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자료

도만호 김성우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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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모 작성일09-03-10 22:01 조회3,115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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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려 충신 도만호 김성우 장군 평전

1. 들어가는 말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자 오늘의 보령을 있게 한 말하자면 보령시민들의 가슴속에 보령의 전설적인 인물로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바로 전라우도 도만호 겸 초토 영전사 김성우 장군이다. 하지만 김성우 장군에 관련된 사료(史料)와 지금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는 보령지역의 수많은 김성우 장군 관련 전설 및 지명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김성우 장군의 업적은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못했고, 그런 연유로 정사에 기록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계속되는 글을 통하여 보령의 수호신으로 보령을 지켜낸 도만호 김성우 장군의 위대했던 조국애를 넘어 보령사랑 정신을 재평가해 보고자 한다.

2. 도만호 김성우 장군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던 보령지역을 지켜내고 백성들을 구해낸 보령의 수호신이자 보령사람들의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정사의 기록에서 배제된 채 역사에 묻혀온 김성우 장군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가? 잘 알려진 대로 김성우 장군은 고려 말의 위대한 장군으로 서해안에 침범하던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을 받고 보령에 내려와 이 지역에 출몰하여 백성을 괴롭히던 왜구를 완전히 축출하여 물리쳤으나, 이성계의 조선 건국으로 인하여 ‘불사이군’이라는 충절로 보령시 청라면 스무티 고개에서 장렬히 순국함으로써 고려조에 대한 마지막 충성을 다한 장군으로 지금까지 구전되어오고 있다.

2.1. 김성우 장군의 가계도(家系圖)

김성우 장군의 가계는 고려의 전통적인 권문세가로 오늘날의 개성에서 덕망이 높은 집안이었다. 김성우 장군은 고려 충숙왕 14년인 1327년 개성에서 판도판서였던 김윤장의 아들로 출생했다. 김윤장의 아버지 즉 김성우의 할아버지는 백관의 수장이었던 문화시중 김류이다. 김류의 아버지 고려 원종 때 문과장원으로 명성을 날렸던 대장군이자 문숙공의 시호를 받은 김주정이다. 이처럼 김성우의 가계는 고려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대대로 문무를 겸비한 집안으로 개성에서 세거를 이루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김성우 장군의 가계는 보령과는 무관한 개성에 뿌리를 둔 고려의 토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개성 출신의 김성우 장군이 자신의 뿌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보령 땅으로 내려오게 된 동기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보령지역에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보령에 내려온 김성우 장군은 보령지역의 왜구를 완전히 축출하여 1392년 개선장도에 오르려했으나 마침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정권참여를 거부하고 불사이군의 순절을 선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함께 보령에 내려온 김성우 장군의 장남인 상호군 김남호가 망국부순(亡國父殉)의 진지인 이곳 보령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김성우 장군이 도만호 겸 초토사로 명받고 보령으로 내려올 때 장남인 상호군 김남호만을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다. 김성우 장군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차자인 청단찰방 김남염의 후손은 아직도 황해도 장연에 세거지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래서 김성우 장군의 후손인 보령의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장군의 묘역이 있는 청라면 발산 장군동에 장군의 부친인 김윤장과 차자인 김남염의 단소를 만들어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이것은 김성우 장군이 왕명을 받들고 보령지역으로 부임하는 와중에도 차자로 하여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문중을 지켜야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후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장군을 수차례 불러들였지만 끝내 거절하고 자결함으로써 김성우 가계는 다시한번 위기에 처한다. 실제로 보령의 광산김씨 족보인 <광산김씨판도판서공파보>에는 김성우 장군의 부친인 판도판서 김윤장을 비롯하여 두 아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다. 이것은 고려 말 조선 초로 이어지는 김성우 장군의 순절로 인하여 대대로 고려의 사대부로 탄탄한 기반을 다져온 한 가문의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이들의 가계를 대변해주는 중요한 단서로 여겨진다. 김성우 장군의 순국 이후 그 후손들이 대대손손 보령시 청라면에 세거지를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2.2. 김성우 장군의 행력 및 주요 전투내용

풍전등화 같던 고려 말의 정치상황에서 오로지 국위를 선양하고 군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백성과 나라를 지키고자했던 김성우 장군의 행력과 전사에 길이 빛날 전투업적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충숙왕14년(1327): 판도판서공 김윤장의 장남으로 개성에서 출생함.
충혜왕4년(1345): 약관(弱冠) 18세의 나이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됨.
충정왕2년(1350): 도만호 겸 전라충청양호초토사(都萬戶 兼 全羅忠淸兩湖招討使) 로 발탁됨.
충정왕2년(1350)- 충정왕(忠定王) 28년(1350): 왜구의 서해안 약탈 시작.
왜구(倭寇) 토벌의 왕명을 받고 출정(出征)하여 전주, 나주, 부 령(扶寧)등
전라지역의 왜구를 무찌름.
우 왕7년(1380): 전라우도(全羅右道) 도만호(都萬戶)로 임명됨.
우 왕7년: 내포지역의 급보를 접하고 서해안의 남포와 대천 등지에서 대첩 (大捷)을 올림.
공양왕2년(1390): 임주(林州), 한주(韓州), 서주 주둔의 왜구를 섬멸함.
공양왕4년(1392):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건국하여 신정부에 참여를 수차례 요청했으나, 이성계의 청을 끝까지 거절하고 지금의 보 령시 청라면 성주산(680M)일대 은선동(隱仙洞)에서 은거함.
공양왕4년(1392): 65歲의 일기로 애마와 함께 현재 보령과 청양의 경계인 스무티 고개에서 자결함.
김성우 장군의 산소: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발산에 위치. 이곳은 세칭 고려향 또는 장군동이라고 불리며 재호(齋呼)는 고려의 혼을 사모한다는 의미로 ‘려모재’(麗慕齋)라 함.

