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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휘 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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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9-10-04 16:21 조회1,20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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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김덕령(金德齡)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정조 무오년에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렸다.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현령 이귀(李貴)가 번갈아 글을 올려서 광주의 선비 김덕령을 감사에게 천거하니, 감사 이정암이 장계로 아뢰었다.
○ 계사년 윤 11월에 덕령이 담양에서 군사를 모아 수천 명을 얻었다. 도원수 권율에게 허락을 얻어 초승사(超乘使)라고 인장을 쓰고 또 스스로 비장을 부절(赴節)이라고 부르고 그 아래도 모두 사호(私號)가 있었다. 덕령은 어려서부터 남보다 뛰어난 용맹이 있었다. 이때 모친 상중에 있었으나 스스로 벼슬에 복직하여 그 군사를 일으키는 격문에, “광주의 상주 김덕령은 도내 여러 고을 모든 군자들에게 삼가 고한다. 나는 일찍부터 구속받지 않는 기질을 지니고 청영(請纓)하려는 뜻이 간절하였다. 변고가 발생한 처음에 군중에 몸을 던지려는 생각이 깊었으나 늙은 어머니가 병에 걸려 해가 서산(西山)에 걸린 듯 하여 끝까지 봉양하고 싶은 심정 간절하고 옷자락을 끊는 짓을 차마할 수 없어서 두 해 동안 숨어 칼을 어루만지며 일본이 있는 동쪽을 돌아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는데, 이제는 어머니가 이미 별세하였으니 신하로서의 절의를 다할 수 있게 되었다. 상복을 입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갑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계책을 내는 것은 비록 표요(?姚 한 나라때의 장군 곽거병(?去病)으로 흉노를 쳐부수었다.)만 못하지만 의기는 사사로이 사아(士雅 진(晉) 나라 조적(祖?)의 자(字))를 사모한다. 군사는 정예(精銳)하기에 힘쓰고 많은 것에는 힘쓰지 않으니 오중(吳中)의 장사 천여 명이 따라주기를 원하노라.” 하는 말이 있었다. 《일월록》
○ 덕령은 광주 석저촌(石底村) 사람이다. 용맹과 힘이 뛰어나서 달아나는 개를 쫓아가 잡아서 그 고기를 찢어서 다 먹기도 하고, 말을 타고 달려서 작은 창문으로 한 칸 방에 들어갔다가 곧 말을 돌려서 뛰어 나오기도 하며, 누각 지붕 위에 올라가서 옆으로 누워 굴러서 처마를 타고 떨어져서 누각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일찍이 대숲 속에 사나운 범이 있다는 말을 듣고 활과 창을 가지고 가서 박두(樸頭)로 먼저 쏘니 범이 입을 벌리고 손살같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덕령이 창을 뽑아 대적하니 창날이 범의 턱아래로 나와서 땅에 박히므로 범은 꼬리만 흔들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이귀가 천거하는 글에, “지혜는 공명(孔明)과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낫다.” 하였다. 세자가 불러서 익호장군(翼虎將軍)에 임명하였는데, 임금이 초승장군이라고 고쳐 불렀다. 일찍이 철퇴 두 개를 허리 아래 좌우에 차고 있었는데 무게가 각각 백 근이 되니 온 나라에서 신장(神將)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먼저 진주 목장(晉州牧場)에 사나운 말이 있어서 뛰쳐나가 곡식을 밟고 날 듯이 높이 뛰어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다. 덕령이 그 소문을 듣고 즉시 가서 굴레를 씌워 올라 타니 말이 잘 말을 들었다. 왜놈들이 듣고 몹시 두려워하여 ‘석저장군(石底將軍)’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석저가 마을 이름인 줄 모르고 돌 밑에서 나온 줄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명신록》
○ 도유사(都有司)인 전 첨정 기효증(奇孝曾)을 시켜서 격문을 썼는데, “장수와 군사들이 비록 싸움터에 달려가지만 부모ㆍ처자들이 모두 산성에 들어가 있으니,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있게 되면 그 군사를 되돌려 산성을 지키는 것이 실상 공격과 수비의 상책이다. 모아 둔 곡식은 한 편으로는 전장에 가는 군사에게 공급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성을 지키는데 준비하여야 될 것이다. 산성 안에는 입암(笠巖)과 금성(金城)이 서로 엇비슷한데, 입암이 더욱 나으니, 한 도의 주장(主將)이 주둔하는 곳이 될 것이다.” 하는 말이 있었다. 《일월록》
