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공(松巖公)태정(泰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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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현 작성일07-01-01 16:44 조회1,3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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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儀禮와 禮學에 해박한 식견을 갖춘 학자
공의 휘는 泰廷이요, 자는 亨彦이며,호는 松巖이다.
공은 판도판서공(휘 允藏)의 7대손 贈嘉善大夫 行安山郡守 백간(伯幹)과 贈貞夫人 全州李氏(明原君의 따님) 사이에 외아들로 중종 36년(1541)에 향제 충남 보령 청라에서 태어났다.
공의 천품이 영민하여 학구에 잠심해 일찌기 문학이 성취하여 명종17년(1561)에 생원시 동
방진사과 3등 29인으로 합격한 후, 선조3년(1569) 알성시문과병과 4인으로 급제하여 三司의 청빈한 여러 요직올 역임하여 재명을 떨쳤다.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12대 仁宗의 妃)가 승하하심에 조정공의가 복제문제로 예설이 논의되었는데, 공이 기년제(朞年制)률 주장하였으나, 공론이 대세에 몰려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사류들은 공의 주장을 정론이라 하였다.
예학(禮學)에 해박한 식견으로 의례(儀禮)에 대한 문답한 사실이 퇴계문집
에 등재되었다. 공은 모든 사리의 변별력이 남달라 당시 鄭汝立의 허명으로 세상을 문란케 하여 모반하였올 때, 공에게 접근해 왔으나, 예리한 판단으로 거절하였다. 그 후 鄭汝立의 역모사건으로 己丑옥사가 일어나자, 당시 공의 선견지명에 모두 탄복하였다.
공은 제주목사, 호남체찰사 등 여러 요직을 거쳐서 벼슬이 가선대부 형조참
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등 요직을 역임 하였다.
공의 배(配 貞夫人 星州李氏)는 전 참의 따님으로 임진 난 중에 순절하였고,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하였으며, 묘소는 보령의 馬山 임좌이다.
위의 사실이 국조문과 방목과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공의 휘는 泰廷이요, 자는 亨彦이며,호는 松巖이다.
공은 판도판서공(휘 允藏)의 7대손 贈嘉善大夫 行安山郡守 백간(伯幹)과 贈貞夫人 全州李氏(明原君의 따님) 사이에 외아들로 중종 36년(1541)에 향제 충남 보령 청라에서 태어났다.
공의 천품이 영민하여 학구에 잠심해 일찌기 문학이 성취하여 명종17년(1561)에 생원시 동
방진사과 3등 29인으로 합격한 후, 선조3년(1569) 알성시문과병과 4인으로 급제하여 三司의 청빈한 여러 요직올 역임하여 재명을 떨쳤다.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12대 仁宗의 妃)가 승하하심에 조정공의가 복제문제로 예설이 논의되었는데, 공이 기년제(朞年制)률 주장하였으나, 공론이 대세에 몰려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사류들은 공의 주장을 정론이라 하였다.
예학(禮學)에 해박한 식견으로 의례(儀禮)에 대한 문답한 사실이 퇴계문집
에 등재되었다. 공은 모든 사리의 변별력이 남달라 당시 鄭汝立의 허명으로 세상을 문란케 하여 모반하였올 때, 공에게 접근해 왔으나, 예리한 판단으로 거절하였다. 그 후 鄭汝立의 역모사건으로 己丑옥사가 일어나자, 당시 공의 선견지명에 모두 탄복하였다.
공은 제주목사, 호남체찰사 등 여러 요직을 거쳐서 벼슬이 가선대부 형조참
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등 요직을 역임 하였다.
공의 배(配 貞夫人 星州李氏)는 전 참의 따님으로 임진 난 중에 순절하였고,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하였으며, 묘소는 보령의 馬山 임좌이다.
위의 사실이 국조문과 방목과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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