2.3. 김성우 장군의 치적

김성우 장군은 보령지역에 출몰하여 백성을 괴롭혀오던 왜구의 섬멸과 더불어 도만호 겸 초토사로 보령을 비롯한 서해안 방위 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치적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김성우 장군은 병사들의 식량조달을 위하여 군둔전(軍屯田) 설치하여 자급자족함으로써 40여년에 걸친 왜구의 소굴인 서해안 지역을 중앙정부의 군수의 조달 없이 소탕할 수 있었다. 둘째, 김성우 장군은 왜구와의 전투에 필요한 군의 장비(裝備)를 직접 제조하여 자급하였다. 셋째 군마를 목축하고 기병을 조련하여 보령지역이 해안과 인접하고 있는 특성 상 속전속결의 전투를 유도함으로써 오랜 항해로 지친 왜군을 대파하여 섬멸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 김성우 장군은 생포한 왜구는 군로(軍奴)로 노역에 충당하여 부족한 노동력으로 이용하였다.

3. 도만호 김성우 장군의 재평가 - 사료(史料)를 중심으로

그렇다면 616여 년 동안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 깊이 묻혀있던 고려충신 김성우 장군을 21세기에 재평가해야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김성우 장군은 오늘의 보령 땅을 왜구의 침략과 침탈로부터 지켜내 보령시민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한 보령 땅의 수호신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는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3.1.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보령을 지킨 수호신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동시에 순절한 고려충신 김성우 장군이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오늘날의 보령지역을 기술하고 있는 현존하는 최초의 서책인 『신안현지(新安縣誌)』(1412년 태종 13년)이다. 이 서책의 ‘인물’편의 맨 첫 머리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김성우 장군이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都萬戶招討事奉命討倭倭寇巢窟公盡滅亡戰時自來故峯曰玉馬寶劍自出故洞稱飛刀洗軍入海門而有軍入浦之名伏兵花厓而有伏兵坪石浦?冠故有冠巖賊屍屯蟻故有蟻坪(장군께서 도만호초토사로 왜구를 토벌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았다. 장군께서 왜구의 오랜 소굴이었던 이 지역 왜구를 소탕하였다.전시에 신마가 튀어나온 산은 옥마산이다. 보검이 절로 나왔으므로 동리의 이름이 비도세이다. 군사가 바다의 문으로 들어온 곳으로 군두리(현재의 어항) 포구라 부른다. 군사를 화애언덕에 매복시켰다 해서 복병펄(복병리)이 되었다. 장군께서 갓을 벗어 놓았던 곳이라 갓바위이다. 장군께서 무찌른 적의 시체에 개미가 모여들어 개미펄(청라 의평리)이라 한다.)

위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우 장군은 고려 말의 도만호 장군으로 초토사란 특명을 받아 당시 서해안지역에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소탕하라는 명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도만호초토사로 서해안지역의 왜구 소탕명령을 하달 받은 김성우 장군은 보령지역에서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소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옥마산’, ‘비도세’, ‘갓바위’, ‘복병펄(복병리)’, 개미펄(의평리)‘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있는 현존하고 있는 많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장군께서 이 지역에 진을 치고 왜구를 물리쳤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사를 매복시켰다는 복병리나 적의 시체에 개미가 들끓었다는 의평리를 비롯하여 현재의 대천어항 해안초소인 군입리 등과 같은 구체적인 지명의 기록은 보령지역에 살고 있던 백성을 괴롭히던 왜구와의 피나는 전투가 이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곳임을 증명하는 단서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김성우 장군의 보령지역에 출몰한 왜구 섬멸의 과정에 대한 기록은 후속 서책의 보령의 ‘인물’편의 맨 첫 머리에 실려 있다. 다음은 영조 24년인 1748년에 좌부승지 정권(鄭權)이 쓴 『신안읍지(新安邑誌)』에 실려 있는 김성우 장군에 대한 기록이다.

