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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문 처 김씨묘지명(朴允文 妻 金氏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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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9-02-20 01:19 조회1,36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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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집인 『포은문집(圃隱文集)』 속록(續錄) 권1에 실려 있으며, 정몽주가 1374년(공민왕 23)에 작성하였다.

묘지명 주인공 김씨(金氏 : 1302~1374)는 광주(光州)사람으로,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밀성군(密城君) 박윤문(朴允文)의 처이다.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에 봉해졌다.

증조는 경량(鏡亮), 조부는 수(須), 아버지는 태현(台鉉)이다.
태현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부인은 가장 막내이다.
광식(光軾)은 이복 오빠이고, 광철(光轍), 광재(光載), 광로(光輅)와 안목(安牧)의 부인은 모두 친형제이다. 외할아버지는 효은태자(孝隱太子)의 후손인 왕정조(王丁朝)이다.

아들이 다섯이다.
큰아들은 밀양(密陽), 둘째는 대양(大陽), 셋째는 소양(紹陽), 넷째는 삼양(三陽), 다섯째는 계양(啓陽)이다.

묘지명은 주로 부인의 가계 및 가족 사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적으로 부인의 아버지(김태현)와 어머니(왕씨부인), 오빠(김광재)의 묘지명이 있다.

(논문)김보경, 2003, 「李穡의 女性認識-女性墓主 墓誌銘을 중심으로-」,『漢文學報』8
(논문)金龍善, 1989, 「高麗 支配層의 埋葬地에 대한 考察」『東亞硏究』17; 2004『고려 금석문 연구-돌에 새겨진 사회사』, 일조각
(단행본)이수건, 1984, 『韓國中世社會史硏究』, 일조각


해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海陽郡夫人 金氏 墓誌銘 幷序) (박종기 역)

대광(大匡) 밀성군 박공(密城君 朴公)의 부인 김씨는 광주(光州)사람이다.

옛날 사공(司空) 김길(金吉)이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다.

몇 대 뒤 후손인 대장군 경량(鏡亮)은 부인의 증조가 된다.

문하시중 수(須)를 낳았고, 시중은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은퇴한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을 낳았다. 문정공은 4남 2녀를 두었다.
부인이 가장 막내이다.

선부의랑(選部議郞) 광식(光軾)은 이복 오빠이고, 문민공(文敏公) 광철(光轍)과 문간공(文簡公) 광재(光載), 정당문학(政堂文學) 안목(安牧)의 부인, 급제한 광로(光輅)은 모두 친형제이다.

외할아버지는 낭장 왕정조(王丁朝)로 효은태자(孝隱太子)의 후손이다.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따뜻하고 맑으며 더하여 어진 아버지와 형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나이 약간에 박씨에게 시집와 부인의 행실을 닦으니 세족(世族)의 귀함에도 불구하고 실오라기만큼의 거만한 빛이 없었다.

(남편인) 대광공 또한 예절을 좋아하는 군자로서 평상시에도 서로 공경하여 손님을 대하듯 했다.

부인은 평생 부모를 효도로 모시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자손을 고르게 사랑하고 노비와 하인에게 은혜롭게 하였다. 밤에는 불경을 읽고 낮에는 베를 짰는데 나이가 들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의복과 음식은 또 반드시 풍요함과 검소함의 중도에 맞게 하였다.

어머니 왕씨(王氏)는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군대부인(郡大夫人)에 봉해져, 해마다 녹을 받았다. 부인도 네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왕씨와 같은 은택을 받았고 녹은 더 많았다.

하루는 서로 ‘우리 한 집안에 두 부인은 나라에 보탬도 없으면서 두터운 은혜를 입으니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부인의) 마음 씀씀이가 이와 같았다.

아들이 다섯이다.
큰아들 밀양(密陽)은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 判典校寺事)이다. 둘째 대양(大陽)은 봉익대부 전법판서 보문각제학 상호군이고(奉翊大夫 典法判書 寶文閣提學 上護軍)이다.

셋째 소양(紹陽)은 성균시를 본 후 (원나라) 수도에 갔다가 운남(雲南)으로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넷째 삼양(三陽)은 정언(正言)이었다. 언사(言事)로 계림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공무로 죽었다. 다섯째 계양(啓陽)은 중정대부 비서감(中正大夫 秘書監)이다.

죄가 아닌 것으로 폐인이 되니 세상 논의가 안타깝게 여겼다. 손자는 남녀 10여 명이다. 밀양은 장경공 유돈(將敬公 柳敦)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인 낭장 경무(敬茂)와 판사재(判司宰) 경인(敬仁)과 네 딸을 낳았다.

별장 구희(具禧)와 중낭장 박침(朴?), 청주판관(淸州判官) 장연(張縯)이 그 사위이다. 막내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대양은 익산군(益山君) 홍운수(洪云遂)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고, 첩(外室)에게서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좌우위 녹사참군이다(左右衛 錄事參軍)이다.

