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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金德齡 장군의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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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7-01-01 09:31 조회1,3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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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
우리 5천년 역사를 살펴보면 2백여회가 넘는 외세의 침입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중에 조선조 임진왜란처럼 생민이 어육이된 참혹한 전란은 일찍이 없었다. 저 좌해부자로 칭송받는 율곡(李珥)선생이 임진왜란 9년전에 경연에서 제의한 십만양병설이 받아들여져 미리 대비했더라면, 저처럼 7년이란 장기간의 전쟁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흥망성쇠가 모두 천운인 것을 어찌하였겠는가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 방방곳곳에서 훌륭한 장수들이 기라성처럼 나왔으나,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명장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당시에 방년 26세로서 조선 의병사상 최연소의 명장으로 등단하여 초병장군·익호장군·충왕장군 등으로 불리어 세상에서 비장으로 추앙받아 관군이나 의병들이 모두 장군을 믿고 든든하게 여기었다. 이것은 어찌 지혜와 용맹을 한 몸에 지닌 명장이 아니고서야 가능할 수 있겠는가. 당시에 장성현감 이귀는 장군을 무군사에 추천하면서, "용과 범을 뒤쫓아가 잡고 공중에 날아다닐 줄 알며, 지혜는 공명과 같고 용맹은 관우보다 났다."고 하였으며, 우암 송시열 선생은 일찍이 인재에 대하여 논하면서, "우리나라 인재가 선조시대에 가장 성하였다. 도학으로는 퇴계·율곡·우계이며, 장재로는 이순신·김덕령이다."고 하였다. 이상의 유현들의 말로 보더라도 장군을 지용이 겸비된 해동명장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지혜와 용맹을 마음껏 펴보지도 못한 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방년 29세로 타는 가슴 끌 물을 찾지 못한채 「춘산곡」을 남기고 소인배들에게 웅지가 꺽이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그래서 장군이 비명에 꺽인 것을 사람들은 송나라 명장 악무목이 진회에게 죽임을 당한 일에 비한다. 이에 필자는 장군의 약사를 신빙성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김충장공유사 및 각종 문헌에 의하여 간단하면서도 정확하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장군의 출생과 그의 주변
현 전라남도 광역시인 광주에서 동쪽으로 16Km쯤 가면 무등산을 앞에 두고서 마치 경주의 반월성처럼 생긴 고색창연한 충효리가 있다. 그 곳이 바로 옛날에 장군이 출생하였던 석저촌이다. 장군은 조선조 선조 원년(1568년) 12월 29일에 아버지 습독공 붕변과 어머니 남평반씨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모부인 반씨가 무등산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안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서 장군을 임신하였는데 만삭에도 역시 그런 꿈을 꾸었다. 해산할 적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호랑이가 문앞을 지키고 있다가 장군의 고고한 울음소리가 들리자 후원 대밭으로 해서 무등산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전설에 의하면 장군이 출생한 뒤로 3년동안 무등산 초목이 꽃이 피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인걸은 지령으로서 무등산의 정기가 온통 장군에게로 쏟아져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장군의 본관은 광산으로서 자는 경무이다. 시조는 신라왕자 휘 흥광에게서 비롯되었고, 파조는 고려 낭장공 규로 장군의 17대조이며, 조선조에서 태백으로 불리었던 양녕대군의 부옹인 광산군 한로(漢老)는 11대조이다. 장군은 충효와 시례를 기구지업으로 삼아 온 유학고가에서 생장하여, 8세가 되던 해에 종조부인 교리공 윤제의 별장인 환벽당에 나아가 입학하였다. 장군은 용모가 준수하고 재질이 총명하여 전도가 촉망되므로 교리공은 항상 "후일에 우리 집안을 대창시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며 칭찬하곤 하였다. 교리공은 저 유명한 정치가이자 문학가인 송강 정철의 처외조부이기도 하다. 송강은 소년 시절에 을사사화로 가화를 만나 순천에 피거하고 있는 둘째 형 정소(鄭巢)를 찾아 서울을 떠나 순천으로 가던 중에 환벽당 아래 조대에서 교리공에게 발견되어 환벽당에서 수업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그의 외손서가 되었다. 그리고 환벽당과 시내를 사이에 둔 성산에 서하당·식영정이 있다. 서하당은 장군의 재종숙 서하당 김성원의 별장이며, 식영정은 김성원이 자신의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하여 지은 별장이다. 서하당은 송강보다 11년 연상으로서 서로 도교가 되어 우정이 매우 깊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성산별곡"은 송강이 서하당이 산중에 은거하면서 벼슬하지 않는 것을 주제로 사시풍경을 곁들여 지은 작품이다. 또 구봉 송익필도 서하당과 도교하였다. 구봉은 선조 19년(1586년) 병술에, 율곡(李珥)선생이 동인들에게 모함당한 것을 송변하는 연평 이귀(李貴)의 상소문을 대초한 까닭으로 동인들이 구봉을 더욱 미워하여 천적에 환원시켜, 그 집안을 멸망시키려 하자 구봉은 광주로 내려와 서하당에게 우거하였다. 당시 장군의 나이 19세였다.

