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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대(王子臺)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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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9-08-21 19:41 조회2,34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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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대(王子臺) 위치

正祖 때 실학자 成海應 硏經齋全集 地理類 東水經에
沙湖江에 대한 아래의 설명이 있다.

‘沙湖江源出潭陽之秋月山。---(중략)--- 至府東。北折而西南流。爲竹綠川。又西南爲滄江。至昌平縣。爲?川爲碧津。由極樂之坪。爲極樂江。至王子臺。砥石江自東來會。

由王子臺以上大川二。長城白岩山之黃龍川。長城蘆嶺之可川入?川。小川五。潭陽滅峙之薪川。玉果之大橋川入竹綠川。光州無等山之三支川入?川。無等山之巾川。長城三聖山之九登川入碧川。

砥石江源出綾州之呂岾。西北流爲車衣川。環綾州州治。西北流經南平縣。爲城灘砥江。西北至王子臺。入沙湖江。

由王子臺以上大川二。光州無等山道川。入于綾州治前。南平德龍山之魚川。入于王子臺之下。

二江旣合。環羅州▣治。爲廣灘。折而西至??巖。爲錦津爲滎江。西爲?浦。至古幕院。爲沙湖津。西南爲曲江梨山夢灘駐龍之浦。經奄山爲木浦。西入于海。木浦者高麗莊和后吳氏浣紗而五色雲所見處。至今有浣絲泉。

사호강은 담양의 추월산에서 발원하여 --(중략)-- 담양부의 동쪽에 이르러 북쪽으로 꺾이어
서남으로 흘러 죽록천이 되고 또 서남으로 창강이 되며 창평현에 이르러 칠천이 되고 벽진이
되며 극락평에서 극락강이 되어 왕자대에 이르러 지석강이 동쪽으로부터 와서 만난다.
왕자대에서 상류쪽으로 대천(大川)이 둘이니 장성 백암산의 황룡천과 장성 노령의 가천이
칠천으로 들어오며 소천(小川)이 다섯이니 담양 멸치의 신천과 옥과의 대교천이 죽록천으로
들어오고 광주 무등산의 삼지천이 칠천으로 들어오며 무등산의 건천과 장성 삼성산의
구등천이 벽천으로 들어온다.

지석강은 능주의 여점에서 발원하여 서북으로 흘러 차의천이 되고 능주관아를 돌아
서북으로 흘러 남평현을 지나 성탄지강이 되고 서북쪽 왕자대에 이르러 사호강으로 들아온다.
왕자대에서 상류쪽으로 대천이 둘이니 광주 무등산 도천이 능주 관아 앞으로 들어오고
남평 덕룡산의 어천이 왕자대의 밑으로 들어온다.
두강(극락강과 지석강)이 이미 합류하여 나주 관아를 돌아 광탄이 되고 서쪽으로 꺾이어
노자암에 이르러 금진이 되고 영강이 되며 서쪽으로 회포가 된다. 고막원에 이르러
사호진이 되고 서남으로 곡강 이산 몽탄 주룡포가 되며 엄산을 지나 목포가 되어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목포는 고려 장황왕후 오씨가 빨래하다가 오색구름을 본 곳이니 지금은 "완사천"이 있다.

출전: 硏經齋全集外集 44권

大東地志
平章洞 : 「西北 三十里 神武王後孫 居于此 世爲平章 故名」
평장동은 '광주의 서북 삼십리에 있으며, 신무왕 후손이 이곳에 살았는데 대대로 평장사가 됨으로 인하여 얻은 이름이다.'라고 하여 평장동을 아예 신무왕 후손의 세거지로 규정하고 있다.

王子臺 : 「西南 四十五里 新羅王子留陳之所 有築城臺址
○按 新羅神武王 微時避禍往依 淸海鎭大使張保皐 與武州 都督金陽 合謀起兵 誅亂反正 此卽 神武王留陳之處」
왕자대는 '광주의 서남 사십오리에 있으며, 신라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성대를 쌓았던 터가 있다. ○살피건대, 신라의 신무왕이 미력한 때 화를 피하여 청해진대사 장보고에게로 가서 의탁하고 무주도독 김양과 더불어 함께 기병을 모의하여 환란을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誅亂反正)하니 여기가 곧 신무왕이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 라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대동여지도를 보면 왕자대가 있는 곳은 古邑城이 있던곳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漕運의 舟橋(배다리)지역이었다.

