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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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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7-01-01 16:36 조회1,5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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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인 가슴에 남은 김덕령

김 범 수
경상남도 향토사연구협의회 수석부회장
kbs842@hanafos.com

광주의 중심거리 ‘충장로’라는 이름이 있게 한 의병장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에 대한 선양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광주 북구청은 지난 1월 16일 북구 향토문화센터에서 김덕령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영호남 지방의 김 장군 관련 전설과 설화, 김 장군의 일대기 등을 정리한 책자 <전설로 되살아난 민중의 영웅 김덕령>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북구청은 또 이 책자 발간을 기념해 오는 5월 김덕령 장군의 미발굴 의병활동 유적지를 찾아 경남 진주시와 함께 영호남 교류 답사 기행을 실시할 예정이다.

역사를 향한 의문
진주에는 광해군 14년(1622)에 시작하여 인조 10년(1632)에 완성된 『진양지』가 있다. 진주의 인문지리지인 이 책은 임진왜란을 겪은 부사 성여신(浮査 成汝信:1546~1632) 등이 편찬한 것인데, 여기에는 김덕령 장군에 대한 사적이 실려 있다. 이 사적은 김덕령 장군이 선조 29년(1596) 8월에 옥중에서 죽임을 당한지 36년만에 기록된 것이다.
김덕령의 『김충장공유사』에 의하면, 장군은 옥중에서 죽임을 당한 후 65년만인 현종 2년(1661)에 신원(伸寃)이 복구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역사상 인물이 처형을 당하고 나면 신원이 복구되기 전에는 역사 속으로 묻혀버리고 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덕령 장군은 신원이 복구되기 29년 전인데도 어떻게 『진양지』에 기록되었을까.
김덕령 장군은 진주에 유진(留陣)하고 있을 때 이졸(吏卒)들을 엄한 군율(軍律)로 다스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시기자들의 모함에 의해 서울까지 압령된다. 이때 진주의 유생들은 이원익(李元翼) 체찰사에게 압령의 부당성을 두 차례나 탄원한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정탁(鄭琢:1526~1605)의 변론도 있었지만 어떻든 김덕령은 왕이 내린 어구의 말을 타고 다시 진주로 돌아왔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진주는 앞서 두 차례의 전쟁을 겪는다. 임진년(1592)에 있은 제1차 진주성 전투와 계사년(1593)에 있은 제2차 진주성 전투가 그것이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3,800명의 군사로써 3만 명(일본 사료에는 2만 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 대첩을 이루었으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김천일(金千鎰)·황진(黃進)·최경회(崔慶會)·고종후(高從厚)·양산숙(梁山璹) 등과 같은 수많은 호남 의병장들이 순절하였다. 그런데도 『진양지』에는 이 분들에 대한 사적은 일체의 언급이 없다.

익호(翼虎)의 깃발 아래
이러한 반면 김덕령 장군에 대한 사적은 이 책의 「월아산 목책(月牙山木柵)」이라는 항목 아래 비교적 자세하게 실려있다.

