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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김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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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모 작성일09-03-19 13:27 조회2,62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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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비상비재의 정치가 충정공(忠貞公) 김극성(金克成)(1474-1540)에 대한 재평가????????????????????????????????????????????????????????????????????


1. 서론

??조선중기의 명신이자 비상비재의 정치가이었던 충정공 김극성은 중종 때의 <정국공신>이자 보령이 낳은 재상으로만 알려진 채,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에 비해 그동안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아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충정공이 조선중기의 치열했던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정치적 중립을 지킴으로써 역사의 소용돌이에 깊게 빠져들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고려 말 이후 보령의 유력한 명문가문이란 오랜 전통이 충정공 이후 그 빛을 잃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퇴색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충정공 사후 충정공의 위대했던 유형무형의 유산이 승계발전되지 못했고, 특히 일부 유물 즉 충정공의 『우정집』과 <산소>, <광성부원군사우> 및 <신도비>를 제외하고 현존하는 유물이 극히 제한되어있다. 하지만 중종시대를 다루었던 사극인 <여인천하>와 <대장금> 등이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함경도와 평안도 일원에 출몰한 오랑캐를 섬멸하는 북평사 영감으로서의 충정공의 기개는 그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던 충정공 김극성에 대한 재평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충정공의 전기를 약술함으로써 그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던 충정공이란 한 인물의 재평가를 통하여, 충정공은 조선중기 충남 보령이 낳은 문무를 겸비한 위대한 정치가이자 충신을 넘어 위대한 문인이자 시인이었음을 새롭게 드러내고자 한다.

2. 충정공의 가계(家系)

??충정공 김극성은 조선조 명문가인 광산김씨로 그의 4대조부인 김성우 장군이 바로 충남 보령의 입향조이다. 보령의 광산김씨는 김성우 장군이 오늘날의 보령시 청라면에 터를 잡은 이후 대대로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대대로 살아온 보령의 유려한 명문가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김성우 장군은 고려 말의 명장으로 충청 전라우도의 도만호 초도사로 이 지역을 약탈하던 왜구를 섬멸한 뛰어난 명장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을 건국한 이후 여러차례 입궐할 것을 권유했으나 결국 이에 응하지 않고 자결함으로써 불사이군의 충성을 보였던 충신이기도 했다. 김성우 장군의 우국충정은 현재 보령시 곳곳의 지명과 유적으로 남아있으며, 보령시에서는 매년 11월 1일 이러한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장군의 산소가 있는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산소에서 인근 군부대장 및 보령지역의 각급기관장을 비롯하여 유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추모제향이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김성우 장군의 아들인 김남호 또한 전형적인 무관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후령호군의 벼슬을 지냈으며, 손자인 김중로는 세종조에 문관이자 무관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사헌부 감찰의 벼슬을 했다. 특히 김중로의 아들인 김맹권은 세종에 의해 반궁유생 20인에 선발된 집현전 학사로 단종의 스승을 지냈다. 하지만 세조의 왕위찬탈의 소식이 있은 바로 다음 날 걸어서 낙향하여 평생을 후학지도에 전념한 전형적인 선비로 생육신에 비유되는 인물로 <상신록>에 기록되어있다. 이처럼 절의를 지키며 꼿꼿한 선비로서 평생을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후학을 지도한 김맹권의 아들이 바로 충정공 김극성이다. 충정공 김극성의 가계도를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中先祖???????? 2????????? 3????????? 4???????????? 5????????????? 6?????????????? 7
??? 祐徵???? 興光????? 軾????? 佶????? 峻?????? 策??????? 廷俊?????? 良鑑
?? 神武王
????????????8???????????? 9??????????? 10????????? 11?????????? 12???????????? 13???????????? 14?????????? 15
??????? 義元????? 光中????? 帶?????? 位????? 光世?????? 鏡亮?????? 周鼎????? 流
???????????16??????????? 17???????????? 18????????????? 19???????????? 20??????????? 21
??????????允臧????? 成雨???? ?? 南浩?????? 仲老?????? 孟權????? 克愼
?????版圖判書公? 全羅右道萬戶??武科??????????武科?????????晩翠堂????? (통예공)
?????????????? (保寧入祖)
?????????????????????????????????????????????????????????????? 克成? 金麟士(양근군수)
????????????????????????????????????????????????????????????? (충정공)
克讓
?????????????????????????????????????????????????????????????? 李穉??
李芝蕃? 李山海?
???????????????????????????????????????????????????????????????????????????????? ? 李山甫???
?????????????????????????????????????????????????????????????? 토정 李芝? ?
(光山金氏 版圖判書公派 世系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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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정공의 약력 및 행력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신이자 무신이었던 광산 충정공 김극성(1474-1540)은 진사 김맹권(증 영의정)과 모 나주 전씨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충남 보령시 청라면에서 1474년(성종5년) 윤 6월 19일 태어났다. 자는 성지(成之) 호는 청라(淸蘿) 또는 우정(憂亭)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불렸으며, 연산 2년 사마시와 연산4년 별시 문과 내리 장원급제하여 1498년 성균관 전적의 종학사회란 종6품의 벼슬로 관직에 첫발을 내 딘 이후, 1500년(연산군 6)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04년 사간원 헌납이 되어 연산군이 심순문(沈順門)을 죄 없이 죽이려하자 모두들 두려워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대사간 성세순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간하였고, 병조 정랑, 의정부 사인을 역임하였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분의정국공신 4등 공신으로 광성부원군에 봉해졌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되었다. 이듬해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청하여 고향 근처인 서천군수(舒川郡守)가 되었다가 장례원 판결사, 병조 참의를 거쳐 의주목사가 되었다
??1518년(중종 13) 삼공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부터 문무겸비의 인물로 천거를 받아 예조 참판이 되었다가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공조 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헌, 예조 판서, 우참찬, 이조판서를 거쳐 1523년(중종18)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찬성(贊成)이 되었다. 1531년(중종26)에 권신인 희락당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그 일당의 모함으로 흥덕으로 7년 동안 귀양 갔다. 1537년(중종32)에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기용되어 좌참찬이 되었다가 우의정이 되었다.
??이상의 충정공의 간단한 행력에서 알 수 있듯이, 충정공은 두 번의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란 벼슬로 관직을 첫 발을 내딛은 이후, 우의정의 벼슬로 세상을 뜰 때까지, 중앙의 주요 관직은 물론 지방의 관직을 두루 섭렵한 충남 보령이 낳은 비상비재의 정치가이자 문신이었다.

