 거쳐 들어와 조회하여 혹은 남보다 늦을까 오히려 걱정하였으니, 요ㆍ순의 정치도 이에 더할 수 없었습니다. 고려는 본래 해외에서 따로 한 국가를 형성하였으므로 중국에 성인이 있을 때가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교통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 태종(唐太宗)의 위엄과 덕망으로도 두 번이나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갔습니다. 국가(원 나라)가 처음 일어나자 제일 먼저 신복(臣服)하여, 왕실에 현저한 공훈을 세웠고, 세조 황제께서는 공주를 하가시켰으며, 인하여 조서를 보내어 장려하여 이르기를, '의복이나 예법은 선대의 풍습대로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풍속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으며, 지금 천하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사직이 보존되어 있는 곳은 오직 우리나라뿐입니다. 고려의 입장으로서는 마땅히 현명하신 조서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선조 때부터 행하던 것을 그대로 따라서 정치와 교화를 닦고 밝히며, 조회와 문안을 제때에 행하여, 국가와 함께 아름다움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녀자와 환관의 무리들이 중국에 가서 자리를 잡고 그 무리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은혜와 사랑 받음을 믿고 도리어 본국을 잡아 흔들며, 심지어는 황제의 지시라고 허위로 칭탁하고 다투어 사자를 달려 보내어 해마다 처녀를 데려가는 자가 길에 잇닿았습니다. 대개 남의 딸을 데려다가 위에 잘 보여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 한 짓은 비록 고려가 자초한 일이지만, 황제의 지시가 있었다고 말하니 어찌 나라에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제왕이 호령을 한 번 발하거나 명령을 한 번 시행하면, 온 천하가 그 덕망과 은택을 기쁜 마음으로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서나 지시를 가리켜 덕음(德音)이라 합니다. 그러니 지금 자주 특지를 내려 남의 처녀를 빼앗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무릇 사람이 자식을 낳아 사랑하며 기르는 것은 그 자식에게 봉양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존귀한 사람이거나, 비천한 사람이거나, 중국이거나 이적(夷狄)이거나 차이가 없는 것이니, 그것은 천성이 다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희들 고려의 풍속은 차라리 사내 자식은 다른 집으로 내보내더라도 딸은 자기집에 두고 내보내지 아니하니, 진(秦) 나라 때의 데릴사위 제도와 비슷한 것입니다. 무릇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딸이 맡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딸을 낳으면 은혜와 애정으로 수고를 다하면서 밤낮으로 그 딸이 자라서 능히 부모를 봉양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조에 그 딸자식을 품 안에서 빼앗겨 4천 리 밖에 보내게 되고, 한 번 문 밖을 벗어나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니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고려의 부녀 가운데 후비(后妃)의 반열에 끼어 있는 이도 있고, 왕후(王侯)의 귀한 짝이 된 이도 있어, 공경대신 중에는 고려의 외생(外甥) 출신이 많이 있사오나, 이것은 그 본국의 왕족이나 문벌 있는 부호의 집에서 특히 조지(詔旨)를 받았거나 혹은 자원하여 온 경우이며, 또한 중매의 예절을 갖춘 것이니, 진실로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익을 좋아하는 자들이 그것을 원용하여 예(例)로 삼고 있습니다. 대개 지금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모두가 아내나 첩을 얻으려 하고 있으며, 동녀를 데려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릇 사방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황제의 은혜를 선포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시(詩)에, '두루 물어보고 두루 자문한다[周爰咨詢 周爰咨諏]' 하였는데, 지금은 외국에 사신으로 가면 곧 재물과 여자만을 탐내고 있으니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듣자오니,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감추고, 오직 그 비밀이 탄로날 것을 걱정하여 이웃 사람들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사신이 중국에서 그곳에 이를 때마다 곧 안색이 변하여 돌아보며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왔을까. 처녀를 잡으러 오지 않았을까. 아내와 첩을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얼마 후에 군리(軍吏)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 집집마다 뒤지고 찾는데, 만일 딸을 감춘 것을 알면 그 이웃까지도 연계하여 잡아들이고 그 친족을 구속하여 매질하고 고통을 주어 찾아내고야 맙니다. 그리하여 한 번 사신이 오면 나라 안이 소란하여, 닭이나 개까지도 편안할 수 없습니다. 처녀를 모아놓고 선발하는데,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에 상관없이 혹 사신에게 잘 대접하여 배불리 먹여주면 비록 아름다운 여자라도 놓아주고, 그 여자를 놓아주고는 또 다른 여자를 찾습니다. 이때에 한 여자를 데려갈 적마다 수백 집을 뒤지는데 오직 사신이 하자는 대로 할 뿐이요, 아무도 감히 그 영을 어기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황제의 지시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1년에 한두 번이나 혹은 2년에 한 번 있는데, 그 수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릅니다. 이미 그 선발에 뽑히게 되면 그 부모나 일가 친척들이 서로 모여 통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며, 국경에서 송별할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사신의 아내나 첩으로 데려가는 때는 비록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지라도 인정을 거스리고 원망을 사는 것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필부(匹夫)ㆍ필부(匹婦)가 자진하여 협력하지 않으면 임금의 사업도 성공할 수 없다' 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나라의 덕화(德化)가 미치는 곳마다 만물이 모두 이루어지는데, 고려 사람만이 유독 무슨 죄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옛날에 동해(東海) 지방에 원한 품은 여자가 있어 3년이나 크게 가물었다 하는데, 지금 고려에는 원한 품은 여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근년에 그 나라에는 홍수와 가뭄이 서로 연달아서 백성들 가운데 굶어 죽은 시체가 매우 많으니, 이는 아마도 그 원한과 한탄이 능히 순화한 기운을 해친 것인가 합니다. 지금 당당한 대국으로서 후궁으로 둘 사람이 모자라서 반드시 외국에서 데려와야만 합니까. 비록 조석으로 총애를 받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와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지극한 정성인데, 이에 궁궐 안에 방치된 채 젊음을 그냥 보내고 헛되이 늙으며, 때로는 혹 환관에게 시집 보낸다 하더라도, 마침내 잉태 한 번 못하는 자가 열에 대여섯 명은 되니, 그 원기(怨氣)가 화(和)를 손상함이 또한 어떻겠습니까. 일에 조그만 폐단이 있더라도 나라에 이로운 것이 간혹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도 폐단이 없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하물며, 나라에 이익도 없이 원방의 백성에게 원한을 사고 그 폐단이 적지 않음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덕음(德音)을 베푸시어, 감히 내지를 칭탁하고 위로 황제의 총명을 흐리게 하며, 아래에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처녀를 데려오는 자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아내나 첩을 데려오는 자가 있다면 법령으로 명확히 금지하시어 그 후일의 기대까지도 근절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성조(聖朝)에서 똑같이 사랑하시는 감화를 밝히시고 외국에서 의를 사모하는 마음을 위로하시어, 원망을 없애고 화기를 이루어 만물을 육성하게 하시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나이다." /
(高麗史節要 제 25권 忠肅王 元年)

