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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0-04-26 17:30 조회1,40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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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국학중앙연구원 人物資料 중 경간공 金元義의 본관 海陽을 光山으로 수정요청하여
訂正하였으나 그 자손들의 본관자료는 정정하지 않고 있다.

平章事 景簡公 金元義 系譜

출전: 氏族源流, 光山金氏 1746년 丁卯大譜

金元義-子 公粹(文科)
子 就貞(改 坪)-子 鍊-子 之淑-女 金天係(慶州人)-女 朴玗/李云起/金瑨
女 柳仁琦(文化君)-子 柳甫發(墓誌文)
子 仁 瑾
子 仁 沇(光山君)-子 元命/續命
女 慶復興/ 吳 憲
子 之?(无后)
子 由祉-子 仁 衍(光山君) -子 臣佐 -
女 白文擧/鄭洪信
女 趙延壽(初配 墓誌文)
子 도(光山君)-女 洪承緖-子 洪元哲/女 李巖
女 任 병- 女 黃河晏/女 李瑞龍/女 鄭乙邦
子 任天年
女 金上瑛-子 世珍/世宥/潛
女 奉質
女 趙延壽(再配 墓誌文)
女 朴守堅- 子 光純/光佑
女 洪 奎- 子 洪戎- 子 澍-女 金元命(光山人)
女 奇元義(姪 仲修 金元命壻
女 阿忽胎(元 左丞相)
女 德陵賢妃(忠宣王妃)
女 鄭? - 女 慶斯萬/ 崔廣(東州人)
女 元忠 - 女 金光利(光山人)
女 明德太后(忠肅王妃)-子 忠惠王/恭愍王

女 劉昌緖(銀川人)-女 蔡禎-子 蔡仁揆/子 蔡仁平/女 李椿老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1

/김련(金鍊)
미상∼1278년(충렬왕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화평(化平).
아버지는 충렬왕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지숙(之淑)이다./


아래 기록참조
(*金之淑은 金鍊의 子임)
金 鍊
본관: 光山
증조: 贈 守司空 左僕射 金位(金元義墓誌銘, 金周鼎墓誌銘)
조: 平章事 景簡公 金元義(金元義墓誌銘)
부: 大將軍 金坪(洪奎 妻 金氏墓誌銘)

시호: 匡靖公(文化人 貞愼公 柳陞墓誌銘)

참고자료
<洪奎 妻 金氏墓誌銘>
三韓國大夫人金氏墓誌銘幷序」 三重大夫匡金海君領藝文館事李齊賢?」
大夫人金姓?出海陽郡 金紫光祿大夫?知政事 諱鍊之女 朝請大夫大將軍 諱坪之孫 金紫光祿大夫?知政事 諱元義之曾孫 朝散大夫樞密院左副承旨 庾諱弘之外孫 推誠陳力安定功臣 三重大匡南陽府院君洪諱奎之夫人也 淑哲慈嚴動無違禮雖親兄弟未?踰?與之言婦道備母儀全論家法者稱首焉年八十二卒于後至元五年八月辛卯以十一月壬申葬于松林縣 洪▨原?府院君之▨禮也▨▨▨▨▨▨▨▨德▨▨」全羅鎭邊萬戶大匡三司使女一適」皇元左丞相阿忽台 次適?成事鄭?
次爲德陵賢妃 次適?成事元忠 次爲懿陵德妃實生我」嗣王丞相公兩子▨里奇普花爲御史大夫自當爲同知徽政院使名重天下諸餘子姓?列靑紫門戶之盛古今未有府院君卒獨處二十餘年姬?遵其▨▨黨服其義富壽康寧哀榮終始嗚呼休哉銘曰」南陽府院君之終也吾先君子實爲墓銘余以不材嗣爲文而又誌大夫人之塋顧余父子何有於洪氏之門府院君夫婦之賢盖無?於斯文也」后至元五年已卯十一月 日立」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