3. 신화적인 각종 기문
장군에 대한 신화적인 이야기는 문헌에 실린 것보다 구전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이를테면 갓난아이 때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새처럼 훌훌 날아 이쪽 벽에 붙기도 하고 저쪽 벽에 붙기도 하였다는 이야기, 하루아침에 무등산에서 돌을 날라다가 환벽당 밑의 축대를 쌓았다는 이야기, 여장사인 누님과 씨름 대회에서 있었던 이야기, 어린이 시절에 시냇가에서 멱감다가 알몸으로 누웠던 바윗돌이 움푹 자국나 있는 이야기, 광주 말바위에다 말을 세워놓고서 날아오는 화살을 받으라고 당부한 다음 무등산으로 날아가 화살을 쏘고 다시 날아와 본즉 말이 멍하게 서있기만 하자, 장군은 장검으로 그 말 머리를 베버린 찰나에 화살이 그제야 씽하고 날아왔다는 이야기, 서봉사의 중 수십명과 단독으로 줄다리기하여 이겼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구전적인 설화는 그만두고 신빙성 있는 문헌에 기록된 것만을 간추려 장군의 신용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날으며 나뭇가지 꺽음
장군은 눈방울이 번쩍번쩍 빛나 사람을 쏘아 보는 듯 하였고 10리밖에 있는 물체도 훤하게 관찰할 수 있었으며, 뭇아이들과 놀 적에도 행동이 이상하였지만 장군이 용력(勇力)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장군의 부모도 그가 신용(神勇)이 있는 줄을 몰랐었다.
어느날 아침에 장군이 환벽당에서 공부를 마친 뒤 책을 기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밥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장군이 그 까닭을 모부인(母夫人)에게 여쭈어 보니, 모부인은 "너는 네 집이 가난한 줄을 모르느냐. 가난한 집이 어찌 아침 저녁으로 끼니를 다지어 먹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장군은 말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교리공(諱 允悌, 종조) 집으로 가서 식량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부엌에 땔나무도 없는 것을 보고는 뒷동산으로 가 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꺽는데 마치 썩은 가지를 꺽듯이 하면서 새처럼 이 나무 저 나무를 훌훌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그제야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장군이 신용이 있는 비범한 아이인 줄 알았었다. 이때 장군의 나이 겨우 여덟살이었다.