高麗 金成雨 光州人 侍中周鼎之曾孫版圖判書允藏之子 麗末以都萬戶 招討事奉命 討倭 師過保寧時 保寧 久爲倭寇巢穴 公盡 剿滅之戰時神馬自來故峯曰玉馬 寶劍自出 故洞稱飛刀 軍入海門而 有軍入浦之名 伏兵花厓而有伏兵坪之號 浦石 ?冠故 有冠巖 賊屍 屯蟻故 有蟻坪至今 人誦異蹟公樂其土 家于靑蘿 故 子孫世居 人謂玆土之主人
(김성우는 광산 김씨다. 시중 주정의 증손자이며 판도판서 윤장의 아들이다. 고려 말 도만호로써 초토사의 명을 받아 왜구 토벌 차 보령을 지날 때 이곳이 왜구의 소굴로 김공이 소탕하고자 할 때 신마가 스스로 나왔다 하여 봉의 이름을 옥마봉이라 하였으며 보검이 나왔다 하여 동리 이름이 비도라 한다... 병사를 매복시켰던 곳을 복병리라 하며.... 왜구의 시체에 개미가 운집하였으므로 의평이라 하고... 지금도 사람들이 이상한 기적 같은 일이라 말한다. 김공이 그 곳을 좋아하여 청라에 집을 마련하니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 한다.)

위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신안읍지(新安邑誌)』는 『신안현지(新安縣誌)』를 바탕으로 기술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신안읍지(新安邑誌)』의 내용 또한 대부분의 경우 『신안현지(新安縣誌)』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와는 달리 이 『신안읍지(新安邑誌)』에서는 장군의 가계를 비롯하여 장군께서 왕명을 받들고 보령에 출몰한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보령에 왔음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왜구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보령지역의 여러 지역 중의 하나인 청라라는 지명을 거론하고 이 지역에 장군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사람들이 보령 땅의 주인이 바로 김성우 장군이라 부른다”(人謂玆土之主人)고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신안읍지(新安邑誌)』는 장군께서 보령 땅에 오게 된 배경과 목적 그리고 보령 땅의 수호신임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장군께서는 고려 말의 도만호초토사로 왜구를 소탕하라는 왕명을 받들고 보령 땅에 내려와 이곳에 출몰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던 왜구를 완전히 소탕했으며, 보령 땅의 주인이자 수호신임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아울러 다음의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에서도 김성우 장군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高麗 金成雨 光州人 侍中周鼎之曾孫版圖判書允藏之子 麗末以都萬戶 招討事奉命 討倭 師過保寧時 保寧 久爲倭寇巢穴 公盡 剿滅之戰時神馬自來故峯 稱玉馬 寶劍自出 故洞稱飛刀 軍入海門而 有軍入浦之名 伏兵花厓而有伏兵坪之號 浦石 ?冠故 有冠巖 賊屍 屯蟻故 有蟻坪至今 人誦爲異蹟公樂其土 家于靑蘿 故 子孫 世人以爲玆土之主人

위의 『여지도서(輿地圖書)』또한 앞의 『신안읍지(新安邑誌)』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으나 맨 마지막 문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이 바로 김성우 장군이라말한다”(世人以爲玆土之主人)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신안읍지(新安邑誌)』나 다른 서책에 기술되어있는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고 말한다“(人謂玆土之主人)에서처럼 단순한 ”사람들“(人)이 아닌 “세상 사람들”(世人)이라고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보령시에서 발간한 『보령군지』의 인물편의 ‘충의’의 장에서도 김성우 장군을 맨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본관은 광산이고 고려 때의 시중 김주정의 증손이며 판도판서 김윤장의 아들이다. 고려 말 전라우도도만호 초토사에 임명되어 당시 서해안에 자주 침범해오는 왜구를 무찌르는데 앞장섰다. 당시 왜구들은 우왕6년(1380)부터 공양왕 2년(1390)에 이르기까지 남포에 그들의 교두보를 세운 듯 여기를 기점으로 충청도 내륙지방까지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 방화를 일삼으며 횡행할 때 남포일대에는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초토사 김성우는 왜구들의 침범 근거지인 남포 일원의 왜구를 소탕하기 위하여 먼저 지금의 대천시 군입리 상륙 상주막에서 첫 번째로 저항해오는 왜구를 무찌르고 다시 흑포 남쪽 갓바위에서 다시 왜구를 무찌르고는 전의를 상실한 왜구를 남포에서 소탕하여 그 침범의 맥을 끊음으로서 다시는 침범의 기회를 잃게 하였다. 그리고는 내륙지방에서 준동하는 왜구를 소탕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길을 택해준 장군이다. 그 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서 태조 이성계가 그에게 출사를 권고하여 불렀으나 불사이군의 신조에서 참여를 거부하고 먼저 애마를 죽이고 스스로도 자결하였다. 그 후 그의 묘는 청라면 라원리 발산에 두었는데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장군의 묘를 굴참하고 철장으로 쑤시는 등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우 장군은 전설속의 인물이 아닌 고려 말에 실존했던 고려의 장군으로 왜구의 침탈로부터 보령 땅과 보령사람들을 지켜낸 보령의 수호신이자 위대한 장군이었음이 여러 문헌의 고증을 통하여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3.2. 김성우 장군의 보령지역 ‘전투’와 현재 구전되는 보령지역의 ‘지명’