<洪奎墓誌銘>
推誠陳力安定功臣三重大匡南陽府院君洪奎墓誌銘」
-전략-
後娶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吏部尙書 參知政事 金鍊之女 光州郡大夫人 金氏生一男五女
男時爲大匡三司使上護軍 女一適中國左丞相阿高? 一適都僉議贊成事鄭? 一爲順和院妃
一適密直副使元忠 一今爲德? 蘭玉之榮顯如許而兩代以窈窕之淑」
(缺)緊貴如何 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吾於今日見之矣壽至七十五延祐三年六月二十三日感疾而逝擧國傷歎適是」
-후략-
重大匡檢校僉議政丞領藝文?事臨海君李?述」
〔출전:『南陽洪氏族譜』(博川, 1939)〕
* 위 墓誌는1908년 盜掘로 因하여 出土

* 光州郡大夫人 金氏는 南陽人 洪奎에게 出嫁하여 1男 5女를 낳았다.
아들은 判三司使 莊簡公 洪戎 이다.
장녀는 元나라 左丞相 阿忽台(阿高?)에게,
2녀는 ?成事 鄭?에게 각 각 시집갔다.
3녀는 충선왕비인 順和院妃이고,
4녀는 ?成事 元忠에게 시집갔다.
5녀는 忠肅王妃인 德妃, 卽 明德太后(忠惠王, 恭愍王 母后)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2

/ 지숙(金之淑)에 대하여
1237년(고종 24)∼1310년(충선왕 2). 고려의 문신. 화평(化平府: 지금의 光州) 출신.-중략-참지정사(參知政事) 연(鍊)의 아들이다. 인근(仁瑾)·인연(仁沇)의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는데, 가세가 어려워 두 딸은 여승이 되었다.-중략-1310년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광정(匡正)이다./



아래 기록참조

金之淑 (1238년(고종25)~1310(충선왕 2)
*김지숙 출생년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서 김지숙 출생년도를 1237년으로 기록하였는바
이는 고려사 김지숙 전에 ‘忠宣二年。卒。年七十三’ 으로 기록한 내용을 滿年式으로
계산한데서 비롯된 오류이다.
종래의 계산법은 사람이 태어나면 나이가 한 살이고 1년이 되면 두 살 이라 하였으며,
사람이 죽어서 1년만에 小祥하고 2년만에 大祥으로 脫喪하는 것을 통칭 三年喪 이라
칭하듯이 史料와 墓誌銘은 延年式으로 기술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본관: 光山
자: 未詳
시호: 光節公(柳甫發墓誌銘)


* 金之淑 傳
高麗史 卷一百八 列傳 卷第二十一
化平府人。父 鍊 美風儀習容止。?事無斷。而人稱爲長者。官至參知政事。
之淑。元宗朝爲將軍。三別抄之亂。陷賊中。無計得脫。自投海隨波出沒。賊以小艇。
追及取之。至珍島。將斬以徇。承化侯溫。救解之。使當一面。之淑密以賊狀。再達于官軍。
及珍島敗。王嘉其忠義。賞以官。
忠烈朝。累遷密直司事。以判三司事。如元。賀聖節。交趾人先入陳庭實。之淑奏曰。
我國雖小。自太祖奮義之初。首先臣服。兄弟有盟。甥舅有親。願先設幣陳賀。帝從之。賜坐諸侯王列。之淑禮貌詳閑。觀者美之。歷僉議參理同知光政院事參知機務。尋改評理。陞贊成事判監察司事。時。闊里吉思爲行省平章。凡奴婢其父母一良者。欲聽爲良。宰相莫有止之者。之淑謂曰。世祖皇帝嘗遣帖帖兀來監國。有趙石奇者訴良。帖帖兀欲用上國法。事聞。世祖詔從本國舊俗。此例具在。不可變更。闊里吉思。不敢復言。加中贊致仕。
忠宣二年。卒。年七十三。性廉潔剛正。歷仕中外。皆有聲績。子仁瑾。仁沇。二女以家貧。未嫁爲尼。