○ 처음에 덕령이 집에서 선비의 학업을 익혀서 겸손하고 자신의 재주를 숨겨서 자기 몸을 낮추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는 이가 없었다. 그 자부 김응회(金應會)도 강개한 선비로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토벌할 것을 여러 번 권하였으나 덕령이 주저하여 결정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와서 평소부터 잘 지내던 장사 최담령(崔聃齡) 등 수십 명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날랜 장사 5천여 명을 모집했다. 덕령이 타던 백마도 그 주인과 같아서 하루에 천 리를 갔다. 향하는 곳에는 대적이 없었으니 적군이 감히 싸우지 못하였다. 《조야첨재》
○ 갑오년 봄에 선전관을 보내어 선유하고 충용장군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덕령이 세자를 전주에서 알현하니 세자가 북정(北亭)에 나와서 그의 용맹을 시험하였다. 덕령은 투구와 갑옷차림으로 말을 달려서 곧장 담양으로 돌아갔다. 《조야첨재》
○ 덕령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으로 향하였다. 그 선문(先文)에, “담양ㆍ순창(淳昌)ㆍ김해ㆍ동래ㆍ부산을 지나서 동해를 건너고 대마도와 일본 대판(大坂)으로 향할 것이다.” 하는 말이 있었고, 이어 영남에 보낸 격문에, “뜻이 글공부에 있었지 활쏘기와 말타는 것은 본업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나이 이미 죽음에 가까웠으며 형도 싸움터에서 죽어서 잠깐 군중에 있다가 곧 돌아왔다. 위로는 나라의 수치를 생각하고 몇 번이나 한 밤중에 칼을 어루만졌으며, 아래로는 형의 원수를 분하게 여겨 매양 밥상에서 눈물을 흘렸다. 집안의 불행이 연달아 어머니도 이제 세상을 떠났다. 상을 대충 마쳤으니 이 몸을 나라에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 남원에 있을 때 광한루(廣寒樓)에 주둔하여 일일이 군사를 조련하면서 본 고을의 유학 최담령을 별장(別將)으로 삼았다.
○ 진주에 주둔하였을 때 크게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원수가 전주 출신의 군사를 예속시키고 각도 의병들도 모두 충용군에 예속시키고 각도 의병들도 모두 충용군에 예속하도록 명하였다.
○ 갑오년 8월에 제찰사 윤두수에게 명하여 덕령을 독려하여 적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두수가 관하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등과 만나서 거제로 진군하였다. 곽재우가 사적으로 덕령에게 말하기를, “이번 거사는 장군이 원수에게서 일을 만든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렇소?” 하고 물으니, “아니오.” 하였고, “장군은 바다를 건너 왜적을 멸망시킬 방책을 궁리하였소?” 하니, “아니오.” 하였다. 또 “국가가 장군을 믿고서 이번 일을 시작하였고 군졸이 장군을 믿고서 싸움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 장군의 말이 이와 같단 말이오?” 하니, 덕령이 “나도 이번 일의 시말을 알지 못하오. 굴에 숨어 있는 적을 무슨 수로 제어하겠소.” 하였다. 재우가 탄식하며, “아아, 일을 알만하오. 오늘의 일은 장군의 용맹을 시험하려고 하는것일 거요. 장군의 명성은 오랑캐의 나라에도 널리 퍼져 흉악한 왜적이 움츠려 물러나는데 만약 가벼이 나가서 약점을 보이게 된다면 뒷일을 잘 처리할 방책이 전혀 아닐 것이오.” 하고 즉시 원수에게 급히 보고하여 도로 물러나서 후일의 변고에 대비하기를 요청하여 여러 번 청하였으나 원수가 듣지 아니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마지 못하여 배에 올랐다.적군은 깃발을 크게 벌려 세우고 성에 올라 대항하였다. 선거이(宣居怡)가 덕령에게, “장군의 용맹을 오늘 써먹을 만하오.” 하였다. 덕령이 익호기(翼虎旗)를 두 개 꽂고 북을 울리며 전진하였으나 총알이 비오듯 쏟아지니 어떻게 할 계책이 없어서 군사를 퇴각하였다. 여러 장수들도 드디어 돌아왔다. 덕령이 이 때문에 뭇사람들의 촉망을 잃었고 더욱이 좌상(左相 윤두수)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다. 《일월록》
○ 을미년 9월 덕령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 동안에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였고, 또 여전히 잔인하고 혹독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윤근수가 잡아서 진주에 가두고 이어 조정에 아뢰었으므로 잡혀와서 구금되어 국문을 받았다. 다음 해 2월에 용서를 받아 진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언관이 허황된 말을 하는 수령을 탄핵하였는데, 임금이 “이 사람의 허황됨이 과연 장성 원 이귀와 같은 자인가. 익호에 대한 말은 다시는 입밖에 내지도 말라.”는 비답을 내렸다.
○ 병신년 가을에 이몽학의 난리 중에 문서를 얻었는데 김ㆍ최ㆍ홍의 세 성이 적혀 있었다. 한현(韓玄)이 붙잡히자 원수가 신문하니, “김덕령ㆍ최담령ㆍ홍계남(洪季男)이라.”고 공초하였다. 또, “곽재우와 고언백(高彦伯)도 모두 나의 심복이었다.”고 하였다. 권율이 곧 위에 구체적으로 아뢰고 군관을 나누어 보내서 체포하게 하였다. 이때 덕령은 역적을 토벌하라는 원수의 명을 받고 진주에서 운봉으로 갔다가 호남 우도가 평정되었음을 듣고 본가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권율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진에 돌아갔는데 곧 잡혀 진주 옥에 갇혔다.임금이 권율의 장계를 보고 조정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니, 어떤 사람은, “덕령은 용력이 뛰어나니 소홀히 해서는 안되니 체찰부로 하여금 군문에 불러오게 하여서 사로잡는 것이 편리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한 미친 사람과 같은 서생이니 속임수로 잡을 것이 아니라 전례대로 선전관과 도사를 보내어 잡아오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선전관은 무인이니 단독으로 맡겨 보낼 수 없다.” 