光州邑誌
王子臺 :「在 州西四十里 三國時 王子留陳之所 尙有築城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0리에 있으며,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아직도 성대를 쌓아둔 터가 있다.'

平章洞 : 「在 州北四十里 新羅王子金興光 知國將亂出爲庶人 卜居于此 子孫有八代平章事 因以爲號 有遺墟碑金鎭商撰陰記」평장동은 '광주의 북쪽 40리에 있으며, 신라왕자 김흥광이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지하고 나와서 서인이 되어 이곳에 터를 잡고 사셨는데 자손에서 8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 동호를 삼았으며, 유허지에 비가 있으니 김진상이 음기를 지었다.'

湖南邑誌
王子臺 :「在 州西四十里 三國時 王子 留陳之所 尙有築城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사십리에 있으며,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아직도 성대를 쌓았던 터가 있다.’

平章洞 :"在 州北四十里 新羅王子金興光 知國將亂出爲庶人 卜居于此 子孫有 八代平章事因以爲號洞 有安心寺 引月庵 棗溪亭 觀德亭 講禮軒 冠帶亭 今皆廢遺趾尙在"
평장동은 '광주의 북쪽 40리에 있으며, 신라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예지하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사셨다. 자손에서 팔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서 얻은 동호이다. 안심사 인월암 조계정 관덕정 강례헌 관대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허가 되어 그 유지만 남아있다.'

與地圖書
王子臺 :「在州西四十五里 大江上 俗傳 三國時王子留陳地所 尙有 築城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5리 대강 위에 있으며, 속설에 삼국(*후삼국) 때 왕자가 유진하던 곳으로 전하며, 아직도 축성하였던 기지가 있다.'


輿地圖書와 湖南邑誌의 光州牧 '山川'

南平川 :「在州西四十五里 自和順綾州發源 歷南平 至王子臺下 與極樂合」<여지도서>
南平川 : 「在州西四十五里 自和順綾州發源 歷於南平 至王子臺下 合極樂」<호남읍지>
남평천은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화순과 능주에서 발원하여 남평을 지나 왕자대 밑에 이르러 극락강과 합류한다.'라고 하여 왕자대의 위치를 영산강(극락강 또는 칠천이라고도 함)과 남평천(지석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위쪽 大江 上에 있음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增補文獻備考
王子臺 :「在西四十五里 俗傳 三國時 王子留陳地所」(『增補文獻備考』卷22, 與地考, 山川條, 光州 項)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속설에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이라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大東地志
< 羅州 山川條 >
ㅇ 沙明江
:南平之砥石江 光州之黃龍川合于王子臺下 西流至州東5里爲廣灘 折而西南流至?鵲岩 爲錦江津爲榮山江爲南浦 西流左過松只川爲曲浦 至古幕院右過鵲川爲沙湖津入務安界 (남평의 지석강과 광주의 황룡천이 왕자대 아래에서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나주의 동쪽 5리에서 광탄이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노작암에 이르러 금강이 된다. 다시 영산강 남포가 되어 서쪽으로 흘러 왼쪽에서 송지천을 지나 곡포가 되어 고막원을 지나고 오른쪽의 작천을 지나 사호진(사호강)이 되어 무안 경계로 들어 간다.)
< 南平縣 >
ㅇ 砥石江: 源出綾州之呂岾 西北流爲車衣川 環綾州治 東北流右過和順至道川 西流左楮浦川 西北流至縣東7里爲砥石江 縣北3里爲城灘 西流之王子臺左過魚川至羅州界 爲榮山江上流
(능주의 여점에서 발원하여 서북류하여 차의천이 되고 능주 소재지를 돌아 동북류하다가 오른쪽에서 나오는 화순의 도천을 합하고 서쪽으로 흘러 왼쪽에서 나오는 저포천을 합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남평현의 동쪽 7리에서 지석강이 된다. 다시 남평현의 북쪽 3리에서 성탄이 되어 서류하다 왕자대 왼쪽에서 어천을 합류하여 나주 영산강 상류가 된다.)