모두에서 살폈듯이, 김성우 장군이 활동하던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략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특히 왜구는 1350년(충정왕)부터 우리나라 남해안 및 서해안에 침입하기 시작하여 1370-1390까지 20여 년 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히며 우리나라 전역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김성우 장군은 1380년 전라우도 도만호로 서해안지역에 출몰한 왜구토벌이란 왕명을 받고 현재의 보령지역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는 전사에 길이 빛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김성우 장군의 보령지역 전투 및 관련 지명은 육군 32사단 해안대대가 주둔지 인근 대천, 보령지역의 옛 지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료(史料)를 발견하여 보고한바 있다. 당시 최학수 대령에 따르면, 32사단 측은 대천해수욕장 인근에 김성우 장군의 사적비를 세워 그 공적을 기념하는 한편 약 2년에 걸쳐 2군사령관을 비롯해 각계로부터 20여 차례 김성우 장군 소개요청을 받고 해안초소 등에서 설명회를 개최한 바 있다고 한다. 이 장에서는 최학수의 「김성우 장군 전투사」를 중심으로 ‘군입리 전투’ 및 ‘의평리 전투’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군입리(軍入里)’ 전투 증명자료
김성우 장군의 ‘군입리’ 전투를 증명하는 자료는 앞서 언급한 『신안현지(新安縣誌)』를 비롯하여 『여지도서(輿地圖書)』등과 같은 현존하는 모든 서책에서 김성우 장군을 소개하는 글에서 한결같이 군입리 전투내용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군입리라는 지명이 김성우 장군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다음의 『신안읍지』(p.13)에서 확인할 수 있다.

軍入浦在縣南三十五里金成雨討倭內浦時引兵于此浦故因名焉
(군입리는 현에서 남쪽으로 삼십오리에 위치한다. 김성우 장군이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을 받고 해안으로 왜구를 유인하던 곳으로 이때부터 이곳의 이름을 군입리라 불렀다)

또한 김성우 장군의 군입리 전투와 관련된 또 다른 증명자료는 김성우 장군 사후 오늘날까지 불리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이 지역 인근의 지명의 예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상주막’은 고려군이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김성우 장군 본영에 소부대로 파견되어 항상 주둔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둘째, ‘해망산’은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던 산이라고 하여 해망산이라 불리우며 현재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다.
셋째, ‘흑포’라는 지명은 왜구들이 죽으면서 흘린 검붉은 피가 내를 이루었다하여 흑포라는 지명이 유래하고 있다.
넷째, ‘갓바위’라는 지명은 현재의 보령시 대천해수욕장 해금강에 위치한 바위로 김성우 장군께서 이곳에 출몰한 왜구를 섬멸할 당시 머리에 쓰고 있던 갓을 이 바위위에 벗어놓고 전투에 임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하고 있음을 다음의 『신안읍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冠巖在縣南四十里麗末金將軍成雨剿滅倭寇時脫冠比巖土因名焉
(갓바위는 현에서 남쪽으로 사십리에 위치한다. 고려 말 김성우장군이 왜구를 섬멸할 때 갓을 벗어놓았다는 데서 이 바위를 갓바위라 부른다).

이상의 군입리 전투관련 군입리 인근의 지명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장군 사후 61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김성우 장군의 왜구와의 군입리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중요했었나를 알 수 있다.

2. ‘의평리’ 전투 증명자료

김성우 장군의 보령지역 전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였던 의평리 전투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앞의 군입리 전투와 마찬가지로 『신안현지(新安縣誌)』를 비롯하여 『여지도서(輿地圖書)』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賊屍屯蟻 故有 蟻坪 至今. 또한 김성우 장군의 의평리 전투를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는 현재까지 의평리 전투에서 유래되고 있는 청라면의 복병리와 의평리라는 지명에서 찾을 수 있다. ‘복병리(伏兵里)와 ’의평리(蟻坪里)‘는 현재의 청라면 소재지의 지명으로 김성우 장군의 의평리 전투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보령현‘ 편)에 따르면, ’의평리‘와 ’복병리‘의 지명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蟻坪川在縣東二十里伏兵川在縣東十七里高麗金將軍成雨伏兵於此大破倭寇名曰伏兵其時蟻屯倭寇屍故名曰蟻坪
(의평천은 현에서 동으로 이십리에 있으며 복병천은 동으로 십 칠 리에 있다. 고려 김성우 장군께서 군사를 매복하여 왜구를 크게 물리친 이후 지명이 복병리가 됐으며, 그 당시 왜구의 시체가 개미떼와 같다하여 의평리라 부른다.)

이외에도 복병리 남쪽에 자리한 ‘불무골’을 비롯하여 시루성과 ‘창터’ 등의 지명이 청라면에 소재하고 있다. 이처럼 청라면 일원에 김성우 장군의 왜구와의 전투와 관련된 많은 지명이 장군 사후 61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보령시민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이러한 현존하는 많은 김성우 장군 관련 지명들이 김성우 장군의 왜구 소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령 곳곳에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보령 땅을 지키고자 투혼을 불살랐던 김성우 장군의 충혼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로 볼 수 있다.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김성우 장군이 보령지역에 오게 된 중요한 이유는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을 받은 데서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보령의 광산김씨의 입향조가 바로 김성우 장군이며, 『광산김씨판도판서공파세보』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료 등에서의 김성우 장군 관련 기록은 엄연한 역사적이며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구전되어 내려오는 보령지역의 김성우 장군의 전투와 관련된 지명인 군입리, 갓바위, 월전리, 복병리 등은 실제로 김성우 장군이 이 지역에서 왜구와의 혈전을 치른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증명한다는 사실이다.

