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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 광산현 편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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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산인 작성일09-03-01 22:32 조회1,2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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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 광산현 편
고려

※ 김길(金吉) 태조를 도와 공이 있었으므로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채순희(蔡順禧) 명종 때 조원정(曺元正)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채순희가 입시(入侍)하여 공이 있었으므로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 김주정(金周鼎)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침착하였으며 말이 적었고 망녕되이 사귀어 놀지 않았다.

부성위(富城尉)가 되었을 때 몽고병이 대거 침입하니, 김주정이 잘 조치하여 널리 칭송을 받았다.
원종 때 괴과(魁科)에 발탁되고 여러 번 승진되어 이부 시랑(吏部侍郞)이 되었다.

충렬왕 때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원(元) 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김주정이 장수의 계략이 있다고 하여 소용대장군 좌부도통(昭勇大將軍左副都統)을 삼고 호두금패(虎頭金牌)를 하사하였다.

일본을 정벌하게 되어 대명포(大明浦)에 이르자 갑자기 대풍이 불어 배가 전복되고 수군들이 많이 빠져 죽었는데, 김주정이 계교를 써서 살린 자가 매우 많았다.

벼슬이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 김수(金須) 김길(金吉)의 후손이다. 담력과 지략이 뛰어났으며, 과거에 급제하자 어사(御史)를 거쳐 나와 영광군(靈光郡)의 지사가 되었다.

※ 김태현(金台鉉) 김수(金須)의 아들로 어머니 고씨(高氏)가 꿈에 명성(明星)이 품에 들어오더니 태현을 낳았다. 일찍이 동무들과 선배[先進]의 집에서 공부했다.

선배의 집에 있는 딸이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시를 좀 할 줄 알았다.
그 여자가 하루는 창틈으로 시를 던졌는데, “말 탄 사람 뉘 집의 백면서생(白面書生)인가, 3개월 동안 그 이름을 몰랐었도다.

이제야 그가 김태현인 줄 알았으니, 가는 눈 긴 눈썹에 가만히 정이 생기네.” 하니, 김태현은 이 시를 받은 뒤부터는 발길을 딱 끊고 그 집에 다시 가지 않았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번 승진되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성절(聖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원 나라로 갔는데, 때마침 원 나라 황제는 감숙성(甘肅省)에 가 있으면서 조서를 내려 여러 나라 사신들을 모두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게 했다.

김태현이 중서성(中書省)에 말하기를, “경사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황제의 명령이고, 감숙성의 행재소(行在所)까지 가는 것은 우리나라 임금의 명령입니다.

차라리 황제께 죄를 지을지언정 우리 임금의 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하니, 중서성에서 허락했다.
드디어 행재소에 도착하니, 황제가 그 충성의 간절함을 가상히 여기고 크게 상을 주었다. 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데리고 왕께 배알하니, 왕은 잔치를 베풀었다.

때마침 원 나라 사신 이 학사(李學士)가 자리에 있다가 왕에게 아뢰기를, “천하에는 이런 일이 없어지고 오직 귀국에만 고풍(古風)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감히 절하여 하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원 나라에서 정동행 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으로 제수하였다.

충숙왕 때 원 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국왕의 인(印)을 가져갈 때, 마침 태현은 행성(行省)에서 서리로 있었다.

태현이 가족을 이끌고 동쪽 금강산으로 갔으니, 이는 혐의를 멀리 하기 위해서였다. 원 나라에서 또다시 역마(驛馬)로 급히 불러 태현으로 하여금 다시 행성의 일을 맡게 하였으나, 이해에 죽었다.
호는 쾌헌(快軒)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들은 광식(光軾)ㆍ광철(光轍)ㆍ광재(光載)ㆍ광로(光輅)가 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광철ㆍ광재ㆍ광로는 계실(繼室) 왕씨(王氏)의 소생이다.

왕씨는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므로 해마다 나라에서 곡식을 내려 주었다.

※ 김광철(金光轍) 벼슬이 판밀직(判密直)에 이르렀고,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 김광재(金光載) 벼슬이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두문불출하면서 지극한 효도로 어머니를 섬기고 장례 때에는 예를 다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어 교유(敎諭)하기를, “경과 더불어 말하고자 하는데 만날 수 있겠는가.” 하니, 광재는 병을 앓으면서도 들어가 뵈었다.