계양은 전주목사 홍만용(洪萬龍)의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증손은 남녀 내외로 합하여 10여 명이다.

아아, 부인의 덕행이 그와 같고 자손의 많고 귀하게 현달함이 이와 같으니 ‘이러한 덕이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복을 누린다’는 것이 옳도다.

부인은 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 1361) 대광공과 함께 밀성(密城)으로 난리를 피하였다가 그곳에 살았다.

나이 73세인 홍무(洪武) 갑인년(공민왕 23, 1374) 8월 기해일에 돌아가셨다. 그 달 신축일에 수산현(守山縣) 구명산(九明山)에 장사지냈다.

(부인의) 막내아들(계양)이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지금 피눈물을 흘리며 시묘 살이 하면서 나에게 편지와 가장(家狀)을 보내며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부인을) 위하여 묘지명을 짓는다.

명(銘)에 이르기를,
대대로 내려오는 세가에 나
아름다운 덕이 뛰어났고
위의를 삼가
예로써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군자에게 시집가 훌륭한 자식 집에 가득하니
어머니는 아들로 귀하여져 봉작과 녹으로 영화롭다.
나이 일흔셋 호상(好喪)이라 하겠는데
슬퍼하는 저 상주 묘 곁에서 피눈물 흘리네.

海陽郡大夫人金氏墓誌銘幷序(○出夫人後孫必義家藏蓋必義得夫人墓欲辨眞僞啓隧得此誌) (鄭夢周)

大匡密城君朴公夫人金氏光州人也昔司空金吉佐太祖爲功臣其後若干世孫大將軍鏡亮於夫人爲曾祖生贈門下侍中須侍中生僉議政丞致仕文正公台鉉文正生四男二女夫人最季選部議郞光軾異母兄也文敏公光轍文簡公光載政堂文學安牧夫人及第光輅皆同母兄也外祖郞將王丁朝亦孝隱太子之後夫人天性溫淑而加以賢父兄之敎年若干歸朴氏修行婦道不以世族之貴而有絲毫驕傲色大匡公亦好禮君子雖平居敬相對如賓夫人平生事父母孝事兄弟順均子孫慈婢僕夜誦佛經書執紡績年高不怠至於衣服飮食亦必豊儉中度大夫人王氏以三子登科恩封郡大夫人歲受?祿夫人亦以四子登科恩例如王氏而?祿有加焉一日相告曰吾一家二婦人無益於國而受厚恩非願也皆辭不受其用心類此五子長密陽奉順大夫判典校寺事次大陽奉翊大夫典法判書賓文閣提學上護軍次紹陽試成均後游京師奉使雲南不返次三陽拜正言言事出?鷄林卒于官次啓陽中正大夫秘書監以非罪廢物論?之孫男女十餘人密陽娶章敬公柳敦之女二男曰郞將敬茂判司宰敬仁四女別將具禧中郞將朴沈淸州判官張縯其?也季未嫁大陽娶益山君洪云遂之女無子外室一男昌左右衛錄事?軍啓陽娶全州牧使洪萬龍之女生二男二女皆幼曾孫男女內外合十餘人鳴呼夫人之德行如彼而子孫之衆且貴願如此有是德者有是福也宜矣夫人至正辛丑與大匡公避兵密城因居焉年七十三卒于 洪武甲寅八月己亥其月辛丑葬于守山縣九明山其季子與余同年進士今方廬墓血泣終喪以書?家狀來請銘故爲銘銘曰
蟬聯世家婉婉令德克愼其儀以禮自飭歸配君子蘭玉滿庭母以子貴爵祿之榮年七十三終焉允藏哀哉棘人泣血墓旁
     前奉順大夫成均大司成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鄭夢周撰

〔출전:『圃隱文集 續錄』 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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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목은문고(牧隱文藁) 제20권 에 
 
 박씨전(朴氏傳)이 있으니 이는 문정공(휘 태현)의 외손
 박소양(朴少陽)에 관한 글이다.  아래는 역문이다.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 김 문정공(金文正公)은 문장과 도덕을 한 몸에 지니고
충렬왕(忠烈王)과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忠肅王)을 차례로 섬겼다.
그리하여 국가의 의혹이 있을 때마다 마치 시귀(蓍龜)처럼 명쾌하게 결단을 내리면서,
임금의 교화(敎化)가 바르게 펴지도록 보좌하여 국가를 떠받치는 주석(柱石)이 되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더욱 엄하게 교육을 시킨 결과 여러 자제들이 등과(登科)하였는데,
백씨(伯氏 김광식(金光軾))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으나 중씨(仲氏)인 둔헌(鈍軒 김광철(金光轍))과
숙씨(叔氏)인 송당(松堂 김광재(金光載))이 모두 재상의 지위에 올라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한편 쾌헌의 사위로는 안씨(安氏 안목(安牧))와 박씨(朴氏 박윤문(朴允文))가 있는데,
안씨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이요 박씨는 밀직 대언(密直代言)으로서 모두 문과(文科)를 통해 현달하였으며,
안씨의 손자 셋과 박씨의 아들 셋(넷=모친 묘지명)이 또 모두 등과(登科)하여 현재 사(士)의 관직에 몸담고 있다.

