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안공 휘:양감(文安公 諱:良鑑)의 사실(事實)과 화동서원에 對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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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孤巖/準一 작성일06-12-19 21:24 조회1,877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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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대종회 홈페이지
공(公)의 휘(諱)는 양감(良鑑)이고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며 시조 흥광(始祖 興光)의 7세손(七世孫)이다.
공(公)이 1051년(文宗5年 辛卯)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1070년(文宗24年 庚戌) 정월(正月) 기유일(己酉日)에 상서우승 좌간의대부(尙書右丞 左諫議大夫)가 되었으며, 7월에는 서북로 병마부사(西北路 兵馬副使)가 되었고, 1071년(文宗25年 辛亥) 정월(正月) 신축일(辛丑日)에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 知御史臺事)가 되었고, 1072년(文宗26年 壬子) 8월 정해일(丁亥日)에 태복경(太僕卿)이 되어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1074년(文宗28年 甲寅)에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의 도표(圖表)를 모사(模寫)하여 돌아왔다.

1074년(文宗28年 甲寅) 12월 정미일(丁未日)에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가 되고, 1077년(文宗31年 丁巳) 11월 병진일(丙辰日)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1078년(文宗32年 戊午) 6월 갑인일(甲寅日)에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이 올때 호부상서(戶部尙書)의 직분(職分)으로 접반사(接伴使)가 되었고, 1081년(文宗35年 辛酉) 정월(正月) 정유일(丁酉日)에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로 서경유수사주국(西京留守使柱國)을 겸(兼)하고, 3월 신축(辛丑)에 권판중추원사(權判中樞院事)가 되었고, 1083년(文宗37年 癸亥) 정월(正月) 무자일(戊子日)에 좌우복야(左右僕射)가 되었으며, 12월 정해일(丁亥日)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진주(陳奏)하였으며, 1086년(宣宗3年 丙寅) 4월 계축일(癸丑日)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고, 1087년(宣宗4年 丁卯) 3월 경진일(庚辰日)에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진주(陳奏)하였고, 5월 무진일(戊辰日)에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요, 7월 임신일(壬申日)에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진주(陳奏)하였으며, 12월 경인일(庚寅日)에 수태위(守太尉)로 누천(累遷)하여 수태보문하시중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監修國史)에 이르렀다.

공(公)이 1074년(文宗28年 甲寅)에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을때 박문약례(博文約禮)하며 미사(微辭)와 오지(奧旨)는 친(親)히 정자문(程子門)에서 배웠고 태묘(泰廟)와 태학(太學)을 본뜨고 경(經)과 전(傳)을 싣고 돌아와 성현(聖賢)의 연원(淵源)을 닦고 부자(夫子)=공자(孔子) 사당(祠堂)을 집 뒤에다 세우고 춘추(春秋)로 조두(俎豆)=제사(祭祀)하니 동국(東國)에 문묘(文廟)가 시작된것이 처음이었고 동방리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공(公)의 시(詩)에 "병든 나그네가 쓸쓸한 집에 들어오니 맑은 그늘이 뜻에 맞아 서늘하다. 중을 만나서 한마디 말도 없건만 바람이 푸른 연 향기를 보내주네" 병객투소사 청음만의량 봉승무일어 풍송벽하향(病客投蕭寺 淸陰滿意凉 逢僧無一語 風送碧荷香)
"세상일 유유하니 마침내 무엇이 될고 부질없이 낚싯대를 가지고 창파만 희롱하네 이제 또 강남에서 이별하니 석양에 뱃노래 더욱 구슬프다." 세사유유의약하 만장어죽농창파 여금우작강남별 낙일난감청도가(歲事悠悠意若何 만將漁竹弄滄波 如今又作江南別 落日難堪聽棹歌) *만(말씀언 변에 끝만 한 글자임)
공(公)의 서(書)에 "밤사이 집안 모든 형편이 어떠하냐 내 오늘 돌아가려 하였더니 이시중(李侍中)의 만류(挽留)로 뜻과 같이 못하겠다. 소학사(蘇學士)의 창화(唱和)한 시(詩)가 윗 사랑에 있으니 찾아 보내라 나머지는 그만쓴다. 1076년(丙辰) 5월 5일에 아비씀" 불여야간가중제황약하오금일대의환귀의위이시중소만미득여의이소학사창화시재어상낭견송가야여객요불선 병진오월오일부착서(不如夜間家中諸況若何吾今日大擬還歸矣爲李侍中所挽未得如意耳蘇鶴士唱和詩在於上廊覓送可也餘客擾不宣 丙辰五月五日父着署)
공(公)이 왈(曰) "내가 심법(心法)은 본래 우리나라 선생(先生)에게 배웠으나 그 학문(學問)의 넓고 간략하고 자상하고 깊은 뜻은 송(宋)나라 정자문하(程子門下)에서 친(親)히 배웠고 소식(蘇軾)=동파(東坡)는 모선(慕仙)하고 술석(述釋)하니 이름은 유자(儒者)이나 실지 행하는것은 묵적(墨翟)이라 진리(眞理)를 어지럽히는 큰 좀인 줄을 알았으나 제후국(諸侯國) 작은나라 사람으로 감히 그에게 거슬리지 못한것은 그는 대국인(大國人)이라 서로 틈이 생기면 우리나라에 근심을 끼칠까 염려하여 극히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문장(文章)과 충절(充節)은 가상(嘉尙)하므로 내가 친애(親愛)하였고 소식(蘇軾)도 또안 나를 아껴준 일이 많았다."