왕이 이르기를, “나이나 안색은 매우 쇠약하지 않았는데 이렇듯 병이 들다니.”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가 사는 곳에 정문(旌門)을 세워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하고, 그 동네의 약간 호수를 예속시켜 받들어 섬기게 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김회조(金懷祖) 김광철의 아들로 벼슬이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 김흥조(金興祖) 김광재의 아들로 호걸스러워 얽매이지 아니하였으며[倜?], 벼슬이 중현군기감(中顯軍器監)에 이르렀다.

※ 김심(金深) 김주정의 아들로 진국상장군 고려병마도원수(鎭國上將軍高麗兵馬都元帥)로 제수되었다가,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내고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이 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 김승진(金承晉) 김심(金深)의 아들로 공손하고 검소하며 충직하였고, 벼슬이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

※ 김적선(金積善) 김승진의 아들로 홍무(洪武) 연간에 남원도 병마사(南原道兵馬使)가 되어 왜병과 사포(沙浦)에서 싸웠고, 또 임실(任實)에서도 싸웠는데 모두 크게 승리했다.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정세운(鄭世雲) 공민왕을 따라 원 나라로 들어가 숙직하여 지켰고, 여러 번 승진되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 공이 일등에 책록되어 군부판서 지문하성사(軍簿判書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기철(奇轍)을 죽이는데 일등의 공로로 기록되었다.

공민왕 8년에 홍건적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자, 세운이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가 되어 황주(黃州)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홍건적이 서경으로 쳐들어와 목책을 쌓고 성을 수리하므로 공격할 계략이 없으니, 원컨대 놀라 들먹이지 말고 민심을 안심시키십시오.” 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가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여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安東))로 피난을 가니, 정세운은 추밀겸 응양군상장군(樞密兼鷹揚軍上將軍)으로 따라갔다.
그는 성품이 충직하고 결백하여 주야로 조심하고 분개하면서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이에 왕은 정세운으로 총병관(摠兵官)을 삼고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를 제수했다.
공민왕 11년에 그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서울을 회복했으나, 이윽고 안우(安祐) 등에게 살해당했다.

공이 일등으로 책록되어 첨의정승을 추증하였다. 이홍길(李弘吉)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다.

탁광무(卓光茂) 높은 관직에 발탁되어 벼슬이 간의(諫議)에 이르렀다.

※ 김속명(金續命)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며 말을 용감하게 하였다. 공민왕 초에 감찰(監察)이 되어 법을 집행하는데 아부할 줄 몰랐으며, 후에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병들이 진해현(鎭海縣)을 침략하자, 속명이 급히 쳐서 크게 격파하니 왕은 기뻐하여 옷과 술과 금띠를 하사했다.

신우 때 삼사우부사(三司右副使)가 되었는데, 마침 반야(般若)의 사건이 생기니 그는 탄식하면서, “천하에 그 아버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혹 있어도 그 어머니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내 듣지 못했다.” 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사의(司議) 허시(許時) 등을 교사하여 그를 탄핵하게 했으나, 태후(太后)가 힘써 구하여 문의현(文義縣)으로 유배당했다. 죽은 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양왕 초에 윤소종(尹紹宗) 등이 글을 올려 그 억울함을 밝혀 포상(褒賞)과 시호를 추가해 주기를 애걸하므로 그의 자손을 책록함으로써 충혼을 위로했다.

※ 김정(金鼎) 벼슬이 중대광 광성군(重大匡 光城君)에 이르렀다.

※ 김첨(金瞻) 김회조(金懷祖)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군총제겸 보문각제학(右軍摠制兼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탁신(卓愼) 탁광무(卓光茂)의 아들로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니 탁광무가 말하기를, “우리 집의 증삼(曾參)이다.” 하였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성(臺省)의 벼슬을 여러 번 거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귀진(鄭龜晉) 두 번째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여러 번 올라가 형조 참의(刑曹參議)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 김구경(金久?) 두 번이나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렸으나 일찍 죽었다.