월아산 목책은 청곡사(靑谷寺) 뒤편 봉우리에 있으니 충용장군(忠勇將軍)이 설치한 것이다. 장군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덕령(德齡)이며 광주인(光州人)이니 용력(勇力)이 절륜(絶倫)하고 지기(志氣)가 강개(慷慨)하였다. 선조 때 임진란을 당하여 3경(三京:서울, 평양, 경주)이 다 함락되고 대가(大駕, 임금)가 서행(西幸)하여 온 나라가 바람에 쏠리듯 하였다. 이 때에 장군은 모상(母喪)을 만나 여막(廬幕, 묘막)을 지키고 있더니 본도의 감사 및 담양부사의 권고를 받아 드디어 일어났다.
폐주(廢主, 광해군)가 동궁이 되었을 때에 전주에 주련(駐輦)하더니 불러서 그의 용맹함을 시험해 보고서 4군(四郡)의 병량(兵粮)을 주고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내렸다. 또 명나라에 계달하니 (선조께서) 충용장군의 호를 내렸다. 이로부터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니 의여(義旅, 의병)가 다투어 모이어 감사자(敢死者, 결사의 뜻)를 얻은 것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격문을 전해 듣고 광주로부터 일어나 일본의 적추(賊酋, 왜장)가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갑오년(선조 27년:1594) 봄에 주의 동쪽 대곡리(大谷里)에 와서 진을 쳤더니 그 땅이 좁아서 용무(用武)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진지를 대여촌(代如村) 진사 문할(文腱)의 집으로 옮겼다. 장군은 매양 틈이 있는 날이면 마평(馬坪)의 들에서 습진(習陣)을 하였는데 위에서 호두(虎頭)의 가면을 쓰고 24근이 되는 철추(鐵椎)를 차고 50근의 쇠자루칼을 휘두르니 칼의 길이가 8척이었다. 암아(珞啞:입을 벌리는 것)하여 질타(叱咤:큰 소리로 꾸짖는 것)를 하면 사람들이 모두 벽역(僻易:놀래고 겁내어 피하는 것)하였고, 군법이 가장 엄하였다. 만약 명령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용서하거나 바꾸는 일이 없었으니 하루아침에 군률을 범하고 베임을 당하는 자가 12명이었다.
병신년(1596)에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에서 모반하여 역옥(逆獄)이 크게 일어나서 호남사람으로서 역모에 참가하여 정국(庭鞠)을 받는 자가 있더니 곧 전일 대장군에게 참수를 당한 12명 군사의 형제였다. 마음속에 그 형의 죽음에 대한 한을 깊이 품고 있다가 추국(推鞫)할 때에 공초(供招)에서 받아 이르기를 ‘김덕령으로 더불어 함께 모의했습니다’라고 했으므로 잡혀갔다. 장군은 전정(殿庭)에서 국문을 당하면서도 얼굴빛을 변하지 아니하였고 네 번이나 곤장이 부러지기에 이르러서도 다리와 등은 상하지 아니하였다.

영남인들 민중의 영웅으로 칭송
어느 날에 대신이 들어가서 아룀으로 인하여 임금이 친히 국문하매 극히 엄하고 준절(峻切)함을 더하니 김덕령이 말하기를 ‘신이 스스로 지은 죄가 없으니 전하께서 마땅히 은명(恩命)의 말씀이 있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엄하게 국문하는 것을 보니 반드시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전하께서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라 하고 이어 눈을 감은 채로 말하지 않다가 죽었다. 그 뒤에 임금이 그 죽음의 억울함을 알고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내렸다. 장군이 일찍 여기에 목책(木柵)을 설치한 것은 장병(藏兵)의 땅으로 삼고자 한 것이나 지금은 폐해졌다.

이 사적은 인조 10년(1632)에 기록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목할만한 대목이 있다. ‘그 뒤에 임금이 그 죽음의 억울함을 알고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내렸다’고 한 대목이다.

그런데 『김충장공유사』에 의하면 김덕령이 병조참의에 추증되기는 현종 9년(1669)이라 하였고, 제사를 내린(遣官賜祭) 시기는 숙종 7년(1681)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37년 내지 49년 이전에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내렸다’는 말이 기록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하여 살피면 김덕령을 죽인 선조 자신이 그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고 당대에 이미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내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김덕령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던가. 김덕령 장군은 광주에서 어머니의 상중(喪中)임에도 선조 26년(1593) 11월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방백 이정암(李廷襤) 등의 천거로 이인경(李寅卿)과 함께 담양에서 기병(起兵)하였다.

그리하여 김덕령은 12월에 도원수 권율(權慄)로부터는 초승장(超乘將)이라는 군호를 받았고, 이후 계속하여 전주에 있던 광해분조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 선조로부터는 충용장군(忠勇將軍)이라는 군호를 하사(下賜) 받았다.

그는 선조 27년(1594) 정월에 담양에서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22일에는 순창, 23일에는 남원에 이르러 광한루 앞에 진을 치고 날마다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남원 사람 최담령(崔聃齡)을 별장(別將)으로 삼았으며, 2월 12일에는 함양에 이르러 2개월을 머물다가, 4월 12일에는 진주로 옮겼다.