3. 충정공의 인물론

??충정공의 성품은 화엄간중(和嚴簡重)하여 좋고 싫음을 결코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뿐 아니라 집안사람의 잘못을 보아도 노기를 드러내지 않고 차근차근 타일렀다. 따라서 대인관계에서도 자신을 저버린 사람에게조차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하여 개의치 않았다. 평생을 관직에 몸담았는데? 입궐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종여일 우국충심(憂國忠心)이 변치 않았고? 직무를 처리하는데 신중하고 꼼꼼하였다. 일상생활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었고? 검소한 생활을 추구하여? 집에 단청을 입히라는 주위의 권유에 “자손에게 사치를 물려주면 상서롭지 못하다”고 거절한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충정공의 인물평에서 배놓을 수 없는 것은 1504년 사관원 헌납이란 일개 간관의 벼슬로 재직할 당시 연산군 앞에서 보여준 그의 선비로서의 꼿꼿한 기개이다. 충정공은 연산군이 죄없는 심순문(沈順門)을 죽이려하자 자신의 목숨마저 담보한 채, 심순문의 무죄를 끝까지 주장했으며, 충정공의 간관으로서의 굽힐줄 모르는 책무는 오늘날에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弘治甲子燕山欲以非罪殺沈順門問于群臣自三公以下皆無敢異議成大諫世純曰吾等職在諫官安可默然而已金獻納克成曰官以諫爲名見人無罪而死縱愛身不言奈負國恩何李正言世應曰獻納言是或曰若不順旨必與順門同死終無益也金與成談?自若曰死生大矣各任其志可也今日先死者必吾兩人次者正言也遂啓其無罪之狀燕山雖不聽用亦不之罪(어숙권, <패괜잡기 2권>(국역총서), 1971)
(홍치(弘治) 갑자년(연산군 10년 1504)에 연산주가 죄도 없는 심순문(沈順門)을 죽이려고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삼정승 이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히 이의(異議)를 말하지 못할 때, 대사간 성세순(成世純)이, “우리들이 간관을 맡고 있으면서 어찌 말없이 잠잠히 있으리오.” 하고, 헌납(獻納) 김극성(金克成)은 “벼슬이 간관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죄 없이 죽는 사람을 보고 설사 몸을 아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데에는 어찌하리오.” 하니, 정언 이세응(李世應)이, “헌납의 말이 옳다.”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약 임금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심순문과 함께 죽을 것이니, 결국 이익이 없는 짓이다.” 하니, 김극성과 성세순이 태연히 담소(談笑)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큰일이니 각기 그 뜻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 먼저 죽을 사람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이고 그 다음은 정언일 것이다.” 하고, 드디어 그 죄 없는 연유를 아뢰니, 연산주가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으나 또한 그들을 벌주지도 않았다.)