광주시청 홈페이지 광산구 향토항목의 전설 편에
용봉동(龍峯洞)과 왕자대(王子臺) 소개가 있다.


향토문화진흥원장 김경수 의 “광주땅이야기”에
왕자대에 관한 글이 있다.

광주 땅에 ‘왕’자가 들어있는 곳이 있다. 용봉동에 전하는 ‘왕개’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그 실마리를 풀어보기 위해 관련 증거를 더듬어 본다. 광주 서편 영산강 수로와 들판이 내려 보이는 둔덕산에는 후삼국 때 쟁패 흔적을 알려 주는 땅이름이 남아 있다. 그 중 고산자가 기록한 왕조대(王祖坮)와 왕자대(王子坮)가 관심거리다. 두 지명은 《대동여지도》에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으며, 1864년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동지지』에도 설명이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왕조대는 광주 서쪽30리에 있으며, 후백제 왕과 싸우던 고려 태조 왕건의 진터다.
『읍지』를 살피면 남평천은 광주 서쪽 45리에 있는데, 왕자대 아래서 극락강과 합류한다.

丁潤國은 1989년 펴낸 『나주목지』에서 王子臺 터를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봉호마을 뒤 해발 52m 봉우리로 비정했다.
丁潤國은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동산마을 뒤 해발 37m 복바위를 王祖臺 터로 보았다.

광산구 용봉동 용동마을 서편 나주시 용산마을 동각에는 근래 붙인 ‘왕좌정’판이 걸려 있다.

왕자대에 관한 『대동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주 서남쪽 45리 지점에 왕자대란 성터가 있다. 이는 신무왕이 김양과 장보고의 힘을 빌어 반정을 도모한 곳이다.

남평현 동쪽 7리에서 지석강이 되고, 현 북쪽 3리에서는 성탄이 되어서 서쪽으로 흘러가다 왕자대 왼쪽에서 어천을 합하여 나주 경계에 이르러 영산강 상류가 된다.


* 대동지지 남평현 지석강 설명에서 '남평현의 북쪽 3리에서 성탄이 되어 서류하다
왕자대 왼쪽에서 어천을 합류하여 나주 영산강 상류가 된다' 하였으므로
魚川을 찾으면 왕자대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자대가 있는 지역을 포함하여 나주지역은 후삼국시에 왕건을 매개로 하여 후고구려인 태봉에 귀부했으니 여기에서 나주지역이라 함은 나주, 영암, 영광, 함평, 무안, 진도, 완도, 해남, 강진, 장흥 등 전남의 서남해안 지역과 전북의 고창지역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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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노안면  마을소개

학산리 (鶴山里)
나주군 복암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산리, 봉호리, 계림리, 용당 일부와
서부면의 동산리 일부, 또 광주군 마곡면의 용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학림과 용산의 이름을 따서
 학산리라 하였고,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학산1구 용산(龍山) 마을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나주를 점거하기 위하여 이곳 태매산(또는 왕자봉, 치마봉)에
3일간 진을 치고 전쟁을 치뤄 나주를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건의 군사 중 2명의 잔여병 (김해김씨, 인동장씨)이 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하고
군사가 머물 다간 왕조대가 있다하여 용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한 풍수지리상에 의해 이곳에 황룡부주(黃龍負舟)라는 명당이 있다하여
이름에'용(龍)'자를 넣어 용동(龍洞) 또는 용산(龍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학산2구 봉호(鳳湖) 마을
당초 1600년대에 장흥고씨, 금성나씨가 거주하기 시작하여 마을을 형성
그 후 1780년경 김해김씨, 1850년대 함평문씨등이 함께 거주하여 하였으며,
마을앞에 영산강이 흐르고 예부터 선착장이 있었는데
나루터 앞에 물이 잘나오는 샘이 있다고 하여 천동(泉洞)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다리가 가설되고 선착장은 없어졌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에 용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용바위골' 이라 불렸다고도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봉호(鳳湖)라 개칭되었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 지명 이름은
황룡부주 : 마을 형국을 황룡부주라 하여 깊은 샘을 파지 못 했다고 한다
서원앞들 : 마을에 천동서원이 있다하여 마을앞 들녘을 이름 하여 부른다
태 미 산 : 마을뒷산으로 토성태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과거 가뭄이 심하게 들면
태미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학산3구 학림(鶴林) 마을
1800년대 초기 창원황씨 황기영(黃基永)이 창원에서 이곳으로 이주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마을 위에 울창한 송림이 있는데, 그 송림에 학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학림이라 부른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풍수 지리상 지형이 소나무에 학이 앉아 있는 형상이라하여 학림(鶴林)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또 마을에는 예전부터 복바위라는 바위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유래를 알 수 없고
그 형태마져 개울속에 잠겨 흔적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학산4구 동산(東山) 마을
바다의 복어가 이곳에와서 점을받아 내려가야 참복이 된다하여 복암리라 하였고,
 마을뒤에 오래된 바위가 있다하여 비석등이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마을 뒤 동쪽에 산이있다하여 마을이름을 동산(東山)이라 개칭하였다.