4. 김성우 장군의 보령지역에서의 전투를 고증(考證)하는 자료

4.1. 현존하는 김성우 관련 서책

지금까지의 기술과정에서 보령지역에서의 김성우 장군의 전투와 행적에 관련되어 소개한 아래의 서책은 김성우 장군의 이 지역에서의 왜구와의 전투와 그 전투에 관련된 현존하는 지명을 고증하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1) 『신안현지(新安縣誌)』
1412년(태종 13년) 지금의 보령시인 당시의 신안현에서 작성한 서책으로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1392년 6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성우 장군의 보령지역에서의 왜구 토벌에 대한 근거와 현재 보령지역의 김성우 장군 전투관련 지명을 기록하고 있다.

2)『신안읍지(新安邑誌)』
1748년(영조 24년) 우부승지 정권이 쓴 서책으로 현재의 보령시의 인물, 풍속 등을 기술하고 있다. 『신안읍지(新安邑誌)』는 『신안현지(新安縣誌)』의 속편으로 이 책에서도 김성우 장군의 왜구토벌을 비롯한 현재의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3)『여지도서(輿地圖書)』
1757년(영조 33)∼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전국단위의 읍지로 55책이 전해지고 있다. 이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보령의 ‘인물’ 편에서 김성우 장군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왜구토벌의 내용과 현존하는 지명을 앞의 서책과 마찬가지로 기술하고 있다.

4)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는 공주의 유학자 이병연(1894-1977)이 100여명을 동원 1910년부터 12년 동안 전국 129개 군을 직접 조사하여 엮은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대동지지』(1864)를 바탕으로 49개 항목에 걸쳐 조사 편찬한 국내 최대의 지리서로 군 건치연혁, 신구속현, 군명, 산천 등 지리 관련 항목을 비롯하여 유현, 학행, 명신, 문행, 청백 등 인문관련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김성우 장군의 가계를 비롯하여 보령 ? 서천지역에서의 왜구와의 전투내용 및 치적과 구전지명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외에도 『호서읍지』(1871),『충청도읍지』,『열읍지』,『보령향사』(1991) 등에서도 김성우 장군의 보령지역에서의 전투와 전투에 얽힌 구전지명 자료를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4.2. ‘묘비’ 및 ‘신도비’

1) 김성우 장군 <묘비>

충남 보령시 청라면 라원리 발산에 소재하고 있는 김성우 장군 산소에 세워진 묘비에서도 김성우 장군의 보령지역에 출몰한 왜구 섬멸에 관한 행적을 살필 수 있다. 이 묘비는 1607년(선조 40년)에 장군의 7대손인 김경지와 김섭이 세운 김성우 장군의 묘비이다. 조선중기 의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묘비를 세우는 것 또한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하고 중앙관청의 엄격한 통제가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김성우 장군의 묘비에 새겨진 내용 또한 허위가 아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麗季爲全羅右道都萬戶卽之水使也嘗以王命討倭冠過保寧樂其土因家焉遂爲縣人/.../
(고려 말에 전라우도 도만호를 역임하였으니 지금의 수사이다. 일찍이 왕명을 받들어 왜구를 토벌하고 보령을 지나다가 보령 땅을 좋아하여 가계를 꾸리니 보령현의 현인이 되었다)

특히 김성우 장군의 묘비에서 주목할 부분은 당시 충청도 절도사와 관찰사를 겸임했던 이홍로가 1604년에 직접 협조 출력했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在昔祖光城君辨誠床喝未成以卒今乎小孫追述祖意方謀有爲適李弘老按節本道出力以助遂??源流親自鐫焉.
(... 그 옛날 우리 조부 광성부원군께서 이 상석을 판출하고 묘갈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졸하여 이제 어린 손자가 조부의 뜻을 받들어 진술코자 정성을 꾀할 즈음 이홍로가 마침내 충청도 절도사 겸 관찰사로써 출력하여 도우니 대략만의 원류계통을 서술하며 내가 친히 돌에 새김이여)

말하자면 김성우 장군의 묘비는 김성우 장군 사후 215년 만에 사료(史料)와 관청의 협조와 고증을 거쳐 장군의 7대손에 의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김성우 장군의 묘비가 사후 215년이 지나서야 세워졌을까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동참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충성을 다하고 자진한 김성우 장군의 묘비를 후손들이 새로 들어선 조선사회 초기에 감히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기의 묘비에서 알 수 있듯이 장군의 고손인 광성부원군 김극성이 장군의 묘비를 세우려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대목이 이를 또한 입증하는 것이다.

2) 충정공 김극성 <신도비>

충정공 김극성은 진사 김맹권의 둘째아들이자 김성우 장군의 고손으로 사마시와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이후 중종반정을 도와 정국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우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다. 김극성의 신도비는 김극성 사후 73년만인 1613년(광해군 5년)에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능동에 세운 비석이다. 김극성 신도비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은 조선조 8대문장가중의 한 사람인 월사 이정구가 지은 글에 있다.