??또한 충정공의 인물평가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희락당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으로 7년간 흥덕에 유배되어있는 동안에도 시종일관 우국지심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올곧은 인품과 선비로서의 기질은 충정공의 무죄를 알리는 사림의 상소문으로 이어졌다. 특히 중종대왕은 충정공이 죽자 3일간의 철조를 명령한 후 2편의 <사제문賜祭文>을 내려 충정공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사실에서 또 다른 충정공의 인물됨을 확인할 수 있다. 중종은 1540년 충성스런 신하이자 문무를 겸했던 충정공이 죽자 다음과 같은 사제문을 좌부승지를 한숙(韓淑)시켜 직접 하달한다:

維嘉靖十九年歲次庚子四月壬戌朔十八日己卯國王遣臣承政院左副承旨韓淑諭祭于卒右議政金某之靈台星隕矣天文晦矣樑木?矣大廈壞矣股肱亡矣一身狽矣老成逝矣邦國?矣天寶殲之又誰?矣天之初生實爲世矣魁?鉅鼻氣磊磊矣兩有文武匪一藝矣泰山喬嶽量河海矣一鳴驚人越于輩矣往在草昧國步蹶矣卿時策勛盟礪帶矣維予小子虛心待矣夙夜不懈補不逮矣巨邪?嫉日讒害矣嗟予不察遷海?矣地濕炎蒸侵??矣姦黨旣?復昭洗矣賜環歸來形已弊矣白首丹心益自倍矣?秉國鈞爲周砥矣凡有稽疑若卜筮矣若濟巨川作之?矣若歲大旱用??矣或作鹽梅調鼎?矣或作麴蘖和酒醴矣邊境或?汝維制矣百?或違汝維?矣蒼生或艱汝維濟矣予心或焦汝維啓矣予之無虞以汝在一朝棄予予誰賴矣輟朝三日不覺涕矣予聞忠魂死不昧矣庶幾告予誰可代矣遣而致哀非爲例矣而奠之菲而誠大矣(『우정집』, 제3권)(국왕은 가정 19년 경자년 4월 18일 승정원 좌부승지 한숙(韓淑)을 보내 우의정 김극성 영전에 제문을 내려 슬퍼하노라. 우리나라의 큰 별이 떨어지자, 천문이 희미하고 천지의 질서가 무너져 내렸도다. 공은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우렁차며 문무를 겸비한 재주가 뛰어나 의정부의 으뜸이었노라. 그 마음 씀이 큰 산과 같았고, 헤아림이 큰 강과 바다와 같았노라! 그런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내가 챙기지 못해 7년간이나 적소에 유배를 보냈었구나. 그 육신의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테지만, 일편단심 짐을 향한 충성심이 한 시도 변함이 없었노라. 그런 충성스런 신하를 하루아침에 잃으니, 이제 누구를 의지하고 정사를 맡을 수 있으랴! 아!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어 3일간 철조를 지시했지만 눈물이 앞을 가리누나. 이제 누가 나를 보필한단 말인가! 네가 날 두고 먼저 갔으니 슬픔이 너무나 크도다. 친히 조문하고 싶으나 전례가 없다하니 할 수 없이 승지를 대신 보내어 나의 이 슬픈 마음을 영전에 대신 전하노라!)

