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철(光轍),김회조(懷祖) ,김첨(瞻)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산인 작성일09-03-03 01:31 조회2,25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 김광철(金光轍 문정공파/문민공) ? ∼ 1349 (忠定王 乙丑六月十七日丙子卒).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둔헌(鈍軒),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王氏)로 증호부상서(贈戶部尙書) 정조(丁朝)의 딸이다.
1305년(충렬왕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345년(충목왕 2) 서연(書筵)이 설치되자 그 시독관(侍讀官)이 되었고,
1349(충정왕 2)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여 여러 도(道)의 경전(耕田)을 고찰(考察)케 하였다.
기황후(奇皇后:원나라 順帝의 第2皇后)의 족제(族弟)인 기삼만(奇三萬)이 황후의 세력을 의지하여 불법으로 사람을
해치고 재산을 탈취하는 등 만행을 자행함으로 안렴사(按廉使)로서 기삼만을 장형(杖刑) 끝에 옥사(獄死)케 하니
원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정치도감 등을 국문 하였으나 병으로 사면되었다.
삼중대광밀직사사(三重大匡密直司事) 화평군(化平君)에 봉작(封爵)되었고,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이며
묘(墓)는 실전되어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에 설단하였다. (見高麗史)
配는 원주원씨(原州元氏) 父 찬성사(贊成事) 관(瓘), 祖 첨의중찬(僉議中贊) 부(傅),
曾祖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진(瑨), 外祖 밀직우승지(密直右承旨) 경주김신(慶州金信)
※ 김회조(金懷祖)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경선(景先), 호는 치당(致當).
아버지는 문민공(文敏公) 광철(光轍)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로 찬성사 관(瓘)의 딸이다.
벼슬은 통헌대부(通憲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였고 해양군(海陽君)에 봉(封)해졌으며
묘(墓)는 실전되어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에 설단하였다.
配는 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父 파평군(坡平君) 해( ), 祖 부윤 암(府尹 ),
曾祖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정(珽), 外祖 장령(掌令) 최용(崔甬)이다.
※ 김첨(金膽 문정공파/문민공파) (1354∼1418)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자구(子具), 호는 연계(蓮溪).
아버지는 해양군(海陽君) 회조(懷祖)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파평군(坡平君) 해( )의 딸이다.
학문에 전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했다. 1376년(우왕2)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친어군호군(親禦軍護軍)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지내고,
1392년(공양왕4) 정몽주(鄭夢周)를 탄핵하다가 파직 되었다. 이 해 조선이 건국되자 복직,
1399년(정종 1) 봉상시소경 (奉常寺少卿)에 임명되고, 그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예조전서(禮曺典書)로 예문관제학(提學)을 겸임,
1404년(태종4)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우군총제겸 보문각제학(右軍摠制兼寶文閣提學)이 되어
여진족(女眞族)의 유민을 초유(招諭)했다.
민무질(閔無疾) 민무구(閔無咎) 형제와 가까이 하여 왕족간의 이간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파직,
후에 용서를 받았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복환 되지 못하고 죽었다.
음률(音律)에 밝아 아악(雅樂)을 교정했고, 의례(儀禮)에도 정통했다.
配는 정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묘(墓)는 실전되어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 남산촌에 설단 하였다. (見朝鮮王朝實錄, 與地勝覽)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둔헌(鈍軒),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王氏)로 증호부상서(贈戶部尙書) 정조(丁朝)의 딸이다.
1305년(충렬왕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345년(충목왕 2) 서연(書筵)이 설치되자 그 시독관(侍讀官)이 되었고,
1349(충정왕 2)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여 여러 도(道)의 경전(耕田)을 고찰(考察)케 하였다.
기황후(奇皇后:원나라 順帝의 第2皇后)의 족제(族弟)인 기삼만(奇三萬)이 황후의 세력을 의지하여 불법으로 사람을
해치고 재산을 탈취하는 등 만행을 자행함으로 안렴사(按廉使)로서 기삼만을 장형(杖刑) 끝에 옥사(獄死)케 하니
원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정치도감 등을 국문 하였으나 병으로 사면되었다.
삼중대광밀직사사(三重大匡密直司事) 화평군(化平君)에 봉작(封爵)되었고,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이며
묘(墓)는 실전되어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에 설단하였다. (見高麗史)
配는 원주원씨(原州元氏) 父 찬성사(贊成事) 관(瓘), 祖 첨의중찬(僉議中贊) 부(傅),
曾祖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진(瑨), 外祖 밀직우승지(密直右承旨) 경주김신(慶州金信)
※ 김회조(金懷祖)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경선(景先), 호는 치당(致當).
아버지는 문민공(文敏公) 광철(光轍)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로 찬성사 관(瓘)의 딸이다.
벼슬은 통헌대부(通憲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였고 해양군(海陽君)에 봉(封)해졌으며
묘(墓)는 실전되어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에 설단하였다.
配는 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父 파평군(坡平君) 해( ), 祖 부윤 암(府尹 ),
曾祖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정(珽), 外祖 장령(掌令) 최용(崔甬)이다.
※ 김첨(金膽 문정공파/문민공파) (1354∼1418)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자구(子具), 호는 연계(蓮溪).
아버지는 해양군(海陽君) 회조(懷祖)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파평군(坡平君) 해( )의 딸이다.
학문에 전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했다. 1376년(우왕2)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친어군호군(親禦軍護軍)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지내고,
1392년(공양왕4) 정몽주(鄭夢周)를 탄핵하다가 파직 되었다. 이 해 조선이 건국되자 복직,
1399년(정종 1) 봉상시소경 (奉常寺少卿)에 임명되고, 그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예조전서(禮曺典書)로 예문관제학(提學)을 겸임,
1404년(태종4)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우군총제겸 보문각제학(右軍摠制兼寶文閣提學)이 되어
여진족(女眞族)의 유민을 초유(招諭)했다.
민무질(閔無疾) 민무구(閔無咎) 형제와 가까이 하여 왕족간의 이간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파직,
후에 용서를 받았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복환 되지 못하고 죽었다.
음률(音律)에 밝아 아악(雅樂)을 교정했고, 의례(儀禮)에도 정통했다.
配는 정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묘(墓)는 실전되어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 남산촌에 설단 하였다. (見朝鮮王朝實錄, 與地勝覽)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