* 金之淑 諡號
柳甫發墓誌銘
(1340년 李穀 撰)
高麗國正順大夫密直司右副代言宗簿令兼監察執義知版圖司事柳君墓誌銘
儒州柳氏有佐命開國者其後延慶食德代生賢哲明王宰相諱公權好學工草隸卒官?知政事謚文簡是時崔忠獻挾討賊功擅廢立子孫相繼專政至忠憲王戊午文簡之孫諱璥才華德望冠一時與別將金仁俊謀誅忠獻之曾孫誼用能歸政于王施惠于民而功在社稷到于今稱之官至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脩國史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謚文正於君爲曾祖文正生知都僉議司事諱陞謚貞愼貞愼生文化君諱仁奇謚溫靖

娶僉議中贊 諱之淑 謚光節之女 海陽郡夫人金氏於君爲考? 君諱甫發年十六以門蔭除興王都監判官再遷郞將至元二年丙子拜少府少尹轉通禮門副使己卯春陞密直代言兼監察執義性聰慧恭恪幼承毅陵之知至是將大用試以納言之任攝風紀之司君能深惟家業志于無?方將立功于時而垂名于後世人亦以此望之也已而毅陵棄國時事一變明年八月乙未病暴卒年三十七夫人元氏故檢校評理諱善之之女毓德華閥賢大家承祀主饋以順以則生男女五人長繼高方十歲次尙左八歲長女適審陽路達魯花赤洪川君忽失帖木耳次適指諭郞將洪有龜季適新陽君盧瑛以九月庚申葬城東大德山麓夫人以君之嘗所往還者於文士莫若余使來乞銘銘曰
柳氏之興與國?焉源其遠矣流慶??文簡文正旣藝旣賢相我釐東五葉蟬聯惟君克肖志篤紹先天未厭德胡不永年孰尸壽夭莫究其然刻銘幽室惟後之傳

출전: 東文選 卷124 / (李穀)『稼亭集』卷3 / 朝鮮金石總覽 P628.
*고려사 金之淑 傳에 “二女以家貧。未嫁爲尼”이라한 기록은 정승을 지낸
김지숙의 淸廉性을 강조한 문구로 여김.
氏族源流, 光山金氏譜, 慶州金氏譜, 文化柳氏譜, 柳甫發墓誌銘에 의하면
長女는 慶州人 判書 金天係에게, 次女는 文化人 溫靖公 柳仁琦에게 각 각 出嫁.
*金之淑 傳에 次子 金仁沇이 光山君으로 封君된 기록과 敬烈公 諡號를 받은 기록이 있고,
김지숙의 弟 由祉 아들 金仁衍은 고려사에 光山君,, 사위 趙延壽墓誌銘에 官爵이
金紫光祿大夫 門下平章事 上將軍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金도(왕+?)는 고려사에 光山君으로, (사위) 趙延壽墓誌銘에 品階가 重大匡으로 기록됨.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3

/ 김인연(金仁沇)
본관 미상(未祥)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화평부(化平府: 지금의 光州) 출신.
아버지는 중찬(中贊)을 지낸 지숙(之淑)이다.
-중략-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즉위초에 시종한 공으로 경렬(敬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래 기록참조

김인연(金仁沇)
본관: 光山
고조: 景簡公 金元義
증조: 大將軍 金坪
조: 匡靖公 金鍊
부: 光節公 金之淑
시호: 敬烈公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4