※ 김예몽(金禮蒙)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문명(文名)이 있었다. 아들 김덕원(金德源)과 김성원(金性源)도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양촌선생문집 제3권 시(詩)

※ 치당(致堂) 시(詩)

자주: 김 판서(金判書)가 조부를 사모하여 자호(自號)하다.
성남으로 백 리 가면 마을이 경원 덕수현(德水縣)이라 / 城南百里慶源村
둔재의 별업이 쾌헌에게 전해졌네 / 鈍齋別業傳快軒
지금은 어진 손자 조업(祖業)을 이어 받아 / 如今堂構有賢孫
사랑바쳐 정성바쳐 마음 노상 돈독하네 / 致愛致慤心常敦
시사에 임해서만 빈번을 닦겠는가 / 豈惟時祀修??
효도에 힘써힘써 아침부터 저녁까지 / 孝思翼翼連晨昏
조년에 출사(出仕)하자 충성으로 임금 섬겨 / 早年移忠朝至尊
우뚝한 관면으로 대궐에 나아가네 / 巍峨冠冕趨天?
화훈을 떠받들어 공업을 이룩하여 / 勉將功業承華勛
길이길이 집안 명예 보존하길 힘쓰더니 / 使我家聲能永存
중도에 돌아와 정적(靜寂)을 즐기면서 / 中途歸來甘避喧
솔 국화 손수 심고 동산을 열었다오 / 手種松菊開閑園
좋은 철엔 손님 맞아 술잔치 벌이기도 / 良辰愛客羅酒尊
대낮이면 햇볕 지고 때로 임을 그리누나 / 白日思君時負暄
하느님이 선(善)을 주어 가문이 창성하니 / 天公錫類令昌門
초료 가지 멀리 뻗어 열매가 되에 가득하네 / 椒聊遠條盈升蕃
백씨 중씨 우애 좋아 훈지를 부니 / 怡怡伯仲吹?塤
온 집안 화기는 따뜻한 봄 같네 / 一家和氣如春溫
진실로 선을 쌓으면 남은 경사 많은 거라 / 固應積善餘慶繁
공후가 끊임없네 다시 말해 무엇하리 / ??公侯何更言
내 알괘라 충효가 바로 덕의 으뜸임을 / 吾知忠孝是德元
냇물이 근원 있듯 나무가 뿌리 있듯 / 猶川有源木有根
방촌에서 출발되어 천지에 가득 차네 / 出自方寸彌乾坤
아 야박한 습속이여 왜 스스로 깜깜한지 / 嗚呼薄俗胡自?
수달도 조상 알고 까마귀도 은혜 갚네 / 獺猶報本鳥酬恩

[주C-001]치당(致堂) : 고려 때 문신 김회조(金懷祖)의 호. 벼슬은 판도 판서(判圖判書)에 이르렀는데, 조부는 중찬(中?)을 지낸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이며, 아버지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둔재(鈍齋) 김광철(金光轍)로서 가문이 매우 훌륭하였다.

[주D-001]빈번(??) : 마름과 흰 쑥으로 제물(祭物)을 가리킨다.

[주D-002]화훈(華勛) : 요순(堯舜)처럼 훌륭한 임금. 요(堯)는 공[勛]이 크다 하여 방훈(放勛), 순(舜)은 요의 뒤를 이어 거듭 밝았다 하여 중화(重華)라 한 데서 온 말.

[주D-003]초료(椒聊) 가지……가득하네 : 자손이 번성한다는 말. 초료는 후추로 료(聊)는 조사(助詞),《시경》 당풍(唐風) 초료(椒聊)에 “초료의 열매 번성하여 되에 가득하네. [椒聊之實 蕃衍盈升]” 하였는데, 후추는 열매가 많이 달리므로 자손이 많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4]훈지(壎?) : 악기(樂器) 이름. 훈(壎)은 흙으로, 지(?)는 대나무로 만들었는데, 《시경》 소아 하인사(何人斯)에 “백씨는 훈을 불고 중씨는 지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 한 말이 있으므로 우애하는 형제간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주D-005]방촌(方寸) : 사람의 심장은 사방 한 치쯤 된다는 옛말에서 온 것으로 마음을 가리킨다.

[주D-006]수달도……갚네 : 수달은 맹춘(孟春)이 되면 물고기가 살찌므로 물고기를 잡아 조상에 제사한다 하며, 까마귀는 새끼를 다 키워 놓으면 새끼들이 어미에게 먹이를 갖다 준다 하여 반포조(反哺鳥)라 하므로 한 말이다.《禮記 月令, 小爾雅 廣鳥》

태종 18년 무술(1418, 영락 16) 5월 4일(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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