2), 처마밑 참새 날 듯이 잡음
장군은 또 어느날 뭇아이들과 환벽당에서 놀게되었다. 환벽당은 높이가 10여 길이나 되고 그 밑에는 큰 연못이 있어 평지에서 쳐다보면 마치 공중루각과 같았다. 장군은 사닥다리도 놓지 낭?고 몸을 번뜩 솟구쳐 올라 한 손으로는 처마 밑 참새 둥지를 더듬으면서 환벽당을 빙 한바퀴 돌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공중을 걸어다니는 것과 같았었다. 장군은 이렇게 한바퀴 빙 돈 다음에 몸을 훌쩍 날려 땅에 닿지않고 사뿐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 장군의 신용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전파되자, 습독공은 준엄하게 경계하였다. 그러자 장군은 학업에만 열중하면서 신용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이때 장군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3), 목발로 물 위를 걸음
장군은 12세에 글동무 6~7명과 무등산 서봉사에서 글을 읽게 되었다. 이 서봉사는 서산대사의 고제자로서 선장무예에 뛰어났으며 후일 임진왜란에 승병을 규합하여 중봉 조헌등 7백 의사와 함께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승병장 영규가 거처하였던 절이다. 하루는 글동무 중 어느 한 사람이 친상을 당하였다. 때마침 7월 장마 비가 개이지 않아 무등산에서 내려오는 홍수로 절 앞 시냇물이 넘쳐흘러 사람이나 말이 통행할 수 없었다. 그 부음을 전달하는 사람이 소리소리 불러 가까스로 알려주자, 그 글동무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며 급류를 건너가려하였다. 장군은 이 광경을 보고는 그대로 놔두면 필시 그가 급류에 휩쓸려 의사하게 될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즉시 서봉사의 중이 목발을 가져 오자 장군은 그 목발을 왼발에 신은 다음, 그 글동무를 겨드랑이에 끼고서 홍수 위에 서 오른발로 마구 헤엄쳐 급류를 돌파하여 건네다 주었다. 이러자 그 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장군의 신용에 감탄하고, 또한 그런 신용을 숨겨온 자제력에 대해서도 높이 감탄하였다. 이 어찌 12세 소년으로서 쉽사리 임기웅변할 수 있는 슬기와 용력이겠는가.

4), 조석으로 동복 조대에서 낚시질
장군은 14세에 아버지 습독공을 여의고 편모를 봉양함에 있어 지성으로 효도를 다하였다. 형제가 세 사람으로 맏은 지평공 덕홍이고, 둘째는 바로 장군이며, 셋째는 풍암공 덕보이다. 삼형제가 한 방에 거처하면서 가정 생계가 매우 어려웠지만 편모를 봉양하는데에 있어서는 항상 부족한 것이 없었다. 장군의 숙부 농재공(諱 곤변)이 오래전에 동복 석교촌으로 이거하여 그 마을 앞 시냇가에 영롱대를 짓고서 은거하였다. 광주 석저촌에서 동복 석교촌까지는 거리가 1백여리가 되는데 아침저녁으로 영롱대를 왕래하면서 싱싱한 천어(川漁)를 낚아다가 편모의 조석반찬을 마련해 드려, 아무리 매서운 추위와 심한 무더위에도 한 번도 천어(川漁)반찬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이 때에 장군이 1백여리를 왕래하는 모습은 마치 비호같이 달려가는지 날아가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5), 씨름 대회에서 장사를 이김
장군은 17세 되던 해에 향시 즉 초시에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 18세에는 부인 홍양이씨를 맞이하였다. 호남의 민속은 5월 단오절이 되면 관위의 광장에 인읍의 장사들이 모여 씨름판을 벌여 필국을 하는 자에게는 푸짐한 상품을 주었다. 심판관은 그 고을의 수령이 맡았었다.
이 때에 장성현에서 씨름판이 벌어져 인읍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식량까지 싸가지고 오기도 하였는데, 그 장성은 바로 장군의 외가가 있는 고을이기도 하였다. 씨름판이 한창 무르익어 어느 장사 한 사람이 모든 씨름꾼들을 이기고 나서 기고만장하여 춤을 추면서 "나하고 씨름할 사람이 있으면 광장에 나와서 승부를 겨루어 보는 것이 좋겠오."하고 외치었다. 이 때에 장군이 구경하다가 씨름판으로 들어가려다가 그만두니, 당시에 월사 이정구의 아버지 이개가 마침 장성현감으로서 장군에게 술과 안주를 권하면서 "그대가 저 장사를 이긴다면 목전의 통쾌한 일이겠네."하였다. 그러자 장군은 부득이 초립 도포에 가죽신을 신은 채로 씨름판으로 들어가니, 그 장사는 단소한 장군을 보고 어린애처럼 잔뜩 얕보아 장군의 허리를 들어올려 몇 바퀴 빙빙 돌리다가 땅에다 내던져 버렸다. 그런데 장군은 엎어지기는커녕 가죽신을 신은 두 발이 땅속으로 1척쯤 쑥 들어가 우뚝 서있었다. 그러자 그 장사가 비로소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다시 맞붙어 장군이 단번에 휘저어 쓰러뜨리자 장사가 실수하였다며서 다시 겨루자고 요구하였다. 장군은 그제야 눈에서 불빛이 튀기면서 호랑이처럼 울부짖어 장사를 죽일 듯 하니, 주위에서 강력히 만류하였다. 장군은 눈에서 불빛이 튀기면 신용이 크게 발동하였다. 신용이 발동하게 되면 아무리 스스로 자제하려고 하여도 되지 아니하여 반드시 닭을 잡아 그 생피를 마셔야만 신용이 가라 앉잤다.