/ 김원명(金元命)
본관 화평(化平)/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5

/ 김속명(金續命)
본관 화평(化平) /



김속명의 玄祖(5代祖) 金元義 墓誌銘에서
“公諱元義 海陽人 追封守司空左僕射 諱位之長子也” 하였고,

金元義 弟인 金光世 孫 文肅公 金周鼎墓誌銘에서
“公諱周鼎 字▨ 海陽郡人也” 라 하였으나

고려사 金周鼎 傳(고려사 권17)에서
“金周鼎 光州人” 이라 하였고

金周鼎의 아들 忠肅公 金深과 손자 金石堅은 化平府院君에,
증손자 金粹는 海陽君에 각 각 封爵되었으며

金元義 從曾孫이며 문숙공 金周鼎의 조카인 文正公 金台鉉墓誌銘과
고려사 金台鉉 傳(高麗史 卷23)에
“金台鉉 字 不器 光州人“이라 하였으나

金台鉉의 아들 文敏公 金光轍은 化平君, 딸(朴允文 妻)는
海陽郡夫人, 손자 金懷祖는 海陽君, 증손자 金繼志는 光城君에 각 각 封君 되었다.
* “朴允文 妻 金氏墓誌銘” (鄭夢周) 圃隱文集 (續錄 권1)에
“海陽郡夫人” 이라 하였다.


고려사 김연 전에 “字 器之 海陽縣人” 이라 하였으나
1301년 帳籍(戶籍)에는 “光州人”이라 하였으며,
良簡公 金璉의 손자 章榮公 金? 戶口單子(1333년 작성)에는
金?의 本貫을 化平府라 하였다.
金元義 의 증손자이며 金坪의 아들인 ?김도(초명 之沂 -1317)와 金元義 玄孫(4代孫)이며
김평의 손자인 金仁沇 과 金仁衍은 光山君에 封君되었다. (출전: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무진군

