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부인 이씨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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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0-08-25 01:30 조회1,89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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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 諱 光中
文科及第, 毅宗17年 給事中 爲西北面兵馬副使, 毅宗22年 3月 同知貢擧, 毅宗24年 7月
上(毅宗)行次 尙書右丞金光中宅, 官至 諫議大夫秘書監, 同年(1170)8月 鄭仲夫之亂遇害.
配는 仁川李氏(1113~1182, 10 14)니 父는 參知政事 軾, 祖는 兵部郞中 資孝, 曾祖 侍中 貞憲公 ?, 外祖는 中書令 桂陽公 富平人 李瑋이다.(金光中妻李氏墓誌銘, 李軾墓誌銘)
*비서감김공부인이씨묘지명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비서감(秘書監) 김공광중(金公光中)의 아내인 경원군부인 이씨(慶源郡夫人 李氏)는 수태사 문하시중(守太師 門下侍中)을 지낸 정(?)의 曾孫이며,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자효(資孝)의 손녀이고, 상서좌복야와 참지정사(尙書左僕射, ?知政事)를 지낸 식(軾)의 딸이다.
부인은 부귀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富貴化) 부귀를 사모하지 아니하고 오직 효성과 공경으로 그 부모를 섬기고 예의와 의리로 그의 남편을 (從)따랐으며 대대로 내려온 덕업을 (能繼)계승하여 그 큰 명성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다. 아들 넷이 있으니, 장남 총(叢)은 내시(內侍) ▨▨주부(注簿)이고 차남은 ▨인데 경시서승(京市署丞)이고, 3남▨▨은 (華嚴業)화엄경을 닦아 대사(大師)가 되었고, 4남 체(?)는 순안현위(順安縣尉)이다.
1173년(명종3 癸巳)과 1174년(명종4 甲午)의 난(亂) 때 총(叢)은 대가(大駕)를 호위하였고, 체는 원수를 살해하여 그 충효(忠孝)의 도리가 한 가정에 모아지니, 선비들의 논평이 이에 매우 높았었다. 딸(女)이 한 명 있어 ▨▨라고 하는데, 부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힘을 다하여 봉양(奉養)하였다.
부인은 거듭된 피로와 질병으로 1182년(명종12 壬寅) 겨울인 10월 24일에 운명(殞命)하시니 나이가 70세였다.
이듬해 정월 11일에 이르러 개성(開城)의 북녁 산기슭에 안장(安葬)하였다.
명(銘)하여 이르노니
그 덕성(德性)은 대대로 이어 온 문벌가문(門閥家門)을 이을 만 하고
그 현숙(賢淑)함은 명관(名官)의 배필(配匹)되기에 넉넉하도다.
한 가문의 충효가 두 아들에게 모아지니 이 어머니가 아니고는
어찌 그런 아들이 있으랴.
나이가 칠십(七十)에 이르니 가히 수(壽)를 누렸다 할 것이며.
몸은 비록 죽더라도 그 유업(遺業)만은 영원히 전해지리라.
언덕 위에 택지(宅地)를 골라 길일(吉日)을 잡아 안장(安葬)하니
억천만년(億千萬年) 영원토록 이곳에서 안식(安息)하소서.
秘書監金公夫人李氏墓誌銘」
左諫議大夫秘書監 金公光中之配 曰慶源郡夫人李氏 守太師門下侍中 ?之曾孫
贈尙書左僕射 資孝之孫 尙書左僕射?知政事 軾之女 夫人生於富貴 而不慕▨▨▨
惟孝與敬 以事其親 惟禮與義以▨其失 故▨▨世德而不殞大名也 有子男四人 長曰
叢內侍▨▨注簿 次曰 ▨京市署丞 次曰 ▨▨華嚴業大師 次曰 ? 順安縣尉
癸巳甲午之亂 謂叢之護大▨ ?之殺怨讐 ▨爲忠孝之道 萃於一門 士論以此高之
有▨一人 曰▨▨ 而不離左右致力養焉 夫人以勞成疾
壬寅冬十月二十四日卒 享年七十 至明年正月十一日 葬于城北麓
銘曰
德足以繼世? 賢足以配名官 一門忠孝有付兩子
非此母豈▨此人 年登七十可謂壽 身雖有盡▨傳▨
卜葬原▨▨筮吉 億千萬年安此▨」
-國立民俗博物館 所藏-
참고자료
高麗史
李 ?墓誌銘
李軾墓誌銘
金光中妻李氏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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