6), 우계 제자에 악무목 필체
장군은 20세에 백형 덕홍과 매형 김응희를 따라 우게선생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장군은 기국이 크고 행동이 단정하니 우계선생이 매우 칭찬하였다. 21세에는 동지들과 무등산 서봉사에서 놀면서 법당 벽에다 성명들을 열서해 놓았는데, 장군이 오언절구를 써 두었는데 그 필화가 호건할이 휙휙 비바람이 일어나는 듯하였다. 그 뒤에 중국 사람이 서봉사를 지나다가 장군의 글씨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기면서 "악무목의 글씨가 어찌 여기에 써 있단 말인가?."하였다. 그 뒤에 서봉사는 정유재란에 소각당하였으나 장군의 글씨가 씌여 있던 법당만은 병화를 모면하여 보존되었다. 이것은 장군의 글씨를 신(神)이 보호하였기 때문이라고 서봉사 중들은 말하였다고 한다.

7), 명의 찾아 진주 길
장군이 22세 되던 해에 모부인 반씨의 병환이 위독하여 여러 달을 병상에 누워 차도가 없자 장군은 밤낮으로 모부인 곁에서 의관을 벗지 아니하고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하루는 경상도 진주에 편작처럼 영험한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장군은 즉시 밤중에 말을 달려 그 이튿날 이른 아침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명의를 효성으로 감동시켜 그를 말위에 모시고서 그날 낮 12시쯤에 집에 돌아와 모부인 병환을 치료하여 마침내 회춘시켜 드렸다. 그 명의는 바로 진주에 사는 참봉 김남인데, 당시에 신의(神醫)로 일컫는 사람이었다. 김남은 경험방 맨 끝장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하루는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어놓고 앉아 있는데, 뜻밖에 작달만한 키에 날래고 용감스럽게 생긴 한 청년이 추녀 밖에 말을 매놓고서 들어와 '저는 광주에 사는 김덕령입니다. 어머님의 병환이 위중하여 어젯밤에 컴컴함을 무릅쓰고 말을 달려 지금 여기에 도착하였습니다.' 하면서 광주까지 왕진해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병증은 오늘 안에만 손을 쓴다면 치료할 수 있지만 진주에서 광주까지의 거리가 300여리가 넘는데, 가령 간다고 하더라도 시기가 늦을 것이오, 더구나 나는 평소에 남의 집에까지는 왕진하지 않았소."하고 대답 하였다. 그러자 김덕령은 뜰에 엎드려 울면서, 돌아가시게 될 어머님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애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득이 승낙하니, 그는 나를 무명배로 말 위에 편안히 동여맨 다음 "눈을 감고 뜨지 마십시오, 눈을 뜨게 되면 위험합니다."라고 당부하고서는 말을 급히 모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당부대로 눈을 감고 앉았는데 귀가에 들리는 것은 폭풍과 소나기 소리 뿐으로 공중을 날으는 듯 하더니만, 겨우 한 시해쯤 지나 벌써 그의 집에 도착하였는데 시간이 오시 반쯤 되었었다. 곧 바로 그의 노모를 치료하여 주었는데, 참으로 그는 세상에 없는 이인이다."하였다. 그리고 장군이 탔던 말도 역시 신마였다. 장군은 그 신마를 타고서 방안으로 달려들어 갔다가 곧 바로 말을 돌려 뛰어나와도 문이 좁아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어떤 때는 지붕위에 뛰어올라 가로 누워서 몸을 뒹글려 처마 밑으로 떨어지다가 당에 닿을세라 번뜩 솟구쳐 방안으로 날아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 장군은 둔갑술을 통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하였다.