/.../麗朝有諱周鼎官之侍中 是其鼻祖 至諱流監察御使 諱允臧版圖尙書生諱成雨全羅道萬戶實 公高祖嘗奉 命討倭過保寧樂其土因家焉遂爲保寧人/.../
(/.../고려 왕조에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던 김주정이 바로 그 비조이고, 감찰어사를 지낸 김류를 거쳐 판도판서를 지낸 김윤장이 전라도 도만호를 지낸 김성우 장군을 낳으니 이 분이 바로 충정공의 고조이다. 일찍이 왜구를 치라는 명을 받들어 보령을 지나다 그 땅을 좋아하게 되어 자리를 잡고 마침내 보령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김극성의 신도비는 당시 뛰어난 대학자로서 명성을 날리던 예조판서이자 홍문관 대제학의 벼슬이란 현직에 있던 이정구가 직접 사료(史料) 및 가장 등을 근거로 직접 지은 글이란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김극성의 신도비의 내용은 국가의 공인을 받은 명확한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가계를 객관적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사적 의견을 기술한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선비사회에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3) 우암 송시열의 <아산현감 김해수> 묘갈명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및 정치가로써 주자학의 대가였으며 또한 서인 및 노론의 영수였다. 효종과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아산현감 김해수의 다음 묘갈명에서도 김성우 장군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昔新羅氏三姓相繼立。其金氏王子有別籍于光州者。其後連八代爲平章事。世號其洞爲平章。公其平章洞人也。與文元公先生爲同貫。而莫知其始分。都萬戶成雨。樂保寧土俗。遂居于靑蘿洞。以討倭功。號稱將軍。自是世居靑蘿。靑蘿之金。其稱蓋久./.../ (송자대전, 175)(본관은 신라 김씨 3성중의 하나로 왕자공이 광주인이다. 후 8대에 걸쳐 평장사의 직에 올랐다. 평장동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하며, 공도 평장동인이다. 문원공 선생과 본이 같으며, 공의 중시조가 된다. 도만호 김성우는 보령의 토속을 좋아하여 청라동에 거처를 정했고, 왜구를 토벌한 공로가 있으며, 그 동을 장군동이라 부른다. 장군이 청라에 거처하게 되어 청라김씨가 되어 그 이후 청라 김씨라 부른다./.../)
위의 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사회를 통틀어 최고의 문인이자 정치가로 알려진 우암 송시열 또한 김성우 장군의 보령지역에서의 왜구토벌 사실을 공인하여 김성우 장군의 후손이었던 아산현감 김해수의 묘비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4.3. ‘문집’ 속에서의 김성우 장군

1) 이언적이 쓴 충정공 김극성의 ‘행장’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중종 때의 성리학자로 희락당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쫓겨나 자옥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했다. 후에 등용되어 좌찬성 겸 원상까지 올랐으나 윤원형 일당의 모함으로 유배되어 사사됐으며, 그의 문집인『회재집』이 있다. 특히 이언적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의 성리학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이언적이 김극성의 사후에 김극성의 ‘행장’을 지었고, 그 내용이 김극성의 『우정집』제3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諱克成字成之其先光州人高麗侍中諱周鼎之後歷若干世至文林郞監察御使諱流御史生諱允藏奉翊大夫版圖判書版圖判書生折衝將軍全羅右道都萬戶諱成雨於公爲高祖嘗以 王命討倭寇過保寧樂其土因家焉遂爲縣人/.../(공의 이름은 극성이요 자는 성지이며 광주인이다. 약간 세대를 지나 고려시중을 지난 김주정을 거쳐 문임랑 감찰어사를 지낸 김류가 봉인대부 김윤장을 낳았다. 봉익대부 판도판서공 김윤장이 철충장군 전라우도 도만호 김성우를 낳았으니 공의 고조이시다. 김성우는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을 받고 보령을 지나다가 이곳 보령이 좋아 가정을 이루었고, 이곳 보령현의 사람이 되었다./.../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김극성의 가계가 고려의 권문세가로 김성우 장군이 보령에 안착한 동기가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을 받았으며, 그 계기가 바로 보령에 정착한 동기임을 기술하고 있다.

2) 심지원이 쓴 충정공 김극성의 ‘가장’

심지원(1593-1662)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수비했으며,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글씨가 뛰어났으며, 『만사고』라는 문집이 전한다. 심지원이 쓴 김극성의 가장에서도 김성우 장군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 있다.