하고 승지 서성(徐?)으로 선전관과 도사를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다. 덕령이 이미 옥에 갇혔으므로 드디어 금부로 잡아와서 국문하였다. 재우 등도 잡혀왔으나 오래지 않아서 은명을 받고 진으로 돌아갔다.덕령이 까닭없이 체포되니 원통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으나 요직에 있는 이가 모두 꺼려서 한 사람도 구해주는 자가 없었다. 혹 말을 퍼뜨려, “덕령은 사람 죽이기를 삼을 베듯 하였으며 또 모반할 상(相)이 있으니 죽이지 않으며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하고, 또 형리에게 부탁하여 속히 죽이도록 시키니 26일 동안에 형장을 치며 심문하기를 여섯 번이나 하여 정강이 뼈가 이미 부러졌는데도 오히려 무릎으로 걸어갔다.마침내 볼기에 형장을 쳐서 아직 목숨만 남아있는 상태였으나 행동거지가 평상시와 같아서 조용히 공초를 받았는데, “신이 만약 다른 뜻이 있었다면 어찌 당초에 원수의 명을 받고 운봉에 왔겠으며, 또 명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서 진으로 돌아갔겠나이까. 다만 신에게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나이다. 계사년에 자모가 별세하였는데 3년 상의 슬픔도 잊고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에 흥분하여 정을 끊고 상복을 벗어 던지고 칼을 잡고 굳건히 나섰으나, 여러 해 동안 종군하여 조그만한 공도 세우지 못하였으니 충성도 이루지 못했으면서 도리어 효도에만 어겼나이다.허물은 이것 뿐이오니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지만 구구한 충정은 천지가 굽어 살피옵나이다. 다만 죄없는 최담령만은 죽이지 마시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덕령은 형장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니 참으로 적이다.” 하였다. 옥문을 출입할 때 그의 용력을 의심하여 큰 나무 토막에다 묶고 좌우에서 에워싸고 다녔는데 마침내 형장 아래에서 죽었다. 《조야첨재》
○ 덕령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만에 명성이 중국과 오랑캐의 나라에 널리 퍼졌다. 전에 호남에 있을 때 맨손으로 범 두 마리를 쳐서 잡아 왜놈에게 자랑하며 팔았더니 왜놈들이 두려워하였다. 청정(淸正)이 그 위엄있는 명성을 듣고 몰래 화공을 보내어 그의 얼굴을 그려다가 보고는, “참 장군이다.” 하면서 항상 스스로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뒤에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고자 하여 충용장군을 면대할 수 있도록 원수부에 청하니, 원수는 집에 돌아가서 상을 마치게 하였다고 대답했다. 마침내 그가 죽었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 술을 마시며 기뻐 뛰면서 “호남과 호서는 걱정없다.”고 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 《조야첨재》
○ 이 때 당시의 정승이 그의 위엄있는 명성을 꺼려서 이 일(역적의 문초에 이름이 나온 것.)로 인하여 죽이고자 하여 국문하는 형벌이 몹시 혹독하였다. 덕령은,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역적의 새끼를 따라서 모반하였겠는가.” 하며 노하여 몸을 떨치니 쇠사슬이 모두 끊어졌다. 《명신록》
○ 역적의 무리들이 덕령을 끌어들였을 때 임금이 크게 놀라서, “덕령은 용맹이 삼군에 으뜸가니 만약 잡아오지 못한다면 어찌하나.” 하니, 서성(徐?)이 아뢰기를, “한명련(韓明璉)도 날래고 용감하니 명련을 시켜 도모하게 하고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항복한 왜인 50명을 거느려서 돕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서성에게 잡아올 것을 명하였다. 서성이 전주에 이르니 권율이 벌써 진주에 가두어 놓았다. 권율도 덕령이 명을 거역할까 염려하여 비밀히 성윤문(成潤文)을 시켜 도모하게 하였다. 윤문이 비밀히 군무에 대해 의논할 것이 있다고 덕령을 청하니 덕령이 혼자서 말을 타고 왔다.윤문이 그의 손을 잡고, “조정에서 그대를 잡으라는 명이 있네.” 하니, 덕령이 즉시 꿇어 앉으면서, “임금의 명이 계시는데 어찌 이와 같이 도리어 나를 접대하는가.” 하였다. 윤문은 그의 원통함을 알고 다만 그의 두 손에만 자물쇠를 채워서 옥으로 보냈다. 서성은 덕령이 이미 잡혔다는 것을 듣고 장계를 올렸는데, “권율이 덕령에게 몽학을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나흘이나 머뭇거리면서[四日遲留] 성패를 바라만 보고 있었으므로[觀望成敗]가두었다.”고 하였다. 이 여덟 글자가 드디어 덕령의 죄안이 되어서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서성을 허물하였다. 《자해필담》
○ 덕령은 단정하고 바르기가 선비와 같았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거문고타고 노래하는 것을 영웅의 일이 아니니 / 絃歌不是英雄事
칼춤을 추면서 모름지기 장수의 옥 장막에서 노닐 것이다 / 劒舞要須玉帳遊
훗날 평난되어 칼을 씻고 돌아온 뒤에 / 他日洗兵歸去後
강호에서 낚시질 하는 외에 다시 무엇이 구하리 / 江湖漁釣更何求