위 사료에서 김찬을 김통정의 생질(甥姪), 이질(姨姪), 처질(妻姪)이 아닌 질(姪)이라 하였으니 김통정과 김찬은 동일성관(同一姓貫)의 혈족(血族)임을 알 수 있다.
김통정에 관한 기록이 수록된 <고려사>열전 제17. 김방경(金方慶)조와 <고려사>열전 제43. 배중손(裵仲孫)조, 및 <고려사절요> 제19권. 원종 순효대왕(元宗 順孝大王)조 및 <元史>권208. 열전 제95. 외이(外夷) 1. 탐라(耽羅)조와 고려(高麗)조, <신원사(新元史)>열전 제146.외국(外國) 1. 고려(高麗)조 등은 삼별초(三別抄)의 진압이라는 지배집단의 사관에 의하여 기록한 관찬사서(官撰史書)이므로 김통정을 위시한 삼별초의 항목세력(抗蒙勢力)을 반역서술부에 넣었던 것이다.

침략세력이었던 원(元)나라와 왕조시대(王朝時代)에 편찬한 관찬사서(官撰史書)인 고려사 등 사료(史料)에 지배세력에 저항한 김통정을 반역자(反逆者)로 규정(規定)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에 김통정의 가문에서는 감히 보첩에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살피건대 김찬의 화상찬만 전하지 않는 이유는 김찬의 화상찬에 김통정 가계(家系)에 관(關)한 기록이 있었던 것으로 추찰되며 이 때문에 김찬의 화상찬은 고려조 때 없어졌을 것으로 여긴다.

조선조에 편찬한 고려사 등에 김통정을 반장(叛將)으로 기록하였으나 이는 역사인식(歷史認識)을 달리하는 현재적 관점(現在的 觀點)에서 보면 바르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삼별초의 무력항쟁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충정의 발로"라고 인식, 후세에 많은 교훈을 심어주기 위하여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28호였던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의 항파두리성을 사적 제396호로 지정하였으며 1977년-10980년까지 국비로 토성(外城)6KM중 922M를 보수하고 <抗蒙殉義碑>를 1978년 6월에 세웠다.

* 필자가 1981년도에 강화군 문화원장과 김통정의 본관에 대하여 통화하였는데 강화군 문화원에서 김통정의 본관을 알아보기 위하여 언양김씨, 교동김씨, 교주김씨, 김해김씨 등 강화에 거주하는 여러 김씨 종중에 김통정의 본관에 관하여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이 있는지 알아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고 하여 본인이 고려사 등에 나오는 김통정의 조카 김찬이 광산김씨가에 전해져 오는 3인 화상찬 기록에 있다고 하니 그 자료를 보내 주면 강화지에 이를 기록하겠다고 하였다.


