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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李穡)의 큰 자부는 문민공의 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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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9-03-03 11:43 조회1,2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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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牧隱)의 장손자(長孫子) 이맹균(李孟畇)이 쓴 이색(李색)의 비음기(碑陰記)에 의하면

이색(李穡)의 장자(長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은 문민공(휘 광철)의 외손서이다.

즉 목은의 장자부(長子婦)는 문민공 휘 광철의 3녀(夫君은 門下評理 柳蕙孫)의 딸이다.


목은집(牧隱集)
비음기(碑陰記)

이맹균(李孟畇) 지음


선조(先祖) 한산백(韓山伯)의 신도비(神道碑)는 문인 하 문충공(河文忠公)이 영락(永樂) 을유년 겨울에 지은 것이다. 금년 여름에야 비로소 좋은 빗돌을 얻어 각자(刻字)를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러 마쳤는데, 숙부(叔父) 유후공(留後公)께서 나에게 산맥(山脈)이 내려온 근원과 좌향(坐向)을 기록해서 비석 후면에 쓰도록 명하시고, 또 이르기를, “내가 비문(碑文)을 보건대,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면서부터 한산백에 봉해지는 사이의 산관(散官)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글을 간략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연보(年譜)가 있으니, 관직은 상고할 수가 있다. 그리고 비문에 기재된 자손들이 이제는 모두 성립하여 관질(官秩)이 승진되어서 현달(顯達)한 지위에 이른 자가 실로 많고, 비문을 지은 이후에 태어난 친손(親孫)과 증손(曾孫), 현손(玄孫) 또한 많으니, 이들을 다 기록해서 후손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빠짐없이 다 기록해서 모두 비석 후면에 기재하라.” 하시므로,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
선조의 묘는 한산군(韓山郡) 기린봉(麒麟峯)의 남쪽 기슭 축간(丑艮)의 산 계좌정향(癸坐丁向)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한산군 소재지와의 거리는 5리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 산맥은 홍산(鴻山)의 영흥산(永興山)으로부터 내려왔는데, 영흥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내려와서 우뚝 솟은 것이 바로 기린봉이니,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실로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온 것이다. 기린봉 아래 가지(加智)의 언덕은 청룡(靑龍) 백호(白虎)와 안산(案山)이 굼틀거리며 빙 둘러 옹위하여 가기(佳氣)가 충만하니, 아, 하늘과 땅이 아끼고 숨겨 두었다가 현철(賢哲)한 이의 좋은 묏자리가 되기를 기다렸던가? 묘의 손방(巽方)으로 33보(步)가 되는 곳에 큰 비석을 세워서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기록하여 무궁한 후세에 밝게 보이고, 또 자손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서 다음과 같이 갖추 열거하는 바이다.
선조의 장남은 우리 선군(先君)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휘 종덕(種德)인데, 문하 평리(門下評理) 유혜손(柳惠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맹유(孟?)는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이고, 그다음은 맹균(孟畇)이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별장(別將)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 맹진(孟畛)은 한성부 부윤(漢城府府尹)이다. 장녀는 서령(瑞寧)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도총제(都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연기(衍基)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그다음 유기(裕基)와 보기(保基)는 글을 읽고 있으며, 장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이후(李厚)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 이의(李椅)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도염서 녹사(都染署錄事) 김자행(金自行)에게 시집갔다. 감찰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주(澍)이고, 다음은 엄(?)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서령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방선(方善)이고, 차남은 방경(方敬)이다.
중남(仲男)인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휘 종학(種學)은 문하 시중(門下侍中) 이춘부(李春富)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숙야(叔野)는 광주 목사(光州牧使)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진주 목사(晉州牧使)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인데, 지금 모두 사망하였다. 그다음 숙묘(叔畝)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고, 그다음 숙복(叔福)은 급제하였으며, 막내 숙치(叔?)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이다. 딸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광주 목사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1남 축(蓄)은 호조 정랑(戶曹正郞)이고, 장녀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안숭신(安崇信)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이원근(李元根)에게 시집갔다. 정랑의 1남 1녀는 모두 어리다. 진주 목사는 5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감목관(監牧官) 유쟁(柳諍)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능직(陵直) 곽분(郭汾)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유학(幼學) 전극경(全克敬)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사남(李思南)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어리다. 첨총제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思)는 사역원 주부(司譯院注簿)이고, 그다음 외(畏)는 능직이며, 그다음 이(異)는 동부 녹사(東部錄事)이다. 주부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능직의 1녀는 어리다. 녹사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동지는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치(?)는 원평도호부 부사(原平都護府副使)이고, 그다음 여(?)는 사헌부 감찰이며, 장녀는 의령감무(宜寧監務) 하맹질(河孟?)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공조 좌랑(工曹佐郞) 안숭효(安崇孝)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 김리(金理)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어리다. 부사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수은(壽垠)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견(仁堅)이고, 그다음은 의견(義堅)이며, 모두 어리다. 급제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문비(文?)이고, 차남은 문강(文疆)이며, 장녀는 군자감 녹사(軍資監錄事) 윤빈(尹濱)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 유중인(柳仲?)에게 시집갔다. 문비의 1남은 어리다. 참판의 1녀는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 이경현(李敬賢)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 의산(義山)은 사정(司正)이고, 1녀는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 김문효(金文孝)에게 시집갔다.