하였다. 그의 뜻을 가히 알 수 있는데 미쳐 성공하기도 전에 명성이 너무 성해져서 마침내 비명에 죽고 말았으니 남쪽 사람들이 지금도 그를 슬퍼한다. 《명신록》 《조야첨재》
○ 덕령이 진주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 지낸 제문이 문장은 강개스럽고 뜻은 창달 간절하였으니, 미친 서생이니 무사니 하는 명칭으로는 그 사람을 단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때 권인룡(權仁龍)이란 사람도 신력이 있어서 덕령 다음 갔으나, 뒤에 그 또한 죄 아닌 죄로 역적으로 몰려서 옥에서 죽었다. 《일월록》
○ 어떤 말에는 조정에서 덕령을 의심하여 원수에게 가만히 불러서 영문에 오거든 곧 묶으라고 명하려 하였는데, 서성이, “덕령은 반역자가 아니니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서 잡아도 곧 잡힐 것인데 하필 거짓 꾀를 쓸 것이오.” 하였다. 임금은 서성의 쉽게 말하는 것을 의심하여 성을 내면서, “네가 가서 잡아라.” 하였다 한다.
○ 권필(權?)이 일찍이 꿈에 작은 책 한 권을 얻었는데 바로 김덕령의 시집이 었다. 그 첫머리 한 편은 취시가(醉時歌)인데, 그 구절은,

