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찰공 휘 현뢰(賢賚) 배위(配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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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9-09-01 10:58 조회1,902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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監察公 諱 賢賚 配位
監察公 配位의 父는 太宗大王 8子 謹寧君 李농(人변+農)이요
母는 河陽人 黃海道觀察使 贈 左贊成 許之惠의 2女 泰安郡夫人이다.
- 泰安郡夫人 母는 本宗 匡靖公 諱 鍊 外玄孫, 즉 工曹典書 南陽人 洪師瑗 女 -
謹寧君 李농(1401~1461)
太祖의 孫이며 太宗의 第 8男으로 信寧宮主 信嬪辛氏 所生이다.
信嬪은 寧越人으로 寧越府院君 蘊의 後孫이며 判密直司事 兼과 漢城左尹 喜와 牧使 이 가 그 高, 曾, 祖 이요 文科及第하여 全羅道觀察使, 戶部典書, 贈 贊成인 辛永貴의 女로 15세에 太宗大王과 婚姻하여 3男 7女를 낳았는데 謹寧君은 이 中 3男이다.
信嬪은 어질고 德있는 분으로 太宗 元年 辛巳에 謹寧君을 生産하였다.
처음에 부군에게 정군을 封하였고 世宗 6年 甲辰年 10月에 謹寧君으로 封하였으며 世宗 8年 丙寅 11月에 嘉靖大夫를 除授하였으며 世宗 10年 戊申 7月에 從一品이 되었고 世宗 12年 12월 3일에 正一品君을 封하였다.
1) 聰明함과 어진 성품
謹寧君은 어려서부터 詩와 禮를 좋아하였고 德도 있고 學行도 있으며 王子로서 공자의 貴함을 마음에 두지 않고 驕慢과 奢侈도 않으며 謙遜하고 恭愼하여 칭찬이 자자하고 뛰어나니 사람들이 河癎集平같은 어짐으로 비단 부채에 설죽을 비기며 讓寧, 孝寧 두 大君의 智德에 難兄難弟라 稱하였다. 謹寧君은 世宗大王과는 異腹兄弟間이며 首陽大君에게는 叔行이다.
2) 冠岳山 연주대에서 臨終
端宗遜位를 맞이하여 世祖의 叔父로 홀로 靖難의 맹훈권에 署名을 아니하고 冠岳山 연주대에 올라 14일 동안 斷食 痛哭하였고 후에 임종할 때에 遺言하기를 葬禮儀式을 밟지 말라고 하여 지금도 墓前 앞에 짧은 碑石이 庶民들의 墓와 같다.
謹寧君은 六宗英(安平大君, 錦城大君, 和義君, 漢南君, 永豊君, 河寧君)의 隊列에 들만하다고 하였다.
諡號는 마음을 조심하여 能히 즐겨하고 큰 德은 오로지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僖懿라 贈하였다.
3) 泰安郡夫人 河陽 許氏
泰安郡夫人 許氏는 3男 6女를 낳으니 長男은 玉山君, 次男은 牛山君인데 牛山君은 玉寧君의 后로 出系하였으며 3男 達川君은 後嗣가 없었다. 長女는 直長 辛尙夏에게, 次女는 監察공 金賢賚에게, 3女는 副正 鄭錫年에게, 4女는 郡守 贈 參議 鄭穗에게, 5女는 府使 贈 都承旨 金僖에게, 6女는 判官 鄭允功에게 各 各 出嫁하였다.
謹寧君夫人 許氏는 1461년 端宗이 廢位되던 날 夫君인 謹寧君과 함께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斷食을 하다 謹寧君 臨終 5일 後에 殞命하였다.
泰安郡夫人 墓는 서울 관악구 신림 6동 156번지 山중턱에 있었으나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謹寧君 墓에 合葬하였다.
監察公 配位의 父는 太宗大王 8子 謹寧君 李농(人변+農)이요
母는 河陽人 黃海道觀察使 贈 左贊成 許之惠의 2女 泰安郡夫人이다.