4.의병 활약

1), 임진왜란 초기에 잠시 기병
장군은 25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이해 5월에 제봉 고경명 『장군의 종조부 (諱 함)의 외손서 찬성공』이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장군의 처남 이인경이 제봉을 찾아가 장군과 장군의 백형 덕홍을 장재로 추천하였다. 장군은 6월에 백형과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고경명의 의병과 연합하여 전주까지 갔었다. 그런데 백형이 장군에게 "늙으신 어머님이 집에 계시는데 막내 동생만 혼자 있으니 우리 형제가 모두 전쟁터에 나가면 어머님을 보살필 사람이 없게 된다. 나는 임금을 위해 죽을 터이니 너는 돌아가서 어머님을 봉양하거라."고 하자 장군은 부득히 토적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고 귀향하였다. 장군의 백형은 고경명과 함께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7월 10일에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앞서 장군의 형제가 의병을 모집하여 출전할 적에 모부인 반씨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니, 모부인(母夫人)은 "너희들이 충신이 되면 나는 충신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면서 두 아들의 장도를 격려해 주었다. 이 어찌 보통 부인으로서는 가능한 일이겠는가. 참으로 그 아들의 그 어머니이다.

2), 담양에서 마침내 의병장으로 등단 함.
선조 26년(1593년) 계사에 장군은 26세였다. 왜란은 발발하여 백성들은 어육이 되어가는데, 이 해 8월에 불행하게도 모부인 반씨의 상사를 당하였다. 백형이 순절한지 1년만에 어머니를 여윈 장군은 망극함이 이를데 없었다. 장군은 아우 덕보와 함께 어머니 묘소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평소에 불효한 자신을 속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가 형편은 2년간의 전쟁으로 민심은 흉흉하였고 여기에 흉년까지 겹쳐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많아 심지어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각처의 관군이나 의병들도 대부분 패전하여 사기가 땅에 떨어졌고 또한 조정은 명나라의 강압에 강화를 지켜보고만 있는 딱한 실정이었는데도 위정자들의 동서당쟁은 오히려 극렬해져 그치지 아니 하였다. 이 때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한 장군의 매형 김응회와 동향인 해광 송제민『장군의 종조부인 선무랑 김윤경의 외손자』이 여막으로 찾아와 장군에게 기병할 것을 권고하였다. 따라서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도 서로 장군을 도백 이연암에게 대장감으로 추천하여 조정에 까지 알리게 되었고, 이경린은 또 무기까지 제공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장군은 시묘살이를 하는 중에서도 " 온 국토가 왜적들에게 유린 당하였는데 백관들은 새처럼 숨어버리고 360주에 남자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공적으로는 국치를 뼈아프게 생각하고 사적으로는 백형의 원수를 분하게 여기고 있었다.

부모상중에는 기병하지 않는 것이 본시 유가(儒家)의 도리(道理)였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장군은 권도에 의하여 계사년 11월에 여막을 아우 덕보에게 맡기고서 최복에 먹물을 들여 입고, 담양에서 호남 열읍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자 열읍에서 장군의 풍성(風聲)을 듣고 의병 오천여명이 순식간에 모여 들었는데 그 중에는 일당 백 할 용사들이 삼백여명이나 되었다. 이 때 장군은 가산을 팔아 무등산 중턱 주검동에서 대장장이들을 시켜 무기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자신이 사용할 오십근짜리 철병도와 이백근짜리 쌍철추를 특별히 주조하였다. 그리고 갑옷은 고려 명장 정지 장군의 유물인 사슬(沙瑟)갑옷 이었다.