취했을 때 노래하노니 / 醉時歌
이 곡을 듣는 사람이 없구나 / 此曲無人聞
나는 꽃과 달 아래에서 취하고자 하지도 않고 / 我不要醉花月
나는 공훈도 세우고자 하지 않는다 / 我不要樹功勳
공훈을 세우는 것은 뜬 구룸과 같고 / 樹功勳也是浮雲
꽃과 달 아래에서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일세 / 醉花月也是浮雲
취했을 때 노래하노니 / 醉時歌
내 마음 알아 주는 사람 없구나 / 無人知我心
다만 긴 칼을 잡고 밝은 임금 받들기를 원하노라 / 只願長劒奉明君

하였다. 권필이 잠이 깨서 매우 슬퍼하며 한 수의 절구를 지었으니,

장군이 옛날에 창을 잡았으나 / 將軍昔日把金戈
장한 뜻이 중도에서 꺾여지니 운명인걸 어찌할거나 / 壯志中?柰命何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 / 地下靈英無限恨
분명 취시가 한 곡조로 나타냈구료 / 分明一曲醉時歌

하였다. 《석주집》


출전: 연려실기술 제17권

* 청영(請纓) : 한 나라 때에 종군(終軍)이 한무제에게 청하기를, “갓끈 하나를 주면 남월와(南越王)의 목을 그것으로 매어 죽이겠다”고 한 일이 있다.

*옷자락을 끊는 짓 : 진 나라때 온교(溫嶠)가 나라일을 하려고 집을 떠나려 하는데, 어머니가 옷자락을 붙잡고 말리므로, 그 옷자락을 칼로 끊고 간 일이 있다.

*오중(吳中)의 장사 : 항우(項羽)가 오중(吳中)에 있을 때 오중의 장사를 모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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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봉 작성일

忠勇將軍贈兵曹判書金公諡狀

上之九年乙巳湖南儒生奇錫周等上言萬曆島夷
之難故忠勇將軍臣金德齡奮自布衣擧義討賊雄
勇威略爲一時諸軍之冠功未及就竟中蜚語以死
?在先朝憫其?誣贈官予祠而國人悲之至
今未已乞賜美諡以表忠臣上敎曰德齡忠勇
節義婦孺所知覽其遺傳凜凜奪魄可依其所請鳴
呼國家所以慰奬忠義者蓋至是而無以加矣謹
按公字景樹光州人高祖諱文孫贈兵曹參判曾
祖諱珝戶曹正郞祖諱允孝宣務卽考諱鵬變習讀

