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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의병장(덕령)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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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7-01-01 16:37 조회1,5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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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忠將公) 김덕령(金德齡)(1567 - 1596)

1. 서 문

역사현장에서 탁월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그를 용납하지 못해 비극적인 종말을 당했던 인물이 많다. 그 인물둘은 세월이 흐름에 역사현장 밖에서 민중에 의해 그들의 영웅으로 재창조된다.

무등산 사나이 김덕령이 그런 인물이다. 그러나 민중에 의해 다시 부활된 충장공 김덕령에 대한 평가는 「신록」「설화」「야사」로 전해오는 얘기가 각기 다르다. 당시는 처참한 전쟁 상황이었고 유능한 인재가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기 때문에 수많은 일화를 남기고 영웅으로 떠올랐을 수도 있다. 또 전쟁이란 참상이 위정자를 비정하게 해 잘못된 판단에 희생을 당한 김덕령을 민중은 안타깝게 생각, 야사류 이야기를 극적으로 변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여튼 김덕령은 광주에서 가장 많은 신화를 내놓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김덕령은 1567년 광주시 무등산 석저촌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형 덕홍과 함께 대학자인 성혼의 문인이 되어 수학했다. 1592년 25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킨 형 덕홍을 따라 전주까지 간다. 그러나 노모와 어린 동생을 돌보라는 형의 권유로 귀향한다.

2. 임란 참전과 노비처형으로 옥형

그때 형은 고경명의 참모로 금산 전투에 참여했다가 순국한다. 이듬해 8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후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러 번 기병 권유를 받았으나 응하지 못하다가 형조좌랑으로 임명 받아 상복을 벗고 담양에서 5천명을 모집 , 전투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전시 상황은 김덕령이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여 왜적과 싸울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명나라에 의해 일방적으로 왜와 화의가 진행되어 급기야는 명의 주장으로 전투 중지령이 내려져 많은 의병이 정세만 관망하고 있었다. 또 의병들 가운데는 적당히 때만 넘기려는 누락자가 상당수 있었고 군량과 병기가 부족해 사기는 저하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김덕령은 진주에서 전쟁 준비를 마치고 싸우겠다고 요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적군을 눈 앞에 두고도 싸우지 못하는 울분과 점점 불리해지는 주위 여건을 쇄신시키기 위해 그는 군법을 엄하게 세웠다. 한번은 태만한 역졸을 죽이고 도망간 군사 대신 그의 아버지를 잡아와 치죄하려 했는데 그 군사는 윤근수의 노비였다.

마침 남방을 순시 중이던 도체찰사 윤근수가 이를 알고 김덕령에게 석방 요청을 했다. 그러나 김덕령은 그의 요청을 응낙하고서도 윤근수가 돌아간 뒤 그 노비를 처형하고 말았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윤근수는 "김덕령은 신의가 없고 살인을 좋아하며 장수의 자질이 없는 자"라고 모함, 결국 옥에 갇히고 말았다.

3. 이몽학난의 관련자로 모함받아 처형영면

이후 곧 풀려났으나 이 일로 김덕령에 대한 조정의 기대와 평가는 부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김덕령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청양. 대흥 등지를 함락시키고 덕산까지 침입, 세력이 점점 커지자 권율이 토벌군을 거느리고 이산으로 향하면서 김덕령에게는 영남에 있는 항복한 왜군을 이끌고 오게 했다.

김덕령은 저간의 사정을 모른 채 권율의 명을 받고 진압을 위해 운봉에 갔으나 이미 진압된 다음이었다. 이때 김덕령은 권율에게 고향에 가겠다는 뜻을 알렸으나 허락을 얻지 못해 진주로 다시 돌아가 있었는데 영문을 모른 채 권율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권율이 이몽학의 진중에서 김덕령이 관련되었다는 문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체찰사 종사관 신경행과 모속관(募粟官) 한현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그의 무관함을 힘써 변명하였고 무죄를 끝까지 주장하였으나 통하지 않았다.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김덕령은 심한 고문을 당한데다 그의 용력을 의심하여 큰 나무토막을 묶어 옥문을 출입토록 하여 결국 형장 아래서 29세라는 나이에 죽고 말았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었다고 하여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4. 사후 신원 복원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수신(守信)도 녹용되었다.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조特命)이 내려졌다. 임종 직전에 지었다는 〈춘산곡 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5. 결 말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 등으로 추측컨데 체찰사 종사관 신경행이 도체찰사 윤근수의 휘하에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김덕령이 윤근수의 노비 처형으로 인한 실수가 원한으로 이어져 모함을 당하였다는 의혹이 짙어 보인다.

권율이 찾았다는 관련문서는 반대파가 흘린 허위문건을 증거로 채택하여 무모한 희생을 하지 않았나 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컬한 미스테리인 것이다.

임종 직전에 지었다는 춘산곡에서도 그는 분명하게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라고 읊어 그는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무고로 인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과히 말할 수 있다고 하겠다.


6. 옥종시 춘산곡과 취가정에 얽힌 취시가 감상

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감옥에 갇혀 죽기 직전 남긴 춘산곡(春山曲)이라는 옥종시를 감상해 보자. 젊은 나이에 당한 억울한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한 맺힌 죽임을 헛되이 보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바른 역사의 인식으로 앞을 내다보아야 한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무등산 자락 자미탄 개울 길을 따라가면 탱자나무 울타리가 나온다. 그곳에 취가정이 있었다.

조선 말기 김덕령 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장군의 후손인 김만식이 장군의 덕을 기리며 1890년에 지은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이 취가정인 것은 송강의 제자였던 권석주라는 분의 꿈에 원한 맺힌 죽임을 당한 김덕령 장군이 나타나 취시가를 불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목숨 걸고 싸웠던 충장공이 모함에 걸려 옥사를 당하고 마는 원한의 피맺힌 취시가를 들어보자.

한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그것은
뜬구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바라기는
긴 칼로 맑은 임금 받들고자.

취가정은 언덕 위에 자리해서 조금은 높아 보인다. 마루에 걸터앉았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옥답이 자미탄 따라 한없이 이어진다. 취가정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둥그렇게 퍼졌다. 원기둥을 사용해서 지은 취가정은 한껏 멋을 부렸다.

곱게 단장한 페인트가 옷에 묻어 날것처럼 최근에 칠한 자국이 선명하다. 겹겹이 포개진 산사이로 유달리 높게 보이는 무등산이 장엄하다. 마당에는 취가정보다 3배는 나이를 먹었음직한 소나무 한 그루가 두꺼운 껍질로 몸을 감쌌다. 거북등 같은 소나무 껍질로 보아 수령이 500년은 됨직하다.
출처:대종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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