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장사공 김원의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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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6-12-14 21:18 조회1,9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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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장사공 김원의 묘지명
*아래 번역문은 전 국사편찬위원회 고서 전문위원과 전 광산김씨사 연구위원 이었던
김준 일가께서 번역한 <김원의 묘지명>입니다.
*原文은 생략하였으며 "守太傅"와 "大夫人柳氏"라 함은
淸末의 金石學者 劉喜海가 우리나라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와 그 弟인 山泉 金命喜 및
雲石 趙寅永의 도움으로 編著한 <海東金石苑>에 유희해의 아들인 금석학자 劉承幹의
補遺 本인 "海東金石苑 補遺5." (pp.920-924.)에 依하였습니다.
1. 고려국 故 "特進 守太傅 門下侍郞 同中書 門下平章事 上將軍 判兵部事" 金公墓誌銘.
公의 諱는 元義이며, 海陽人으로 守司空 左僕射에 追封된 諱 位의 長子이다.
지난 庚寅년(1170) 가을, 私邸에 있던 明宗이 登極하자 公이 右中禁으로 御駕를
隨從한 功으로 隊校에 발탁되었다.
그후 서도에서 叛亂(趙位寵 亂)이 일어났을 때 公이 그 賊徒를 정벌한 功으로 別將이 되었고,
또 公이 右軍兵馬錄事로 있을 때 남쪽 지방의 賊徒(亡伊, 亡所伊 등)를 토벌하여
郎將으로 임명되었으며, 辛丑년(1181) 가을에는 雲中道의 監稅使로 나가고,
戊申년(1188) 가을에는 전라도 按察使가 되었다. 이에 앞서 西京에서 叛亂이 일어났을 때
田籍簿가 모두 燒失되었으므로 국가에서는 刑部郎中 金卿을 그 곳으로 파견하여
그 田沓을 測量하게 하였는바 그는 여러 해를 걸쳐 (측량을)완성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에게)土地分配를 고르게 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怨聲이 沸騰하므로
有司는 그를 彈劾하여 그의 官職을 파직하였다. 이에 公에게 命하여 다시 측량을 하게 하자
公은 측량을 매우 緻密하게 하여 믿을 수 있게 하였으므로 丙辰년(1196) 여름에
將軍兼給事中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刑部侍郞과 知閤門事를 역임하다가 다시 大將軍으로
임명되어 東藩과 恩嚴의 鎭管으로 나가니 兩鎭의 吏民들은 公을 기뻐하며 따랐다.
丁卯년(1207)에는 公이 上將軍과 刑部尙書로 임명되고, 이 해에 또 選軍別監이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樞密院副使와 左散騎常侍를 거친 후 同知院事를 지내다가 얼마 후에
守司空 左僕射 判三司使 등 관직에 임명되고, 壬申년(1212)에는 參知政事와 判禮部事에
임명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門下侍郞 平章事와 判兵部事에 임명되고 特進에 加資되었다.
乙亥년 (1215) 가을에 公이 상소하여 은퇴를 願하므로 (高宗)王은 "두번이나 公의 뜻을 어기었다".
고 하면서 (公이)鄕第로 내려가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公은 관직을 그만두고 즐겁게 살다가
丁丑년(1217) 7월 13일 病을 앓던 중 正元里 鄕第에서 71세의 나이로 卒 하였다.
(高宗)王은 公의 訃音을 듣고 슬퍼하며 有司에게 命하여 喪費를 마련해 주도록 하고 3일 동안
朝會를 보지 않았으며, 景簡이란 諡號를 내리었다. 그리고 이 해 8월 15일(庚申)에
法雲山 기슭에 禮로서 葬禮를 치루었다.
公의 性品은 正直하고 慾心이 없었으며 官職에 있을 때 淸白하고 謹愼하여 私的인 일로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관직생활을 淸廉하게 한 公에게 感服하였다.
公은 宰相의 자리에 있을때 大夫人 柳씨에게 前例의 恩典에 따라 生前에 承化郡 大夫人으로
被封되게 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이 훌륭할 수 있을까. 公은 大將軍 印英輔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2男1女를 두었다. 아 - 公의 風度와 德望으로 어찌 銘을 엮지 않을 수 있겠는가.
銘하노니
훌륭한 우리 公이시여! 어름처럼 깨끗하여 티끌 한 점 없었네.
스스로 勤愼하고 儉素함을 履行하여 野薄한 世俗을 따르지 않았네.
검은 곳에 있어도 물들지 않고, 그 節槪를 始終 한결같이 하였네,
政丞으로 있을 때 그 恩典이 어머니께 미치었으니,
世上에서 비교할 사람 드물었네,
國家에서는 忠臣이 되고, 가정에서는 孝子였네.
스스로 맑은 氣風을 떨치었으니, 그 風度가 永遠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네.
깊고 그윽한 무덤에 그 美績 돌에 새겨 나타내리라.
* <金元義墓誌銘>은 '海東金石苑' 補遺5, '朝鮮金石總覽'上, '韓國金石文'中世下,
'高麗墓誌銘集成'에 收錄되어 있음. / 성봉.