화동서원은 1957년(丁酉年)에 유림儒林)의 공의(公議)로써 서원(書院)을 창설(創設)하고 문안공 휘:양감(文安公 諱:良鑑)으로 주벽(主壁)을 삼고, 문안공(文安公)의 12세손(世孫) 전리판서 휘:인우,(典理判書 諱:仁雨)와 인우(仁雨)의 아들 함종현령(咸從縣令) 휘:승길,호:사은(諱:承吉,號:沙隱)과 승길(承吉)의 아들 군기시 정(軍器寺 正) 휘:오행,호:매은(諱:五行,號:梅隱) 이렇게 4위(四位)를 매년(每年) 陰 3월2일에 유림(儒林)과 후손(後孫)들이 서원향사(書院享祀)로 봉행(奉行)한다.
화동서원은 전북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교동마을에 있다.
공(公)의 휘(諱)는 양감(良鑑)이고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며 시조 흥광(始祖 興光)의 7세손(七世孫)이다.
공(公)이 1051년(文宗5年 辛卯)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1070년(文宗24年 庚戌) 정월(正月) 기유일(己酉日)에 상서우승 좌간의대부(尙書右丞 左諫議大夫)가 되었으며, 7월에는 서북로 병마부사(西北路 兵馬副使)가 되었고, 1071년(文宗25年 辛亥) 정월(正月) 신축일(辛丑日)에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 知御史臺事)가 되었고, 1072년(文宗26年 壬子) 8월 정해일(丁亥日)에 태복경(太僕卿)이 되어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1074년(文宗28年 甲寅)에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의 도표(圖表)를 모사(模寫)하여 돌아왔다.

1074년(文宗28年 甲寅) 12월 정미일(丁未日)에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가 되고, 1077년(文宗31年 丁巳) 11월 병진일(丙辰日)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1078년(文宗32年 戊午) 6월 갑인일(甲寅日)에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이 올때 호부상서(戶部尙書)의 직분(職分)으로 접반사(接伴使)가 되었고, 1081년(文宗35年 辛酉) 정월(正月) 정유일(丁酉日)에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로 서경유수사주국(西京留守使柱國)을 겸(兼)하고, 3월 신축(辛丑)에 권판중추원사(權判中樞院事)가 되었고, 1083년(文宗37年 癸亥) 정월(正月) 무자일(戊子日)에 좌우복야(左右僕射)가 되었으며, 12월 정해일(丁亥日)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진주(陳奏)하였으며, 1086년(宣宗3年 丙寅) 4월 계축일(癸丑日)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고, 1087년(宣宗4年 丁卯) 3월 경진일(庚辰日)에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진주(陳奏)하였고, 5월 무진일(戊辰日)에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요, 7월 임신일(壬申日)에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진주(陳奏)하였으며, 12월 경인일(庚寅日)에 수태위(守太尉)로 누천(累遷)하여 수태보문하시중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監修國史)에 이르렀다.