??말하자면 충정공의 죽음은 조정 안팎의 큰 슬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중종의 <사제문>뿐만 아니라 당대를 주름잡던 윤은보, 홍언필, 임억령 등 수많은 조신들이 충정공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하는 물결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충정공의 인품을 가장 잘 요약할 수 있는 것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지은 행장(行狀)과 조선중기의 최고의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직접 충정공의 <신도비> 비명을 지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충정공은 충남 보령이 낳은 조선 중기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문무를 겸한 충신으로 오로지 나라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다 바쳐 일했던 지조 높은 선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대학자이자 위대한 시인

??충정공은 권력의 줄과 거리가 먼 집안 출신으로서 매사에 신중하였으며, 전후 세 번이나 예조판서 및 예문제학을 지낼 정도로 특히 문학 및 학문에 뛰어났다. 지금 현재 충정공에 관련된 기록은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자랑스럽게 등록되어있는 <조선왕조실록>에 총 387회(<연산실록> 8건, <중종실록> 377건, <명종실록> 1건, <고종실록> 1건)가 실려 있으며, 문무를 겸비하여 문무관직을 두루 역임한 조선중기의 충남 보령이 낳은 위대한 정치가이자 대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아울러 충정공의 학문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우정집』3권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우정집』은 충정공이 사마시와 별시의 양과에서 장원급제 이후 우의정의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관직에 있으면서, 충정공 자신의 모든 행적과 일부의 시문을 담고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특히 충정공은 수백편의 시와〈사서의四書疑〉에서 사대부로서의 면모와 위대한 학자로서의 풍모 및 인생관 철학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책과 교서 및 역원록을 통해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부록의 행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 할 수 있는 송래희를 비롯하여 심지원, 정구석과 같은 많은 문사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충정공의 훌륭한 선비로서의 자질과 탁월한 정치가로의 면모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충정공이 뛰어난 문인이자 시인이란 사실은 지금 현재 마산의 시립박물관에 우뚝 서있는? <월영대> 시비를 비롯하여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오서산 입구에 옹골찬 모습을 보이고 있는 <등오서산망월> 시비와 같이 현존하는 기념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쌍계사록>을 비롯하여 『오리지널 대장금 시나리오』, 『한국의 명언』, 『사임의 향촌생활과 시가문학』등 약 30여권의 각종 책이나 자료에서 충정공의 학자이자 문인으로서의 높은 선비정신을 기리고 있다.??

5. 결론

??지금까지의 충정공의 간략한 전기의 고찰에서 알 수 있듯이, 충정공은 충남 보령이 낳은 문무를 겸한 위대한 정치가이자 대학자이었다. 권력과 거리가 먼 보령의 유력한 명문가의 출신으로 두 번씩이나 과거에 장원급제한 충정공은 30여 년 간 벼슬에 있는 동안 오로지 국가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헌신한 선비로 청백리의 표상이었다. 특히 불의 앞에서 자신의 죽음마저도 불사하며 정의를 외쳐댄 선비로서의 꼿꼿했던 기대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아울러 예조판서를 3번씩이나 역임할 정도로 뛰어난 문인이자 대학자로서의 학덕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우정집』등에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충정공의 이와 같은 위대한 위업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앞으로 충정공의 문집인 『우정집』의 우리말 번역을 비롯하여, 충정공 사후에 조성되어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능동에 현재 소재하고 있는 약 500년 된 충정공의 <산소>를 비롯하여 <신도비>와 <재실> 등과 같은 충정공의 유물에 관한 재평가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조선중기에 충정공 김극성이란 인물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글은 김영모의 <조선중기 비상비재의 정치가 충정공 김극성(1474-1540)에 대한 재평가>에서 발췌 요약한 글입니다.)

댓글목록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훌륭하신 충정공 선조님에 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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