- 泰安郡夫人 母는 本宗 匡靖公 諱 鍊 外玄孫, 즉 工曹典書 南陽人 洪師瑗 女 -
謹寧君 李농(1401~1461)
太祖의 孫이며 太宗의 第 8男으로 信寧宮主 信嬪辛氏 所生이다.
信嬪은 寧越人으로 寧越府院君 蘊의 後孫이며 判密直司事 兼과 漢城左尹 喜와 牧使 이 가 그 高, 曾, 祖 이요 文科及第하여 全羅道觀察使, 戶部典書, 贈 贊成인 辛永貴의 女로 15세에 太宗大王과 婚姻하여 3男 7女를 낳았는데 謹寧君은 이 中 3男이다.
信嬪은 어질고 德있는 분으로 太宗 元年 辛巳에 謹寧君을 生産하였다.
처음에 부군에게 정군을 封하였고 世宗 6年 甲辰年 10月에 謹寧君으로 封하였으며 世宗 8年 丙寅 11月에 嘉靖大夫를 除授하였으며 世宗 10年 戊申 7月에 從一品이 되었고 世宗 12年 12월 3일에 正一品君을 封하였다.
1) 聰明함과 어진 성품
謹寧君은 어려서부터 詩와 禮를 좋아하였고 德도 있고 學行도 있으며 王子로서 공자의 貴함을 마음에 두지 않고 驕慢과 奢侈도 않으며 謙遜하고 恭愼하여 칭찬이 자자하고 뛰어나니 사람들이 河癎集平같은 어짐으로 비단 부채에 설죽을 비기며 讓寧, 孝寧 두 大君의 智德에 難兄難弟라 稱하였다. 謹寧君은 世宗大王과는 異腹兄弟間이며 首陽大君에게는 叔行이다.
2) 冠岳山 연주대에서 臨終
端宗遜位를 맞이하여 世祖의 叔父로 홀로 靖難의 맹훈권에 署名을 아니하고 冠岳山 연주대에 올라 14일 동안 斷食 痛哭하였고 후에 임종할 때에 遺言하기를 葬禮儀式을 밟지 말라고 하여 지금도 墓前 앞에 짧은 碑石이 庶民들의 墓와 같다.
謹寧君은 六宗英(安平大君, 錦城大君, 和義君, 漢南君, 永豊君, 河寧君)의 隊列에 들만하다고 하였다.
諡號는 마음을 조심하여 能히 즐겨하고 큰 德은 오로지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僖懿라 贈하였다.
3) 泰安郡夫人 河陽 許氏
泰安郡夫人 許氏는 3男 6女를 낳으니 長男은 玉山君, 次男은 牛山君인데 牛山君은 玉寧君의 后로 出系하였으며 3男 達川君은 後嗣가 없었다. 長女는 直長 辛尙夏에게, 次女는 監察공 金賢賚에게, 3女는 副正 鄭錫年에게, 4女는 郡守 贈 參議 鄭穗에게, 5女는 府使 贈 都承旨 金僖에게, 6女는 判官 鄭允功에게 各 各 出嫁하였다.
謹寧君夫人 許氏는 1461년 端宗이 廢位되던 날 夫君인 謹寧君과 함께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斷食을 하다 謹寧君 臨終 5일 後에 殞命하였다.
泰安郡夫人 墓는 서울 관악구 신림 6동 156번지 山중턱에 있었으나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謹寧君 墓에 合葬하였다.
댓글목록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작성일
참고로 사헌부 감찰공 19세 휘 현뢰는 문숙공후 충숙공파 상호군공파이며
묘지명은 정홍명(鄭弘溟)이 지었으며 1471년에 평장동 유허서를 찬하였다
아들은 상주목사 영보(永寶)다
세일사는 음 3월3일이며
묘소는 전남 장성군 장성읍 유탕리 서동(하청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