그런데 이름이 소양(少陽)이고 자(字)가 중강(仲剛)인 자가 있으니, 박씨의 아들이다.
차서로 보면 그가 셋째 아들이 되는데, 비록 성균시(成均試)에는 입격하였지만
대과(大科)에는 누차 응시했어도 급제를 하지 못하였다.
이에 내가 그를 슬프게 여긴 나머지 여기에 그의 일을 기록하게 되었다.

중강(仲剛)은 성품이 고결하여 장구(章句)의 학문 따위는 아예 좋아하질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평소에 책을 읽지도 않고 과거 공부를 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미 급제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열릴 때면 시험장에 으레 들어가긴 하면서도 지필(紙筆)과 등촉(燈燭)만을
가지고 갈 뿐 책은 한 권도 지니질 않았다. 그러고는 담소(談笑)하는 사이에 글 한 편을 짓고 나면
잘 됐는지 못 됐는지 따져 보지도 않고서 그냥 던져 버리고 나오곤 하였으므로 끝내 급제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가 일찍이 혼자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답답하게 한쪽 구석에만 처박혀 있다면 우물 속의 개구리와
뭐가 다르겠는가.’ 하고는, 길을 떠나 서쪽으로 경사(京師)에 유람하러 갔다.
그리하여 산천과 인물, 궁궐과 성읍을 실컷 구경하고 나서는 옛날과 달리 안목이 한층 넓어지고
기상이 호탕하게 트인 가운데 평소의 소망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서하(西夏) 간극장(幹克莊)의 치서공(治書公)이 그를 한 번 보고는 사랑한 나머지,
자기 집에다 숙소를 정해 주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때때로 시서(詩書)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으나,
중강은 또 이런 데에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강이 오래 머물러 있다 보니 북방의 언어를 곧잘 구사하게 되었으므로, 밖에 나가서
행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중강이 우리 동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행인들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중강 스스로 꽤나 기뻐하면서 벼슬을 해 볼 뜻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이를 주선해 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인친(姻親) 가운데 산남 염방사(山南廉訪司)의 지사(知事)를
맡은 이가 있었으므로 중강이 그를 따라 노닐게 되었는데, 산남(山南)이 그 관아의 주차(奏差)로
임명해 주었으므로 그가 일찍이 첩서(捷書)를 지니고서 경사(京師)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해에 마침 내가 또 외람되게 회시(會試)에 급제하였으므로, 여관방에서 그를 만나 며칠 동안
허물없이 유쾌하게 지내다가 헤어졌는데, 그 뒤로는 다시 그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아, 중강이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우리나라 사신이 해마다
건강(建康 남경(南京))에 들어가서 조근(朝覲)을 하곤 하는데, 그에 대한 소식을 들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어쩌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데다가
경사(京師)에는 친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일반 백성들 사이에 뒤섞여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본국 사람들을 보는 것이 부끄러워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세상을 떠나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8, 9년의 세월이 지나고 사신들의 왕래가 또 한두 번이 아닌데 이처럼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단 말인가.

나는 중강과 죽마고우(竹馬故友)도 아니고 그저 경사(京師)에서 그의 얼굴을 한 번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송정(松亭) 선생이 바로 나의 좌주(座主)이고 보면, 좌주의 생질(甥姪)인 그와 범범하게
사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때문에 내가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같이 밥을 먹자고 하면
중강도 감히 배불리 먹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내가 같이 옷을 입자고 하면 중강도 감히
그 옷을 걸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중강을 종잡을 수 없는 기인으로 여겼지만
나는 그를 근후(謹厚)하게 대우하였고, 사람들은 중강을 방탕한 인물로 여겼지만 나는 법도에 입각해서
그에게 충고를 해 주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강도 나에 대해서는 감히 보통 사람을 대하듯
범범하게 사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쾌헌공의 자손들로 말하면 그야말로 한 시대에 성황을 이루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런데 중강만은 중원(中原)에서 노닐면서 끝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중강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후세 사람들이 장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중강이란 존재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서 전해지지 않게 될 것인데,
하물며 자식도 없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이 점을 특히 애달프게 여긴 나머지 대략적인 내용을 간추려 써 놓고는,
뒷날 중강에 대해서 알려 줄 자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중강이 만약 중원에서
공을 세워서 사씨(史氏)가 “고려(高麗) 출신으로 성은 박씨요, 부친은 모(某)이며
모친은 모씨(某氏)이다.”라는 기록 등을 역사책에 남기게 된다면,
나의 이 전기(傳記)는 전해지지 않아도 무방하겠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박씨의 자손들이 가보(家譜)를 만들 적에 나의 이 기록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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