공(公)이 1074년(文宗28年 甲寅)에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을때 박문약례(博文約禮)하며 미사(微辭)와 오지(奧旨)는 친(親)히 정자문(程子門)에서 배웠고 태묘(泰廟)와 태학(太學)을 본뜨고 경(經)과 전(傳)을 싣고 돌아와 성현(聖賢)의 연원(淵源)을 닦고 부자(夫子)=공자(孔子) 사당(祠堂)을 집 뒤에다 세우고 춘추(春秋)로 조두(俎豆)=제사(祭祀)하니 동국(東國)에 문묘(文廟)가 시작된것이 처음이었고 동방리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공(公)의 시(詩)에 "병든 나그네가 쓸쓸한 집에 들어오니 맑은 그늘이 뜻에 맞아 서늘하다. 중을 만나서 한마디 말도 없건만 바람이 푸른 연 향기를 보내주네" 병객투소사 청음만의량 봉승무일어 풍송벽하향(病客投蕭寺 淸陰滿意凉 逢僧無一語 風送碧荷香)
"세상일 유유하니 마침내 무엇이 될고 부질없이 낚싯대를 가지고 창파만 희롱하네 이제 또 강남에서 이별하니 석양에 뱃노래 더욱 구슬프다." 세사유유의약하 만장어죽농창파 여금우작강남별 낙일난감청도가(歲事悠悠意若何 만將漁竹弄滄波 如今又作江南別 落日難堪聽棹歌) *만(말씀언 변에 끝만 한 글자임)
공(公)의 서(書)에 "밤사이 집안 모든 형편이 어떠하냐 내 오늘 돌아가려 하였더니 이시중(李侍中)의 만류(挽留)로 뜻과 같이 못하겠다. 소학사(蘇學士)의 창화(唱和)한 시(詩)가 윗 사랑에 있으니 찾아 보내라 나머지는 그만쓴다. 1076년(丙辰) 5월 5일에 아비씀" 불여야간가중제황약하오금일대의환귀의위이시중소만미득여의이소학사창화시재어상낭견송가야여객요불선 병진오월오일부착서(不如夜間家中諸況若何吾今日大擬還歸矣爲李侍中所挽未得如意耳蘇鶴士唱和詩在於上廊覓送可也餘客擾不宣 丙辰五月五日父着署)
공(公)이 왈(曰) "내가 심법(心法)은 본래 우리나라 선생(先生)에게 배웠으나 그 학문(學問)의 넓고 간략하고 자상하고 깊은 뜻은 송(宋)나라 정자문하(程子門下)에서 친(親)히 배웠고 소식(蘇軾)=동파(東坡)는 모선(慕仙)하고 술석(述釋)하니 이름은 유자(儒者)이나 실지 행하는것은 묵적(墨翟)이라 진리(眞理)를 어지럽히는 큰 좀인 줄을 알았으나 제후국(諸侯國) 작은나라 사람으로 감히 그에게 거슬리지 못한것은 그는 대국인(大國人)이라 서로 틈이 생기면 우리나라에 근심을 끼칠까 염려하여 극히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문장(文章)과 충절(充節)은 가상(嘉尙)하므로 내가 친애(親愛)하였고 소식(蘇軾)도 또안 나를 아껴준 일이 많았다."

화동서원은 1957년(丁酉年)에 유림儒林)의 공의(公議)로써 서원(書院)을 창설(創設)하고 문안공 휘:양감(文安公 諱:良鑑)으로 주벽(主壁)을 삼고, 문안공(文安公)의 12세손(世孫) 전리판서 휘:인우,(典理判書 諱:仁雨)와 인우(仁雨)의 아들 함종현령(咸從縣令) 휘:승길,호:사은(諱:承吉,號:沙隱)과 승길(承吉)의 아들 군기시 정(軍器寺 正) 휘:오행,호:매은(諱:五行,號:梅隱) 이렇게 4위(四位)를 매년(每年) 陰 3월2일에 유림(儒林)과 후손(後孫)들이 서원향사(書院享祀)로 봉행(奉行)한다.
화동서원은 전북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교동마을에 있다.
댓글목록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성봉 (2005-06-30 13:14:42)
오류를 바로잡음
대종회 홈페이지에 있는 자료는 主로 "光山金氏史"의 기록을
基本으로 하였기 때문에 오류가 많습니다. (수백개 임)
文安公(諱 良鑑)의 記錄中 高麗史와 다른 部分을 바로잡습니다.
*1072년(文宗 26년 壬子) 8月에 宋나라에 使臣으로 감과
公이 1074년(文宗 28년 甲寅)에 宋나라에 갔을 때를
1073년(文宗 27年 癸丑) 8月에 太僕卿으로 宋나라에 使臣으로 감과
1073년(文宗 27年 癸丑)에 宋나라에 使臣으로 갔을 때로 訂正
*1074년(文宗 28年 甲寅) 12月에 左右散騎常侍가 됨을
1075년(文宗 29年 乙卯) 12月에 右散騎常侍가 됨으로 訂正.
*1083년(文宗 37年 癸亥) 正月에 左右僕射가 되었으며 를
1083년(文宗 37年, 順宗 1 癸亥) 正月 "左僕射"가 됨으로 訂正.
*1090년(宣宗 7년 庚午) 4月 門下侍郞으로 知貢擧가 되어 李景泌 등 及第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