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계공 휘 화준(華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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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9-06-21 11:55 조회1,9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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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준(金華俊 1602 - 1644)
(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참봉공파/당계공) 4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사원(士元)이요, 호(號)는 당계(棠溪)이다.
아버지는 증 장악원정(贈 掌樂院正) 식남(式南)이며,
어머니는 증 숙인(贈 淑人) 평해오씨(平海吳氏)로 참봉 성(參奉 晟)의 딸이다.
부모 봉양에 전심을 다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매 3년 동안 시묘(侍墓)살기를 마치고 상경(上京)하여, 1633년(인조 1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동년(同年)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壯元 及第)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로써 벼슬길에 올라 있다가 휴가(休暇)중에 1636년(인조 14)병자호란이 일어 나게된 소식을 듣고 즉시 말을 타고 남한산성 왕이 있는 곳에 달려가 모셨으니 왕이 충절(忠節)과 문사(文詞)를 사랑하여 보연(寶硯:벼루)을 하사(下賜)하고 설서 지제교겸(說書 知製敎兼)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청(淸)나라와 굴욕적인 화의(和議)가 이루어졌으므로 벼슬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이에 정승(政丞) 이경여(李敬輿)가 왕에게 아뢰기를 "김모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 하고자 하니 지방 원으로 보냄이 어떠한 가요"라고 상언(上言)하여 석성 현감(石城 縣監)에 제수(除授)하였다. 1643년(인조 21)에 어머니가 병에 걸려 죽게 되므로 심히 애통(哀痛)한 나머지 병에 걸려 다음 해 12월, 43세로 운명(殞命)하였다. 후에 영의정 문곡(文谷)김수항(金壽恒)이 효행(孝行)을 천(薦)하여 나라에서는 효자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棠溪集(奎11075), 金華俊(朝鮮)著, 金孝源·金瓚模(朝鮮)編.
1冊(48張) 活字本(後期木活字) 32×20.5cm.
四周單邊 半郭:22×16cm.
10行 20字.
版心:上花紋魚尾.
棠溪 金華俊(1602∼1644)의 詩文集으로 1869년(高宗 6) 그의 6世孫 金孝源과 7世孫 金瓚模 등이 遺稿를 모아 편집·간행한 것이다. 金華俊의 字는 士元, 號는 棠溪, 本貫은 光山, 海南 出身 贈掌樂院正 式南의 아들로 詩才에 뛰어났다. 1633년(仁祖 11)에 及第한 후 石城縣監 등을 지냈다. 1책 1권으로 賦, 表, 詩, 義, 策, 書, 雜著, 銘, 頌, 贊, 祭文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끝머리에 附錄이 있다. 그 중 書는 朝廷 群臣들과 문답한 書翰이며, 詩에는 挽章, 試券이 있다. 附錄에는 順菴 按鼎福이 지은 東湖師友錄, 그의 玄孫이 쓴 家狀, 尹仁圭가 쓴 行狀, 禮曹判書兼判義禁府事 李敦榮이 지은 墓碣銘 等이 있다. 別冊으로 된 御賜棠溪金公寶硯記蹟은 그의 子孫 外 30여명이 지은 것으로 왕이 그에게 내린 벼루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칭찬한 詩들이다.
御賜棠溪金公寶碩記蹟(奎3423,奎 4764), 金錫臣(朝鮮)編.
1冊(50張) 活字本(木活字) 31.6×20.5cm.
四周單邊 半郭:21.9×15.8cm.
10行 20字.
版心:上花紋魚尾.
1839년(憲宗 5)∼1840년에 棠溪의 後孫 등이, 棠溪 金華俊이 丙子胡亂당시 南漢山城이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 注書로서의 職任을 잘하여 仁祖로부터 賜與받은 寶硯을 찬양하여 지은 序·記·銘·次韻詩 등을 모아 1869년(高宗 6) 7월 全羅道 古阜 望山에 있는 棠溪祭閣에서 간행한 木活字本이다. 두본의 판본은 같다. 표제는 「寶硯記」이다. 맨앞에 실린 1839년 淸明에 棠溪 5세손 金錫臣이 지은「家藏寶硯記」에는 金華俊이 明에서 가져온 寶硯을 御賜받은 경위와 그 寶硯을 金華俊一金胄萬一金瀚一金汝確一金鳳壽一金應壽一金錫臣으로 家傳되어 온 내력 등이 실려있다. 이어 棠溪 金華俊의 6·7·8·종6世孫들의 記·銘·詩 등과 그외에 尹敬圭 李德秀 趙命夏 洪在喆 등 여러 사람의 記·序·銘·詩(次韻詩등)가 차례로 실려 있다. 맨끝에는 「崇禎紀元後五己巳七月日刊于古阜望山祭閣」이라는 刊記와 함께 校正(金孝源)·正書(金瓚模)의 이름이 적혀 있다.
<국조 문과 방목>
김화준(金華俊)
인조(仁祖)11년(1633년), 증광시(增廣試) 병과8(丙科8)
>>> 인적사항
생년(生年) 1602년, 임인
자(字) 사원(士元)
본관(本貫) 광주(光州)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 가족사항
부(父) 김식남(金式南)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정(金珽)
증조부(曾祖父) 김중겸(金仲謙)
외조부(外祖父) 오성(吳晟)
처부(妻父)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633(계유)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현감&(縣監&)
묘(墓)
전남 장성군 북이면 오월리 필동 후강(後岡) 해좌(亥坐) 이고, 현감 윤인규(縣監 尹仁圭)의 찬
행장(撰 行狀)과 판서 이돈영(判書 李敦榮)에 찬 묘갈(撰 墓碣)이 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부(父)
김식남(金式南
(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참봉공파/당계공) 4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사원(士元)이요, 호(號)는 당계(棠溪)이다.