마을에 전하는 주요지명은
고즉위 : 동산 동쪽에 있던 마을
광탄(廣灘) : 마을 남쪽 영산강 상류에 있는 여울을 지칭
동산들 : 마을남쪽에 있는 들
똥섬 : 마을남쪽에 있는 들로 강과 내로 둘러싸여 섬이 되었다.
용소 : 동산 마을 뒤쪽에 있는 소로 위에 용 바위가 있다.
신촌들 : 동산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

학산5구 신동산(新東山) 마을
정확한 입향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사람이 와서 살곳이라 하여 만호동이라 하였고
한국전쟁 후 5일장인 노안장이 노안역 앞에 서게 되면서 많은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그 후 마을에 노안역이 있다고 하여 역전마을이라고 하였다.

학산6구 만호(萬濠) 마을
560년 전(1443년) 일본 통신사 서장관으로 갔던 본면 오룡동 (현 기말리)에서 출생했던
보한제 신숙주가 그해 10월 19일 귀국 하면서 본가에 들러 조상에 집배한 후 귀경하던 중
본 마을을 가리키며 편안한 땅 만호터가 되리라는 풍수지리를 봤다는 구전이 내려와 현 마을이 조성되었으며,
나주목사가 자식을 분가 하고자 집터를 정하지 못하던 차에 선몽에 동북쪽으로 활을 쏘아 꽃힌 곳에
성주 하라는 꿈을 꿔 화살을 쏘았으나 화살을 찾지 못해 다른 곳에 성주 하였는데
그 후 화살이 꽃힌 곳이 발견 된곳이 본 마을이었기에 목사는 만호터가 축성되리라고 화담을 한 곳이라고
구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학산7구 문화마을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본디 영산강은 광산구 본덕동 시산마을 남서쪽 997번지 10만여 평으로 남아있는
구하도(舊河道)로 굽이돌아 호가정 앞에 깊은 쏘(沼)를 형성하고 남서쪽으로 흘러내렸다.

 승촌마을에서 서쪽으로 들판길을 따라 5리 정도 가면 ‘섬들’이 나온다.
이곳에 1970년대 중반까지 원가래마을이 있었다.

 본디 이곳 들은 해발 8m정도로 물난리가 잦아 임야와 잡종지였는데,
점차 영산포 거부 구로즈미(黑住)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소유하게 되었다.

592번지, 593번지, 588번지, 590번지 일대 10여 필지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 초에 대지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보아 신흥촌이었고,
주로 강건너 학산쪽 사람들이 이주해왔다.

영산강과 지석강이 합류되었던 곳이었는데 직강공사가 이뤄져 구하도가 남아 있다.
즉 천동(봉호)마을에서 복바우까지 반달형으로 굽이도는 곳에 원가래 마을이 있었으며,
나주시 노안 학림마을 쪽에는 포구가 있으며, 학산수리조합 양수장이 설치되었다.

이 수로에는 일제 때까지만 해도 황복어가 거슬러 올라 왔다고 한다.
원가래에 살던 사람들은 1974년 홍수 때 북동쪽 강 건너편 광산구 용봉동 용동마을로 집단이주 했다.

* 자료: 향토답사  "<영산강과 광주천~서구, 광산구 일대> 왕조대와 왕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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