諱克成字成之號蘿軒姓金氏系出光光州麗朝有諱周鼎官至侍中是其鼻祖累世至諱允藏版圖判書版圖判書生諱成雨全羅道都萬戶卽今之水車邯度使寬公高祖也嘗奉命討倭過保寧樂其土因家焉遂爲保寧人/.../(이름은 김극성이며, 자는 성지, 호는 라헌으로 성은 김씨로 광주인이다. 고려조에 김주정이란 인물이 있었으니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고 공의 선조이다. 몇 대에 이르러 판도판서인 김윤장을 낳았고, 김윤장이 전라우도 도만호 즉 수군통제사 김성우를 낳았으니 공의 고조이다. 김성우는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을 받들고 보령 땅을 지나다가 이 땅을 좋아하여 가계를 이루었고 보령인이 되었다./..../)

위의 글은 당시 우의정의 벼슬에 있던 심지원이 쓴 김극성의 ‘가장’인데, 이 글에서도 김성우 장군과 보령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김성우 장군이 보령에 오게 된 동기는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을 받들었기 때문이며, 그 이후 보령 땅에 안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의 서하 유호근의 문집에 실린 김성우 장군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하자. 서하 유호근은 고종 때의 보령사람으로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 전집을 달관하고 교학에 출중했던 선비로 보령에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金公成雨生質奇偉勇力絶倫當麗季爲全羅右道都萬戶兼招討營田事時海寇交斥湖右公奉命討平之新城之南?今有軍浦伏兵之名盖誌公戰我之所也/.../(김공 성우는 태어날 때부터 기품이 특수하고 힘이 뛰어났다. 고려말기에 전라우도 도만호로 초토영전사를 겸임하였다. 이때에 왜적들이 전라도 지역에 몰려 들어와서 침략을 자행했는데 공은 임금의 명을 받고 이를 토벌 평정하였다. 신성 남쪽에 지금도 군포, 복병 등의 땅 이름이 있다. 이것은 공이 전투하던 장소를 기념하기위한 명칭이다./..../)(招討公記實)

이상의 예로 든 사료의 고증을 통하여서 알 수 있듯이, 김성우 장군 보령지역에서의 왜구와의 전투는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5. 고려의 마지막 충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이 시기 왜구의 대대적인 침략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어났으며, 왜구와의 4대 대첩이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김성우 장군이 활약했던 같은 시기에 충청도 내륙지방에서는 최영장군이 부여 ‘홍산전투’(우왕2년 1376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최영장군(1316-1388)은 김성우 장군보다 11년 정도 선배장군으로 충청도 부여의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던 것이다. 또한 김성우 장군보다 8년 정도 후배 장군이었던 이성계(1335-1408)는 전라도에서 ‘황산대첩’(우왕6년 1380년)으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남해지역에서는 정지 장군이 ‘관음포전투’(우왕9년 1383년)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정사에 기록된 고려 말 왜구와의 전투기록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유독 충남 서해안 및 내포지역에서의 왜구와의 전투사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바로 김성우 장군의 ‘불사이군’이라는 고려왕조에 대한 우국충정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금까지 문헌자료의 고증을 거쳐 살펴보았듯이 김성우 장군은 약관 18세인 1345년에 절충장군에 제수되었고, 1350년 충정왕 2년에 도만호 겸 전라충청양호초토사로 이 지역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을 받고 내려와 전라도와 서해안으로 침략하여 백성들을 약탈하고 괴롭히던 왜구를 완전히 축출하여 섬멸한 위대한 장군이었음이 밝혀졌다. 김성우 장군은 고려 말의 최영장군이나 이성계와 동급의 장군으로 오로지 자신과 가족보다는 조국과 백성의 안위만을 염려했던 장군이었다. 따라서 40여년을 고향인 개성을 떠나 보령 땅에 머물면서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보령과 보령의 백성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 전투사에 길이 빛날 혁혁한 전공을 세운 김성우 장군이 개선장도로 고향인 개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그 길이 영원히 좌절되고 말았다.
알려진 대로 김성우 장군은 이성계의 수차례의 출사 권고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대한 ‘불사이군’의 충정으로 1392년 65세의 나이로 애마와 함께 현재의 보령시 청라면 스무티 고개에서 자결했다. 다음은 서하 유호근이 쓴 『서하집』(권3)에 나오는 김성우 장군 관련 기록이다. 유호근은 그동안 전해져 내려오던 김성우 장군의 행적을 장군의 비명 및 사료 등의 고증을 통하여 ‘고려초토사김공성우기실(高麗招討使金公成雨記實)’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未幾我太祖革命素憚公之雄勇屢召不置公不得己乘馬佩刀行到甘峙離家 數里也公慨然下馬而謂馬曰吾與爾去將安之母苟生爲也馬亦不淚?地公因拔佩刀斬馬旋卽自處馬則葬于其路傍葬公于所處堪巖之後自後新城玉山等數邑之宰新除下來到得甘峙則官或經斃馬?僕痛如是者 屢度矣相戒不敢踰甘峙者行且四百有餘年矣子孫奉祀公廟將事之夕有虎輒來宿于廟門之外三尊之酌旋獻旋乾忠魂義魄久而不散精來之可畏有如是矣及親盡將?雷震大作子孫不敢奉出因建別廟以亨之數十世至于甲午動賊之亂山下所居之後孫倉皇埋主而更無靈之現示者豈亦公之精靈久及渙歟(高麗招討使金公成雨記實)
/.../ 얼마 후에 조선 태조는 혁명을 일으켰다. 평소부터 공의 용맹을 거려하여 여러 번 부르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공은 어쩔 수 없이 말을 타고 칼을 차고 떠나서 스무재(甘峙)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집에서 두어 마장 거리에 있는 곳이다. 공은 비장한 마음으로 말에서 내려서 말에게 이르기를 “나와 네가 이제 어디로 간간 말이냐?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구나!”하였더니 말도 눈물을 흘리며 땅을 발로 후비적거렸다. 공은 마침내 칼을 뽑아 말을 베고 공도 자결하였다. 말은 그 길옆에 묻고 공은 살던 곳인 감암 뒷산에 안장 하였다. 이 뒤로 신성과 옥산 등 수개 고을의 군수가 새로 부임하여 내려오다가 스무재 고개에 와서는 관원이 갑자기 죽던가 말이나 노복이 죽곤 하였다./.../)(초토공실기)