*아래 번역문은 전 국사편찬위원회 고서 전문위원과 전 광산김씨사 연구위원 이었던
김준 일가께서 번역한 <김원의 묘지명>입니다.
*原文은 생략하였으며 "守太傅"와 "大夫人柳氏"라 함은
淸末의 金石學者 劉喜海가 우리나라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와 그 弟인 山泉 金命喜 및
雲石 趙寅永의 도움으로 編著한 <海東金石苑>에 유희해의 아들인 금석학자 劉承幹의
補遺 本인 "海東金石苑 補遺5." (pp.920-924.)에 依하였습니다.
1. 고려국 故 "特進 守太傅 門下侍郞 同中書 門下平章事 上將軍 判兵部事" 金公墓誌銘.
公의 諱는 元義이며, 海陽人으로 守司空 左僕射에 追封된 諱 位의 長子이다.
지난 庚寅년(1170) 가을, 私邸에 있던 明宗이 登極하자 公이 右中禁으로 御駕를
隨從한 功으로 隊校에 발탁되었다.
그후 서도에서 叛亂(趙位寵 亂)이 일어났을 때 公이 그 賊徒를 정벌한 功으로 別將이 되었고,
또 公이 右軍兵馬錄事로 있을 때 남쪽 지방의 賊徒(亡伊, 亡所伊 등)를 토벌하여
郎將으로 임명되었으며, 辛丑년(1181) 가을에는 雲中道의 監稅使로 나가고,
戊申년(1188) 가을에는 전라도 按察使가 되었다. 이에 앞서 西京에서 叛亂이 일어났을 때
田籍簿가 모두 燒失되었으므로 국가에서는 刑部郎中 金卿을 그 곳으로 파견하여
그 田沓을 測量하게 하였는바 그는 여러 해를 걸쳐 (측량을)완성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에게)土地分配를 고르게 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怨聲이 沸騰하므로
有司는 그를 彈劾하여 그의 官職을 파직하였다. 이에 公에게 命하여 다시 측량을 하게 하자
公은 측량을 매우 緻密하게 하여 믿을 수 있게 하였으므로 丙辰년(1196) 여름에
將軍兼給事中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刑部侍郞과 知閤門事를 역임하다가 다시 大將軍으로
임명되어 東藩과 恩嚴의 鎭管으로 나가니 兩鎭의 吏民들은 公을 기뻐하며 따랐다.
丁卯년(1207)에는 公이 上將軍과 刑部尙書로 임명되고, 이 해에 또 選軍別監이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樞密院副使와 左散騎常侍를 거친 후 同知院事를 지내다가 얼마 후에
守司空 左僕射 判三司使 등 관직에 임명되고, 壬申년(1212)에는 參知政事와 判禮部事에
임명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門下侍郞 平章事와 判兵部事에 임명되고 特進에 加資되었다.
乙亥년 (1215) 가을에 公이 상소하여 은퇴를 願하므로 (高宗)王은 "두번이나 公의 뜻을 어기었다".
고 하면서 (公이)鄕第로 내려가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公은 관직을 그만두고 즐겁게 살다가
丁丑년(1217) 7월 13일 病을 앓던 중 正元里 鄕第에서 71세의 나이로 卒 하였다.
(高宗)王은 公의 訃音을 듣고 슬퍼하며 有司에게 命하여 喪費를 마련해 주도록 하고 3일 동안
朝會를 보지 않았으며, 景簡이란 諡號를 내리었다. 그리고 이 해 8월 15일(庚申)에
法雲山 기슭에 禮로서 葬禮를 치루었다.
公의 性品은 正直하고 慾心이 없었으며 官職에 있을 때 淸白하고 謹愼하여 私的인 일로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관직생활을 淸廉하게 한 公에게 感服하였다.
公은 宰相의 자리에 있을때 大夫人 柳씨에게 前例의 恩典에 따라 生前에 承化郡 大夫人으로
被封되게 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이 훌륭할 수 있을까. 公은 大將軍 印英輔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2男1女를 두었다. 아 - 公의 風度와 德望으로 어찌 銘을 엮지 않을 수 있겠는가.
銘하노니
훌륭한 우리 公이시여! 어름처럼 깨끗하여 티끌 한 점 없었네.
스스로 勤愼하고 儉素함을 履行하여 野薄한 世俗을 따르지 않았네.
검은 곳에 있어도 물들지 않고, 그 節槪를 始終 한결같이 하였네,
政丞으로 있을 때 그 恩典이 어머니께 미치었으니,
世上에서 비교할 사람 드물었네,
國家에서는 忠臣이 되고, 가정에서는 孝子였네.
스스로 맑은 氣風을 떨치었으니, 그 風度가 永遠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네.
깊고 그윽한 무덤에 그 美績 돌에 새겨 나타내리라.
* <金元義墓誌銘>은 '海東金石苑' 補遺5, '朝鮮金石總覽'上, '韓國金石文'中世下,
'高麗墓誌銘集成'에 收錄되어 있음. / 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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