<광산군 휘 한로(漢老) 부친의 휘자(諱字)>
광산군 휘 한로(漢老)는 낭장공 휘 규(珪)의 7세손으로
고려 우왕 9년(1383) 계해방(癸亥榜), 을과(乙科)에 장원급제하였는데 당시 지공거(知貢擧=고시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우현보(禹玄寶)와 동지정당문학(同知政堂文學) 이인민(李仁敏)이었다.

아버지는 공민왕 17년(1368) 송산친시방(松山親試榜) -幸九齋親試- 에 급제한 증 좌찬성 휘 자빈(子贇)이며 兄은 안성군수를 지낸 휘 소우(蘇雨)이다.

정묘대보, 병자대보, 기묘대보, 한성대보와 대종회 홈페이지 분파도 및 여타 광김홈페이지에 광산군 휘 한로 부친의 휘(諱)를 빈(贇)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오류이므로 사료에 의해 자빈(子贇)으로, 또 형인 휘 소(蘇)는 정묘대보의 기록대로 휘 소우(蘇雨)로 바르게 기록해야 한다.

휘 한로 부친의 휘(諱)를 자빈(子贇)으로 기록한 문헌(文獻)
* 동문선(東文選) 제 103권 근사제일고 발(近思齊逸藁 跋)
<光山 金子贇 仲彬> (*仲彬은 字)
* 조종운(趙從耘)저 씨족원류(氏族源流) 1991년 초판본 201면

*국조방목(國朝榜目) 부록 <고려조과거사적(高麗朝科擧事蹟)>
-려계각년문과방목(麗季各年文科榜目)- 521면
공민왕조(恭愍王朝) 무신송산친시방(戊申松山親試榜)
김자빈(金子贇) 급제기록
<김자빈 광주인(金子贇 光州人)>

*위 책 528면 우왕조( 禑王朝) 계해방( 癸亥榜) 김한로 급제기록
<김한로 광산인 부 자빈(金漢老 光山人 父 子贇)>

* 광산김씨사 1권 180면
<김자빈(金子贇) >

그 외 전고대방, 문헌비고, 국조문과방목 등에도 휘를 자빈(子贇)으로 기록하고 있다.

*휘 한로 부친의 휘 자빈(子贇)의 음독(音讀)은 <자윤>이 아닌 <자빈>이다. “贇”자는 “예쁠 빈”, 과 “예쁠 윤"이지만 이름자에 있는 음(音)은 “빈”으로 음독(音讀)한다.

<“贇”자 음독(音讀)에 대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의 견해>
/ 강희자전(康熙字典)을 비롯한<廣韻><集韻><類韻><龍龕手鑑>등의 책에는 '美好貌'의 뜻에는 모두 "於倫切"(즉 윤)로 음을 잡았다. 그러나 명(明)나라 때 매응조(梅膺祚)가 지은 자서인 <자휘패부(字彙貝部)>에 贇 卑民切 音賓 美好貌 又 人名 後唐死節傳 有程福贇 = (贇은 卑(비)와 民(민)의 반절이다. 음은 ‘빈’으로 ‘아름다운 모양’이다. 또 ‘사람 이름’으로, 후당〈死節傳〉에 ‘정복빈’이란 자가 있다.』 라고 하였다.
또 명나라 때 장자열(張自烈)이 짓고 청(淸)나라의 요문영(寥文英)이 편집, 간행한 <정자통 패부(正字通, 貝部)>에 "補京切, 音賓(즉 빈). 미호모(美好貌). 우 인명(又 人名)."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자서(字書)인 정조(正祖)때 편찬된 <全韻玉篇>에 "(빈) 미호모(美好貌)" 라고 나오며, 1915년 최남선(崔南善) 등이 편찬한 최초의 근대 자서인 <신자전(新字典)>에 "(빈) 미호모(美好貌)" 라고 나온다.
이를 근거로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빈'으로 통용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자의 음을 정할 때, 기본적으로 중국의 운서(韻書)를 토대로 하고 있으나, 어떤 경우에는 한국의 통용음과 괴리되는 경우도 있다. 오류가 분명한 경우에는 사전을 편찬할 때 바로잡아 수록하게 되지만, 때로 오랫동안 통용되어 이미 일상어로 쓰이게 된 경우에는 통용음으로 인정해서 사용하고 있다. /