계남(季男)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 휘 종선(種善)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권균(權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계주(季疇)를 낳았는데, 계주는 호조 정랑(戶曹正郞)이다. 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의 딸에게 재취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계린(季?)은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이고, 그다음 계전(季甸)은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인데 정미년 친시(親試)에 급제하였으며, 그다음 계원(季?)은 전직(殿直)인데 임자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그다음 계정(季町)은 글을 읽고 있다. 장녀는 강화도호부 부사(江華都護府副使) 이백상(李伯常)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능직 김숭로(金崇老)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1남은 개(塏)이고, 장녀는 유학 이휘(李徽)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분연(李賁然)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판사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숙(塾)이고, 그다음은 훈(壎)이며, 그다음은 해(垓)이고, 그다음은 경(坰)이며, 모두 어리다. 수찬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육(堉)이고, 그다음은 우(?)이며, 모두 어리다. 전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은 연(堧)이고, 모두 어리다. 능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외현손(外玄孫)은 모두 50여 인이나 되므로, 글이 많아서 명씨(名氏)를 다 쓰지 않는다. 그리고 혼인(婚姻)한 가운데 이성(李姓)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모두 우리와 같은 이씨가 아니다.
자손이 많고 대대로 높은 관작이 나서 통현(通顯)한 지위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나처럼 불초한 사람도 외람되이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거쳐 낭묘(廊廟)의 직임에까지 참여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적덕(積德)으로 인한 여경(餘慶)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덕을 많이 쌓은 자는 덕택이 먼 후세까지 전해지고, 근본이 깊은 나무는 지엽이 무성하게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로다.
또 홍무(洪武) 을축년 가을에 명(明)나라 국자감 학록(國子監學錄) 장보(張溥), 전부(典簿) 주탁(周倬)이 사명을 받들고 와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우리 선조를 바라보고는 역자(譯者)에게 묻기를, “저 몇째 번에 서 있는 이는 순수한 유도인(有道人)인데, 저분이 바로 이 선생(李先生) 모(某)가 아닌가?” 하므로, 역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선조의 앞으로 다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우 공경하였다. 그리고 무진년에 명년(明年)의 하정사(賀正使)로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는 고황제(高皇帝)가 한 번 보고 선조의 어짊을 알고는 한참 동안 말을 나누어 주고, 선조가 물러감에 미쳐서는 물러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그려 놓음 직하다.” 하였으니, 대체로 선조의 풍도(風度)를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다.
영락(永樂) 계미년에는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사명을 받들고 본국에 와서 일 때문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그간에 목은 문집을 구하여 보고는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또 행장(行狀)을 구하여 열람하고는 또한 매우 사모하여 시(詩)를 지어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그러자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청하여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이렇게 간절히 탄복하고 사모하시니, 서(序)를 지어서 권수(卷首)에 붙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축군(祝君)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의당 환조(還朝)하여 글 잘하는 조신(朝臣)에게 청해서 지어 보내겠다.” 하였다. 과연 그 후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양성(羊城) 진련(陳璉)이 찬한 묘지명(墓誌銘)을 보내왔는데, 사적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양촌 선생(陽村先生)이 찬한 행장에 근본하여 조사(措辭)를 변개하려다가 오히려 실상을 잃게 된 곳이 있다. 그러나 덕행을 논함에 있어서는 역시 양촌의 말에 근본하여 약간 손익(損益)을 가하였고, 문장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문사(文辭)가 전실(典實)하고 풍창(??)하되, 흥치(興致)는 풍아(風雅)에서 근본하였고, 언론(言論)은 덕의(德義)에 도달하였으므로, 화평한 음조와 정대한 기운이 편질(編帙)의 사이에 성대히 드러난다.” 하였고, 명(銘)의 한 구절에는, “오직 공이 제작한 것은 화곤처럼 문채가 나도다.[惟公製作 華袞之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만약 공이 천조(天朝)에서 벼슬을 했다면 반드시 평소에 온축(蘊蓄)한 것을 크게 펴서 천자(天子)에게 알아줌을 받았을 것이니, 그래서 훈명(勳名)을 수립하여 역사(歷史)에 길이 빛나게 되었더라면 왕사례(王思禮)만 유독 당(唐)나라에 훌륭한 공훈을 남기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 나라에서만 벼슬을 하여 경륜을 다 펴지 못하였으니, 그 애석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총결(總結)의 말을 보면 이는 양촌이 하지 않은 말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 문집을 보고 그 위인을 알아서, 감히 외국 사람이라 하여 낮게 보지 못하고 칭찬한 말이 여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그 성심으로 감복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우리 선조의 도덕의 숭고함과 문장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동방 사람들만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 사모할 뿐 아니라, 고황제의 명철함으로도 한 번 보고 그 어짊을 알았었고, 또 장 학록(張學錄), 주 전부(周典簿) 같은 이들은 중조(中朝)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는데도 역시 매우 공경하였으니, 반드시 성덕(盛德)의 광휘가 사람들에게 감지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 소경(祝少卿), 진 조교(陳助敎)의 탄복하고 칭찬한 것도 어찌 문장의 오묘함이 풍아에 잘 합치되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아울러 여기에 나타내는 바이다.
선덕(宣德) 8년 8월 하한(下澣)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참찬 집현전대제학 겸 성균대사성(議政府參贊集賢殿大提學兼成均大司成) 손(孫) 이맹균(李孟畇)은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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