아버지는 증 장악원정(贈 掌樂院正) 식남(式南)이며,
어머니는 증 숙인(贈 淑人) 평해오씨(平海吳氏)로 참봉 성(參奉 晟)의 딸이다.
부모 봉양에 전심을 다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매 3년 동안 시묘(侍墓)살기를 마치고 상경(上京)하여, 1633년(인조 1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동년(同年)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壯元 及第)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로써 벼슬길에 올라 있다가 휴가(休暇)중에 1636년(인조 14)병자호란이 일어 나게된 소식을 듣고 즉시 말을 타고 남한산성 왕이 있는 곳에 달려가 모셨으니 왕이 충절(忠節)과 문사(文詞)를 사랑하여 보연(寶硯:벼루)을 하사(下賜)하고 설서 지제교겸(說書 知製敎兼)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청(淸)나라와 굴욕적인 화의(和議)가 이루어졌으므로 벼슬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이에 정승(政丞) 이경여(李敬輿)가 왕에게 아뢰기를 "김모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 하고자 하니 지방 원으로 보냄이 어떠한 가요"라고 상언(上言)하여 석성 현감(石城 縣監)에 제수(除授)하였다. 1643년(인조 21)에 어머니가 병에 걸려 죽게 되므로 심히 애통(哀痛)한 나머지 병에 걸려 다음 해 12월, 43세로 운명(殞命)하였다. 후에 영의정 문곡(文谷)김수항(金壽恒)이 효행(孝行)을 천(薦)하여 나라에서는 효자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棠溪集(奎11075), 金華俊(朝鮮)著, 金孝源·金瓚模(朝鮮)編.
1冊(48張) 活字本(後期木活字) 32×20.5cm.
四周單邊 半郭:22×16cm.
10行 20字.
版心:上花紋魚尾.
棠溪 金華俊(1602∼1644)의 詩文集으로 1869년(高宗 6) 그의 6世孫 金孝源과 7世孫 金瓚模 등이 遺稿를 모아 편집·간행한 것이다. 金華俊의 字는 士元, 號는 棠溪, 本貫은 光山, 海南 出身 贈掌樂院正 式南의 아들로 詩才에 뛰어났다. 1633년(仁祖 11)에 及第한 후 石城縣監 등을 지냈다. 1책 1권으로 賦, 表, 詩, 義, 策, 書, 雜著, 銘, 頌, 贊, 祭文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끝머리에 附錄이 있다. 그 중 書는 朝廷 群臣들과 문답한 書翰이며, 詩에는 挽章, 試券이 있다. 附錄에는 順菴 按鼎福이 지은 東湖師友錄, 그의 玄孫이 쓴 家狀, 尹仁圭가 쓴 行狀, 禮曹判書兼判義禁府事 李敦榮이 지은 墓碣銘 等이 있다. 別冊으로 된 御賜棠溪金公寶硯記蹟은 그의 子孫 外 30여명이 지은 것으로 왕이 그에게 내린 벼루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칭찬한 詩들이다.
御賜棠溪金公寶碩記蹟(奎3423,奎 4764), 金錫臣(朝鮮)編.
1冊(50張) 活字本(木活字) 31.6×20.5cm.
四周單邊 半郭:21.9×15.8cm.
10行 20字.
版心:上花紋魚尾.
1839년(憲宗 5)∼1840년에 棠溪의 後孫 등이, 棠溪 金華俊이 丙子胡亂당시 南漢山城이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 注書로서의 職任을 잘하여 仁祖로부터 賜與받은 寶硯을 찬양하여 지은 序·記·銘·次韻詩 등을 모아 1869년(高宗 6) 7월 全羅道 古阜 望山에 있는 棠溪祭閣에서 간행한 木活字本이다. 두본의 판본은 같다. 표제는 「寶硯記」이다. 맨앞에 실린 1839년 淸明에 棠溪 5세손 金錫臣이 지은「家藏寶硯記」에는 金華俊이 明에서 가져온 寶硯을 御賜받은 경위와 그 寶硯을 金華俊一金胄萬一金瀚一金汝確一金鳳壽一金應壽一金錫臣으로 家傳되어 온 내력 등이 실려있다. 이어 棠溪 金華俊의 6·7·8·종6世孫들의 記·銘·詩 등과 그외에 尹敬圭 李德秀 趙命夏 洪在喆 등 여러 사람의 記·序·銘·詩(次韻詩등)가 차례로 실려 있다. 맨끝에는 「崇禎紀元後五己巳七月日刊于古阜望山祭閣」이라는 刊記와 함께 校正(金孝源)·正書(金瓚模)의 이름이 적혀 있다.
<국조 문과 방목>
김화준(金華俊)
인조(仁祖)11년(1633년), 증광시(增廣試) 병과8(丙科8)
>>> 인적사항
생년(生年) 1602년, 임인
자(字) 사원(士元)
본관(本貫) 광주(光州)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 가족사항
부(父) 김식남(金式南)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정(金珽)
증조부(曾祖父) 김중겸(金仲謙)
외조부(外祖父) 오성(吳晟)
처부(妻父)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633(계유)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현감&(縣監&)
묘(墓)
전남 장성군 북이면 오월리 필동 후강(後岡) 해좌(亥坐) 이고, 현감 윤인규(縣監 尹仁圭)의 찬
행장(撰 行狀)과 판서 이돈영(判書 李敦榮)에 찬 묘갈(撰 墓碣)이 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부(父)
김식남(金式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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