이에 앞서 김덕령 장군은 정월 초 6일에 ‘영남 여러 고을의 모든 군자에게’라는 격문을 돌렸고, 정월 20일에는 영남의 곽재우(郭再祐:1552~1617) 장군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각오의 편지를 보냈으며, 곽재우로부터 회신을 받은 후 2월 2일에도 또다시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진주의 동쪽 대곡리(大谷里)에 진을 쳤으나,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 지금의 금산면인 대여촌(代如村)으로 옮겼다가 다시 인근의 월아산에 목책성(木柵城)을 쌓고 그리로 옮겨 유진(留陣)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월아산에는 김덕령 장군과 관련된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김덕령 장군이 진주에 유진하고 있던 시기는 명과 왜 사이에 화의(和議)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큰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합포(合浦, 昌原)에서는 20여 명을 사살하였고, 고성에서는 왜군에 잡혀있던 50여 명을 구출하였으며, 의령에서는 곽재우 장군과 연합하여 왜를 섬멸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휴대하고, 그 기록에 따라 거제 장문포(場門浦:長門浦)를 찾아나선 적이 있었다. 장문포는 이순신·곽재우·김덕령 등 세 분 장군이 선조 27년(1594) 9월 26일부터 10월 7일까지 회동하여 합동작전을 전개했던 장소였다. 거제 장목리에는 대형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안내간판을 보니 ‘이순신 장군이 전략을 숙의하던 곳’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그 건물의 정면에는 「장문포진어우(長門浦鎭御宇)」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바로 이 곳이 세 분 장군이 회동했던 곳이었다.

필자는 여기에서 명상에 잠겼다. 김덕령 장군이 광주에서 담양·순창·남원·함양·산청·진주·고성·견내량을 거쳐 여기까지 온 것이다. 물론 말을 타고 왔겠지만 그 거리는 보통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상중이었기에 상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여기까지 오다니, 그의 애국충정의 정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덕령은 다시 진주로 돌아와 유진하고 있던 중 도원수로부터 ‘충청도 홍산(鴻山, 扶餘)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를 평정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정하였으나 운봉(雲峰)에 이르렀을 때 이미 평정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다시 진주로 돌아왔다.

4백년 육탈되지 않은 원통한 주검
그런데 시기자들에 의해 김덕령도 연루되었다는 모함에 의하여 추국청으로 압령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는데 그 죽음에 대하여 『선조수정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덕령이 옥에서 고문 받다가 죽었다. 덕령이 전령을 듣고 즉시 부하를 거느리고 길에 올랐는데 적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도로 진으로 돌아갔다. 이때에 이르러 덕령을 나국(拿鞠)하려 하였는데, 조정이 그의 용력(勇力)이 절륜(絶倫)하다는 말을 평소에 들었으므로 혹 그가 체포에 응하지 않을까 근심하여 여러 가지로 방략(方略)을 만들어서 그의 도망을 미리 방지하였다. 덕령이 순순히 체포되어 하옥되었는데 상이 직접 국문하였다. 이에 덕령은 사실대로 답변했으나 그는 갑자기 유명해진 까닭에 이시언(李時言) 등의 시기를 받았으며 조정 또한 그의 날쌔고 사나움을 제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의심하였으므로 기회를 타서 그를 제거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놓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상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대질하여 심문하고는 오히려 그를 아깝게 여겨 좌우에게 묻기를 ‘이 사람을 살려줄 도리가 없는가’하니 대신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두고 그의 일당들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상은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였다.

수백 번의 형장 신문에 드디어 정강이뼈가 모두 부려졌는데 조용하게 스스로 변론하며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신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계사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삼년상의 슬픔을 잊고 하늘에 사무친 원수에 격분하여 모자간의 정을 끊은 채 상복을 바꿔 입은 다음 칼을 짚고 분연히 일어나 여러 해 동안 종군하였지만 아직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해서 충성도 펴보지 못하고 도리어 불효만 하였습니다. 죄가 이에 이르렀으니 만 번 죽어도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지금 목숨이 다하게 되었으니 다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신이 모집한 용사 최담령(崔聃齡) 등이 죄 없이 옥에 갇혀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말고 쓰도록 하소서’ 라고 했을 뿐 시종 다른 말이 없었다.

충용장군 김덕령은 선조 26년(1593) 11월에 담양에서 기병하여 29년(1596) 8월에 원사(寃死)하기까지 2년 10개월 중 2년 7개월을 진주와 경남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이렇게 죽어갔다. 그의 죽음이 얼마나 원통하였기에 1974년 그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발굴하여 보니 378년이나 지났는데도 육탈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는 경남지역의 김덕령 장군에 대한 사료와 전설을 발굴하면서 그의 발자취를 최초로 더듬어 보았다는 점에 대하여 긍지를 느끼고 있다. 바라건대 이런 일들이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회복하고 장군의 충정을 기리는 선양 사업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호남에서 영남지역으로 뻗어있는 김덕령 장군의 행로를 따라 문화탐방 코스를 개발하여 청소년들에게 애국 애족의 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는 행사가 있을 것이라니 기대가 된다. 영남인들의 가슴에도 남아있는 민중의 영웅 김덕령 장군의 행적을 통해 영호남이 하나가 되는 화합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출처:대종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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