장군은 방년 26세의 청년 장수로서 하루 아침에 의병 오천여명을 모집하여 의성(義聲)이 크게 진동하니, 도원수 권율(權栗)은 영남에 주둔하고 있다가 장군의 의성을 듣고 군호를 초병군이라 지어 주었으며, 또 광해는 전주에 분조하여 있다가 장군을 불러 공북정(拱北亭)에서 그의 무용을 시험해 보고는 익호장군(翼虎將軍)이란 호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12월에는 선조대왕이 선전관을 보내어 충용군(忠勇軍)이란 군호와 군기를 내려주고 겸하여 형조좌랑을 특별히 제수하였다. 임진왜란 7년을 통하여 의병장들이 기라성처럼 일어났지만 선조·광해·도원수가 거듭거듭 칭호를 내린 것은 오직 장군뿐으로서 전무후무한 큰 은총이었다. 당시에 조정에서 장군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앞서 장성현감 이귀가 장군을 대장감으로 추천하면서 "지혜는 공명과 같고 용맹은 관우보다 낫다"고 한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3), 일본 대판까지 정벌하겠다는 전략 발표
선조 27년(1594년) 갑오 정월 초 6일에 장군은 영남으로 행군에 앞서 전략노선을 발표하고 이어서 영남에도 격문을 띄워 의병에 호응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장군의 전략노선은 다음과 같다. 즉 담양을 출발하여 순창·남원·운봉·함양·산음·단성·삼가·의령·함안·창원·김해·동래·부산과 동해의 대마도를 거쳐 일본 대판까지 쳐들어 간다는 전략이었다.
장군은 이러한 웅략을 세우고서 마침내 정월 22일에 투구에 사슬갑옷을 입고 이백근짜리 쌍철추와 오십근짜리 철병도를 찬 다음 충용군·초병군·익호장군 등 세 깃발을 앞세우고서 백색 신마(神馬)에 올라 위풍도 당당하게 의병 오천여명을 영솔하고 담양을 떠나 순창에 이르러 야영하였다. 그 이튿날 23일에 남원에 도달하여 광한루 앞에다 류진(留陳)하고서 날마다 병사들을 직접 지휘하면서 훈련시켜 정예병을 만들었다. 당초에 광한루는 남원성 남문밖에 있는데, 그 앞은 바로 시장터로서 주위에 밤나무가 빽빽이 서 있었다. 이렇게 협착한 지혀에서는 오천여명이 넘는 대병력의 군막을 치는 것이 극히 어려웠다. 그래서 장군은 밤나무를 베어 버리고 그 곳에 진을 치기로 결정하고 팔척 철병도를 뽑아 한차례 휘두르니 아름드리 밤나무들이 순식간에 삼대 쓰러지듯 제거되었다. 장군은 그 곳에 의병 군막을 설치하고 병사들을 직접 조련시켰던 것이다. 이 때에 장군은 남원 사람 최담령이 담약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별장(別將)으로 삼았다.

4), 호랑이를 맨 손으로 생포하여 왜진에 보여줌
어느날 장군이 병사들을 훈련시키던 중에 송아지만한 호랑이 두 마리가 진중으로 들어와 병사를 물어뜯는 변이 생겼다. 그러자 장군은 맨 손으로 그 호랑이를 생포해서 결박하여 왜적들의 군영에 보여주니 왜적들은 장군의 용력을 무서워 하였다.
장군은 "나는 만약 신용을 발동시키면 아무리 캄캄한 밤중일지라도 십리안에 있는 물체를 환하게 대낮처럼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고 또, "나는 밤에 혼자 다니면 꼭 호랑이 두 마리가 좌우에 따라 다닌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장군은 날고기를 즐겨 생닭을 찢어먹으면서 "나는 이런 것을 먹으면 신비스런 용력이 자연히 왕성해진다."고도 하였다.

5), 홍의장군과 사명당에게 편지보냄
임진왜란 당시 영남에는 유명한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再祐)가 있었다. 장군은 영남으로 진군하기에 앞서 의령에 주둔하고 있는 홍의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시종 협력하여 전에 없었던 국치를 씻어버리자"고 하였다. 홍의장군은 장군의 충성어린 편지를 받아보고 감탄하여 그의 편비장을 특별히 보내 답서를 전하자, 장군은 또 홍의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두 장군은 이처럼 의기가 서로 통하여 의병중에 주류가 되었다. 그래서 뒷날 광주 유림들이 장군을 의열사에 봉향할 적에 당시 광주목사였던 서하 이민서(西河 李敏敍)가 이 일을 주관하면서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선생에게 상서하니, 우암선생은 "곽장군을 동향(同享) 시키면 대단히 좋겠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장군은 승병 팔도도대장(八道都大將)인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에게도 편지를 보내 격려한 동시에 왜적들을 무찌르자고 다짐하였다.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아! 묵자(墨子)의 이름을 지니고서 유자(儒者)의 행동을 한 사람으로는 내가 오늘날 대장(大將) 한 인물을 보았을 뿐입니다. 바야흐로 왜적들이 쳐들어오자 여러 고을들이 모조리 함락 당하여 건장한 장수와 정예스러운 병졸들도 새나 쥐처럼 도망하여 숨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유독 대장은 깊은 산림 속에서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도총섭대선(都摠攝大禪)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하루 아침에 부도(浮屠)를 떠나 정토(征討)의 대열에 나섰습니다. 국난(國難)에 임하여 의병을 일으킨 것이 육식(肉食)하는 유자(儒者)보다 났습니다." 하였다.