?南平潘氏直長季宗女公以隆慶戊辰生甫弱冠
倜?有大志常以忠孝自勵壬辰倭大擧入寇連陷
湖嶺州郡直犯京師上幸義州是時公伯兄諱
德弘已擧義兵與高公敬命軍合公亦在其軍中行
到全州公兄謂公曰老母在季弟尙幼吾與若俱死
王事誰可顧養者遂遣公歸獨與高公進擊賊錦山
兵敗死之明年皇朝提督李如松克平壤賊悉撤
諸路兵還據嶺南諸郡謀再?官軍及諸義兵皆奔
潰時公方家居守母服觀察使李公廷?薦公可將
而潭陽府使李公景麟長城縣監李公貴及女兄?金
應會俱以大義勉公遂以墨?募兵得五千人傳檄
湖嶺到南原聞邑人崔聃齡有勇略召爲別將進兵
咸陽受都元帥權公慓節度權公標其軍曰超乘
世子方駐全州又賜號翼虎將軍事聞行在
上遣使奬諭更名曰忠勇軍公愈自奮勵遂會郭公
再祐進軍宜寧賊夜?郭公營公設伏夾擊大破之
賊將淸正潛購公像見之愕然曰眞將軍也稍幷其
小屯爲三大壘據險固守當是時諸將環寇而壁者
且十數而忠勇軍最爲賊所畏服上聞而嘉之命
諸義兵悉屬公公欲乘銳進?會皇朝遣沈惟敬
議封貢戒我母得交兵公乃留箚晉州益治戰具屯
田積粟屢請出戰朝廷不許而不悅者群起沮撓
公知事不可爲日飮酒感憤成疾言者又誣以濫戮
軍吏遂被建問賴大臣力救乃解頃之李夢鶴叛湖
西憚公等威名乃宣言公及崔聃齡洪季男郭再祐
高彦伯皆與之通謀季男彦伯亦當時良將也時公
承元帥檄討夢鶴至雲峯聞賊平還軍晉州忠淸兵
使李時言慶尙兵使金景瑞素忌公卽密啓公有
叛狀而領議政柳成龍從中主之上問群臣德齡
叛事當如何皆曰此猛將可以計擒有隣先祖忠肅
 公方爲承旨獨曰此人萬萬無叛理一武士足以?
之行詐不可上因顧曰汝其往捕至則公已自就
獄及置對公慷慨曰臣受國厚恩寧肯從逆賊叛耶
臣忘哀起義將欲爲國家剪狂寇擁兵數年未
始 樹寸功不伸於忠反屈於孝是宜死且臣已矣惟願
勿殺無辜崔聃齡大臣鄭公琢金公應南皆白其?
柳相曰彼素號驍勇今縱之後可擒乎遂酷加拷掠
竟死獄中時年二十九諸義兵聞之莫不解體而倭
酋皆動色相賀公爲人短小精悍目光??射人能
辨十里外物勇力絶倫常使大刀長數丈又用雙鐵
椎重各百斤每走馬山谷中上下馳驟揮?跳?樹
木爲之披靡嘗有猛虎在竹林公持?獨往徑前刺
之虎帖尾不敢動性至孝事親承顔怡愉終日無違
十四丁習讀公憂哀毁幾不能全奉慈母能盡其養
母嘗?疾公聞晉州有良醫往邀之醫言病已危雖
往無及公泣請乃許卽躬執鞭以從疾馳三百里到
家日未午遂賴其藥以?又嘗讀書山齋同舍有聞
喪而奔者川水方漲不可渡公哀之卽挾其人亂流
而濟往來水上若履平地見者感歎不獨神勇然也
然公務自難晦折節謹飭不露鋒角卽之溫然端士
也好讀書善屬文十七擧鄕解旣又遊牛溪成先生
之門有志聖賢之學先生?許之蓋其仗義校忠以
赴國家之急者亦由平日之所養云顯宗二年
道臣啓請伸雪上下大臣議領中樞李公景奭
擧忠肅公當日所奏爲證諸大臣亦同聲訟?命贈
兵曹參議肅宗七年加贈兵曹判書賜祠額
曰義烈公無子配潭陽李氏公死之三年丁酉避兵
秋月山遇賊不屈死弟別座諱德普痛二兄之死隱
居力學與安公邦俊爲道義交丁卯之難約安公擧
義勤王會病不能行貽書爲訣辭氣激烈不愧爲
公之弟也當奇錫周等上言竝陳公兄弟節行命
各贈官有隣嘗讀公所歌春山火燃之曲竊悲其
所遭方公之始起痛念宗國奮不顧身釋?仗?
豪傑四應何其壯也顧其志豈肯以一死動毫髮哉
然今觀其詞意牢愁鬱?若有所不釋然者又何其
悲也當公之時倡義諸公如趙公憲金公千鎰或身
冒白刃力盡孤城以殉國難生爲忠臣死爲毅魄
而公獨抱幽枉竟罹禍殃死雖欲與公?亦不可得
等是死耳抑又有幸不幸焉此公所以重自悲也雖
然我聖朝崇奬節義扶植風敎至于今日褒贈
之典殆無遜於殉國諸公王言渙發志士增感則公
之死雖勿之悲焉亦可也奇錫周等以有隣職?館
閣且爲忠肅公後孫托以諡狀義不可辭謹?其
遺事而論次之以論于太常氏正憲大夫行龍?衛
副司直兼知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世
子右副賓客徐有隣謹狀

乾隆五十三年四月照訖

忠愍[주:危身奉上曰忠落使民悲傷曰愍點]

忠壯[주:忠上同武能持重曰壯]

忠烈[주:忠上同强而能斷曰烈]


출전: 太常諡狀錄(仁祖朝부터 朝鮮王朝末期까지 諡狀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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