*살피건대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고전국역서에 이름자에 들어있는 “贇”자의 음은 모두 “빈”으로 국역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간행한 여러 옥편에도 예쁠“빈”, 사람이름 “빈”이라 기록하고 있다,
柳正基 교수 감수의<康熙大玉篇> (1978년 11월 民晶社 간행) 295면
"贇" 의 한글음을 "빈"으로 기록하고 예쁠빈(美好貌)이라 하였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
<韓國漢字語辭典 > ( 단국대학교출판부 1997.12.01) 4권 3150면
(자번 27335) 贇 : 一 빈 (篇 . 玉篇 즉 字典) 音 賓 (bin)
二윤 (廣 .廣韻) 於倫切 眞(yun)
同字 貝斌 一 사람이름 빈(人名) - 資治通鑑 (漢 建安 12)
黃巾殺濟南王 贇(빈)
二 예쁠 윤(美好) 아름답다 ,또는 그 모양 (廣隕)
(자번 2336) 貝斌 : 빈 贇(27335)과 同字

<大漢韓辭典> (敎學社 1998, 9,10)
李家源, 安炳周 監修 (漢韓辭典編纂室 編)231면
贇 : 예쁠 빈(윤)

[빈과 (贇科] 문과와 무과를 아울러서 실시하는 과거.
<국역 조선효종실록 4, 원년 6월 丁未>
淑能參奉陳翊聖上疏 請設贇科 廟堂以爲不可創設 上從之(贇科者 文武備具之謂也)

김빈길(金贇吉)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태조, 정종, 태종, 세종실록)에 22건이 나오는데 김빈길로 국역하고 있으며

낙안김씨족보(樂安金氏族譜)에도 김빈길(金贇吉)을 "빈"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북 진안군 안촌면 백화리 하이촌(下梨村)에 있는 화천사(華川祠)에서 음력 2월 15일에 김빈길(金贇吉) 장군의 제향이 있는데 이 때 김빈길 장군으로 음독(音讀)하고 있다.

국역본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낙안군(樂安郡)편
궁성: 이 고을 사람으로 절제사(節制使)가 된 김빈길(金贇吉)이
부민(部民)들을 거느리고 토성(土城)을 쌓았다,
인물: 본조 김빈길(金贇吉) 재력(材力)이 사람 중에 뛰어나
병졸에서 일어나 여러 벼슬을 거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에 이르렀으며 왜군과 여러 번 싸워 이겨서 벼슬이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국역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 전라도(全羅道) 고창현(高敞縣)
우거: 본조 김빈길(金贇吉) 현의 서쪽 7리 남짓한 곳에 묘비가 있다.

순천시 낙안읍성(樂安邑城) 사적 제 320호 소개편에도 김빈길로 표기하고 있다.

<낭장공 휘 규와 양간공 휘 연의 생갑 고>
(郎將公 諱 珪, 良簡公 諱 璉 生甲 考)

가. 후손 생갑

金珪 -仁元 -錚 -如玉
- 憑 - 之寶 - 子贇(1368년 문과) -漢老(21世)
(1367년생) -1383년文科-


金璉(1215년생)-士元(1257년생)-진(1292년생)-英利(1314년생)-鼎 - 若采(1371년文科)
若恒 (1371년文科)
若時 (1367년생) - 1383년文科 -

* 살피건대 휘 정의 3자 휘 약시는 1367년생이며 1355년경 생인 차자 휘 약항께서 1371년에 약관 17세쯤 급제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1352년생인 장자 휘 약체께서는 20세쯤에 문과급제 하엿다고 추정할 수 있으니 1215년생인 양간공 휘 연과 5대손인 1352년경생인 휘 약체와의 5대간 년차는 137년으로 한 대의 년차는 27.4년이다.
위 한 대 27.4년차를 낭장공 휘 규의 7세손인 1367년생 휘 한로부터 낭장공까지 7대를 한 대 년차 27.4년을 곱하면 191.8년 이 되므로 휘 한로 생갑 1367년에서 192년을 제하면 낭장공 휘 규는 1175년경 생이 된다.

그러므로 낭장공 휘 규의 생갑이 양간공 휘 연의 생갑에 크게 앞섬을 알 수 있다.

나. 혼인관계(婚姻關係)

李密(判官)-斯祥(典法判書)- 女 金子贇(1340년경生) 20世
女 金若恒(1353년경生) 19世
女 宋陞壽 - 完(佐郞) - 臨(郡事)
商(府使)
女 金若時

19世 직제학공 휘 약시(諱 若時)는 태종(太宗)(1367-1422)과 동년생(同年生)이라 하였은즉 1367년생이며 21世 광산군(光山君) 휘 한로(諱 漢老)역시 1367년 生이니 동년생(同年生)이요,

휘 한로의 아버지인 20世 휘 자빈(諱 子贇)은 1340경 생으로 이사상(李斯祥)의 맏사위이며 19세 휘 약항은 1353년경 생으로 이사상의 막내 사위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낭장공 휘 규의 생갑은 양간공 휘 연의 생갑에 크게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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