◎ 무진군(茂珍郡)
본래 백제의 무진주 도독(武珍州都督)이었는데,【일명 노지(奴只)라고 한다. 】신라에서 백제를 차지하여 그대로 도독(都督)으로 하였고, 경덕왕(景德王) 16년 정유【당나라 숙종(肅宗) 지덕(至德) 2년.】에 무주 도독(武州都督)으로 고쳤다. 진성왕(眞聖王) 6년 임자【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에 견훤(甄萱)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빼앗아 웅거하고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일컫다가 드디어 전주(全州)로 옮겼다. 견훤 20년 신미【양(梁)나라 태조(太祖) 건화(乾化) 원년.】에 후고려(後高麗) 왕 궁예(弓裔)가 고려 태조(太祖)를 정기 태감(精騎太監)으로 삼아서 뱃군사[舟師]를 거느리고 무진 지경을 공략하여 차지하게 하였는데, 성주(城主) 지훤(池萱)은 바로 견훤의 사위였으므로 견훤과 서로 응(應)하여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고려 태조 23년 경자【진(晉)나라 고조(高祖) 천복(天福) 5년.】에 이르러 광주(光州)로 고쳤고, 성종(成宗) 15년 병신【송나라 태조(太祖) 지도(至道) 2년.】에 광주 자사(光州刺史)로 강등하였고, 그 뒤에 또 해양 현령(海陽縣令)으로 강등하였다가 고종(高宗) 45년 무오【송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6년.】에 공신(功臣) 김인준(金仁俊)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지익주사(知翼州事)로 고쳤고, 뒤에 광주목(光州牧)으로 승격하였고, 충선왕(忠宣王) 원년 경술【원나라 세조(世祖) 지대(至大) 3년.】에 화평부(化平府)로 고쳤고, 공민왕(恭愍王) 11년 임인【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22년.】에 무진부(茂珍府)로 고쳤고,【혜묘(惠廟)의 휘자(諱字)를 피하여 ‘무(武)’를 ‘무(茂)’자로 고쳤다. 】23년 갑인【명나라 홍무(洪武) 7년.】에 광주목으로 승격하였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금상(今上) 12년 경술에 읍(邑)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본주(本州) 목사(牧使)를 구타하였으므로 노흥준을 곤장을 때려 변방(邊方) 지방으로 유형시키고 그 가족도 이주시키고서, 군(郡)으로 강등하였다. 별호를 광산(光山), 또는 익양(翼陽)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5권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일명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가 백제를 빼앗은 뒤 그대로 도독(都督)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무주(武州)로 고치고, 진성왕(眞聖王) 6년에 견훤(甄萱)이 습격하여 의거하고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다가, 이윽고 전주(全州)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弓裔)가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으니, 태조는 해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주의 경계를 대략 평정했는데 성주(城主) 지훤(池萱)이 견훤의 사위로서 굳게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 19년에 이르러 신검(神劍)을 쳐서 멸망시키고 23년에 광주(光州)라 고쳤다. 지금 《고려사》를 상고하건대, 천복(天復) 3년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경계까지 가서 금성(錦城)을 쳐서 빼앗게 했다. 개평(開平) 3년에 또 태조를 시켜서 전함을 수리하고 가서 광주와 진도군(珍島郡)을 쳐서 빼앗게 했다. 뒤에 또 광주 서남쪽 반남현(潘南縣) 포구(浦口)에 이르러, 압해현(壓海縣) 수적(水賊) 능창(能昌)을 잡아 궁예에게 보냈다. 태조 즉위 19년 친히 신검(神劍)을 칠 적에 영마성(營馬城)에 주둔하니, 신검은 그의 아우 정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劍)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劍)과 함께 와서 투항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주(武州)를 광주(光州)라고 부른 것은 견훤 때부터였으니 태조 23년에 비로소 광주라 칭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고려의 사신(史臣)이 추후에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주현(州縣)은 모두 당시의 이름으로 기록했는데 광주만 그렇게 기록했을 것인가. 생각하건대, 견훤이 후에 광주라 하고 무주라 하여 다 함께 불렀다가 이해(태조 23년)에 이르러 광주로 정한 것인가 한다. 정확히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성종 15년에 강등하여 자사(刺史)가 되고 후에 또 강등하여 해양 현령(海陽縣令)이 되었다. 고종 46년 공신 김인준(金仁俊)의 외가의 고향이므로 승격하여 익주 지사(翼州知事)가 되고, 후에 또 승격하여 무진주(武珍州)가 되었다. 충선왕 2년에 강등하여 화평부(化平府)가 되고, 공민왕 11년에 무진부(茂珍府)라 개칭했다. 혜종(惠宗)의 휘(諱)를 피해서 무(武) 자를 무(茂) 자로 고쳤다. 22년 다시 광주라 칭하고 목(牧)을 삼았으며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따랐다. 세종 12년에 그 고을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목사(牧使) 신보안(辛保安)을 때렸으므로, 노흥준을 장형(杖刑)에 처하여 변방으로 쫓아 보내고 강등하여 무진군(茂珍郡)으로 만들었다가 문종 원년에 옛날대로 복구하고, 성종 20년에 판관(判官) 우윤공(禹允功)이 날아온 화살에 맞았는데 조정에서는 그 고을 사람의 행위인가 의심해서 강등하여 현을 만들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 연산군 7년에 다시 주(州)가 되었다.

【郡名】 무진(武珍)ㆍ무주(武州)ㆍ광주(光州)ㆍ해양(海陽)ㆍ익주(翼州)ㆍ화평(化平)ㆍ
무진(茂珍)ㆍ익양(翼陽)ㆍ서석(瑞石)

*세종실록 지리지에 光州의 別號를 光山이라 하였고 지금은 光山金氏로 通稱하고 있으므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의 본관 海陽, 化平은 모두 光山으로 訂正(統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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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바르지 못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가 이제 정정되었습니다.
 
휘 원, 휘 련, 휘 지숙, 휘 인연, 휘 원명, 휘 속명의 본관은

모두 광산으로 정정했으며

휘 지숙의 시호는 光節로 정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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