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암 김구 적려유허추모비(自菴 金絿 謫廬遺墟追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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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9-02-20 01:27 조회2,12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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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1766년(영조42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기타문화재 - 남해군 보호문화재 제 2호
크기 높이 200cm, 너비 90cm, 두께 25cm
출토지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소재지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김만화(金萬和) / 김만상(金萬相) / 김만주(金萬?)
이 비석은 경남 남해군 설철면 노량리에 있는 남해충렬사에서 오른쪽 마을 안길을 따라 1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766년(영조 42년) 남해에 유배생활을 했던 자암 김구를 추모하기 하기 위해 그 옛터에 비를 세웠다.
비석의 형태는 비신과 이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신이 크고 중후해 보인다.
그러나 기단부분의 비문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마모가 심해져서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비문은 선생의 6대손인 남해현령 김만화가 짓고, 비석은 통정대부 전 사헌부장령 김만조가 건립하였다.
김구(1488~1534년)는 자가 대유(大柔)이고 호는 자암(自庵)·삼일재(三一齋)이며 시호가 문의(文懿)으로 본관은 광산김씨이다.
성종 19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1503년(연산군 9년)에 한성시에 급제했고, 1513년(중종 8년)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과 함께 투옥되고 개령(開寧: 경북 김천)에 유배되었다가, 남해에 안치(安置)되었다.
1531년 임피(전북 군산)로 옮겼으며, 1533년 풀려나와 고향 예산에 돌아가 이듬해 죽었다.
글씨에 뛰어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서울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고 한다.
선조 때 이조참판이 추증되고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 군산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그가 남긴 저서와 작품으로는『자암문집』,『이겸인묘비(李謙仁墓碑)』,『자암필첩(自庵筆帖)』,『우주영허첩(宇宙盈虛帖)』등이 현전하고 있다.
당시 혼란스러웠던 정시상황과 유배생활을 하면서 지낸 일화들과 그가 남긴 시가(詩歌)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단행본)남해문화원, 1989『남해의 금석문을 찾아서』남해문화원
원문
自菴金先生謫廬遺墟追慕碑
有朝鮮國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自菴金先生?廬遺墟追慕碑
嗚呼此吾先祖自菴先生謫居鄕也吾以先生六大孫出守是邑首訪先生遺址以得邑人指名其處?可以審先生之澤入人者深矣旣俳徊顧慕肅敬而?傷之不己而人自思曰賢人君子所經過棲息之地輒表章之以圖其不朽況不肖孫適?于?庸可使先生遺蹟泯泯無傳乎此所以臨陂之謫所禮山之杖?鄕皆有先生書院而必於此又謀刻石而記者也先生諱絿字大柔系光州金氏也生有異質年六歲作石榴詩詩意奇偉人皆??十六魁漢城試弱冠俱中生進壯元考官批其卷曰退之作羲之書二十六釋褐由槐院選入弘文館爲正字著作博士歷修撰校理旋拜吏曹佐郎遷正郎由司諫院司諫又入弘文館應校典翰直提學賜暇湖堂陞同副承旨移拜副提學嘗直玉堂讀書中廟乘月持酒親臨善其誦聲淸雅仍命歌侍賜以貂?思遇之隆實古今罕有先生嘗與趙靜菴金?菴爲道義交協心贊迪自任堯舜君民時運不幸己卯禍作遂竄?土于時事機?測人皆劫劫而先生不以禍福介意?小堂于竹林以詩酒自適積十三年量移臨陂癸巳放還甲午復官在謫連遭內外難哀?踰制及反松?稅服守廬昕夕哭臨涕淚所着草木盡枯先生生於弘治戊申卒於嘉靖甲午得年四十七萬曆辛卯贈吏曹參判用宗系辨誣時功勞也嗚呼先生道德文章有誌有狀又有國乘之載斯皆不可誣者不敢오不肖孫一二談也今去己卯百八十有八年而碑成於此豈獨爲瞻依追慕之私而己其將使遐裔人士景仰感發知先生遺墟之此而愈不忘也
崇禎紀元後七十九年丙戌三月 日
後安通訓大夫前行司憲府掌令金萬胄謹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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