6), 영남으로 진군
장군은 선조 27년(1594) 갑오 2월12일에 남원에서 의병을 영솔하고 영남으로 진군해 함양에 도착하여 병사들을 주둔시켜 놓고, 도원수의 군막으로 가서 현신(現身)하고 주둔지 군막으로 돌아왔다. 4월에는 함양에서 진주로 진군하여 진주 동쪽 월아산에 목책산성을 쌓은 다음 대여촌 마평(代如村 馬坪)에다 진지 구축 공사를 하여 연병장(練兵場)을 만들고 거기에 진을 치고서 둔전(屯田)을 크게 설치하여 왜적들과 싸워 지킬 전략을 세웠다. 장군은 한가한 날에는 마평 연병장에서 투구와 사슬갑옷에 호랑이 가면을 쓴 다음 좌우 옆구리엔 쌍철퇴(추)(雙鐵椎)를 차고 백색 신마(神馬)에 올라 철병도(鐵柄刀)를 휘두르면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때 장군이 고함쳐 호령하면 산악이 쩌렁쩌렁 진동하고 사람들도 깜짝깜짝 놀라 물러서곤 하였다.
장군은 이렇게 직접 병사들을 훈련시켜 더욱 정예병으로 만드니, 도원수는 전주 출신 병사들을 특별히 장군의 의병에다 편속시켜 주었으며 제도(諸道)의 의병들도 조정의 명령에 의하여 모두 장군의 의병에 편속되었다. 이렇게 병사가 증강되자 그 의성(義聲)이 원근간에 메아리처럼 진동하여 사기(士氣)가 백배 충천하여 저마다 왜적과 한번 싸워보기를 희망하였다.
그러자 관군이나 명나라 병사들이 모두 장군을 믿고 마음 든든히 가졌다. 이 때에 왜장 청정(淸正)은 화가(畵家)를 몰래 간첩으로 보내 장군의 초상을 그려다 보고는 '참 장군이다"라고 탐복하고서 여러 진영을 모두 철수시켜 세 개의 진영으로 통합해 놓고 싸움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왜적들은 장군의 위명(威名)을 듣고 석저장군(石底將軍)이라 부르면서 무서워 하여 감히 도전해 오지 못하였다. 석저장군이란 장군이 출생한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칭호인데 왜적들은 그것을 모르고 돌밑(石底)에서 나온 장군으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9월2일에는 왜적 2백여명이 고성(古城)지방에 침입하여 남녀 50여 명을 사로잡아 가는 것을 장군은 복병을 배치하여 모두 탈환하였다. 22일에는 선조대왕이 겨울이 다가온다고 하여 장군에게 호피립(狐皮笠)·이엄(耳掩)등을 하사하였다.

7), 이순신장군, 곽재우장군과 거제도에서 수륙연합작전
장군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젊은 장수로서 병졸들을 잘 훈련시켜 모두가 정예병이 되었다. 장군은 도원수로부터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과 수륙연합하여 거제도에 점거하고 있는 왜적들을 토벌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하달받았다. 그래서 장군은 갑오년 가을이 저물어 가는 9월 대병력을 정돈 영솔하고서 26일 새벽녘에 충무공이 주둔하고 있는 견내량(見乃梁)에 도달하였다. 이 때에 홍의장군 곽재우도 연합하였다. 27일 석양에는 비가 내렸다. 이날 장군은 적도(赤島) 앞바다 선상(船上)에서 충무공·홍의장군과 연석작전회의를 열어 전략을 미리 약속한 후 각각 주둔하고 싶은대로 돌아갔다.
장군은 일주일동안 병사들과 무기를 재정비한 후 시월 초사일에 충무공·홍의장군과 함께 장문포(長門浦)에서 수륙연합하여 대병력을 출전시켜 왜적들을 들이치니 왜적들은 혼비백산하여 허겁지겁 동서로 달아나 성문을 닫고 출전해 오지 않자 장군은 하는 수 없이 칠천(漆川)으로 환군 하였다. 이로부터 이틀후인 초 6일에는 왜적들이 장문포에다 "일본은 명나라와 강화를 추진중이므로 서로 전투할 수 없다"는 비문을 꽂아 놓고서 꼼짝도 하지 않으니 장군은 웅용(雄勇)을 써보지도 못한 채 초 7일에 병사들을 영솔하고 다시 진주로 환진하였다.