결국 이러한 김성우 장군의 순국은 새로 들어서는 이성계의 조선을 부정하는 결과였고, 따라서 이와 같은 김성우 장군의 혁혁한 보령지역에서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김성우 장군의 우국충정과 보령 및 서해안 지역에서의 전투는 새로 들어선 조선조에 의해 정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폄하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역사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항상 승자의 편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6. 나오는 말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전라우도 도만호 겸 초토영전사 김성우 장군은 오늘의 보령을 있게 한 위대한 장군이었다. 보령출신이 아닌 말하자면 황해도 개성출신의 김성우 장군이 보령지역에 온 것은 오직 하나 서해안지역에 출몰한 왜구 토벌의 왕명을 받고 전라우도 도만호 겸 초토사로서의 임무완수를 위함이었음이 밝혀졌다. 말하자면 개성이 고향인 김성우 장군은 왕명을 받고 전라도지역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이어서 충청도 대천, 보령지역에 출몰한 왜구를 섬멸한 뛰어난 장군이었음이 확인됐다. 왜냐하면 고려 말 당시 보령지역에서의 김성우 장군의 전투와 장군의 뛰어난 전략은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현재 보령지역에 현존하는 많은 지명 및 사료(史料) 등이 이를 고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김성우 장군이 가족들이 있는 고향 개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보령 땅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있다는 사실 또한 살피었다. 고려와 새로 건국한 조선이란 두 왕조의 양자택일에서 당시 대부분의 무장들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가담하여 공신으로 탄탄대로의 길을 걸을 때, 김성우 장군은 ‘불사이군’이란 충절로 고려를 선택했고, 이 선택은 결국 장군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김성우 장군의 보령지역에서의 왜구와의 빛나는 전투업적이 고려 말의 역사와 더불어 새로 시작된 이성계의 조선역사에 완전히 파묻힐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사료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확인한바와 같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가담하거나 협조한 장군들의 전투기록만이 고려 말의 왜구와의 대첩으로 정사에 기록되어 전승되어 온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이와는 달리 동 시대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고려에 대한 마지막 충성을 다했듯이, 김성우 장군 또한 보령 청라의 은선동(오늘날의 고려향)에서 고려왕조에 대한 마지막 충절을 지킨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명명백백한 김성우 장군의 충절과 왜구를 섬멸한 무장으로서의 뛰어난 전략과 공적에도 불구하고, 김성우 장군 사후 616여 년 동안 동시대의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정사에 기록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오늘의 보령을 있게 한 위대한 장군이자 보령의 수호신인 김성우 장군의 공적이 지금까지 학계의 평가를 제대로 받아오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따라서 그동안 616여 년 동안 역사에 묻혀있던 전라우도 도만호 겸 초토사 김성우 장군의 업적이 공정하게 있는 그대로 재평가되어 정사에 당당하게 기록되어야함은 당연한 이치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전라우도 도만호 겸 초토사 김성우 장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야말로 보령시민 모두의 긍지와 자긍심을 되살릴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며, 나아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는 우리고유의 정신문화를 계승발전 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이 글은 김영모의 「다시 쓰는 고려충신 도만호 김성우 장군 평전」에서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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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헌연구소, 「읍지 7, 충청도1」, 『한국지리총서』, 서울 아세아문화사.

두산백과사전, 엔싸이버
인터넷 광산김씨 대종회 홈페이지
인터넷 광산김씨 시중공파 홈페이지
인터넷 광산김씨우정종중 카페
인터넷 보령시 홈페이지

댓글목록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영모 일가님께서 올려주신

도만호공 선조님의 귀중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늘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김영모님의 댓글

김영모 작성일

성봉 일가님! 한번 뵙고 싶었는데 친히 전화까지 주시어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급히 올린 글이다 보니 오타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정정해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본 중중회의 발전을 위해 수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해박한 지식과 뜨거운 열정으로 종중의 발전을 위해 밤낮으로 노심초사 하시는 성봉 일가님께 다시한번 뜨거운 박수를 올립니다. 기회만들어 꼭 한번 찾아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김영모님의 댓글

김영모 작성일

홈피를 운영하시면서 엄청 고생많으신 정현일가님 반가웠습니다. 보령의 판도판서공파의 자료 협조 전화를 받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정현 일가님의 언제나 변함없는 열정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종중회를 위해 너무나 고생하고 계시단 말도 올립니다. 언젠가는 일가님의 수고가 반드시 올바르게 평가될줄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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