8), 진주의 전망장사(戰亡將士)에게 제사 지냄.
장군은 진주로 환진한 후 전날과 똑 같이 병사들을 훈련시켜 항상 전투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계사년 6월에 진주성이 함락된 이후 날씨가 음음하면 귀곡성(鬼哭聲)이 여기저기서 들리곤 하였다. 당시에 왜적들이 칠만여 진주군민들을 개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참혹하게 도륙하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다. 그래서 장군은 선조 27년(1594) 갑오 10월에 친히 제문을 지어 진주의 전망장사(戰亡將士)들에게 위령제를 올렸다. 장군은 무장이었지만 문장에도 능하였다. 이른바 문무겸전한 장군으로서 그가 지은 제문은 비장하고 격렬하여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그 제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 한 조각 전쟁터가 만고의 의(義)로운 지역이었네, 눈물을 닦으며 술잔을 올리고 피를 토하며 조사(弔辭)를 고하오. 전화(戰火)가 갑자기 솟아오르니 해와 달도 컴컴하였네, 새삼스레 무어라 말하리까 옥석(玉石)이 함께 탓구려, 저 남강을 굽어보니 노중연(魯仲連)의 동해가 아닌가, 높은 산에 전사한 백골이 모두가 순국한 넋이련만, 참담하게 풍상에 드러났고 처량하게 성월(星月)만 비춰주네, 살아서 열렬한 넋이 죽었다고 귀곡성을 내서야 되겠는가, 용렬한 장수 덕령이 간소한 제수를 올립니다. 아! 진주산은 뾰족뾰족하고 진주강물은 넘실넘실하구려, 유유(悠悠)한 이 한(恨)은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길다오." 하였다.

9), 의령 정암(鼎巖)에서 왜적 섬멸
선조 28년(1595) 을미에 장군의 나이 28세였다. 정암은 영남의 의령과 함안의 접경에 있는데 그 밑으로 큰 강물이 흐른다. 장군은 홍의장군과 연합하여 왜적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병사들을 영솔하고 진주에서 의령으로 와 정암 근처에 진을 쳤다. 어느날 장군은 홍의장군과 함께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강가를 시찰하였다. 그런데 왜적들이 갑자기 강 상류에 나타나 얕은 여울에 표목을 세우는 것이었다. 장군은 홍의장군에게 "무엇 하려고 표목(標木)을 세우느냐"고 물으니, 홍의장군은 "오늘밤에 왜적들이 틀림없이 기습해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목을 세워두어 깊은 데를 피하는 것이다."하였다. 장군은 그 말을 듣고 "그렇다면 두 진이 한군데 있을 수 없다"고 하고서 마침내 병사들을 영솔하고 강을 건너가 복병 시켜놓고 또 그들이 세워 둔 표목도 뽑아 아주 깊은 곳으로 옮겨두었다. 과연 밤이 깊자 왜적들은 강을 건너려는 찰나에 장군이 함성을 지르면서 왜적들의 뒤를 쫓아 역습을 가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은 표목만 바라보고 강을 건너다가 모조리 빠져 죽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1567(선조 즉위년)~1596(선조 2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광주출신.아버지는 붕섭(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계종(繼宗)의 딸이다.
20세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하여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조달의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하였으나 이때 강화회담이 진행중이어서 별다른 전투상황도 없고, 또 군량의 부족으로 그 예하 3천여명 가운데 호남출신 5백여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 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이를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여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함에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출처:대종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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